35년의 추억으로 남던 날




기나긴 단잠과 함게 꿈에서 깨어난 듯 합니다. 지난 35년이 꿈이었을까....

언젠간 문을 닫을 날이 오겠지하고 생각만 해왔었는데, 동생의 사진들을 받고 보니 더이상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 35년간 유지햬오셨던 조그만 구멍가게같은 약국이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는 소식.

제 어린 시절 제 추억의 전부를 간직하고 있던 이 곳.

두 분께서 한 때 하루 16시간 까까이 악착같이 일하시면서 함께하셨던 곳.

변변치 못한 제가 끝까지 지켜드리지 못해서 너무나 죄송하기만 합니다.

오늘이 가게의 마지막 날이라는데, 여전히 못난 아들은 정리하는 것마져도 도와드리지도 못하네요.


10여년 전 의약분업 시행 이후, 동네 조그만 약국들이 대형 약국에 밀려서 하나 둘 씩 사라지는 것을 봐왔었고,

아버지도 돌아가신 후 한 10년 넘게 어머니 홀로 힘들게 버티어오셨던 이 곳.


친척도 아무도 없는 외국나와서 삽질만하고 있는 제모습이 가장 실망스럽고 후회되는 날입니다.

제가 이전에 사진에라도 관심을 가졌었다면, 가게 모습이라도 평소에 남겨 놓았을 텐데요.

언젠간 겪게될 일이라고 되뇌어보지만 제가 미쳐 깨닫기도전에

시간이란 녀석은 정말이지 잔인하게도 끊임없이 지금도 흘러가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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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려 잠깐 거미줄처럼 송전선들이 아직도 어지럽게 가로지르는 동네를 걸어들어가면 약국 건물 한 쪽 벽에

조금은 엉뚱한 탈문양이 보입니다. 어렸을 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런 걸 아버지께서 만드신 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원래 여러가지로 좀 엉뚱한 곳이 있던 아버지인데다 말이 많지 않으셨던 분이라 이유를 물어보진 못했죠.


휴...가게 진열장에 약이 비어있는 모습을 보니 더 서글퍼집니다.

 지금은 식당이 되어있는 맞은 편 건물이 신혼부부로서 새 삶을 시작한 초기 약국 터였습니다.

약국 이전하던 시기에 저는 동네 아이들과 모여서 딱지 치기를 하거나, 밤늦도록 동네 친구들과 동대문 놀이를

하곤 했었죠. 가게에 많이 있던 고무줄과 박스를 가지고 이것 저것 만들어보기도 하던 곳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커다란 해머로 현재 약국터 담을 허물던 그 날이 아직 기억나요. 저러다가 건물 무너지면 어쩌지하던

생각들도 했었구요. 그렇게 해서 현재의 가게 건물이 지금까지 유지되어왔습니다.


제가 가지고 나온 스캔한 사진들 중 이 사진(79년 4월)이 원래 현재 가게의 맞은 편 건물 터입니다.

가게 앞에서 찍은 사진이 있을텐데 제가 가지고 나오지 못했네요.

가게 내부 조제실 테이블에서 어머니가 발라주시던 통닭을 받아먹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납니다.

통닭 한 마리를 저 혼자 다 해치우던 날도 기억나요. 유치원때 같은데, 유치원에서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고 와서인지

배가 너무 고팠는데, 어머니께서 발라주시던 통닭을 계속 받아 먹다보니 저혼자 다 먹은 거였습니다.

어머니는 한 입도 못드시고, 입맛만 다시고 계셨을 텐데 그게 어떻게 통째로 제 배속으로 다 들어갈 수 있었는지

한 동안 너무도 신기했었습니다.


한 땐 저도 오너 드라이버였었는데... 몇일 타고 화장실 간 사이에 누군가 들고 가버렸던 기억이 나네요.

화를 불같이 내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기억나구요. 지금 생각하니 아버지가 더 속상하셨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큰 장난감이 순식간에 사라져야했던 영문을 몰랐던 저로서는

그저 하루종일 주저앉아서 울고있던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없었어요. 지금 이 순간의 제 심정과 똑같습니다.

내 기억의 커다란 일부가 이렇게 순식간에 추억으로 끝나야하는지...

영문도 모르고 주저앉아서 울던 그 어릴때 심정말입니다.



어느 화창한 봄날 이 한 장의 사진....

분명히 아버지게서 찍어주셨을텐데, 당시에 제 두 손으로 들기도 힘들만큼 무거웠던 카메라가 니콘 SLR이엇던 것 같습니다.



이 약국터는 동생이 태어날 즈음 맞은 편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됩니다.

약국 근처에 아버지께서 지으셨다는 2층 집도 아쉬운 우리 가족의 추억이 얽힌 곳이구요.

이전 약국터는 수십년 동안 오락실, 비디오 가게, 책가게, 그리고 현재의 식당이 들어서기까지 우리 삶의 한 단편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 이것도 기억나요. 맞은 편 약국터가 오락실을 개업하자 너무나 내성적이어서 오락실도 못가던 저였습니다.
 
어느날 아버지께서 제 팔을 잡고 오락실로 끌고 가셔서 오락해보라고 하셨죠. 보통 부모님은 오락실못가게 하는데,

아버지의 엉뚱함을 아직도 이해못하는 저로서는 신기하기만 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몇 백원 오락하고나면 빨리 끝나버리는 오락이

너무나 싫어서 그만 두곤 했었습니다. 제게 부족한 근성이 오래 전부터 있었던 거였나봅니다. -.-;

네 저희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붙들고 오락실에 가서 다른 애들처럼 오락좀 해봐라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의약 분업과 함께 약국에서의 한약 조제가 사라지고, 동네 소규모 약국은 사실 병원의 처방전에 따라 약파는 슈퍼마켓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취지는 좋았을지는 모르지만, 제가 보기엔 여전히 되돌릴 수 없는 실패한 정책이라고 밖에 안보여집니다.

큰 병원 앞의 커다란 약국만 생존하게되는 그러한 현실.

따로 한방공부를 하셨음에도 능력에따라 다양하게 약을 다루지 못하고 약국이 슈퍼마켓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결국은 대기업의 마켓들처럼 소규모 약국은 수익을 내지 못해서 사라지고, 커다란 약국으로 흡수되어버리게 되었던 거죠.

이 문제는 여전히 다른 분야에서도 진행중입니다. 결국 생활이 편해질지는 모르지만, 빈부 격차는 더 커지게 될 수 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어머니의 약국은 저희들에겐 놀이터였었고, 공부방이기도 했어요.

가게에 있는 방에서 숙제를 하다가 누나와 싸우던 일도 기억이 나구요, 동생의 이빨을 실에 묶어서 뽑던 추억도 있는 곳이죠.

아버지 몰래 약들을 사발에 넣어서  갈아 가루로 만들어 보기도했구요.

아버지가 쓰시던 알코올 램프가 제겐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저놈으로 불장난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죠

물론 브루스타 같은 걸 이용해서 전자석을 만들고 코일을 감아서 어설픈 전신기를 만들어서 어딘지 모를 신호를 보내곤 했었죠.

아마도 당시에 제 꿈을 신호로 만들어서 미래로 만들어보냈던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보잘것 없는 전자석 전신기였지만, 제법 작동도 했었죠. 너무나 신기해서, 제가 나중에 크면 전자석으로 연구를 하는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처음 꾸던 곳도 이 곳 약국이니까요. 


재미있는 것은 지금 제 전공이 초전도체관련 연구라는 겁니다. 5억이상 나가는 고가의 실험장비를 저혼자 쓰고있는데.
 
자기장은 제 연구에 필수입니다. 당시 어설펐던 자석의 자기장에 비해 지금은 수십만배는 강한 자기장을 가지고 실험하게 되었죠.

제가 특별히 이 연구를 하리라고 해서 온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렸던 제가 꾸던 막연한 꿈대로 그런 일을 하고
 
있다니 신기할 따름입니다.


약국집 아이들만의 특권이 있다면, 비타민C와 박카스를 자주 먹을 수 있다는 겁니다.

약 진열장 뒤, 드링크제 박스를 놓아둔 바닥에 쭈구려 앉아서 고무줄을 가지고 소총을 만들거나, 어머니가 주시는 버리는 박스들을

모아다가 딱지를 만드는 것이 제가 누릴 수 있었던 제일 큰 낙이었습니다. 그것도 하루 종일 어머니 곁에서요. 그러다가 때가 되면

제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주변 분식집에서 배달 주문해주셨죠. 만두나 짜장면 같은 것들.

조그만 동네의 약국이 대부분 그렇듯 많은 분들이 계절과 상관없이 저희 부모님 가게에 나와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나누시곤 하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약국 안에 쪼그려 않아서 어른들 사는 이야기들 흘려듣곤 했었죠.

주변 동네 분들의 삶과 함께 하셨던 어머니셨죠.


어머니의 약국은 제겐 천국이었습니다.


제가 제일 흥분할정도로 좋아하던 것이 등화 관제 훈련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반공 교육, 민방위 훈련이 엄했던 시절이라서

등화 관제 훈련이 되면, 정말로 온 동네의 불을 모두 껐어야만 했습니다. 온 동네의 불이 꺼지면, 동네 사람들은 각자 가게 앞에

나와서 의자에 앉아 주변 이웃들과 얘기를 하거나, 아이들은 신나서 조심조심 어둠속을 뛰어다니곤 했었죠.

저는 가게 주변에 있던 저희 집 베란다에 돗자리깔고 별보는 것이 좋았습니다. 아버지는 가게를 보고 계셨고, 어머니는 화장을 하시거나

혹은 동생을 안고 밖에 돗자리에 누우시면 어머니 곁에서 조용히 별보기 놀이를 하던 기억이 납니다.


아 또 하나 기억납니다.

주변에 재래 시장이 있었던 곳인 만큼 장사하기 녹녹치 않은 곳이었습니다.

하루에도 수차례 술취한 남자들이 가게에 들어와서 돈좀 달라고 하거나 행패를 부리곤 했었습니다. 제 마음 같으면 그냥 내 쫒았을 텐데

어머니는 언제나 제가 어릴 때 꼬박꼬박 천원 이천원씩 쥐어주고 돌려보내셨던 기억이 납니다.

몇 번의 도난도 있었었구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언제나 의연하게 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대처하신 것은 어머니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
 
아닌가 하네요.

하루는 가게 옆 미용실에 술취한 채로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협박하던 사람이 있어서 아버지와 실랑이를 벌이셨던 일도 있었다네요.

아버지와 실랑이를 벌이던 그 사람은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고 손을 잃었고, 미용실의 천장은 구멍이 크게 났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아버지는 당시에 다치진 않으셨는데. 뉴스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나온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한 누나의 증언입니다.


얼굴 한 번 못 뵌 할아버지의 묘소 앞에 있던 제 모습이네요. 이 당시에는 그래도 부모님이 20대 젊은 신혼 부부이셨을 테구요.

지금은 시시 때때로 염색하시는 할머니가 되셨더군요.


두 살 때의 저입니다. 체크무늬같은 셔츠를 좋아하시던 어머니^^  여전히 제게 주시는 옷들은 체크무늬입니다.

부디 오래도록 한결같으시길...


유치원 다닐 때 제 모습이네요.

무슨 무늬 맞추기 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모이라고 해서 모였더니 사진찍었던 것 같습니다. 여전히 셔츠는 체크무늬..




누나가 유치원 다닐 때 따라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요즘은 누나 유치원 때 따라가고 하는 것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죠.

선생님들도, 부모들도 누구나 그 당시에는 그럴만한 마음의 넉넉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싶네요.

요새는 누가 돈을 더 준다고해도 자기 유치원생의 동생을 소풍가서 같이 돌봐줄까요. 저는 소풍가서 좋았고, 누나는

그다지 내색은 않하지만 부담(?)스러운 모습같아 보여요. '내 평생동안 살아오면서 동네 챙피해서 얼굴 못들겠다' 뭐 이런 표정.

중요한 건, 누나 치마나 제 셔츠가 모두 체크무늬란 거....


몇 년전 가족끼리 마련했던 어머니 생신 때 모습.

사진을 통해 봤던 어머니의 고우셨던 모습이 이제는 중년의 모습으로 바뀌어버린 지금 그저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올해는 저도 졸업하고 제 갈길을 얼른 가야겠지요.

35년도 넘게 정든 용두동(동대문 구청 주변)에 이제 다시 가게 될 일이 없을 것 같아 너무나 아쉽기만 합니다.

이전엔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던 지금의 홈플러스 부지. 그리고 그 뒤의 커다란 목재소.

이층집이었던 집에서 보면 커다란 나무들이 쌓여있던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대기업, 그리고 커다란 자본에 의해 사라져버린 구멍가게들, 소규모 약국들...이젠 이런 모습을 우리 다음 세대들이 구경하기는

힘든일이겠죠. 물건을 사려면 당연히 커다란 마켓에 가야 사는 것이 되어버렸으니까요.



마음의 준비도 없이 추억 하나가 사라진다는 생각에 무척 서운합니다.

부모님께서 젊은 신혼부부로 시작해서 평생 일해오셨던 곳이니까요.


저로서는 너무나 아쉽지만 그동안 고생만 하셨으니 당연히 좀 쉬셨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자식들 걱정에 잠시도 못 쉬시는 거죠.


너무나 서운하지만 슬픈 이야기는 아니니  추억은 간직하고 새로운 기쁜일만 기대하렵니다.^^






하나의 기나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버린 어머니의 약국은 제겐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었습니다.

저희의 추억을 35년간 지켜주셨던 어머니십니다.

어머니께 제가 드리고 싶은 마음이네요.



어머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