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으로 불리는 집단에 관한 사회학 - 장편소설로 만나기

 

좀도둑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 장선정 옮김 | [비채]

 

 

 

하나의 가족

오늘 만난 <좀도둑 가족>이라는 장편소설은 어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서 개봉된 고레아다 히로카즈 감독 작품의 원작 소설이다. 그런데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이 나누는 대화가 일상적이지는 않다. 가족끼리 서로 이름을 부르는 서양과 달리 일본 영화인데도 구성원들은 서로를 아빠, 엄마, 할머니 등으로 부르지 않고 서로의 이름으로 부른다. 그것도 본명이 아닌 각자가 선택한 이름으로.

 

린이 린이 아닌 것처럼 노부요는 노부요가 아니며, 오사무도 오사무가 아니다. 아키를 포함해 집에 사는 가족은 하나같이 이름을 갖고 있었다.(129)

 

책을 읽기 시작하면 가족으로 보이던 한지붕 식구들의 관계가 일반적이진 않다는 것을 바로 있다. 이들은 피로 연결된 가족이 아니었다. 이들은 본래의 가족으로부터 떨어진 아웃사이더 같은 존재들이 헤쳐모여이루어진 집단이었다. 하지만 서로에게 무심한 , 서로 예의차리지 않고도 할말 다하는 이들은 여느 가족 못지않게 가슴 속에 따뜻함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사람다움 모습들은 무엇보다도 각자 선택한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로의 존재감은 선택한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유지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나 서로가 남남인 이들은 각자 나름의 추억 혹은 의미를 갖던 존재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각자가 선택한 이름을 서로 불러주는 행위는 팔을 활짝 펴고 상대방을 환대한다는 의미와 다름이 아닐 것이다. 과거에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건 간에 현재 있는 그대로, 상대방의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좀도둑 가족 피로 엮인 가족은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있다. 자신들의 가족으로부터 떨어져나온 이들은 자신의 가족을 영영잃어버린 인물들이 모여 선택한 하나의 가족이야기라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 가족이라는 집단은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애증의 관계 같은 . 멀리 있으면 그리운 존재이면서도 가까이 있으면 서로에게 말못할 상처를 주기도하는 가까우면서도 집단이 가족이다. 영화든 책이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줄곧 가족이란 주제에 대한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할머니 하쓰에의 말처럼 서로가 선택한 관계가 (가족보다) 끈끈한 아닐까. 인생의 숱한 희노애락을 겪었을법한 할머니 하쓰에는 피가 이어지지 않아서 좋은 것도 있지 않아?”(185)라고 책을 읽는 우리에게 직구를 날린다. 서로에게 가장 상처를 있는 존재가 가족이라는 점에서 수긍할 있는 반면 가족이니까어려움을 이겨내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어느 쪽이 옳다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는 질문이다. 정답은 없으니까. 다만 원작에 충실한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상투적이긴 하지만 분명 가족이라는 집단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는 점이다.

 

 

 

현대 가족이 처한 사회에 관한 보고서

<좀도둑 가족> 21세기 어느 날을 살고 있는 사회 구성원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기도하다. 이따금 들어오는 공사장 일을 전전하며 지내오는 오사무. 결국 공사장에서 다리를 다쳐 하기 싫은 일마저 끊긴 상황에 닥치고, 산재보험으로 보상을 받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사회의 투명인간 같은 혹은 잊혀진 존재일 뿐이다. 그가 그나마 유일하게 꾸준히 하는 일은 쇼타와 함께하는 쇼핑’, 동네 마트에서 물건을 슬쩍해오는 일이다.

 

한편 동네의 영세한 세탁소에서 고참이긴 하지만 여전히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노부요의 독백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실감나게 드러낸다. 나는 가난에 허덕이는 쪽일까. 앞은 내리막길일까. 그저 운이 없는 것뿐일까.(144)  벗어나기 힘든 가난 앞에서 자신의 운이 없음을 자책할 수밖에 없는 운명은 분명 많은 이들이 공감할 있을 터이다. 현대 사회에서 보여주는 가난은 모두가 가난하던 절대적 가난의 모습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어느 신문의 칼럼을 보니 70년대 강남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 서울의 집값은 300 이상이 올랐지만,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대략 15 올랐다는 내용을 기억이 난다. 결국 경제적 도움을 있는 가족, 부모님이 없는 구성원들은 평범한 직장을 다녀서는 평생동안 결코 자기 집을 자신의 힘으로 마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미국의 실천 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죽음의 밥상>에서는 극심한 빈부격차를 월마트의 사례로 이야기해준 있다. 그는 책에서 10 년전(2000년대 초반) 기준으로 당시 월마트 CEO 월마트 정규직 최저 임금의 ‘170만배수준을 받고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현대 자본주의의 빈부 격차는 이정도까지 벌어져있는 상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최저임금 인상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다며 이를 반대하고, 모든 경제 신문과 상당수의 기업인들이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난한다. 언제나 서양의 선진국의 사례를 들먹이며 비판적인 주장을 하던 이들도 최저임금에 대해서는 선진국 사례를 참고하는 이들은 드물다. 아울러 사회가 안고있는 보다 근본적인 경제구조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고, 사회의 기초 체질을 개선하는 일에 문제의식을 갖고 일을하는  시도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환경에서 풍요로운 도시에 사는 빈민 가족은 운이 없는것이 맞다. 그리고 안타까운 것은 노부요의 말대로 앞으로도 가난에 허덕일 이라는 점이다.     

 

이런 가난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선택하여 구성된 헤쳐모여가족의 유일한 구원은 할머니 하쓰에의 사망한 남편의 이름으로 나오는 연금이다. 매달 11만엔 남짓한 돈을 부정수급하는 일은 가족들에게는 유일하게 안정적인 수입원이다. 그마저도 하쓰에는 파칭코로 상당부분을 탕진하긴 하지만 말이다. 오사무는 공사장에서 다리를 다친 이후로 일을 하지 않게 되고, 정기적으로 마트에서 쇼핑 하거나 차의 유리를 깨서 물건을 훔치는 일을 하기도 한다. 노부요는 안정적이지 못한 직장에서 고액 고참 근로자라서 해고 통보를 받는다. 회사에서는 낮은 임금을 받는 외국인 노동자를 대신 고용했기 때문이다. 부분도 사회구조의 주도권을 얻지 못한 계층이 어떻게 사회에서 점점 난민화되어가는 지에 대한 가지 사례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 한편 집에서 교과서 읽기를 좋아하는 쇼타는 등교하는 또래 아이들을 보며 집에서 공부할 없는 아이들이나 학교에 가는 이라고 오사무로부터 들은 말을 주문처럼 되뇌인다. 가정폭력과 무관심 속에 방치된 주리는 선택된 가족의 구성원이 된다. 쇼타와 주리는 전통적인 가족의 테두리에서 소외된 아이들이 겪을 있는 일들의 단면을 드러내준다. 이처럼 소설은 등장 인물들이 겪는 일상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작품을 완성하기 까지 10여년 고민했다고 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비교적 짧은 장편소설에서 현대인이 안고있는 사회의 주요 문제점들을 담아낸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사는 곳에 온기를 더하는 일을 빼놓지 않는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책을 읽지 않거나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에게 스포일러가 되지 않도록 하고 싶었는데, 어쩔수 없었다. 보다 자세한 줄거리는 여기서 생략하겠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면 선택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 오사무가 사는 집을 방문한 쇼타가 하루밤을 오사무와 같이 보내고 다음 버스를 타고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오래간만에 만나 회포를 푸는 아빠와 아들의 모습같다. 오사무는 쇼타를 태우고 떠나는 버스를 바라보다 문득 버스를 따라 달리기 시작한다. 오사무는 순간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것이 아닐까. 핵가족이 되다못해 원자화된 오늘날 가족의 모습에서 피로 연결된가족의 의미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부모님 세대가 생각하는 가족의 의미와는 분명 다르다. 대가족이 모두 모여 살면서 나이 많은 형제가 어린 동생들을 부모대신 돌봐주는 풍경은 이제 이상 보기 힘들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개개인 각자가 생존을 위해 분투해야만 하는현실에서 그나마 서로를 받아들이고 버팀목이 되어줄 있는 것은 서로가 선택한 가족 있는 새로운 역할이 아닐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부담이되거나 상처를 주는 일이 있다면, 이보다는 오히려 좀도둑 가족처럼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임이 새로운 형태의 가족으로서 대안이 수도 있겠다.

 

이러한 상황을 좀더 확장해보면 오늘날 사람들이 가족보다는 동호회 같은 모임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이런 모임에 의지를 하게 되는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소설에 나오는 가족처럼 이들은 온라인에서 각자가 선택한 서로의 닉네임을 불러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비슷한 관심사와 주제를 가지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구성원들이다. 오프라인에서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받으며 위로와 격려를 나눈다. 어쩌면 오래동안 지속되는 동호회 모임은 이미 하나의 가족으로서 기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시 매맞는 가정에서 방치된 여자 아이 주리를 자신의 딸처럼 받아들이고 아끼는 노부요는 자신이 주리를 낳지는 않았지만 주리의 엄마였다 형사에게 항변하는 대목이 나온다. 대목은 자녀를 소유물처럼 여기고 인격으로서 대우하지 않는 많은 부모들을 떠올리게 해준다.  노부요가 하던 대사는 피로 이어진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현대의 가족을 되돌아보게 한다. 해체되는 가족들에게 돌을 던지고 비판의 눈초리를 던지는 일을 잠시 접어두고, 저자는 내막을 들여다 보려고 흔적에 나는 무엇보다 인상을 받았다. 서로가 선택한 가족의 내부에서 상투적인 시선을 과감히 걷어버리고, 이들을 이해해보려고 하는 시선에서 무엇보다 저자의 온기를 느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