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문을 생각한다

Amherst bikepath, NY 2010



     중국의 대학자 이선림(李羨林:지셴린)이 '人生'에 대해 담담하게 써내려간 책 < 人生 >을 읽어보다가 문득 든
 
생각이다. 여든이 되어 자신의 여든을 뒤돌아 보며 상상하는 대목에 어느 할아버지와 여자 아이가 나온다. 지나가

는 과객이 물 한잔을 청하자, 노인은 앞에는 무덤뿐이라고 말하고 어린 여자아이는 백합과 들장미가 가득한 꽃밭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투르게네프의 산문시에 나온다는 문구를 인용한다.


     "나는 그 길을 가는 것이 두렵지 않다. 먼 길을 걷다 드디어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곳이므로. 그리고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그나마 위안이 디는 것은 여느 노인과 달리 어린 여자 아이처럼 무덤 이외에
 
백합과 장미꽃을 보았다는 점이다."

 
     30대 초반을 지난 지금은 이전처럼 가난(?)하지만, 그리고 여전히 내 앞날은 불확실하지만, 이전처럼 그렇게

우울하거나 불안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고통스럽고 정신없던 20대와는 달리 좀더 게을러

져서 그런지, 이전보다 좀더 느긋해지고, 매사를 대할 때 좀더 담담하게 대할뿐이다.

     모든 이들이 도착하게되어있는 무덤, 죽음의 순간에 나 또한 좀더 덤덤하게 다가 설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더이상 우울하지 않다. 20대에 우중충하고 거대한 도시 서울의 어느 한 구석에서 우울해하던 나는 이제

오히려 소소한 내 삶을 발견하고 잠시 쉬어간다는 느낌이다.


     지은이 지셴린은 문화 혁명당시 '10년의 재난'을 겪으며 2백만 자가 넘는 인도 대서사시  <라마야나>를 번역했

다 한다.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도연명의 시구가 있다.


"커다란 격랑 속에서도 기뻐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자네.

해야할 일을 다했으니 더는 걱정하지 마시게."


     문득 내 무덤에 세울 묘비에 뭐라고 쓸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모든이는 자신의 길을 가는 나그네이고

죽음이란 것은 잠시 쉬어가는 과정이라 생각을 해본다. 내가 할 일은 잠시 쉬어가게 될 때까지 계속 나의 길을
 
가는 것이며 그 때 몇 안되는 좋은 추억거리를 가지고 싶다.

Amherst bikepath, NY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