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I'm doing this?

초심初心, Buffalo, 2004



[생각 하나]

Why I'm doing this?

요즘들어 가끔 내게 하는 질문이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해봐야 잘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이 언제나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을 하고 살 수는 없는거라고...

물론 그렇다. 사람마다 다른 가치 기준과 그에 따른 우선 순위가 있을 것이고, 현재 자신이 하는

일또한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싶다고 해도 언제나 원하는 일만을 하게되지는 않는다.

삶의 모습은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전개되어 나가기도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자신이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던간에 궁극적으로 자신이 무언가를

하고 싶은게 있다면, 끊임없이 그 곳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야한다는 점이다.

내 주위엔 우연과 같은 계기로 그 전과는 다른 일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결국에는

그 일이 자신의 없이되고, 자신이 원하는 일이었단 것을 깨닫게 된다.

그 들은 막연한 시작에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자신을 드러내었던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그들이 마주하게된 그런 기회나 계기를 우연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필연적인 우연'

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사람들은 어느 순간에 '그 곳'이 있었고, 그러한 계기를 만나게 된 것이고,

개개인이 대상에 대해 열려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그러한 계기에 관심을 갖고 받아들이는 일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계기를 마주하게된 사람들이 사실 난 부럽다.

난 그렇게 극적인 만남을 갖지는 않았지만, 아주 오래 동안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작은 소망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절실한 마음가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제주도도 못가본 내가 처음 새로운 환경에 발을 디딛던 때가 떠오른다.

그 땐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땅을 밟았던 것일까. 난 어디로 가고 있는건지.

난 왜 이일을 하는건지. 왜 해야만 하는건지 나에게 다시 질문해본다.





hotshoe, Buddha's Birthday, Buffalo, 2006

[생각 둘]



선 명상을 배운적이 있다.

엄격하게는 아니지만 선 스님들이 수행하는 방식대로 방석위에서 절을 여러 번 한 후

결가부좌 자세로 명상에 들어간다.

절을 한 후에 난 땀이 온 몸을 적신다. 다리엔 통증이 오고, 허리는 꼳꼳히 세우느라 뻐근하다.

호흡을 가다듬고 호흡에 집중을 하는 것이다.

수행하는 스님들이라면 가지고있는 '화두'에 집중을 하게된다.

'나는 무엇인가?'

선생님이 내게 꾸준히 물어보라던 질문이다.

'이뭐꼬?'

간결하면서도 묘한 이 화두는 실제로 선 스님들이 갖고 있는 화두 중의 하나란다.


명상 선생님은 절을 할 때 나 자신을 위해 절을 해보라고 하셨다.

꾸준히 절을 하고 명상을 하면 달라진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성철스님은 생전에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먼저 삼천배를 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내가 빠르게 절을 계속해서 했을 때 한 시간동안 300회의 절을 했었으니까

삼천배라면 꼬박 10시간을 쉬지않고 해야 할 수 있는 양의 절이다.

왜 굳이 3천 배라고 했을까.

글세. 3천배를 하는 동안 무언가를 깨닫게 된다면 바로 돌아가면 될것이고,

의지가 약하거나 자신에게 그다지 절실하지 않다면 하기힘들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3천배를 할 정도의 절심함이 있다면, 절을 한 후 성철 스님을 만날 때에는 스스로의 마음의 문을 열고

눈과 귀가 열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난 600회의 절을 해본적이 있는데, 온 몸이 땀으로 젖고, 무릎은 아파오기 시작한다.

심신은 지쳐가지만, 오히려 정신은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나 자신을 위해서 절하라는 말...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절을 꾸준히 하고나면
 
마치 뱀이 허물을 벗는 듯 새로워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알송달송한 말을 전하셨다.

절을 하는 동안 많은 생각들이 교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