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lla in Mundo Pax Sincera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 : Vivaldi

내 기억이 맞다면 영화 <Shine>이 '빛'을 보게된 것은 1996년이다.
1년간의 극심한 방황 속에 허우적대던 1996년이었다.

96년 말 무심코 군대를 가기로 결정했던 나는 내 생일에 입대 통지를 받아놓고있던 터였다.
생일날 군대를 가는게 너무 억울해서 차라리 좀더 일찍가기위해 공군을 선택한 면도 부인할 수 없다. 군대가기전에 방황과 백수 생활을 반복하던 내가 하던 일들은 이전 내가 학창시절에 하지 않았던 일들을 찾아해보는 것이었고, 서울 거리를 걸어서 사람들을 구경하던 일이나 영화를 보러 혼자 다니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리에서 5~6시간동안 걸어다니면서 청계천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고 관찰하던 일들과 혼자 영화를 보고 미술관을 처음으로 용기내서(?) 혼자 찾아다니던 일들이 결국에는 내가 현재 찍는 사진들에 영향을 많이 주었다고 생각한다. 



영화 <Shine>이 1996년에 나왔다고 해도 내 기억으론 이 영화를 1997년 입대 전에 혼자 봤었다. 신사동에 있는 예술전용 영화관에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에 울려퍼지던 이 Vivaldi의 곡이 강하게 여운으로 남았던 기억이 난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는 동안 제프리 러쉬(Geoffrey Rush)가 영화 포스터에 나온 것 처럼 화면 아래로부터 위로 뛰던 그 모습이 오버랩되고 이 비발디의 음악이 흘러나왔던 것이다. 이 음악은 오래도록 방황하고 외로왔던 나를 지켜봐주었던 존재 같다.

OST에 나오는 두 가지 버젼의 이 곡 중에 나는 Jane Edward가 부른 버전보다 Emma Kirkby의 목소리를 더 좋아했었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Jane Edward의 버전은 아마도 좀더 성숙하고 정제된 그녀의 목소리가 암울했던 나를 격려(?)해주었다면
Emma Kirkby의 목소리는 좀더 내게 신선하게 다가왔고 고등학교 2년 간의 우울증세와 1년 간의 암흑같은 재수 생활을 지나 새로운 방황기를 시작했던 대학 신입생에게 나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나를 공감해주고 이해해주는 존재로 느껴졌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드시던 수북한 약봉지들을 보고 충격받았던 기억, 우울 증세로 참담하게 학업에 실패하고 식물인간처럼 살았던 고등학교 시절과 내 존재감에 대한 부정들...1996년은 내 암울한 과거의 연장선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14-15년이 지난 그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은 왜 일까?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바다 건너 외딴 곳에 혼자 남아있지만, 외적 내적으로 많은 변화들이 있었고 그걸 가만히 지켜볼 수 있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 같다. 이젠 나의 과거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내 일부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누구는 나이 마흔이 되니 잠잘 때마다 다음날 아침에 영영 못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겁이 난다고 했다.
난 그 분 보단 빠른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의 마지막을 지켜볼 때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삶들을 거리에서 관찰하고 지켜보고 있노라면,
사람들 하나 하나 언젠가는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것이란 생각을 가끔하곤한다.
내가 찍어놓은 수천 컷의 필름도 누가 보게될지는 모르겠지만 고스란히 남게될 것 이다. 
바둥바둥대며 밥을 굶어가며 샀던 내 카메라들도 결국에는 남게될 것이다.
계절이 바뀌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삶이 유한하다는 것, 인생 그리 길지 않다는 것들을 좀더 자주 자각하게 되는 것 같다.
그게 나의 30대가 20대때와는 다른 한 가지라면 한 가지 변화라고 하겠다.

나의 다음 변화를 준비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