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제럴드> - 한 인간의 상처와 욕망을 읽고 공감하다

피츠제럴드

최민석 지음 | [arte]

 

 

학창시절, 그러니까 꽤 오래전에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처음 읽었다. 하지만 일말의 공감도 할 수 없었다. 읽었던 소설에 대한 내용은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개츠비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지도 꽤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나는 부분은 갑자기 부자가 된 남자가 옛 여자를 잊지 못해 스토커 내지는 변태 수준으로 과거의 여자를 생각하고 그녀를 궁금해하며 흥청망청 파티를 여는 장면 뿐이었다. 난 도대체 뭘 읽었던걸까. 개츠비가 도대체 왜 ‘위대한’ 걸까를 궁금해하기도 전에 나는 수많은 독서인들의 찬사를 받은 이 소설이 이해가 되지 않아 나의 무식한 교양 수준을 탓할 뿐이었다. 그렇게 《위대한 개츠비》는 나의 학창시절 이후 오랫동안 ‘무명의 개츠비’로 잠수를 타다 내 앞에 나타났다.

 

 

소설가 최민석 작가가 피츠제럴드의 자취를 따라가며 일종의 취재를 겸한 여행 후 정리한 책이 이번에 만나게 된 《피츠제럴드》이다. 제목이 드러내듯 이 책은 인간 피츠제럴드에 대한 안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보다 포괄적이고 집요한 ‘평전’과는 다르게, 짧았던 피츠제럴드의 생애의 후반부를 주 대상으로 한다. 최민석 작가는 끊임없이 방랑하듯 살았던 피츠제럴드의 생애 중에서도 작가가 판단하기에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장소 몇 곳을 선별하여 인간 피츠제럴드가 살았던 생애 어느 순간을 조명하고 있다. 책의 서문 ‘피츠제럴드와 ’의 첫 부분을 보자마자 그의 생애를 따라가며 글쓰기를 준비했을 최민석 작가의 마음가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여러 편의 소설집과 에세이집을 펴낸 작가이면서도 대한민국에서 ‘글쓰는 이’, 소설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임을 암시하는 ‘생계형 작가’로서의 고백을 따라가며 피츠제럴드 이전에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준비했을지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는 저자처럼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지는 않지만, 박봉을 쪼개어 아내에게 전달해야하는 가장으로서의 내 모습을, 무엇보다 그의 문장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물론 책의 후반에서 소설가인 저자도 처음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을 때, 이 소설이 ‘왜 고전인가?’ 반문했다는 고백또한 《위대한 개츠비》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갖게 해준 요인이었다. 단순히 나의 독서 수준이 낮거나 난독증을 의심할만한 징후가 아니었음을 확인해 해주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 내가 타인의 삶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데이터가 너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는 사회에 나와 살아가면서, 보다 보편적인 삶의 이해와 경험치들이 쌓임에 따라 이제는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더라도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하는 일말의 희망은 얻은 셈이다.

 

 

프랜시스 스콧 키 피츠제럴드는 19세기가 끝나갈 무렵(그러고 보니 그의 123번 째 생일을 몇 일 앞두고 있다)에서 20세기 전반을 살다간 사람이다. 젊은 시절에 1차 대전의 시기를 겪었고, 유럽에서 일어나 끝난 전쟁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미국의 호황기였던 1920년대를 관통했던 인물이다. 특히 1920년대는 미국의 ‘ 에포크’(좋은 시절)였다. 비록 20년 대 내내 금주법의 시기였지만, 당시에 주류 생산을 급격히 줄인 결과, 오히려 술값이 더 내려갔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등장하듯, 밀주를 팔아서 부를 축적했던 이들 또한 있기 마련이다. 20년대는 또한 일명 ‘재즈 시대’이기도 하다. ‘아는 사람’만 초대되어 들어갈 수 있는 클럽의 비밀 공간에서 재즈를 듣고, 술을 마시며 흥청망청했던 당시에 끈적끈적하고 매캐한 공기 속에서 피츠제럴드가 하이볼을 손에 들고 자신의 야망과 상승욕구를 불태웠으리라 상상을 해본다.

 

 

피츠제럴드를 ‘미국적인 작가’라고 불렀을 때, 이 표현의 함의는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우선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사회적 요소와 ‘백인 중심 사회’라는 키워드를 떠올려보게 된다. 아마도 피츠제럴드가 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아버지의 먼 친척 중에는 미국 국가를 작사한 인물이 있으며, 볼티모어 시에는 그의 동상도 있다고 한다. 바로 부계 쪽으로 명망있는 백인 가문이라는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으며, 모계 쪽으로는 1850년대 아일랜드 대기근 이후 미국으로 이민온 부유한 이민자들의 후손으로서의 연결고리를 모두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창시절 처음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을 때 아무런 감흥이나 기억나는 부분이 거의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이 ‘미국적’이라는 키워드의 함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피츠제럴드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사회의 커다랗고 공고한 장벽과 처음 맞닿게 되는 프린스턴 대학 시절을 조사한 부분을 주목해본다. 나는 이 부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최민석 작가가 프린스턴에서 마주한 발견들을 따라가면서 돈만 있다면 귀한 신분이 될 수 있는 대한민국의 사회보다 더 철저히 근본적인 철옹벽이 둘러쳐져 있는 미국사회의 보수성과 배타성을 새롭게 볼 수 있었다. 아들이 친구들과 점심먹을 공간을 짓는데 대략 20억 원에 해당하는 기부금을 내는 가문들이 미국과 세계를 좌지우지하고 있고, 이들의 자녀들은 이 곳에서 대학생활을 함께하며 평생 사업을 같이 할 친분을 쌓아 온 것이다. 사실 저자가 소개한 피츠제럴드의 집안 역시 개츠비에 대한 설정처럼 가난한 환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어린 시절부터 프린스턴 시절에 이르기까지 강박에 가까울정도로 스스로를 상대화 시키며 자신이 결핍하고 있는 것을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소설에서조차 “미국인이라면 지느러미를 가지고 태어나야 한다”, “그들은 (미국인들은) 그렇게 태어난 셈이다. 돈이 지느러미다”라고 써둔 것이 아니겠는가.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금수저와 흙수저를 이야기하지만, 이미 1-2세기 전에 자본주의 사회의 최전선인 미국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는다’는 교훈을 이미 우리에게 주고 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가 일종의 돈많은 ‘스토커’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데이지’라는 여인 때문이다. 미국의 빈부격차를 극명하게 볼 수 있는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어느 지역에 물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지역 ‘이스트 에그(전통 명문가가 사는 곳, 데이지의 집이 있는 곳)’와 ‘웨스트 에그(신흥 부자들이 사는 곳, 개츠비의 집이 있다)’가 있다. 이 소설에서 이 두 장소를 분리하는 물은 개츠비에게 장애물이자, 넘어야할 대상일 뿐이다. 개츠비에게 있어 이 물을 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돈’이라는 ‘지느러미’가 필요하다. 이 물 속을 거스르든, 헤쳐 나가든 하기 위해서는 응당 지느러미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소설 밖에서 피츠제럴드의 삶 또한 상당히 극적이었음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특히 돈없는 가난뱅이라는 이유로 첫 사랑을 이룰 수 없었던 피츠제럴드가 어떤 상처를 받았을지 짐작해볼 수는 있겠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좀 더 뛰어난 점이 하나 있다면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일 테니까. 물론 피츠제럴드가 겪었을 법한 이런 현실은 극소수이긴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기에, 우리는 왜 이런 부유하면서도 심리적으로 아픈 이들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가늠해볼 수는 있다.

 

 

피츠제럴드가 살아간 생애의 실마리를 따라간 이번 기회로 미루어 보면 그는 모든 소설에서 자신의 결핍과 상처를 어떤 방식으로든 글의 소재로 사용했음을 깨닫게 된다. 달리 말하면 최민석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피츠제럴드는 평생 자전 소설을 쓴 작가라는 간결 명료한 표현을 곱씹어보게 된다. 1차 대전에 참전하기를 갈망하며 대기하던 와중에 전쟁이 끝나 헤밍웨이처럼 전쟁 영웅이 될 기회조차도 얻지 못했던 피츠제럴드. 이마저도 상처와 결핍이 되었던 그의 삶을 보면, 그의 소설은 작가 피츠제럴드 자신의 욕망을 대리 실현하는 공간으로서 사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가 전쟁에 참전하여 영웅의 모습으로 복귀하는 설정도 이러한 배경과 저자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따라서 피츠제럴드의 작품들을 단서로서 잘 분석하면, 역으로 그의 결핍과 욕망이 어떤 식으로 투영되고 문자화되었는지를 파악할 수도 있겠다. 특히 최민석 작가가 소설의 화자인 닉이 피츠제럴드의 또 다른 페르소나로서 볼 수 있다는 지적은 분명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어나감에 있어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 같다. 피츠제럴드에게 있어 개츠비가 계급이라는 벽으로부터 받은 결핍과 상처의 보상 기작이라고 한다면, 닉은 글을 쓰는 자로서 피츠제럴드의 욕망이 분출된 캐릭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떤 면에서 데이지가 젊은 시절 첫 사랑의 실패에 대한 아픔의 기억을 통해 되살아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피츠제럴드가 평생 자전 소설을 썼다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며, 이건 하나의 강박에 다름아니라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 된다.

 

 

최민석 작가의 《피츠제럴드》를 읽으며 피츠제럴드의 삶을 조금 더 이해하다보니 다시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보고 싶어졌다. 다른 고전들은 경우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특히나 피츠제럴드의 경우는 자신이 써낸 작품이 곧 자신의 삶과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잊혀진 작가로 알고 있던 피츠제럴드가 팔리지 않는 자신의 책을 사려고 서점을 방문했을 때, 놀란 서점 주인들의 표정을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그리고 피츠제럴드의 말년에 정신병원에 있던 아내 젤다에게 ‘이제 나는 완전히 잊혔소’라고 인정하며 써내려간 순간의 심정은 또 어땠을까. 피츠제럴드의 작품이 아닌 그의 삶을 따라가보며 44년 이라는 짧은 생애에 응축된 한 인간의 고뇌와 상처를 좀 더 가까이서 느끼고 공감하게 되었다. 이제 다시 그의 작품을 읽어보게 되면 소름돋을 정도로 솔직한 그의 내밀한 욕망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최민석 작가의 말대로 ‘위대한 소설은 일상을 살아내고 있을 존재감을 드러낸다’라는 점을 믿어보고 싶다. 머나먼 이국 땅에 묻힌 한 작가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작가의 말이니까. 내게는 내 생애의 절반에 가까운 ‘소설이 익는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최민석 작가의 진심과 도움을 빌어 나의 ‘감각과 영혼’이 눈을 뜨는 순간을 나도 기대해보게 된다.

 

 

이 책이 인간 피츠제럴드를 이해하고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더 가까워지길 의도한 결과물이라면, 최민식 작가는 성공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 책을 읽은 다음 이미 오래 전에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을 때, 아무런 감흥이나 기억나는 대목하나 남아있지 않은 중년의 어느 초보 독자가 《위대한 개츠비》를 주문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문학작품의 뒤에 정리되어 나오는 작가연보 수준이 아닌, 작가의 삶을 보다 생생하고 깊이 들여다보는 기회를 통해 작품과의 관련성을 함께 생각해보게 해주는 시도는 한 인간의 삶과 그의 작품을 통해 나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최민석 작가가 피츠제럴드의 작품 중에서 인용한 대목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을 재인용하며 마무리해본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은 오류의 왕관, 판도라의 상자였다. 자부심 가득한 뉴요커의 사람으로 올라갔던 나는 그곳에서 뉴욕의 빌딩 숲은 끝없는 연속이 아니라 유한하다는 사실을, 도시는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녹색과 청색의 무한한 자연으로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난생처음 그토록 높은 곳에 올라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재즈 시대의 메아리》중 ‘나의 잃어버린 도시’ 중에서 재인용(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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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