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분야 신간]<낯선 이와 느린 춤을>: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
<낯선 이와 느린 춤을>
(원제: Slow Dancing with a Stranger: Lost and Found in the Age of Alzheimer’s)
메릴 코머(Meryl Comer) 지음 | 윤진 옮김 | MiD
공교롭게도 <낯선 이와 느린 춤을> 읽기 시작한 날, 내 옆지기의 회사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던 컴퓨터 한 대의 하드드라이브가 ‘사라져버렸다’. 컴퓨터는 하드드라이브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모든 데이터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내는 ‘데이터 복구가 불가능합니다’란 컴퓨터 기사의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다만, 컴퓨터 시스템의 경우 우리는 미리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백업’을 해둘 수 있다는 점이 사람과 다르다. 만물의 영장을 가능하도록 해준 뇌신경의 ‘가소성’은 ‘백업’과 ‘복구’가 불가능한 원본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이 책의 뒷표지에는 ‘치매를 예방하려면 읽고 쓰고 끊임없이 머리를 써야 한다.’라고 조언한 추천사도 있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치매의 경우에 도움이 되는 말일 수 있으나, 이 책의 저자인 메릴 코머의 남편 하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조언이었다. 하비는 저명한 의학박사로서 수십년 간 ‘끊임없이 읽고 쓰고 꾸준히 머리를 써왔을’ 터이다. 그러나 알츠하이머병은 경력의 정점에 올라있던 한 가장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아마 이 추천사를 썼던 분은 책을 다 읽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조발성 알츠하이머성 치매. 이 병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발생하는 알츠하이머병으로 치료법은 현재 없다. 그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경이 퇴행해가며 한 인간이 구축해 놓은 인격, 정체성, 추억 등 모든 것을 백지화해버리는 병이었다. ‘나’를 잃어버리는 병이라고 했던가. 이 책을 읽기 전까진 나는 치매의 문제가 그저 한 개인의 문제로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낯선 이와 느린 춤을>은 2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남편을 옆에서 간호하며 절절히 적어내려간 간병기이며, 하비의 병은 결코 개인의 고통에서 끝나지 않음을 나에게 일깨워 주었다.
[하비의 알츠하이머병에 관하여]
하비가 병에 걸리고 10년 간 뇌사진으로부터 알아낸 사실은 이 기간동안 뇌가 현저히 위축되었다는 점이다. 나아가 ‘노인반’이라고 불리는 단백질 이상 침착물이 존재하였으며, ‘신경섬유 농축체’라고 하는 ‘타우’ 단백질이 비이상적으로 형성된 섬유다발이 나타났다. 통상적으로 나이가 많이 들어 뇌에 특별한 자극이 주어지지 않는 노인의 경우, 뇌신경의 퇴행과 더불어 알츠하이머병에 걸리기 쉬운 것으로 이야기하곤한다. 그러나 하비의 경우에는 누구보다도 뇌를 많이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였으며, 나이에 비해 일찍 병을 얻었다. 곧 ‘조발성 알츠하이며병’ 진단을 받은 하비는 생활습관의 영향이라기보다는 유전적인 문제로 봐야할 것이다. 희귀한 유전 질환 사례를 기술했던 <니콜라스 볼커 이야기>에서와 같이 한 개인의 유전자 내부의 특정 위치에서 매우 드물게 일어난 돌연변이로 인하여 정상적인 단백질합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나아가 이 비정상적으로 합성된 단백질의 다발이 재생이 불가능한 뇌세포를 영구적으로 손상시킴으로서 뇌가 관여하는 모든 기능을 상실해나가는 모양이다.
[환자의 입장에서 일관되게 저술해간 기록]
우리가 흔히 보는 환자의 투병기나 완치기록, 혹은 <니콜라스 볼커 이야기>처럼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다양한 입장에 놓인 사람들(환자, 보호자, 의료진, 과학자 등)을 조명한 책이 있다면, 이 책은 오로지 환자를 옆에서 지켰던 보호자의 관점으로 기록된 책이다.
우선 저자인 메릴은 치매 환자의 보호자로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남편 하비의 병에대한 당혹감과 절망감을 감추지 않는다. 암과 같이 많은 이들이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고 환자와 함께하려는 활동이 많은 경우가 있는 반면, 치매 환자들의 보호자들은 그만큼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듯하다.
“알츠하이머병 환자 보호자들은 대부분 너무 지쳐있거나 도움을 받지 못해 고립되어 있다.”(17면)
“하비는 늘 나와 함께하지만 그의 정신은 나와 함께하지 않는다. 우리는 가깝게 있지만 또한 각자 고립되어 있다.”(21면)
“나는 철저히 혼자다.”(302면)
가족이 있고, 아들의 며느리, 손자 손녀까지 있던 메릴에게 환자의 보호자로서 당면문제는 오로지 그녀의 몫이었다. 가장 가까운 친구들마저도 이들과의 ‘우정어린 노력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난 뒤, ‘홀로 자신만의 고독한 현실로 되돌아 오는 일’이었다고 고백하듯, 메릴은 철저히 혼자였다. 자녀들은 그들의 아이들의 육아로 인해 메릴 자신만큼 남편과 어머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했다. 점점 악화되는 재정문제에 더하여 치매 환자 뿐만 아니라 고립되어 절망감과 두려움을 겪고 있는 보호자를 위한 프로그램이 취약하다는 점에도 주목해본다. 우리의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치매에 걸린 부모를 과연 어느 선까지 돌볼 수 있을 것인가. 치매 환자가 자신의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는 데다, 하비처럼 끊임없이 돌아다니거나, 절제력을 잃어 공격적인 성향까지 지닌 상태가 된다면 과연 나는 어디까지 간호할 수 있을까. 2-3년은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메릴의 친척이나 친한 친구들이 그녀에게 ‘만약 하비가 보호자의 입장이었다면 그녀처럼 간호해줄 것 같으냐?’라고 반문할 때, 메릴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하비가 내게 무엇을 해줄까가 아니다. 내게 중요한 건 인간으로서 신뢰와 책임을 지키기 위해 내가 해야한고 느끼는 일들이 무엇인지였다.’(180면)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경력을 포기하고, 자신의 모든 역량과 시간을 남편 하비의 간호에 집중한다.
메릴이 친하게 지내던 지인들도 ‘변해버린 환자의 모습을 보고 방문객들은 발길을 끊게 된다.’라고 언급하는데, 이는 환자와 보호자에게 이중으로 소외와 고립를 가져다준다. 책에 따르면 알츠하이머병은 미국에만 540만 명, 전 세계적으로 4400만명 정도가 고통을 받고 있어 통계적으로 68초마다 치매 진단을 받는 셈이라고 한다. 암과 버금갈 만큼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고통받고 있는 병인데도, 이 ‘병’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암의 경우와 사뭇 다르다는 점이 나에겐 하나의 의문임과 동시에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왜 유독 알츠하이머병은 타인에게 ‘알리지 않는’ 병이 되었을까.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듯 치매환자가 있는 가정은 보호자가 환자만큼이나 고통을 받는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보호자로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환자를 보면서, 나와 공유하던 추억과 기억을 서서히 잃어가는 환자를 보면서 보호자가 받는 심리적인 고통은 이루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보호자는 이러한 환경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 책은 치매를 앓고 있는 보호자의 입장을 상세히 알려 이 병이 환자와 보호자에게 가져오는 변화와 그 의미를 우리가 알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나’는 누구인가? – 정체성의 문제]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주목한 점은 우리가 ‘나’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는 아마도 지구상의 인류가 생긴 시점에서 지금까지 해답이 주어지지 않은 문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평생을 이 질문과 함께 살아간다. 그만큼 ‘나’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은 삶의 근본이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이란 두터운 책에 보면, 전기고문 기술자가 인간의 기억을 완전히 말소시키기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매우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전기고문을 통해 뇌세포를 ‘포맷’해버림과 동시에 새로운 인성이 자라길 기대했던 것이다. 전기고문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소리가 차단된 어두운 방에서 자신의 몸도 건드리지 못하게 묶어두는 것, 곧 사람이 ‘나’에 대한 물리적 감각(오감을 통한 자기 확인)과 공간성(나는 어디에 있는가?)을 차단함으로써 ‘나’의 정체성을 파괴시킬 수 있었다. 한 인간의 기억과 개인이 겪게되는 경험은 한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세계를 탐색하도록 한튼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나의 기억은 내가 인식하는 ‘시간성’의 본질을 이루고 있을 것이며, 나의 오감과 직관을 통한 나의 경험들은 내 외부 세계를 인지함으로써 나 자신과 내가 존재하는 공간성을 확립해주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삶은 ‘기억’이라는 대체될 수 없는 중요한 인자를 기반으로 하여 이 우주에서 고유한 ‘나’의 존재를 마련해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인간으로서 수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살면서 이를 다시 불러들이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영원을 살수 있다고 말할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인간으로서 하비는 자신의 ‘정체성’을 ‘비가역적’으로 상실해갔다. 지갑이나 열쇠, 신문 등을 찾지 못하거나 자신이 찾던 논문을 끊임없이 찾는 증상부터 시작하여, 자신이 아끼던 노란색 포르쉐를 타고 10분 거리이던 직장까지 가는 길을 찾지 못해 헤매기 시작했다. 나아가 하비는 운동조절능력을 상실해갔으며, 절제력마져 잃으면서 공격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또 인지 장애가 나타나며 환청 및 환각에 시달리는 것 뿐 아니라 부인인 메릴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던 것. 이쯤 되면 하비는 그를 ‘정의’해주던 그만의 특질, 곧 인성마저 상실했던 것이다. 뇌가 손상을 입어가면서 뇌가 관여할 수 있는 모든 기능, 기억, 인성이 사라져가며 결국에는 ‘낯선 이’가 되어버렸다.
내가 ‘나’임을 안다는 것은 바로 ‘기억’에 기반하고 있다. 인간의 정체성이란 뇌의 ‘가소성’과 같이 무한해보이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특성으로서 한 인간이 경험하고 감각하고 세상과 교류한 모든 것의 총체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나는 ‘동일한’ 나이면서 이미 책을 읽기 전의 나와는 ‘다른’ 나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비롯된 내 가족과 친척, 내가 경험하고 나와 상호작용을 거친 모든 세상의 흔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현상은 바로 ‘기억’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기억의 축적을 통해 내가 나임을 잊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알츠하이머병은 나를 정의하는 그 모든 기반인 ‘기억’을 아울러 지우기에 ‘나’를 잃어버리는 병이라고 불리는 것일 터이다. 따라서 이 나를 정의하는 기반이 무너질 때 저자 메릴이 “나와 한 집에 사는 이 남자는 내가 사랑해서 결혼했던 그 사람이 아니다.”(13면)라고 쓰고 있듯이 ‘나’는 이 세상에 ‘낯선 이’가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기억을 공유하지 못하면, 그 사람과 사적인 관계는 성립할 수 없어요.”(316면)
메릴이 한 이 말은 잔인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지닌 ‘정체성’의 무게를 보다 숙연하게 깨닫게 해주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삶과 죽음의 문제]
‘우리는 곧 죽는다’라고 괴테가 말했던가. 나는 이 말을 괴테의 다른 문장과 비교하곤 한다.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내가 살아 있는 것, 알게 되었네.”(전영애 교수의 번역) 이 두 표현은 상당한 이질감을 주지만 사실 엄정한 인생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온도의 개념을 떠올려볼 때, 우리가 말하는 ‘차가움’은 ‘뜨거움’의 다른 이름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손은 100도 씨 끊는 물에든 영하 196도의 차가운 액체 질소에서든 모두 동일하게 화상을 입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생의 끝을 떠올릴 때, 곧 우리 삶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앞에서 괴테가 말한 진술로부터 교훈을 다시 정리해 보면, ‘내가 살아 있을 때, 해처럼 맑게, 꿈꾸고 사랑해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가 되지 않을까. 죽음은 곧 삶의 다른 이름이며 전제조건일 터이다. 우리는 언젠가 죽을 운명이지만, 살아있는 한 내 삶을, 타인을 사랑해야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서경식 교수가 <내 서재 속 고전>에서 ‘죽음’에 대해 언급한 것을 기억해내었다. 현대 사회는 ‘죽음’을 금기시하고 ‘죽음’을 기피하게 된 사회라고 말했다. 내가 어릴 때 할머니는 집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나는 할머니를 둘러싸고 있던 친척들의 발 사이로 누워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봤던 기억만 난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한 인간의 마지막은 그가 평생 살아왔을 집(아파트)을 벗어나 친척들이 아닌 첨단기계가 둘러싼 병실에서 보내야하는 것으로 ‘정의’되어버린 듯하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에서 어린 주인공 모모가 죽어가는 로자 아줌마를 집의 지하에 데리고 간 마지막 모습에 다소 놀란 적이 있지만, 프랑스에서는 집에서 죽은 가족의 묘가 집의 지하 깊숙한 곳에 있었다는 기록을 어디에선가 보고는 그 때에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에밀 아자르 아니 로맹 가리의 충격적인 상상력에 빚진 결말이 아니라 ‘죽음’을 대하는 과거 프랑스인들의 시선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다시 <낯선 이와 느린 춤을>로 돌아오면, 메릴의 남편 하비는 삶과 경계에 매우 가까이 있던 사람이었다. 메릴의 기록은 우리의 죽음을, 다시 말하면 우리 각자의 삶을 다시 바라보도록 환기시킨다. 메릴은 몇 년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들의 단언을 들으면서 절망에 빠지곤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그렇게 20년을 간호했다. 그녀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이와 대면한다. 남편의 ‘죽음’을 금기시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안았다. 물론 금전적인 어려움도 영향을 받았겠으나, 메릴은 자신의 직업과 경력을 포기하고 죽음에 가까이 다가간 남편과 새로이 치매를 앓기 시작한 어머니를 자신의 집에서 간호했다. 자신의 가족 중에 병원에 오래 머물러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픈지, 나의 삶은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나가야할지 막막했던 적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기억을 되살려보면 나는 메릴의 간호활동이 얼마나 상상하기 힘든 어려운 결정이었는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저 나는 메릴이 남편과 어머니가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어떻게 지켜주었는지 숙연한 마음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책을 덮으며 놀랐던 점 하나는 20년간 일관되게 유지했던 메릴의 면모였다. 그녀를 정의하는 여러가지 면모를 고려해보자면, 우선 그녀는 무한한 인내와, 깊은 절망 속에서도 자신과 남편의 삶을 놓지 않는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나아가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의 삶을 전부 남편과 어머니의 간호에 던져 넣은 상황에서, 알츠하이머병 재단과 관련한 활동을 하며 ‘다음 세대를 더 돕고 싶었다.’라고 말하는 삶에 대한 긍정이었다. 메릴의 긍정적인 태도와 진정성은 다음 한 문장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비는 인생에서 중요한 모든 것, 즉 사랑, 신뢰, 가족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그이가 고맙다.”(322면)
불치병을 앓고 타인이 되어가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환자로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고 가족의 의미를 다시 보여준 메릴의 삶을 보면 그저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책의 다음 마지막 두 문단은 책을 덮은 후에도 몇 일간 계속 내 머리 속에 강하게 자리잡았다. 아마 이 책에 대한 나의 기억은 이 두 문단에 대한 인상으로 남을 것 같다. 인간으로서 자신과 가족의 존엄을 지켜주었던 메릴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의 말을 마지막으로 여기에 발췌해본다.
“내가 아침에 보스턴에 가게 될 때는, 언제나처럼 마지막인 듯 하비에게 키스를 건넨다. 우리가 신체 접촉을 할 때에 서로 교감한다고, 병이 말기에 이르렀긴 해도 내가 보내는 조건 없는 사랑의 메시지를 하비가 알아차릴 수 있다고, 믿고 싶다. 하비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말 못하고 덮어 놓은 슬픔이 배어나는 것을 숨길 수 없다. 나는 그를 구할 수 없다.
말기 호스피스 치료를 집에서 하기로 하고 그이의 생명이 꺼져 가는 마지막 날들에 그이에게 낯선 이의 손길이 닿지 않게 한 결정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사람이 처음 느끼는 감각이 촉감이라는데, 하비가 마지막으로 느끼는 촉감이 내 손길이기를 바란다. 내겐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323-324면)
(참고로 메릴 코머라는 분이 과연 어떤 분일까 궁금해져서 찾아보게 되었는데, 여기에 그 링크를 포함해둔다. http://merylcomer.com/)
(ver.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