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불편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 <자동화된 불평등>

자동화된 불평등

(원제: Automating Inequality: 

How High-Tech Tools Profile, Poilice, and Punish the Poor)

버지니아 유뱅크스(Virginia Eubanks) 지음 | 김영선 옮김 | [북트리거]

 

 

 

인간이란 위대한 존재다. 인간만이 위대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확인하고자하는 존재이기에 위대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확신과 긍정을 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인간의 근원적인 불행은 여기에서 시작할 것이다.

 

범죄자요. 단지 세상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말이지.

 

누군가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느끼고, 그것도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말한다면 화자는 분명 사회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인간의 실존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증거이다. <자동화된 불평등> 읽고 빈곤 대한 나의 생각이 좀더 구체화되었다. ‘빈곤 막연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며, 소수의 불행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탈은 더더욱 아니다. 빈곤은 우리 사회에 반드시존재하는 장치이자 사회구조라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빈곤 기본적으로 인간이 거대한 집단을 이루고 생활해나가야하는 이상 인간이 개발한 발명품이 아닐까. 인간이 부족을 이루어 사냥과 채집을 공동분배를 하던 소규모 공동체에서 빈곤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농경 생활이 시작되고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면서 공동생산-공동분배하던 공동체는 기존의 소규모 집단으로부터 분기되어 새로운 사회의 구심점과 구성원의 역할이 필요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빈곤 애초에 지배층의 사회구속력을 만들어내고 사회를 통제하기 위한 장치라고 있다.

 

<자동화된 불평등> 저자 버지니아 유뱅크스는 책에서 1662 보스턴에서 세워진 미국 최초의 구빈원으로부터 공공부조의 역사를 언급한다. 그러나 책의 주요 관심은 기술혁명 이후 급속하게 발달한 인간의 도구들, 컴퓨터의 발달과 소프트웨어, 방대한 데이터 처리 기술과 알고리즘의 구현까지 결합된 첨단기술이 빈곤에 어떻게 대처하고, 공공부조의 성격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어떻게 심화시켰는지를 보다 깊숙이 들여다보는데 있다. 공공부조는 기본적으로 구성원에 대한 지원을 목적으로 하지만 구성원이 누구인지 알려주어야하는 개인정보 노출 공유에 대한 동의를 전제한다. 공공부조는 지원 조사라는 공통적인 틀을 갖추고 있다. 전통적인 구빈원이 그러했고, 현대의 디지털 구빈원이 그러하다. 문제는 저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디지털 구빈원이 인간의 실존적인 위기를 더욱 공고히 만든다는데에 있다. 결과 빈곤이라는 이유만으로 개인의 인권과 평등이 침해받을 있다는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책에서 저자는 인간의 조건 위기에 처해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미국 근현대 시기의 공공부조 형성 배경 역사적 맥락

 

저자는 주로 미국 사회의 공공부조 전통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근현대 시기 미국 사회의 배경을 이해한다면 오늘날 첨단기술과 접목된 여러 공공부조의 모습을 살피는데 유용할 것이다. 아울러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공공부조의 양상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미국 최초의 공공부조 형태로서 탄생한 구빈원은 1600년대 중반 이후로 점차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국가가 나서서 빈곤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가난한 이들을 공공 기관에 귀속시키는 방식은 1820년대 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분명 산업혁명의 여파로 효율성 향상를 위해 기계가 인간을 대신한다는 공포는 오늘날 인공지능이 인간을 많은 산업영역에서 대체하고 심지어는 인류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공포보다 작지는 않을 것이다. 국가는 이미 이런 대중의 공포심과 사회 구조의 중심인 중산층의 두려움(실업과 빈곤층이 되는 두려움)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사회에 도입, 정착 시켰다. 우리는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에 대해 많이 알고있지만, 1800년대에도 여러 차례 대공황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게되었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 해양봉쇄 정책을 계기로 발발한 영국과 미국의 1812 전쟁 이후, 미국 토지 관련된 과도한 부동산 대출과 자본 투기 그리고 대출 규제가 이어지면서 미국의 은행이 파산하고, 기업들은 도산하였으며, 자유민 성인 남성의 4분의 일에 해당하는 50만명이 실직한 사례가 있다. 나아가 번의 19세기 미국 대공황은 1873 과잉 철도 투자로 인한 시장 왜곡으로 발생하였다. 특히 서부로 나아가려는 수요, 철도 건설 사업이 붐을 이룬 이유는 1820년대 서부에서 금이 발견된 사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19세기 중반 부터 1920년대 까지 이어졌던 고아열차 미국사회의 철도라는 사회기반구조를 통해 고아와 집없는 취약 계층 아이들을 동부 도시로부터 중서부의 농촌 지역 가정에 위탁하던 형태의 공공부조 사업이었다.

 

사회가 대공황을 겪고나면 취약한 계층이 늘어나고, 빈민이 증가하기 마련이다. 국가 주도 하에 통제의 성격을 갖는 미국 근현대 시기 공공부조에 대한 이해는 디지털 구빈원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국가는 사회의 불안계층인 빈곤층을 통제하기 위하여 다른 타개책을 고안해 내었다. 이것이 바로 자선이다. 특히 과학적 자선 운동 이를 주도한 사회 엘리트층은 다윈 진화론의 왜곡된 형태인 우생학 영향을 크게 받았다. 우생학은 과학에대한 맹목적인 신뢰와 인간의 편견이 결부되는 과정에서 변질되어 인간의 삶을 위협하게 되었다. 우생학의 기본적인 논리는 자격을 갖춘 빈민과 그렇지 못한 빈민이 유전적 차이 있다는 믿음이다. 논리가 미국적 맥락에에서 백인 우월주의와 접목이 되면서 특히 1880년대 미국사회를 휩쓸게 되었다. 20세기 초에는 우생학이 인종적인 편견과 결부되면서 미국의 엘리트 계층이 가난한 노동자 계층 6 여명에 대한 강제 불임시술을 주도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우생학 연구를 통해 미국 최초의 빈민 데이터베이스가 만들어진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00년대 미국사회는 공공부조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20세기 미국 공공부조의 틀을 형성한 시기로 있다.  한편 미국 근대에서 나타난 구빈원의 전통은 자본가와 지배층의 이익극대화라는 욕망에 희생된 계층에 대해 이들이 갖는 불안감을 일소시키기 위한 통제 장치로 이해해볼 있다.  

 

공공부조의 관점에서 20세기는 근대의 틀을 이어받으면서도 좀더 다른 자각이 사람들 사이에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4 대공황 타개책으로 추진된 뉴딜 정책으로 빈민 구제 제도가 개개인의 도덕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저자의 평가대로 뉴딜 정책의 결과 사회보험과 공적부조가 구분됨으로서 경제 불평등의 씨앗을 뿌리고, 백인 우월주의에 굴복했으며, 빈곤층과 노동자 계층의 갈등을 조장하였으며, 여성의 노동을 평가 절하 측면이 있다. 또한 루즈벨트는 보편적 복지 혜택 프로그램이라는 개념을 폐기하여 과학적 자선의 조사와 감시, 견제를 부활하는 계기를 만들었는데, 공공부조의 기본 형식인 지원 조사라는 구도는  다시 미국 사회로 부활되어 힘을 얻게 된다. 반면 1960년대에 전미복지권단체의 탄생으로 강력한 복지권 운동이 등장하게 되면서 복지 혜택의 개념을 복지 혜택은 수급자의 개인 재산이라고 재정의를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부양아동 가정지원의 확대에 대한 백인 중산층의 반감과 1973 1 석유 파동의 영향으로 불어닥친 경제 불황으로 1976년에는 디지털 구빈원 결국 탄생하게 되었다. 나아가 컴퓨터의 보급으로 공공부조를 받는 가정에 대한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수집, 저장, 분석할 있게 되었다. 이로서 디지털 구빈원은 1960년대 기반이 갖추어진 복지권 운동의 성공적인 결과와 복지 혜택에 대한 재정의를 70년대에 뒤집어 놓았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1996 제정된 개인의 책임 노동 기회의 조화를 위한 으로 미국사회는 이른바 복지의 종언 맞이하였고, 1996년에서 2006 사이 거의 850만명의 수혜자가 복지 명부에서 제외되었다. 저자는첨단기술과 도구의 결합으로 수혜 대상자 개개인에 대한 사생활 침해와 감시 추적이 강화되고 가혹한 기준을 요구하며 엄격한 처벌을 낳게 되었다고 경고한다.

 


 

전통적 구빈원과 디지털 구빈원의 유사점과 차이점

 

저자에 따르면 전통적 구빈원과 디지털 구빈원은 모두 공적 혜택으로부터 빈민들의 주의를 돌리고, 이들의 노동을 강제하며, 가족을 해체하고, 정치적 권리를 상실하게 한다. 또한 가난한 이들의 생존을 불법화하는 측면이 있고, 실험 대상으로 이용하기도하며, 중산층과 구분하는 윤리적 거리를 만들어내며, 심지어는 인종차별적이고 계급차별적인 위계를 재생산한다’(282)라고 지적한다. 아울러 전통적 구빈원은 산업적 실업에 대한 중산층의 두려움 대응하며, 디지털 구빈원은 전문직 중산층의 추락에 대한 두려움 대응한다고 하였다. 다시말하면 공공부조의 존재는 공교롭게도 중산층의 필요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으로도 있다. 사회지도층은 사회 구속력을 획득하기 위해 중산층의 두려움 이용하여 빈민을 통제할 명분을 얻은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빈곤이란 개념이 사회지도층을 위해 고안된 그들의 발명품이라는 생각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도출된 것이다.

 

물론 전통적 구빈원과 디지털 구빈원에 두드러지는 차이점 또한 존재한다. 전통적 구빈원에는 하나의 시설에 다양한 인종, , 출신국을 넘어 함께 수용함으로써 계층 결속의 결과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다만 제한된 시설과 사회 자본의 제한으로 규모가 확대되는 것에는 한계가 필연적이었다. 반면 디지털 구빈원은 감시와 알고리즘에 의한 사회적 분류 과정으로 기존의 공동체 구성원을 개개인으로 해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다시말하면 디지털 구빈원은 빈곤층의 연대를 약화하고, 이들이 다양한 공격과 통제의 대상이 되는 것을 방치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디지털 구빈원의 성격은 전통적인 구빈원 보다는 공적인 빈민 구제 방식에 대항하여 등장한 과학적 자선 운동 계보를 잇는 것으로 있을 것이다. 과학적 자선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는 우생학 연구와 결합하여 최초의 빈민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낸 강제불임 시술에서 있다. 나아가 디지털 구빈원이 전통적인 구빈원과 달리 새롭게 갖게된 중요한 특징은 첨단기술 도구의 발달과 함께 소프트웨어, 알고리즘, 예측 모형이 결합하여 보다 은밀한 속성을 띄며 보다 영속적이라는데 있다. 한편 감시라는 관점에서 구분되는 차이점도 존재한다. 전통적인 구빈원에서 보이는 아날로그 방식의 감시 시스템은 감시 대상을 먼저 선별하여 추적한다. 반면 디지털 감시 시스템은 감시 대상을 방대한 양의 빅데이터로부터 알고리즘이 제시한 기준에 근거하여 선별한다. ‘감시표적 특정 기준에 의해 걸러낸다는 의미다. 결과적으로 디지털 감시 시스템은 가난한 사람들을 추적하는 빈곤 프로파일링으로 본질을 이해할 있다. 빈곤 프로파일링은 개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개인의 조건, 가난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가난한 개인을 추가 조사 대상으로 포함시킬 있다.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범죄자로 표현한 노숙인 게리의 자조적이고 상실감이 담긴 진술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세상이 만들어낸 무형의 감옥 그리고 고립과 추방

 

빈곤 관리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경제 불안에 대한 국가의 두려움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혐오에 의해 만들어지고, 차례로 빈곤의 정치학과 빈곤에 대한 경험을 형성한다.”(27)

 

저자는 빅테이터 활용기술과 알고리즘과 같은 기술-도구는 중립적이지 않다고 말하고 있으나 오히려 기술과 도구 자체는 자체로 의지가 없으므로 중립적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기술은 두려움과 혐오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기술 도구들을 적용하는 주체가 누구이냐에 따라 양날의 칼로 기능할 있을 것이다. 다만 수학자이자 테이터과학자로 알고리즘을 개발했던 캐시 오닐의 견해를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캐시는 내부고발자로서 역할을 자신의 책에서 (수학적) 모형들은 수학에 깊이 뿌리내린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있다.”(<대량살상 수학무기>, 45)라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알고리즘 개발에는 모형을 만든이의 우선 순위에 대한 가치 판단 선입관 반영된다는 태생적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아가 이러한 모형을 적용하는 단계에서 차례 인간의 의도에 따라 상이한 결과를 낳게 것이다.

 

결국 이렇게 인간의 선입관, 편견이 결부된 모형들을 통해 주요한 감시 표적이 되는 대상은 어김없이 빈곤층이다. 가난한 이들은 디지털 통제 시스템의 감시에 투명하게노출되어 있다. 이는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설계했던 원형감옥(파놉티콘) 역할을 디지털 알고리즘이 대신하는 형국으로 있다. 바로 감시자는 방대한 개개인의 데이터를 있으며, 심지어는 개개인들을 지속적으로 추적할 있다. 이는 디지털 세계가 만들어낸 무형의 감옥(디지털 파놉티콘)이라 있다. 알고리즘에 기반한 공공부조 시스템은 디지털 파놉티콘으로서 가난한 계층에 대한 감시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분류과정이 더해 공동체로부터 고립 추방이라는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다. 알고리즘에 의한 예측 모형으로 어느 가정을 고위험가정으로 분류한다면, 가정은 서비스, 지원, 공동체 등을 제공하는 네트워크로부터 물러나게 만들 있다. 이것은 첨단 디지털 시대에 사회 구성원에 대한 추방행위 이면서 새로운 형태의 정치·사회적 격리를 낳게 된다는 말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홀로 살아갈 없는 존재임을 안다면, 정치·사회적 배제 기작(고립 추방) 기본적으로 인간의 삶에 결정적인 위협을 안겨주는 행위다.  

 

인디애나주에서 시행된 공공부조 프로그램의 적용사례를 살펴보자. 사례는 기존에 수혜 자격 판정을 사람이 진행했던 것을 알고리즘을 통해 자동화한 인디애나주 주민들이 겪어야했던 재앙을 상세히 보여준다. 특히 자동화 과정이 민영화 과정에서 예산 절감의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 나타날 있는 문제점들과 사례들을 열거한다. 자동화된 공공부조 적격성 판정 시스템은 효율성 극대화 부정 수급 차단이라는 명분으로 실행되었다는 사실도 주목해볼만하다. 한편 예측 모형이 적용된 앨러게니의 알고리즘 사례를 보면 예측 모형의 근본적 한계가 이를 적용하는 인간의 부주의와 결합하면 초래할 있는 불행한 사건들을 일깨워준다. 아동청소년가족국의 지원을 받으려면 감시가 심해지고 엄격한 행동 준수 요건이 따르는데, 아이의 부모가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부모가 지원을 받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먼저 다른 가정에 위탁해야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는 첨단기술과 사회제도가 인간의 행복을 위해 기능해야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에 모순되는 결과이다.

 

데이터과학자가 매우 성공적인 예측 모형 개발했다고 가정하자. <자동화된 불평등> 읽은 이상 우리는 진술이 의미하는 상황을 짚어보고 숙고해볼 있을 것이다. 성공적인 알고리즘의 선별 대상 개인이나 가정은 저자의 지적대로 보다 엄격한 조사와 처벌 조치의 대상이 것이다. 따라서 표적 대상 기관의 요구를 충족시켜야만 한다. 엄격한 심판관 앞에 서야 한다는 의미다. 가정의 부모가 알고리즘에 의해 정밀 조사 대상이 되고, 이들이 기관의 요구사항을 충족하지 못하게되면 아이가 부모로부터 강제 분리되어 다른 가정에 위탁될 것이다. 그러나 위험예측 모형 알고리즘은 매우 성공적인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알고리즘의 예측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하더라도 행복했던 가정이 알고리즘에 의한 법집행으로 아이가 부모로부터 강제분리 경우, 부모와 아이가 받을 스트레스와 정신적 외상은 누가 돌보아 있을까? 인디애나의 적격성 판정 프로그램처럼 일주일에 30분도 미치지 못하는 정신과 상담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개인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데는 커다란 한계가 있다. 알고리즘에 기반한 복지 제도를 적용할 , 인간의 부주의와 편견으로 아이들을 가정으로부터 자동분리시키는 기계가 되지는 않을지 미리 점검해봐야 한다. 저자의 지적대로 수학적 모형에 근거한 프로파일링은 빈곤한 가정의 양육 빈곤한 양육으로 치부하고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적 부인’ vs. ‘잊힐 권리 대해

 

앞서 빈곤은 인간 사회에 필수적인 장치이자 발명품 같다고 언급했다. 저자의 말대로 미국에는 부와 빈곤이 공존한다. 찰스 디킨스가 소설에서 묘사한 도시’, 런던과 파리에도, 조지 오웰이 몸소 체험한 파리와 런던에도 빈곤은 부와 공존하고 있었으며 나아가 빈곤은 부와 함께 지구촌 어디에나 공기처럼 퍼져있다. 그러나 실제로 대중매체의 제한적인 보도와 사회적·개인적 무관심과 외면으로 빈곤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저자는 사회학자 스탠리 코언의 용어를 빌어 사회와 구성원이 타인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기작을 문화적 부인(cultural denial)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외면 기작은 개별적이거나 심리적인 속성이 아니라 학교 교육이나 통치 체제, 각종 제도와 대중 매체 등을 통해 조직적으로 진행되는 사회 과정이라고 하였다.

 

문화적 부인 다른 사례로 이해해볼 있을지 궁금해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사례가 있다. 일본의 지식인 강상중과 우치다 타츠루가 지구촌이 당면한 문제들(난민, 테러문제 세계화 ) 대해 나눈 대담을 담은 <위험하지 않은 몰락>에서 사례를 있다. 대담에서두 지식인은 2 대전 이후의 프랑스 사회, 특히 지식인들과 사회의 과거사 외면 사례를 이야기한다. 이들에 따르면 프랑스는 2 대전 당시 비시정부 시절 나치 독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패전국이다. 여기서 패전국이라는 의미는 나치 독일과 다름없는 전범국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프랑스 비시정부는 레지스탕스 활동에 가담한 자국인들을 탄압하고, 유대인들을 나치 독일 넘긴 활동을 하였다. 문제는 프랑스 사회와 지식인들은 어느 누구 하나 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자기 반성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자마자 미군정이 들어서고 친일파 정리를 골든 타임을 놓친 것처럼, 프랑스 또한 비시 정부가 일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사회와 지식인들이 묻어둔 지금에 이르렀다. 이는 문화적 부인 적절한 사례로 생각해볼 있다. ‘문화적 부인 과거 기억을 회피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치다 타츠루는 대담에서 현대 프랑스 지성사회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를 과거의 실패와 과오를 돌아보지 않는 순간 지성은 쇠퇴한다라는 말로 정리하고 있다. 사르트르와 카뮈 이후로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잠깐 과거사를 언급한 적은 있으나 프랑스 지식인들은 문화적 부인 사례를 보여준다.

 

<자동화된 불평등>에서 저자는 문화적 부인이 가져다주는 중요한 폐해를 정치적 공동체로서 갖는 사회적 연대 의식을 약화하기라고 덧붙인다. 문화적 부인은 사회가 안고있는 문제들에 대해 공동체가 문제를 상대화하고 어려움에 직면한 이들을 타자화하는 과정의 전제가 된다. 다시말하면 사회의 문제를 나와는 무관한 치부하게 만드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말이다. 기관의 조사와 감시를 받는 빈곤층의 경우 공적 자원 수급을 거부당하거나 가족이 해체되면 삶의 기본적인 조건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빈곤층의 결속을 고려할만한 여유도 이들에게는 사치일 있다. 빈곤층과 중산층의 기본적인 삶의 조건에서도 점점 격차가 벌어질 것이다. 이는 가치 중립적인 첨단기술이 인간의 편견과 부주의로 부적절하게 적용되었을 야기하는 평등권의 침해와 불평등의 심화를 불러온다. 저자는 디지털 구빈원은 현재 소수 권력 집단의 손에 행정 권한을 집중시키고 있다. 가난한 이들을 분류하기 위한 자동화 도구를 그대로 두면 불평등을 낳을 것이다.”(306)라고 경종을 울리고 있다.   

 

문화적 부인과 관련하여 가지 주목해본다. 다시 40 여년 프랑스로 되돌아가보자. 당시 프랑스의 정보자유구가위원회가 개개인의 데이터가 공공 시스템에 무기한 저장되어서는 안된다 제안하고 확립한 잊힐권리원칙에 관해 생각해본다. 논의는 디지털 구빈원이 영구적이며 디지털 데이터가 무기한 보관되는 경우 개인 정보의 유출 위험 또한 높아질 있다는 우려에서 나왔다. 한편 사람의 과거가 전적으로 그의 미래를 제한해서는 된다 전제에서 나왔는데, 잊힐권리 나타난 배경을 <위험하지 않은 몰락> 언급된 현대 프랑스 사회의 정황과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2 세계대전 프랑스 비시정부에 협력하여 일했던 프랑스 공직자들(정치인, 경찰, 군인 포함) 자신들의 과거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잊힐권리라는 우아한 원칙을 일찍이 확립한 것은 아닐까. 그들은 전후 어디로 갔을까? 물론 나의 추측이긴 하지만 불가능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프랑스 비시 정부에 협력했던 공직자들은 나치 세력과 유사하게 남미를 비롯한 세계로 피신했다는 기록도 보이지만, 해방된 프랑스에서 이들과 자손들이 살아가기에 사회에 남아있을 개인에 대한 기록은 껄끄럽게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잊힐권리 일견 납득할만하고 중요한 원리를 기반으로 하지만 잊힐권리 해당하는 대상이 분명 프랑스의 빈곤층 아닐 것이다. 버지니아 유뱅크스가 지적하는 미국의 사례만 보더라도 잊힐권리 빈곤층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빈곤층은 애초에 국가에 의해 잊혀진 존재이나 감시망에 붙들려 있을 뿐이다. 아니 빈곤층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디지털망에 불들려 절대 삭제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캐시 오닐이 <대량살상 수학무기>에서 수학 모형은 본질적으로 과거와 기존 패턴들이 반복될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을 둔다라고 지적하듯, 이런 맥락에서 알고리즘에 기반한 디지털 구빈원은 우리, 특히 빈곤층을 과거의 패턴 속에 가두게 된다. 나는 프랑스 사회에서 논의된 잊힐권리 대한 논의는 맛이 프랑스 지식인들의 외면 속에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싶은 프랑스 지도층의 수작이며 허구라고 본다.

 

아래는 불평등 구조를 공고하게 하는 디지털 구빈원을 거미줄로 설명한 훌륭한 은유다.

 

디지털 구빙원을 시선(視線)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집이라고 생각해 보라. 거미줄은 마이크, 카메라, 지문 인식기, GPS추적기, 경보용 철망 , 수정 구슬 역할을 한다. 어떤 거미줄 가닥은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다. 이들은 서로 연결되어 페타바이트(100 기가바이트) 단위의 데이터를 이동시키는 망을 만든다. 우리의 움직임이 망을 흔들어 놓아 우리의 위치와 방향을 노출시킨다. 이들 필라멘트는 스위치가 켜지거나 꺼질 있다. 거미줄들은 역사를 거스러 올라가고 미래로 나아간다. 이들은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관된 망에 우리를 연결한다. 우리의 사회경제 등급이 내려갈수록, 가닥들은 빽빽이 짜이고, 많은 가닥들에 스위치가 켜진다. ”(290)

 


【나가며 땅의 모든 소피 기억하기 위해

 

새로운 첨단 기술도구는 보다 정밀한 평가와 추적, 나은 정보의 공유, 표적 집단의 가시성 증대를 가능하게 한다. (…) 현재 복지 제도에서는 자동화된 의사 결정이 오래된 본능적인 형태의 처벌 통제와 아주 비슷하게 작용한다. 그것은 걸러내고 견제한다. 그것은 조력자가 아니라 문지기이다.”(131)

 

디지털 구빈원은 최전선에 있는 사회복지사의 때로 편향된 결정을, 첨단 기술 도구의 합리적인 차별로 대체한다. (…) 권력 집단의 계층차별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수학으로 세탁하는 것이다.”(295)

 

책에서 저자는 다양한 공공부조의 형태를 조사하고, 데이터과학자 고통을 겪었던 빈곤층과 폭넓은 인터뷰 자료 조사를 통해 디지털 구빈원의 본질을 통찰하고 이를 책에서 여러 강조하고 있다. 저자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디지털 구빈원의 해체이다. 다만 책은 여러 종류의 디지털 구빈원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보다 집중하여 저자가 주장하는 디지털 구빈원의 해체를 위한 보다 구체적인 대안은 부족해 보인다. 저자가 제시하는 연대 필요성은 전통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 결속 수단이다. 이는 조직적으로 진행되는 사회의 문화적 부인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 행위 이기도 하다. 디지털 구빈원의 해체는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닐 것이다. 다만 저자가 당부하는 것은 거대한 임무가 아닌 우리가 불편해하는 점을 서로 이야기 하는 이다. 저자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특히 사회 구성원이 개별화, 원자화되어버린 현대 사회에서 구성원들을 결속시킬 있는 연대의 실마리를 어떻게 구할 있을 것인가도 만만치 않은 숙제가 것인데, 저자는 이야기 하기에서 찾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연대 이야기 하기 통해 접착력이 발생한다.   

 

저자는 디지털 구빈원 해체를 위한 구체적인 대안보다는 개개인의 보다 근본적인 인식 변화를 촉구한다. 어쩌면 이것이 현명하고 현실적인 방법일지 모른다. 특히 앞서 이해해 바와 같이 전통적인 구빈원이든 디지털 구빈원이든 사회지배층은 중산층의 두려움 이용하여 빈곤층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명분을 얻는다. 따라서 보다 중요한 대안은 중산층과 빈곤층이 서로 간의 이해와 결속을 통해 연대하는 것이 같다. 저자는 그런 의미에서 중산층이 보이지 않는 디지털망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를 언급한다. 자동화된 불평등은 중산층 빈곤층 모두에게 해를 끼치며, 이를 극복하는 것이 서로에게 모두 이익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거시적으로는 디지털 구빈원의 존재가 국가가 보장하는 기본 가치인 자유, 평등, 통합의 가치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의 역할이 축소되고 기업의 역할이 극대화된 현대 금융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더욱 위협적이다. 중산층이 보수화되는 것은 이들의 두려움을 이용한 지배층의 정치공학 결과일 수도, 사회 지식인들과 중산층의 문화적 부인 수도 있다. 공동체에서 살면서 불평등으로 배제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갖고 공감하는 노력이라도 하는 것이 중요한 시민의 책무가 같다.

 

문득 책의 페이지를 보고 소피에게라는 저자의 헌정사를 발견한다. 아마도 소피는 책에서 메디케이드 혜택의 수혜가 거부되었다가 회복한 스타이피즈 가족의 딸일 것이다. 소피는 저자와의 마지막 인터뷰를 끝낸 8 심장마비로 사망한 소녀이다. 사회에 존재하는 불편함과 우리 삶을 위협하는 조건들에 보다 민감하게 관심을 갖고 이야기하는 것이 다른 소피를 행복하고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 맞이하는 출발점이 같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없는 존재다. 인간의 편견과 부주의로 마련된 기준으로 누군가 공동체로부터 배제가 된다면 구성원은 곧바로 실존적인 위기에 직면한다. 다른 소피 나오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외면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억하는 일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도움이 것이다.

 

책을 덮는데 문득 저자가 인터뷰를 했던 젊은 엄마와의 대화가 다시 떠오른다.

 

사람들(개별사회복지사) 대단해요. 그걸 (사회복지사업) 이외에 추적 장치로도 이용해요. (…) 우리한테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좋을 거에요. 다음은 당신들 차례니까.”(27)     

 

그녀는 생활보호대상자였으며, 디지털 구빈원의 도움과 감시를 동시에 받았다. 우리 사회가 다른 소피 잃지 않기 위해 우리 모두가 기억해둘만한 경고다




#네이버원탁의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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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생태계에서 살아가는 지구인의 자화상 <위험하지 않은 몰락>

위험하지 않은 몰락: 불안과 화해의 시대론

(원제: 세계최종전쟁론 )

강상중·우치다 타츠루 대담 | 노수경 옮김 |  [사계절]

 

 

 

일본의 사상가 강상중과 우치다 타츠루가 처음 만나 지구라는 우주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그리고 우리 시대에 관하여 대화를 나눈다. 현재 지구라는 우주 속의 미세한 지구에서 벌어지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이 <위험하지 않은 몰락> 관심사이다. 예컨대, 지구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난민 문제나 테러리즘,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가는 세계의 우경화 양상 등을 있다. 지구인들이 우주선이라는 배를 공동 운명체라고 한다면, 특히 유례없이 서로가 연결되어 있는 우리 지구인들은 사상가의 대화에서 주목하는 모든 문제들과 우리 삶이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테러/우리가 모르는 프랑스]

 

요즈음은 국제 여행이 과거 보다 많이 수월해졌다. 교통기관의 발달 뿐만 아니라 외국을 나갈 기회도 많아지고, 여행지에 대한 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유럽은 많은 이들이 번쯤 가보기를 꿈꾸는 곳이기도 한데, 특히 프랑스는 가보고 싶은 유럽 나라에서도 단연 높은 순위를 차지할 같다. 하지만 <위험하지 않은 몰락>에서는 안타깝게도 2015 11 프랑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테러 사건부터 시작한다. 그러면 도대체 ? 우리는 궁금해진다. 인류문화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온 프랑스에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테러가 발생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강상중과 우치다는 어쩌면 필연적인 테러 사건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진실을 알려준다.

 

 

2015 당시 프랑스의 테러 사건은 일련의 무슬림 프랑스인 의해 발생한 사건이었다. 역시 의문이 든다. 도대체 프랑스인이 자국의 국민을 테러하는가라고. 우치다와 강상중 선생에 의하면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독특한 역할을 해왔다. 다름아니라 프랑스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중동에 군사 개입을 나라들이다(27)’라는 사실. 나아가 프랑스에는 인구의 10% 달하는 500 명의 프랑스인 무슬림 있는데, 이슬람 이민자를 비롯하여,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이들마저 뿌리 깊고 아주 단단한 차별정책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무슬림이라는 이유만으로 500만명의 프랑스인이 자국의 커뮤니티에 통합되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담자들은 이번 프랑스 테러의 성격을 예견된 사태라고 말한다. 특히 미국에서 일어난 9.11사건(2001) 비교해보면, 9.11사건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인데 반해, 프랑스의 테러는 사회에서 나고 자란 홈그라운드 테러리스트 의한 내파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다.  

 

 

한편 대담자의 대화를 통해 프랑스의 다른 면을 새롭게 보게 되었는데, 이들은 프랑스가 2 세계대전의 패전국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패전국이라함은 당시 나치 독일 유대인에 대한 인종멸절프로그램에 결과적으로 협력한 사실상의 전범국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강상중과 우치다가 지적하는 프랑스의 중죄는 패전국으로서 자아비판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특히나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하지 않으면 사회가 병들어 가기 시작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우리 나라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며 영토를 지배했던 외부의 세력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넘어갔음에도, 도망갔던 친일파 세력이 다시 돌아와 대한민국의 지도층이 되고 중심세력이 되었던 사례를 떠올려본다. 새로운 나라의 주인이 친일파 세력들이 일제 강점기 시대의 친일파를 찾아 벌을 줄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프랑스도 일면 비슷한 사례가 것이다. 비시정부에 적극 협력한 세력들, 레지스탕스를 잡아다가 독일에 넘긴 이들이 해방을 맞고 나서도 면면이 이어지는 극우세력을 구성했으리라 예상할 있다. 특히나 프랑스의 극우세력은 근본적으로 인종차별적이기까지 하다. 아무리 우리가 문화의 나라라고 부르는 프랑스도 자체적으로 지식인들의 반성이 없다면 우치다가 이야기하듯 지성은 곧바로 쇠퇴하기 시작함을 보여준다. 프랑스는 미국과도 같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자기분열적인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 다른 지구적 문제 난민 그리고 전쟁]

 

우리도 최근 제주도에서 임시 난민을 받아들일 것인가하는 문제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였다. 곳에서만 벌이지고 있는 현상인줄로만 알았는데, 우리도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실감했던 사례다. 우치다는 난민은 국가가 거절하고 말고 문제가 아닙니다. 난민이란 미국과 유럽이 주도한 글로벌화의 귀결이기 때문입니다.”(86)라고 명료하게 정리한다. 급격히 가속화된 세계화 과정에서 국가가 맡았던 부의 재분배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써 양극화가 심화되었고, 빈곤층은 이민자와 난민이되어 유동하기 시작하였다. 난민의 발생 또한 후기 자본주의의 심각한 병폐현상이라고 이해할 있게 되었다. 이로서 난민과 테러의 문제는 자본주의가 초래한 부작용으로 있다.

 

 

이러한 난민과 테러의 관계와 더불어 자본주의와 전쟁의 문제를 연결지을 있다. 자본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들이 생산해내는 물건을 있는 시장의 존재이다. 일반 생활용품을 무한정 만들어도 소비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수요가 있지 않게 되면 잉여 제품의 축적만 생겨난다는 말이다. 자본가들에게 이러한 패턴을 깨버릴 있는 품목이 있으니 무기 것이다. “무기는 절대로 포화되지 않는 시장을 가진 꿈의 ”(111)이라는 말이다.  자본가들이 영원한 시장을 개척할 있는 확실한 분야는 무기 산업 되며, 이를 위해 자본가들은 전쟁이라는 수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특히 1990년대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된 이후 세계는 사실상 자본주의로 이루어진 지구촌이 되었다. 냉전 구도가 사라진 지구촌에서 자본가들에게 시장 확보를 위한 타개책은 전쟁에 있었다. 우리 시대의 자본가들은 자본주의 세계의 '시바신'(흰두교 파괴의 )이라 할만 하다. 앞서 말한 프랑스와 미국이 중동에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고 폭격과 같은 군사 작전에 개입한 이유를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해볼 있다. 결국 우리가 흔히 금융자본주의로 일컫는 지구촌 생태계에서 전쟁은 없어지리라 기대하긴 힘들다. 우치다는 전쟁을 근절하기 위한 최종 전쟁이란 세상에 인간이 살아가는 불가능한 일입니다.”(106)라고까지 말한다. 아울러 그는 전쟁을 없애는 원리의 문제보다 사망자수를 줄일 있는 보다 현실적인 정도의 문제 관심을 갖고 궁리를 해야한다고 조언한다. 제한적이지만 당장은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 노력을 기울여야 같다.

 

 

 

[일본의 경우 - 싱가포르화]

 

우치다와 강상중은 다시 자국의 상황으로 화제를 옮긴다. 일본 사회가 싱가포르화되어 간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들은 싱가포르 사회를 파놉티콘 같은 도시 국가로 묘사한다. 파놉티콘은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제안한 일종의 원형 감옥으로서, 수감자가 있는 감옥의 중심은 밝고 사방으로 노출되어 있어 간수가 주변의 어두운 곳에서 수감자를 지켜볼 있는 감옥을 말한다. 간수가 수감자를 지켜보고 있지 않아도, 수감자는 간수가 언제든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심리적 압박감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효과가 파놉티콘이 의도한 결과일 것이다. 따라서 대담자는 싱가포르가 나라 전체를 통해 보이지 않는 감시망이 펼쳐있으며 정부의 활동에 비판적인 언론과 미디어를 통제하거나 없애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진단한다. 다만 일본이 싱가포르와 다른 하나는 풍부한 천연자원과 풍요로운 산하를 가졌다는 점이다. 싱가포르는 천연자원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따라서 일본 정부가 국민을 통제할 있는 여지가 현재로서는 제한적이라는 의미가 된다. 반면 싱가포르는 일본의 젊은이들처럼 자본주의의 폭주 맞서서 느린 경제 일구어내는 대안적인 시골의 삶을 구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현재 일본 정부는 자국을 이렇게 싱가포르화 되는 양상으로 변화시켜 가고 있다고 대담자는 비판한다. 비즈니스를 위해 국토를 개발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한국과 마찬가지로 국민을 도시의 삶에 의존하도록 만들어간다. 결국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문제도 도쿄와 같은 대도시에 전력을 지원하기 위해 향토를 개발하였던 것인데, 원전 사고를 통해 수많은 국민의 생활 터전과 국토를 상실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고향을 떠나야 했던 수많은 거주민들은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 난민 되어 버렸다. 사례는 전쟁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난민을 만들어내는 다른 방식으로도 이해될 있다.

 

 

 

[우리가 있는 일은?]

 

<위험하지 않은 몰락>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지구라는 우주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양상들을 짚어주고 있다.

강상중과 우치다가 직접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대담 속에서 유목민을 이야기한 부분을 떠올려본다. 항상 유동하는 삶을 살아가는 유목민에게 생존의 기회를 높일 있는 행동양식 내지는 도덕율이라면 희사의 문화 환대의 문화라고 있다. 개인의 이기적인 행동은 자신의 생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자신이 안전한 상태에 있을 타인을 환대하고, 나누는 이타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이 유사한 상황에서 이와 대등한 생존 조건을 확보할 있다는 기대를 있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도 자신의 천막에 찾아온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유목민들에게는 일종의 문화적 유전자로 남게되었을 것이다.

 

 

대담자가 주목하는 다른 자세로서, 불안한 현대사회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호인정 배려 모습이다.

한쪽이 옳고 나머지는 틀렸다 아니라 각각이 로컬한 가치관이자 고유의 민속지적 습관일 뿐이라는 점을 서로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253)  

다시 말하면 내가 옳다면 상대방도 옳을 있다 점을 인정하는 태도가 차이를 가져올 있다. 여기서 우치다는 실은 내가 옳거든이라고 생각해도 그걸 밖으로 꺼내지 않는 일종의 자기 억제 필요하다.”(253)라고 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이를 다르게 이야기하여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바꾸어 말해보고 싶다. 이러한 태도는 책의 후반에서 이야기하는 약자를 위한 건축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근대의 건축물은 약한 개체 고려한 반면, 현대의 건축물은 사람을 긴장 또는 흥분시키고 전투력을 높여 최고의 효율성을 추구하는데 모든 노력이 집중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결국 현대의 건축물은 사람을 포용하고 보듬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습관(최고의 효율성 추구) 매몰된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위험하지 않은 몰락>  일본의 사상가가 나눈 대담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책을 읽기에는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중요한 주제를 많이 언급하고 있다. 내가 모르고 있던 프랑스의 이면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자본주의라는 맥락 아래에서 서로 연관짓고 틀에서 이해할 있게 해주었다. ‘무기 산업 자본주의의 상징이 되었는지, 그리고 냉전 이후 일어나는 전쟁의 필요는 어디에서 오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성장 내지는 이익 추구만을 위한 자본주의는 결과로서 난민과 테러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배웠다.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자 우리는 배를 지구인이라는 생각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있는 일을 알고 있다. 다만 우리가 보고도 못본체하거나, 지금은 애써 실행으로 옮기지 않을 뿐이다. 혼자 살아갈 없는 존재인 인간으로서 우리는 타인에 대한 배려 환대 태도를 실천하는 것이 불안하고 잔혹한 시대에서 생존을 보장받을 있는 길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목민이었고, 언제든 새로운 형태의 유목민(난민) 있기 때문이다. 이를 기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같다.  

 

 

 

 

 

 

 

 

 

 

 

 

[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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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한 서양화 감상법 안내 <단숨에 읽는 그림 보는 법>

단숨에 읽는 그림 보는

(원제:  Art Essentials: Looking at Pictures )

수잔 우드포드(Susan Woodford) 지음 | 이상미 옮김 |  [시그마북스]

 

 

 

2018-2019 (?) 걸쳐 만나게 <단숨에 읽는 그림 보는 > 미술 감상에 관한 안내서이다. 나는 학창시절 미술성적이 좋지 못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미술과 상당한 거리를 지내왔었다. 그나마 미술관에 기회가 되면 미술 감상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은 그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궁금했다. 오늘 만난 책은 그림 문외한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흥미롭게 그림을 감상할 있도록 안내해주는 책이다.

 

 

우선 미술-그림은 시각 예술이므로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기호라고 있는 문자-언어라는 텍스트와는 다소 다르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문자는 세부적으로 약속된 기호를 통해 우리에게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의미를 지정해주지만, 그림에 드러나는 시각 이미지들은 간접적이고 추상적으로 의미들을 제시한다. 예술사를 가르치며 예술에 대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 저자 수전 우드포드는 미술 감상 초보자들에게 간결하고 핵심적인 그림 감상법을 안내한다. 특히 현대 미술에 대한 감상법보다는 고전 근대 미술에 대한 그림 감상법에 초점을 맞추어 감상 초보자들에게 흥미로운 미술 감상 방법을 마련해두었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롭게 주목했던 부분은 저자가 끊임없이 여러 관점에서 그림들을 비교 분석하는 점이었다. 특히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의 그림 스타일을 여러 그림을 통해 비교하는 부분이 인상깊었다. 부분은 책의 후반에 나오는 형식분석 통해 서로 다른 양식 사이의 차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느끼며 이해할 있었다.

 

 

예를들어 라파엘로 산치오의 그림 <성인들과 함께 왕좌에 앉아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콜로나 제단화)>(136) <아테네 학당>(141 ) 조반니 벨리니의 그림 <레오나르도 로레단 총독>(142)에서 확인할 있는 르네상스 양식의 특징 하나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르게 분산된 르네상스 그림의 광선은 구성 요소를 분리해주기 때문에 개별 부분의 다수성이 서로 균형을 이룰 있다. (…) 느슨한 광선은 또렷한 윤곽선을 만들고, 조각 같은 모델링은 요소를 분리하고 국부적 색채들은 뚜렷하게 만든다.”(140)

 

 

그림 감상 초보자의 말로 다시 표현해보자면 르네상스 그림 양식에서 빛은 비교적 고르게 그림 속의 개별 요소(정물/인물) 비추어주기 때문에 구성요소의 윤곽선이 분명하게 드러나며, 심지어 조각과도 같은 느낌, 그림 전체적으로는 다소 안정적이면서 정적인 느낌을 전달해준다는 것이다.

 

 

반면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 < 프란치스코와 함께 있는 성가족>(138), 렘브란트 레인의 그림 <야경(프란스 반닝 코크 대위의 민병대)>(141 아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그림 <자수 놓는 여인>(143)에서 발견할 있는, 르네상스 그림 양식과는 다른 바로크 양식만의 특징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바로크 그림의 경우 강력한 비직선 광선은 형상들을 혼합하고 국부적 색채들을 조정할 뿐만 아니라 표면을 가로지르면서 깊숙한 곳으로 후퇴하는 대각선의 연속적 성격에서 나오는 통일성을 부각한다.”(140)

 

 

다시 나의 언어로 이해를 해보자면, 바로크 그림의 경우 그림 속의 대상에 비춰지는 빛이 인물 등의 요소에 고르지 않고 특정 대상에서 밝기가 분명히 차이가 그림 속의 요소들이 배경과의 구분이 명백하게 나타나지 않다는 점이다.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혼재하므로 평면 상의 그림에 깊이감을 준다는 것이다. 아울러 국부적으로 비추는 빛이 동일한 색에 비춰지더라도 색채의 느낌이 부분에 따라 크게 다를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크 그림 양식의 특징 하나는 그림 요소들로 드러나는 분명한 대각선의 구성적 요소로 인해 르네상스 양식처럼 정적인 느낌이 아니라 매우 역동적인 움직임의 요소를 주고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림에 대해 저자는 보다 자세히 설명할 있는 여지는 많겠지만 보다 간결하게 설명을 마무리했을 것이다. 다만 책에 설명되어 있는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의 그림들을 비교하며 설명한 대목만 보더라도, 그림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작업에 그림들 사이를 비교하며 파악하는 일이 얼마나 강력한 감상법이 있는지 분명히 보여주었다.

 

 

 

가지 저자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그림 감상에 도움이 되는 배경 지식으로는 성경에 대한 이해, 기독교 문화에 대한 이해라고 있을 것같다. 나아가 고대 그리스-로마의 신화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더욱 이해의 폭을 넓힐 있으리라는 점이다. 저자가 예를 그림들 중에는 기독교를 배경으로 그림이 매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일화를 재현한 그림, 십자가형을 당하는 예수의 모습, ‘최후의 만찬 모티브로 그린 여러 점의 그림들, ‘오병이어 기적이나 수태고지 기반으로한 여러 그림들 풍부한 예시는 모두 서양의 기독교 문명에 대한 이해가 서양화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교양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비너스와 아도니스에 얽힌 그리스 로마 신화의 장면이나 마르스와 비너스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들은 그리스-로마 신화 또한 고전 시대 그림의 주요 모티브였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현대 미술이 아닌 고전 근대 미술에 대한 이해에는 적어도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 문화에 대한 이해, 그리스-로마 신화에 대한 이해가 그림 감상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배울 있었다.

 

 

<단숨에 읽는 그림 보는 > 흥미롭게 읽은 독자로서 가지 아쉬운점은 있었다. 저자가 미국인이기에 책에서 그림이라고 하면 보다 명확히는 서양화 의미하는 것이므로, 제목을 서양화 보는 이라고 옮겼으면 어땠을까하는 점이다. 우리가 그림이라고 일반적으로 서양화 암묵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관점 자세가 어떠한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같아서이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서양으로부터 유입되는 문화에 대해 우리는 서양인들의 관점을 거침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습관화되어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반성을 해보게 된다. 굳이 구분하여 동양화를 이야기할 , 동양화에도 오랜 세월을 거치며 다양한 기법이 실험되고 발전되어왔을 것이다. 동양화를 모든 그림들을 서양화를 감상하는 관점에서 이해를 시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자가 책에서 동양화를 언급한 것은 일본화가가 그린 뿐이다. 따라서 나는 책을 읽어나가면서도 우리가 그림이라할 무의식중에 서양화 떠올리게 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를 한번 환기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독서 가지 궁금해지는 점은, 저자가 장의 말미에 추가해놓은 핵심질문 있다. 과연 우리가 좋은 그림 위대한 그림 구분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저자 수전 우드포드는 호바르트 플린크의 그림 <야곱을 축복하는 이삭>(160)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며 복잡하고도 섬세하게 전해진 이야기다. 좋은 작품이지만 위대한 작품은 아니다.라고 마무리 하였다. 책을 덮으며 여전히 저자가 재차 배치해놓은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할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다만 좋다 위대하다 말은 모두 가치를 담고 있기에 매우 주관적일 있지 않을까.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 좋은 화가 위대한 화가 대한 간결한 설명을 하고 있으나 구체적이지는 않다. 저자의 설명에 좀더 덧붙이자면, 우선 좋은 그림들은 테크닉의 완성도와 화가의 의도를 충실하게 재현하여 우리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는 그림들일 것이다. 반면 위대한 그림 이러한 재능의 요소를 넘어 감상자의 정서를 새롭게 환기해주고,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적 차원을 열어주는 그림이 것이다. 다만 좋은 그림 우리가 판단하려면 그림을 그린 화가의 재능과 기술을 파악할 있는 눈이 필요할 것이다. ‘위대한 그림 알아보는 일은 우선 좋은 그림 알아볼 있다는 점이 전제가 감상자에게 영향의 정도, 감상자가 그림에 얼마나 공명을 하는지의 여부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림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애정이 우선일 것이다.

 

 

<단숨에 읽는 그림 보는 > 읽어가다 보면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과의 비교외에 신고전주의와 로코코 양식에 대한 관련성도 일부 제시되어 있으나, 저자가 해주는 그림 이야기들을 따라가다보면 이런 설명을 좀더 해주었으면 하는 상태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이런 아쉬움은 <단숨에 읽는 현대미술사> 통해 보다 폭넓게 접근하며 달랠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본다.

 

 

 

 

*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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