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트럼프의 시대, 진실과 이성의 죽음을 이야기하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미치코 가쿠타니 지음 | 김영선 옮김 | 정희진 해제 | [돌베개]

 

 

들어가며

 

과학의 목표는 점진적으로 편견을 없애는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였다. 그는 현대 물리학의 근간을 이루는 양자 역학의 정립에 큰 기여를 했다. 이 말에는 인류의 역사가 편견과 싸워온 역사이기도 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과학기술은 인간의 삶을 보다 편리하고 효율성있게 바꾸어주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인간사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해주는 것은 아니다. 아울러 과학기술 그 자체는 인류에게 유익하거나 해로운 방향 모두에 활용될 가능성을 담고 있다. 이미 인류는 20세기 중반에 원자 폭탄을 개발하여 스스로를 파멸시킬 가능성 속에서 살게 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인터넷과 모바일 통신기기가 발명되고 인간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만들어 놓았다. 전방위적인 정보의 공유와 소수자들과 같은 소외된 계층의 사회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주기도 했지만, 인간은 거짓 정보의 전세계적인 유통망을 마련해놓은 셈이기도 했다. 나아가 첨단 과학기술의 시대에 살고있는 인류에게 편견이 소멸해가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이 물음에 공감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전세계를 묶어주는 네트워크 통신수단을 통해 미국인이 아니어도 트럼프의 시대와 무관하게, 영향을 받지 않고 ‘쿨’하게 살 수는 없게 되었다.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한 마디, 트위터 피드, 그의 거짓말과 으름짱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환경에서 살고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우리의 편견은 해소되었을까? 역시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뉴욕 타임즈>에서 오랫동안 영향력있는 서평을 기고해온 서평가 미치코 가쿠타니는 자신의 평론집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이하 《진실》)에서 트럼프 시대에 스며들어온 거짓과 허위가 여전하며, 한편으로 우리는 새로운 국면에 들게 되었음을 이야기한다. 특히 트럼프는 자신의 거짓말을 첨단기술 수단과 결합하여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다. ‘독설 서평가’ 가쿠타니의 눈에 트럼프는 ‘전적으로 공감능력이 부족하고 서로 먹고 먹힌다는 세계관, 서로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고 항상 되갚아준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트럼프가 ‘세상은 끔찍하고 무자비한 곳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는 인간의 본성이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라고 보며 인간에 대한 신뢰가 희박한 사람으로 보인다. 이 책 《진실》의 표지에 ‘8’자 모양으로 자신의 꼬리를 물것만 같은 뱀이 그려져있는데, 이것은 하루에 평균 5.9개의 거짓말을 한다고 평가받은 트럼프가 끊임없이 거짓 사실의 유포와 유지를 위해 자신의 꼬리를 물듯 또 다시 거짓말을 하는 그의 처신 대한 상징같기도 하다. 혹은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고 속였던 과수원의 뱀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는 ‘트럼프 시대’로 대변되는, 진실이 소멸되어가는 시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오늘날 사실과 가짜 뉴스 사이의 경계가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주위에서 혹은 뉴스에서 종종 합리성의 여부를 따지지 않고 무언가를 믿는 이들을 보게 되는데, 이들의 신조는 신앙을 닮아있기도 하다. 이 책 《진실》에서 가쿠타니는 트럼프 시대에 그가 만들어내는 ‘가짜 뉴스’와 거짓말에 대해 기술한다. 트럼프는 국가주의,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심’에 호소하며, 이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자신의 견해에 반하는 것들을 모두 ‘악’ 또는 ‘나쁜 것’으로 규정하며 이를 배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들은 우리 사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가쿠타니가 인용하듯이 움베르토 에코가 ‘과학과 합리적 담론을 거부하며, 이견을 배신과 동일시하는 성향’이라고 묘사한 무솔리니의 초기 파시즘에 대한 특징들은 트럼프가 보여주는 여러 징후들과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합리성의 첨단을 보여주는 과학기술 시대에 어떻게 이런 광신도들의 특징처럼 보이는 불합리가 가능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인간이 지니고 있는 편견 사이에는 관련성이 극히 미약하거나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불합리한 주장 및 행위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공존하는 거대한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이런 현상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 이면에 상당히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전략이 숨어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역사가가 ‘탈진실 정치학’의 대부라고 표현한 레닌은 대중을 결집하기 위해 사회의 혼란을 이용하고, 오명을 씌울 수 있는 것에 무엇이든 공격하는 수사술 등을 활용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또 어떤가. 히틀러는 ‘지성이 아닌 감정에 호소할 것, 판에 박힌 정형화된 문구를 거듭 반복하여 사용할 것, 적을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대중에게서 본능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특유의 문구나 기호로 적에게 꼬리표를 붙일 것’등을 요구했다고 한다.

 

21세기 들어 개인과 개인은 모바일 기기를 통해 보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터넷이라는 무형의 연결망이 가져다준 새로운 삶의 조건으로 우리는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탈진실’이라는 흐름에 더욱 취약하게 노출되어버린듯 하다. 최근 많은 이들은 소셜 미디어가 만들어 유포할 수 있는 가짜 뉴스에 대해 알게 되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 러시아 해커들의 개입하여 사회의 혼란을 조장하고, 선거에 영향을 주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레닌과 무솔리니, 히틀러가 활용했던 ‘탈진실’의 전술이 소멸되어간 것이 아니라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라는 새로운 무형의 무대에서, 마치 잠복해있던 바이러스처럼 숨어있다가 다시 그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여전히 과거에 사용되던 전술이 활발히 사용되면서 말이다. 러시아 지도자 가리 카스파로프는 자신의 트위터에 현대 프로파간다의 요점은 잘못된 정보를 전하거나 어떤 의제를 밀어붙이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의 비판적 사고를 소진시키는 , 진실을 무효화는 것이기도 하다.(134면)라고 올렸다. 곧 잘못된 거짓 정보의 과도한 공급이 사실과 분석의 역할을 축소시키며, 오히려 사실로부터 우리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책의 뒷부분에서 가쿠타니는 사회비평가이자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인 닐 포스트먼의 유명한 저서 죽도록 즐기기를 언급한다. 가쿠타니는 이 책에서 사람들에게 과도한 ‘거짓’ 정보의 제공과 은폐되고 억압된 정보 상황 모두 우리에게 해로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각각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을 비교하며 제시한다. 멋진 신세계에 나오는 사람들은 ‘마약과 시시한 오락거리들로 무감각해져 최면에 걸린 삶’을 살아간다. 반면 1984에서 사람들은 ‘뉴스피크 Newspeak라고 하는 축소되고 제한된 언어를 사용하도록 강요받는다. 이 언어는 정부의 관리들이 정보를 은폐하는 등 여론과 국민의 사고를 조작하는데 사용된다. 그런데 트럼프가 보여주는 행보는 이 두 가지 세계의 모습을 모두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끊임없이 거짓말을 남발하며, 거짓 정보를 트위터로 나르는 행동에 더하여 사실과 분석에 대한 의혹을 외면하고 덮으려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합리해보이는 여건 속에서도 사람들이 이런 행동과 거짓 정보를 두둔하거나 받아들이는 이유는 사람들이 우둔해서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감정(분노, 혐오와 두려움 같은 감정들)을 이용하여 이러한 불합리를 스스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조건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치인들이 대중의 감정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비난과 분노의 대상이 될만한 희생양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이러한 수단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가쿠타니는 오스트리아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남긴 회고록 어제의 세계의 문장을 인용하고 있다.

 

이성의 원칙이 얼마나 빠르게 정반대인‘공포심과 대중정서’에 의해 무너질 있는지를 가장 끔찍하게 보여준다.(35면)

 

가쿠타니는 츠바이크가 말한 이성의 원칙에 과학, 인본주의, 진보, 자유에 대한 신념을 포함하고 있음을 밝히는데, 츠바이크가 두 번의 세계 대전을 몸소 겪으며 절실하게 체험한 진실을 간결하게 제시하고 있다.

 

 

사실을 대하는 태도와 환경의 변화 - 인간의 조건

 

저자는 트럼프 시대가 보여주는 ‘진실의 쇠퇴’, ‘진실에 대한 공격’이 미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가쿠타니는 ‘TV와 인터넷이 진실을 얼버무리는 새로운 플랫폼을 제공한다’고 전한다. 다만 TV와 다르게 인터넷은 단지 현실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즉각적으로 새로이 만들어낸다. 게다가 새로 만들어진 거짓말/억측/유언비어는 인터넷을 통한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몇 초만에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트위터로 자신과 이견을 가진 이들에 대해 비방과 조소, 거짓말을 배출해내는 트럼프가 성격에서나 습성에서나 트롤이다(149면)라고 한 가쿠타니의 표현은 간결하지만 정확해보인다. 어느 실리콘밸리 관계자도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서비스에 대해, ‘마술 같은 도구가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로 되어가고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나아가 웹(Web)의 미래에 대해서도 ‘이 시스템이 실패하고 있다’라고 진단하고 있다고 가쿠타니는 전한다. 따라서 이러한 논의는 단순히 인터넷 사용자의 ‘주의력 결핍’이라는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퇴행시키고 있다는 것, 인류는 과거와 전혀 다른 환경에 놓여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웹에 기반한 소셜미디어를 좀더 들여다보면, 더 우려할 만한 사항을 발견한다. 여기에서는 바로 ‘알고리즘’이라는 새로운 키워드를 고려해야할 것 같다. 페이스북, 트위터, 유투브 등의 소셜 미디어 플랫폼은 개별 사용자 계정을 통해 정보 개별화 알고리즘을 적용하고 있다. 나아가 구글을 비롯한 검색엔진은 기본적으로 중립적이지 않다는 점은 익히 알려져 있다. 특정 집단 혹은 국가의 방침과 다른 정보에 대해서는 사전에 정보의 흐름이 차단되기도 하며, 검색되는 정보의 유형을 제한 및 조율할 수 있음도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렇게 정보의 필터역할을 하는 웹 서비스 사용자에겐 이들의 관심사와 판단의 근거를 한층 더 제한적이고 편향적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많은 현대인들은 업무를 제외하더라도 개인 모바일기기를 통해 웹에 대개 2-3시간 이상 접속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알고리즘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된 제한되고 편향된 정보를 양분처럼 흡수하며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은 알고리즘에 의해 길들여지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우리는 알고리즘에 걸러진 편향된 정보에 의해 길들여지고 있다.

 

여기에 사람들의 분노와 원초적 감정에 호소하는 포퓰리즘 메시지가 결합하게 되면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현실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소셜 미디어를 조작하여 선거제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유권자들의 신뢰를 약화시키고 냉소적으로 변화시키는데 러시아 해커들의 역할이 있었음이 알려졌다. 가쿠타니는 이러한 러시아 트롤들의 활동은 특히 ‘기술/문화/사회적 변동의 시기에 견인력을 얻는 경향’이 있음도 지적한다. 따라서 이들은 유럽과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여러 국가 및 사회에 혼란과 분열을 조장하는 활동을 주요한 임무로 한다. 언젠가 사회의 우경화 현상이 전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여기에 러시아 트롤들의 활동이 이 현상에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저서 새로운 계급투쟁에서 지젝은 2015년 11월 13일 파리테러 사건에 대한 분석으로 책을 시작하며 유럽의 위기를 진단한다(이제 곧 이 테러 사건의 4주기가 된다). 지젝은 ‘난민과 테러의 발생 모두 기본적으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결과이며, 이 모든 문제의 기본 바탕은 계급투쟁이다’라고 언급하며,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다만 후기 자본주의의 확산으로 전세계 우경화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러시아의 해커/트롤들이 미국의 선거 개입 정황과 유럽 여러 국가에 사회 혼란과 분열을 야기하는 활동을 통해, 이것이 지구촌의 우경화 경향 확산에 보다 설득력있는 설명을 제시해준다고 생각한다. 국내 정치를 보더라도 현실 정치에 적용되는 정치공학적 수법은 러시아 트롤들의 수법과 달라보이지 않는다. 거짓 정보를 유포하고,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일 말이다. 남녀노소 각 계층에 대립과 갈등의 요소를 사회에 심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가쿠타니의 지적대로 정치인들이 시민들의 ‘분노와 원초적 감정’을 이용하기에 수월해지는 구도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분열과 혼란의 양상은 외세에 의한 것이든 내부에서 형성된 것이든 불순한 목적에 의해 의도된 것이란 의심을 제기해볼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런 환경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과 거짓을 구별하고, 정치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어떤 현상 이면에 계획되거나 의도된 의미를 해독해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만하는 상황에 내던져 있는 상황이다. 이것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조건일 것이다.

 

 

【가쿠타니의 포스트모더니즘 유감

 

해체주의에 대한 가쿠타니의 견해에 따르면, 해체주의가 모든 텍스트를 불안정하며, 독자에 의해 언제나 변경가능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객관적 진실이 존재한다고 믿는 미치코 가쿠타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모든 진실이 불완전하며, 보는 이의 관점에 달려있다’라고 보고, 이러한 입장을 비판하며, 이러한 시각에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가쿠타니는 객관적인 진실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이성과 합리성의 회복을 지지하고 있다. 가쿠타니가 바라보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특징은 자크 데리다로 대변되는 해체주의에 많이 주목하고 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의 적용 범위는 언어와 해체주의에 대한 논의보다 더 광범위해 보인다. 만약 모든 텍스트에 대한 근본적인 불확실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독자가 각각 조금씩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텍스트를 보다 분명히 하려는 시도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이러한 시도는 과연 불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오독의 빈번한 발생을 정당화하는, 혹은 오독의 발생이 근본적인 필연적 결과임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지 않을까? 저자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와 비판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 그 자체로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 속에 있다고 보인다.

 

정희진 선생의 해제에 따르면, ‘현실과 언어,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는 언어의 본질’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언어의 형식과 내용에는 언어가 근본적으로 가지는 불일치, 불확정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언어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각각의 주체는 일종의 은유적 프리즘으로서 작동한다. 그러므로 정희진 선생은 어떤 의도이건 간에 모든 사유는 오해되고 왜곡된다(197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모든 사유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리의 존재에 대한 내 입장을 고민해보니,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견해에 더 가까울 것 같다. 정희진 선생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누가 옳고 그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단 하나의 목소리에 대한 문제 제기’라고 했다. 다시 말해 모든 이에게 고정불변한 단 하나의 진실이 있다기 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인식자 개인의 사유로 인해 진실의 다원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라고 이해된다. 나는 포스트모던적인 논의의 주안점이 ‘진리의 존재 여부’에 대한 논의 보다는 ‘공정함에 대한 태도 내지 인식’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가쿠타니는 객관적 진실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정희진 선생은 ‘진실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만 이것은 사실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대신 사실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은폐하려는 시도 내지는 의도에 대한 균형감각과도 같은 인식의 태도가 요구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짜 뉴스도 진실도 유일한 목소리일 수 없다’라고 언급한 정희진 선생에 따르면,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고 이를 반복하여 주장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예컨대 <나는 부정한다 Denial>이란 영화를 떠올려본다. 이 영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이 저지른 ‘홀로코스트’, 곧 유대인 대학살이란 사실을 부정하는 어용 역사학자와 이를 저지하려는 역사학자 사이의 법정 대결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가쿠타니의 비판대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이용하는 세력들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정을 도발하고 심지어 피해자에게 사실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도 어용 역사학자가 법정에서 재판을 통해 피해자들을 변호하는 변호인들에게 ‘대학살’의 증거를 대보라고 요청하고 있다. 심지어 가해자를 옹호하는 세력들은 피해자 측이 피해를 증명해야하는 이런 상황을 즐기기도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을 불편해하고 비판하고 있음을 알지만, 어떤 관점이 달리 이용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하여 이런 관점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조금 별개의 문제라는 생각을 해본다. 예를 들면 현대 사회에서 과학기술이 이를 이용하는 인간을 소외시키고 인간의 삶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고하여 과학 자체를 배척하고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희진 선생도 해제에서 ‘과학’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피력하고 있지만, 과학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이해한다.

 

 

나가며

 

진실의 쇠퇴는 민주주의의 약화를 예비한다.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비이성적 전통이 바이러스처럼 퍼질 수 있으며, 잠복해 있다가 언제든 다시 활동을 재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사실이 부정되거나 은폐되고, 분석의 역할이 감소하는 ‘탈진실’의 시대에 존재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가쿠타니가 인용하는 톰 니콜스의 저서 전문가와 강적들에는 다음과 같은 실마리가 보인다.

 

시민들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이해하는 기본 문해력을 습득하는 신경 쓰지 않으면, 좋든 싫든 이런 문제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권자가 이런 중요한 결정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면, 무지한 선동 정치가가 민주주의를 장악하거나 또는 좀더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민주주의 제도가 권위주의적 기술지배체제(technocracy) 쇠퇴하는 위험에 처한다.(31-32면)

 

우리는 톰 니콜스의 경고를 이미 몸소 체험하고 있다. 바로 트럼프 정부의 등장으로 변해버린 미국사회가 그 증거이다.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이후,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민주주의가 이렇게 퇴보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분명한 것은 이런 일이 미국만의 현상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에게도 다시 도래할 수 있다는 점을 이 책은 경고해주는 셈이다. ‘진리/앎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말은 이성에 큰 가치를 두는 합리론의 전통에 근거한다. 이 말은 가짜 뉴스/정보와 진실이 쇠퇴하는 시대에 중요한 표어가 될 수 있다. 미국의 사례로부터 ‘역사’와 ‘시민론 교육’이 심각하게 위축된 문화 속에 러시아의 허위 정보가 얼마나 쉽게 뿌리내릴 수 있는지’를 보았다. 결국 스스로 진실이 어떤 것인지 따져보고 의문을 던지는 의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는 글에서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조지 워싱턴의 고별 연설(1796)을 인용하며 현재의 미국 사회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전한다. 워싱턴은 미국의 미래를 보장하려면 헌법을 보호하고, 정부 내 권력의 분립과 균형을 파괴하는 활동에 대해 방심하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다. 아울러 ‘교활하고 야심 차며 파렴치한 인물’의 출현을 경고하기도 했는데, ‘국민의 권력을 와해’시키는 인물의 존재, ‘방심할 수 없는 외세의 책략’, ‘당파심의 끊임없는 폐해’, ‘파벌주의(미국의 동부-서부, 남부-북구, 주정부-연방정부)’의 위험을 경고하기도 했다. 200년도 더 된 과거의 지도자가 전하는 진심어린 경고는 우리가 지켜야하는 가치가 이를 파괴할 수 있는 환경에 얼마나 쉽게 노출될 수 있는지를 시사하고 있기도 하다. 역사를 통해, 그리고 현재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고 수정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지 않으면, 우리가 보고 있는 트럼프 시대의 모습은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라는 경고를 미국 건국의 아버지는 충고하고 있다.

 

단테의 장편 서사시 신곡에는 ‘밤에 등불을 등 뒤로 들고 가는 사람’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지상의 인간으로서 저승의 두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스타티우스 세 사람이 연옥을 지날 때,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스타티우스에게 어떤 경위로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를 물었고, 스타티우스는 베르길리우스의 영향으로 시인이 되고 신앙도 갖게 되었다고 말하며, 베르길리우스를 ‘밤에 등불을 등 뒤로 들고 가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그를 칭송한다.

 

당신은 마치 밤에 등불을 뒤로 들어

자신에게 유익하기보다 뒤의 사람들을

현명하게 만들어 주는 분처럼 말했지요.

(신곡 연옥편, 열린책들 191면)

 

나는 이 대목에서 ‘밤에 등불을 등 뒤로 들고 가는 사람’이 가쿠타니가 언급한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 그리고 현재 우리의 삶을 함께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탁월한 은유라고 생각한다. 뒤에서 등불을 안내삼아 따라오는 후손들을 염려하는 일은 바로 오늘날 필요한 언론의 역할이기도 하며, 소셜 미디어를 통한 1인 미디어의 주체로서 각 개인에 주어진 역할이자 사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책 속의 문장들]

 

 

“나는 오래전 보스니아에서 이뤄진 인종 청소와 집단 학살을 취재하면서 배운 게 있습니다. 희생자를 정당한 이유없이 공격하는 사람과 동등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도덕이나 사실의 거짓 등가성을 만들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면 도무지 입에 담지 못할 범죄와 그 결과의 공범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중립성이 아니라 진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실을 진부하게 만드는 일을 멈춰야 한다고 믿습니다.”

- 크리스티안 아만푸어(이란계 영국 저널리스트)의 말, P69

“(워싱턴의 허무주의는) 예의의 상실, 즉 갈수록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며 논쟁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을 말해주는 징후면서, 우리가 점점 다른 사람들의 말을 믿어주고 정직한 실수의 여지를 주면서 정중히 들어주고 싶어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P145

‘시민들은 독재자와 권력에 굶주린 정치인들이 저항을 와해시키기 위해 의존하는 냉소주의와 체념을 반드시 거부해야한다.’

‘동시에 시민들은 미국 건국자들이 민주주의의 지붕을 떠받치기 위한 기둥으로서 만든 제도를 돌보고 보존해야 한다.’

‘교육과 자유로이 독립된 언론(언론의 자유)’이 매우 중요하다.

- P160

“그러므로 나는 확신한다. 진실의 문을 여는 것과 이성으로써 모든 것을 살피는 습관을 강화하는 것이, 우리 후손들이 스스로 동의해 국민을 속박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그 손에 채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갑임을.”

(토머스 제퍼슨)- P161

“이념적 저장탑에 고립된 사람들의 대안사실이 아닌, 공통으로 동의한 사실 없이는 정책에 대한 합리적 논의가 있을 수 없고, 정치 공무원 후보자를 평가할 실질적 수단이 없으며, 선출직 공무원들이 국민에 대해 책임지게 할 방법도 없다. 진실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절름발이다. 미국 건국자들은 이를 알았고, 오늘날 민주주의를 살리려는 사람들도 이를 알아야한다.” - P161

“진실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진실이라고 간주되는 것이 있었을 뿐이다. (…) 어떤 의도이건 간에 모든 사유는 오해되고 왜곡된다. 그래서 모든 담론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의 ‘올바름’이 아니라 효과다. 언어의 사용 과정에서, 즉 누가 어떤 위치에서 말하는가에 따라 의미의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정희진 해제)- P197

“포스트모더니즘은 인식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다르지만, 대안 없는 해체주의나 상대주의가 아니다. (…) 역사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과거의 승자와 동일시하는 대중의 인식이다.”

“진실(객관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시공간의 횡단을 통해 구성된다는 의미다. (…) 현장의 역사적 맥락이 언어의 의미를 정한다.”

(정희진 해제) - P200

 

 

 

 

* 온라인 서평 카페: 원탁의 서평단 (https://cafe.naver.com/bookkn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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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을 지키는 중국 그림의 힘

김선현 지음 | [자유의길]

 

 

 

우리는 회화라고 하면 무의식적으로 서양의 그림들을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대학의 서양화과 커트라인이 동양화과보다 다소 높은 경향이 있다는 것도 공공연한 사실이다. 서양의 예술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 차지하는 위상은 동양의 예술과 대등하지 않아 보인다. 이런 모습들은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를 바라보는 우리가 어쩌면 중심(中心)에 서 있지 않기 때문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우리 삶의 모습들은 그럴만한 원인이 분명히 있으며, 어떤 대상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이러한 현실에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림에 관한 도서라면 서양화가 대부분인 상황에서, 그리고 수묵화와 같은 전통 동양화가 아닌 동시대 중국 예술가들의 작업은 어떨지 궁금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번에 만난 도서는 현대 중국 예술가들의 작업을 소개해주고 있는 국내 저자의 책이다. 저자인 김선현 교수는 미술을 전공하고 미술치료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전문가이다. 곧 그림을 통해 상대방의 심리 분석과 치료에 접근해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저자가 연구를 위해 교환교수로 해외로 나갈 기회가 생겼을 때, 미국이나 호주와 같은 의료 선진국이 아닌 중국을 선택한 것도 오늘 만나게 된 이 책의 출발점이 되었을 것이다. 발달한 의료 장비나 기술을 보고 배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급속한 변화로 중국인들이 겪게되는 트라우마와 심리 상태를 연구하기 위해서’라는 저자의 간결명료한 선언을 만났을 때, 이 책이 또 한번 달리 보였다. 이 책에는 중국을 대표하고 있는 현대 작가 30인과 그들의 작업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저자는 중국과 한국을 수십 번 오가며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작가들 만나서 친분을 쌓고 이들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결과가 바로 이번에 읽게 된 중심 (中心)이다.

 

 

이 책의 제목은 다의적이다. 저자는 중심(中心)의 의미를 마음을 굳게 흔들림 없이 자신의 삶을 바로잡고, 정성을 다해 자기 인생의 줏대를 든든히 지키는 이라고 풀이한다. 문장 어디에도 ‘가운데’를 의미하는 표현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흔들림 없이 자신을 지키는 것’에 방점이 있다. 친척분이 지어주신 내 호에도 ‘중()’자가 하나 들어가는데, 여기서 ‘중()’은 ‘천하의 근본’이라는 의미에 가깝다고 이해했다. 곧 내 호에 적용된, ‘중()’은 나의 본질, 나의 참모습 나아가 세상의 근본이라는 맥락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러므로 내게 ‘중심’이란 의미는 ‘세상의 근본을 향한 마음’이라고 하면 너무 멀리 나간 것일까? 여기에는 자신의 삶을 바로잡는 ‘균형감각’과 ‘의지’를 내포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여기에서 나아가 저자는 이 중심을 ‘중국인의 마음’으로 해석하고 있기도 하다. 이 의미는 창작자가 예술행위를 통해 자신의 감정과 의식을 결과물에 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편적으로 창작자들이 속한 공동체의 보편성을 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난 뒤, 나는 동시대 중국 작가들의 고뇌와 감정의 표현물을 통해 나와 다른 문화에 살고 있는 이들의 생각과 공감을 아울러 발견할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현대 중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이룬 요소들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현대 중국 작가들의 작업과 배경을 보면, 공통적으로 몇 가지 특유한 경험들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현대 중국인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친 사건들은 ‘문화혁명’과 ‘천안문사태’로 정리된다. 여러 작가들은 어린 시절 ‘문화혁명’의 모습을 몸소 체험했다. ‘대머리 건달들’을 주제로 여러 그림을 그렸던 화가 팡리쥔이 겪은 중국 현대사의 모습은 시대성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개인들에 대한 문제를 절실히 보여주었다. 다섯 살에서 열 다섯살까지 겪은 ‘문화혁명’ 시절에 대지주였던 자신의 할아버지가 이웃사람들 앞에서 ‘인민의 적’이라는 비난과 저주의 함성 속에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천안문 사태’ 현장에서 총을 맞고 피흘리며 죽어간 친구들을 보았을 때 작가가 받았을 충격과 혼란은 그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와 트라우마를 남겼을 것이다. 그는 생존했지만, 대신 평생 거대한 중국 현대사가 남겨준 생채기를 온 몸에 기억으로 남겨두었을 것이다. 등장인물이 모두가 대머리인 남자의 힘없어보이는 혹은 생각이 많아 보이는 뒷모습, 하품을 하는 대머리 남자의 무기력한 모습은 오히려 이러한 표현 자체가 작가의 감정과 의식의 강렬한 표출임을 느끼게 해준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겪었던 경험과 유사한 것도 있다. 바로 산업의 발달로 인한 도시 인구의 증가 현상이 그것이다. 한 나라의 산업화가 국가주도적인 성격을 띠게 될 때 더욱 두드러지는데, 농촌의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하여 도시의 가난한 공장 노동자로 살아가곤 한다. 이런 모습은 중국 뿐만 아니라 산업 혁명 이후 산업화의 영향이 미친 전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우리의 경험도 다르지 않다. 화가 쑹이거의 <부츠 >을 그린 그림이나, 류쿵씨가 그린 <먹는 기쁨이 크다>에서는 도시 생활을 하는 노동자의 ‘고단함’을 엿볼 수 있다. 나의 부모님 역시 60-70년대 지방에서 서울로 두려움과 설렘을 가지고 도착하셨을 것인데, 이런 경험을 가진 누구나가 중국 화가들이 그린 이런 작업을 통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양상은 다르지만 이런 부분들은 현대 중국 예술가들 역시 삶의 보편적인 경험에 주목하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친근하게 현대 중국 예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중국여행을 하며 들은 사항 중 하나는 베이징에서 중국인들이 들어와 살려면 일종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베이징 시민이 될 자격을 얻어야 한다는 말인데, 저자가 이 부분을 책에서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1990년대 말 중국 정부가 밀려오는 농민들의 이동을 막기 위해 선택했던 ‘호구제도’는 주택을 비롯한 거주의 권한 외에 의료 혜택이나 교육에도 도시의 거주자들과 차별적인 제도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예컨대 도시로 이동해와 가족을 이룬 이들의 자녀들은 대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부모가 나온 지역으로 다시 돌아가 시험을 봐야만 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중국 예술가들의 작업을 통해 우리와는 다른 중국 특유의 문화 속에서 우러나온 이런 경험들은 다소 생소하지만, 한편으로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공감이 되기도 한다. 아마도 이것은 서양과 달리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비극의 체험을 공유하는 한편,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압축적인 경제 성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의 감상자들은 창작자들이 녹여낸 경험을 통해 보편성을 발견하고 확인하고 있기에, 현대 중국 예술가들이 작업에도 충분히 공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당신의 거울이다

 

1980년대 중국 미술에 등장하는 신사조 운동은 무엇보다 창작자 자신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데 주안점을 두는 것으로 이해된다. 서양미술의 전통과 견주어보면, 100여년 전에 예술가의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던 예술 사조인 ‘낭만주의’의 맥을 잇는, 혹은 ‘낭만주의’의 현대적인 변용과 같은 관점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대 중국 예술가들은 문화 혁명이나 천안문 사건과 같은 중국사의 큰 사건을 몸소 겪기도 하고, 특히 예민한 감성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 이들은 자신의 이런 상처와 아픔을 들여다보고, 작품을 통해 다시 직접 대면하며 아픔과 트라우마를 극복해내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쉼없이 파안대소를 보이는 남자들을 그린 화가 웨민쥔의 그림을 보노라면, 자연스럽지 않은 상황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의학 연구에 의하면 억지로라도 얼굴 근육을 움직여 웃는 얼굴을 지으면 마치 행복감을 만들어내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반대로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는데 억지로 미소를 지어야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행복하기를 선택할 수 있을까? 현대 사회의 일부인 우리는 사실 후자의 상황에 더 많이 놓이게 되지 않을까. 작가 웨민쥔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아무 생각도 없이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며 행복해 하는 사람들을 표현한다. 이들은 초상이자 친구의 모습이며 나아가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50면)

 

작가 웨민쥔의 말마따나 그가 그린 작품 속 인물은 하나 하나가 곧 자기 자신이기도 하며,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저자가 트라우마 자살관리 센터에서 상처받고 찾아온 사람들의 치료과정에 참여해본 후, 세상에 상처 받지 않은 영혼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한다. 결국 예술가들은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돌아보며, 이들이 만든 작품을 보고 자신의 아픔이나 상처를 발견해내는 과정을 통해 서로 교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들은 이들의 예민한 촉수와 감수성을 통해 우리와 시대의 거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환하게 웃는 인물을 그린 웨민쥔의 그림 <세상 구경> 에서는 남자가 허리를 굽혀 다리 사이로 세상을 거꾸로 보는 모습을 담았다. 세상은 뒤집힌 채 다르게 보일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쑹이거의 <부츠 > 에서도 부츠의 위치를 서로 반대편으로 벗어놓은 것을 알아볼 수 있는데, 이 그림도 평범하지만 ‘고단한 하루’의 흔적을 담고 있는 일상 생활 속에서 발견하는 ‘낯선 시각’을 알아볼 수 있다. 사실 다른 예술가들이 내놓은 결과물들을 보면 하나 같이 우리의 삶을 조금씩 다른 시각에서 포착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예술가는 각자의 경험과 삶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온 아픔이나 관심사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를 자신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세상에 내놓는다. 그 과정이 이들 예술가들이 하는 궁극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낯선 시각’은 예술가들만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저자는 삶이란 얼핏 보기에는 시시해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것들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저자의 말을 한 자 한 자 따라읽다가 언젠가 그늘이 드리워진 동네 골목길을 지날 때 보았던 장미 사진이 생각났다. 건물 사이로 한 쪽 벽에 비치는 햇살을 쬐던 장미 한 송이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아래 사진 참고). 멋진 풍경이 있거나 역사적인 기념물이 있는 곳도 아닌 동네 골목에서 어느 날 이 한 송이 장미가 조각 햇살을 받으며 나의 눈길을 끌었던 모양이다. 길거리에서 갑자기 서서 꽃을 찍는 중년의 내 모습을 상상하면 부끄럽긴 하지만, 햇살이 비치는 좁은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를 당당히 드러내고 있는 이 녀석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나에겐 이런 기회가 내 주변을 ‘낯설게 보는 순간’이다. 이런 행위들을 중국 현대 예술가들이 보여준 작업과 견줄 수는 없다. 다만, 이 장미 사진은 나의 하루를 다르게 만들어준 ‘내 삶의 자극제’라고 생각한다. 예술에 대해 접할수록 내가 배우게 되는 것은 바로 타인 뿐만 아니라 내 삶의 현재성에 대한 관심과 이해인 것 같다.

 

 

 

나가며

 

책을 읽으며 한 가지 혼란스러웠던 점은 이 책의 방향성에 관한 의문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현대 중국 예술가들의 작업을 소개하고 있다. 다만 순수하게 저자가 현대 중국 예술가들을 친절히 소개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전공인 미술 치료와 관련한 정보와 경험을 일부 함께 전달하고 있기에 책의 정체성이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 책이 현대 중국 예술가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 및 입문서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지만, 일부 작품에서 저자의 미술 치료와 관련한 이야기를 더하고 있는 부분은 책의 일관성에 혼동을 주고 있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중국 작품들에 대한 저자의 감상을 기록하는 부분은 이 책이 현대 중국 미술에 대한 개인적인 에세이로서의 성격을 띄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 책의 방향을 어디에 두고 있다고 이해해야할지, 저자는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있을까가 다소 혼란스럽게 다가왔다. 개인적으로는 현대 중국 예술가들에 대한 소개와 저자 개인의 감상을 전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저자가 본인의 전공과 경험을 살려 화가 랴오야오야오의 <기인> 시리즈에 대한 심리분석을 넣은 부분은 특히 책의 방향을 혼동스럽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저자가 현대 중국 예술가와 작품을 소개하는 것이 주안점인지, 아니면 그림에 대한 미술치료의 관점에서 심리 분석을 해보는 것인지를 명확히 하여 분리하거나 아니면 매 그림마다 심리분석을 추가하여 책의 방향을 분명히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몇 군데서 그림에 대해 저자가 독자에게 격려하는 듯한 부분도 책의 방향을 다소 모호하게 만드는 요소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아니면 서문에서 책의 방향에 대해 미리 힌트를 주었으면 독서에 다소 혼란이 덜했을 것같다.

 

 

몇 가지 혼란스러운 부분을 제외하면, 이 책을 통해 현대 중국 예술가들과 이들의 대표작품들을 알게 되어 흥미로왔다. 여러 현대 중국 예술가들이 간직한 경험들과 고민들을 통해 지구라는 행성에 함께 살고 있는 인간의 보편성을 새로 발견한다. 나아가 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예술가는 시대의 모순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사람들이란 생각도 해보게 된다. 현대 중국 예술가들이 묘사한 그림과 사진 작품들에는 이들이 감지해낸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들이 담겨있다. 이 부분은 이들에게 보편적이면서 동시에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게는 특수한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회의 한 부분, 구성요소로서 인간을 이해할 때, 사회로부터 받는 스트레스, 상처, 트라우마 등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예술가들의 작업이 인간으로서 각자 지니고 있는 감성에 크게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 독서를 통해 저자가 소개해주는 현대 중국 예술가들의 작업들을 조금 알게 되었다. 이들 역시 자신이 속한 사회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자신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평범함 인간이기도 했다. 다만 이들은 시대에 공감하고 분노하기도 하며, 자신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화가는 자신의 감정을 그림이라는 작업으로 대상화하고 이를 들여다보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한편 감상자는 화가의 작업을 통해 자신의 기억(경험)과 공감을 통해 주관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또 다른 보편성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바로 경험과 기억, 그리고 공감을 통해서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예술가들은 범인(凡人)을 초월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끊임없이 극복해가는 인간으로서 ‘초인’들인지도 모르겠다. 상처와 아픔을 지닌 자신의 삶을 그대로 들여다보고, 자신의 의지로 이를 ‘있는 그대로’ 껴안고 나아가는 것은 끊없는 허무주의나 냉소주의에 빠져있다면 추구하기 힘든 긍정의 자세일 것이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상처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며, 자신의 상처를 돌보고 아픔을 긍정하고 극복할 때, 내 안의 나이테는 근사한 모습으로 자라나게 될 것이다. 여러 현대 중국 작가들의 작업을 보면서 나 자신도 역시 조금씩 위로를 받는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처음 만나게 중국 작가들이었지만, 저자의 자연스러운 글쓰기 덕분에 현대 중국 예술이 처음인 나도 중국 예술가들의 작업들에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앞으로 현재 중국의 예술계를 이끌고 있는 이들의 다음 세대, 주목받는 젋은 중국 예술가들에 대한 소개도 기대 해보게 된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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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돌베개] 서평단 모집(10.07-10.15)

서평/리뷰 글쓰기에 관심을 갖고있는 이들이 모인

온라인 서평 카페 '원탁의 서평단'에서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10월 서평 이벤트는

돌베개 출판사에서 출간한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입니다.

저자 소개를 보니 1983년부터 2017년까지 <뉴욕타임즈>의 서평을 담당했던 이력이 있습니다.

'독설 서평가'라는 별명이 왜 붙었는지 궁금해지기도하고,

해제를 쓴 정희진 선생이 '책의 주장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해볼 거리가 많은 책'으로 이야기하고 있기도 합니다.

아울러 서경식 선생이 2달 전 어느 대중 강연에서

미치코 가쿠타티의 이 책을 읽고 '상당히 좋았다'라고 평한 책이기도 합니다.

https://cafe.naver.com/bookknights/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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