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0자>가 가르쳐 주는 것 - 대상을 '이해'하는 일이 필요한 이유

 

2230

김인국 칼럼집 | [철수와영희]

 

 

단 하루라도 아무런 사건없이 평온한 날이 있을까. 오죽하면 천주교 신부가 날 선 글을 통해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을 비판하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230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일원인 김인국 신부가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국내 일간지에 기고한 서른세 편의 칼럼을 모은 책이다. 날카로운 비판보다 원색적인 비방과 공격이 난무하는 대한민국 언론의 현실을 고려해볼 때, 김인국 신부의 칼럼에 주목하게 된다. ‘2230자’는 저자가 기고하는 칼럼에 대한 분량제한인 듯하다. 저자는 사회의 크나큰 이슈들에 대한 생각을 한정된 분량의 지면에 풀어 놓는다. 그의 목소리는 사회의 일반 구성원이자 시민의 입장에서 나오고 있다. 때로는 목소리를 높여 준엄하게 권력을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어두운 현실에서 희망을 전하고자 한다.

 

 

나는 그리 길지 않았던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요지경 세상을 체험했다. 신문에서만 보던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을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아마 오랜 시간을 사회 속에서 지낸 사람들은 사회의 부조리한 면들이 이미 익숙해지고 무덤덤해졌을지 모르겠다. 백남기 농민을 ‘전문 시위꾼’이라 욕하던 회사의 임원도 있었고, ‘우리 나라가 일제 강점기 때 해방이 안되었으면 지금 더 잘 살았을 것’이란 말을 하여 나를 놀라게 했던 거래처 임원을 만나기도 했다. 또 어느 중소기업 업체 사장은 요새 젊은이들 중에 ‘빨갱이들이 너무 많다’라며, 자신의 아파트 매매가격이 15억 이하로 떨어졌다며 정부를 욕하는 모습도 목격했다. 때론 큰 기업의 하청업체의 입장에서, 때로는 또 다른 외주업체에 일을 맡기는 작은 회사의 회사원으로서, 좋은 환경에서 전문직으로 살았다면 접하기 힘든 값진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난 이런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과 합리적인 일처리를 보여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일이 아닌 다른 문제에 관해서 이들은 어떻게 이런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는가에 대해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회사생활을 하며 만났던 이들을 단순히 비난하기만 하는 일은 매우 쉽다. 하지만 언젠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장 쉬운 비난하기를 일단 접어두고, 이들이 어떻게 해서 이런 생각과 주장을 하게 되었고, 나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 판단이 선다면, 보다 긍정적인 변화를 미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는 이미 익숙해진 사실인 ‘언론의 글은 무엇보다 그 결론이 이미 정해진 상황에서 글이 쓰이거나 다듬어진다는 사실’을 염두해둔다면, 언론의 보도에 대해서도 좀더 비판적인 시각으로 검토해보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나는 앞서 예를 든 사람들의 ‘논리’에 대해 이를 비판하고 내 의견을 갖출만한 논리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다. 이 발견으로 나는 나에 좀더 알게 된 부분도 있다. 나라는 사람의 감정과 지적인 한계에 대해 깨닫게 되면 여기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2230을 읽어나갈 때, 사회의 부조리에 비판하는 사람이 필요한 이유를 보다 분명히 깨닫게 된다. 일본사회의 상황을 예를 들어보아도 그 중요성을 바로 알 수 있다. 재일조선인 서경식 교수는 아베 정권과 여기에 동조하는 일부 세력이 기획하고 휘두르는 망동에 그동안 일본 사회내에서 비판기능이 상당히 약해져버렸음을 지속적으로 지적해왔다. 특히 90년대 이후 진보세력으로 자처하는 리버럴 세력의 붕괴현상으로 사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더욱 입지를 찾기 힘들어 졌다. 오늘날 아베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내는 일 자체가 힘든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아베를 비판하는 공무원은 상당수 퇴출되었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서경식 교수에 따르면 이 모든 결과의 근본원인으로 일본의 ‘식민주의’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 그리고 이들과의 화해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거짓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점점 더 큰 거짓말을 하다가 이제는 걷잡을 수 없게 된 형국이다.

 

 

김인국 사제의 비판은 우리 사회의 민감한 부분을 곧바로 겨냥하고 있다. 그렇기에 저자는 머리글에서부터 “어차피 고운 말씨, 고운 말씀은 것입니다. 그래도 언제나 땅을 사랑하시고 땅의 형편때문에 자주 끙끙 앓으시는 하느님의 애끓는 심정이 어느 한구석 글자에라도 묻어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고백한다. 그의 글은 비판적이면서도 한 마디 한 마디가 조심스럽기도 하다. 사랑을 전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떠올리기도 하며,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비판과 포용을 하는 모습도 읽게 된다. 우리의 삶이 부조리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그리고 ‘나름대로 만족’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만족도는 사회가 더 부조리하게 변해갈 때, 더 열악한 사회의 상황에 적응해갈 뿐이다. 당연해보이는 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가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이유다. 그리고 2230의 저자는 사회에 당연해보이는 일에 곧바로 목소리를 높여 의문을 던지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칼럼 하나에 담긴 저자의 모든 주장에 공감이 가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보다 다양한 생각과 비판적 검토가 독자들 내부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면, 칼럼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2230가 독자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한 글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사회의 해당 문제와 시간·공간적으로 멀어지기 시작할 때, 우리의 기억을 되살리고, 생각하게 하는데 그 역할이 있을 것 같다. ‘세월호 사건’도 우리 사회에 크나큰 충격과 경종을 주게된 사건이다. 그러나 사건의 배후에는 보다 거대한 어른들의 부조리가 함께 도사리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저자는 ‘이제는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타박하는 이들에게 이를 계속 기억할 계기를 준다. 보다 근본적인 사회의 문제점들을 개선하고 바꾸기에 그 변화는 아직 느리기에, 김인국 사제가 사회에 던지는 경종은 더 소중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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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마라톤] <모비딕> 5장 - 천천히 읽기

 

 

모비 Moby-Dick or, The Whale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5] 아침식사(Breakfast)

 

 

[5장의 기본 줄거리]

 

물보라 여인숙에서 침대, 이불을 덮고 하루 밤을 지낸 이슈메일과 퀴퀘그는 여인숙의 술청으로 내려가 아침식사를 한다. 술청에는 간밤에 들어온 투숙객들로 가득 있었다. 아직 선원용 재킷을 입고 있던 사내들로서 입항한 포경선의 선원들이었다. 이슈메일은 식탁에서 이들과 퀴퀘그의 식사예절을 관찰한다.

 

 

 

 

 

5장의 배경은 물보라 여인숙의 아침식사가 준비된 술청이다. 이번 장도 매우 짧은 장이며 이슈메일이 본격적으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기 전의 풍경, 포경선원들의 모습, 퀴퀘그의 식사법 등에 관한 관찰이 이루어지는 장이다. 밤새 만원을 이루던 여인숙에서 주인장 코핀의 장난으로 한 침대, 한 이불을 덮고 자게 된 퀴퀘그와 이슈메일 두 사람은 아침 식사를 하러 술청으로 내려간다.

 

 

히죽거리는 주인에게 이슈메일은 원한을 품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슈메일의 독백이 흥미롭다.

 

실컷 웃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기 드물게 좋은 일이다. (…)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자신을 유쾌한 웃음거리로 제공한다면, 사람이 부끄러워서 꽁무니를 빼지 않고 기꺼이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고 남의 웃음거리가 되게 해주어라. 자신에 대해 실컷 웃을 거리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 들어 있을 분명하다.

 

 

이 부분은 스치듯 지나가는 부분이며 작품을 이야기할 때 어떤 역할을 하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저자의 내면에 보관되어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불쑥 드러나는 저자의 이런 생각들을 발견하는 것이 흥미롭다. 이런 행동은 저자인 멜빌이 수긍하고 동의하는 행동양식일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나 자신도 이런 생각을 하곤 했기 때문에 잠시 멈춰가게 되는 부분이다.

 

 

나는 언젠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 우리가 ‘유머’라고 하는 것의 기본적인 정신이자 자세는 ‘자기 자신에 대한 희화화 과정에서 시작한다’는 것 말이다. 자기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를 유쾌한 웃음거리로 ‘대상화’하고 ‘거리두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용기있는 사람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슈메일의 독백대로 스스로 타인에게 웃음거리가 되게 제공하면, 기꺼이 남의 웃음거리가 되게 하는 행위는 성경의 가르침과 닮아 있기도 하다. ‘누군가 나의 왼쪽 뺨을 때리면, 나의 오른쪽 뺨도 대주어라’와 같은 논리의 성경문구를 떠올리게 한다. 유머의 관점에서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며, 유머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아울러 도덕적인 관점에서도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스스로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의 전개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니겠지만, 멜빌이 생각하고 공감하는 바를 170년이 지난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이런 부분은 천천히 읽을 때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한다.

 

 

여인숙 주인이 ‘식사들 해!’라는 말에 술청의 투숙객들은 모두 아침을 먹기 시작한다. 이슈메일은 아침 식사가 이루어지는 식탁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흥미로운 관찰을 한다. 그런데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많은 경험을 쌓은' 이들의 태도가 성숙한 사교술이 아닌 깊은 침묵으로 일관된 아침 식사 풍경을 보고 희한한 광경이라고 말한다. 서양에서는 특히 같은 식탁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태도는 예의바르지 못한 사교술이라고 판단하는 것 같다. 갓 귀항한 포경선원들로부터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를 들을 기대에 부푼 이슈메일에게 이런 깊은 침묵은 마뜩잖다. ‘처음 보는 고래를 수줍음도 없이 죽이는 노련한 포경선원들이 식탁에 앉아 목장의 양들처럼 서로 바라보기만 하며’ 식사를 하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이슈메일은 이들을 ‘수줍어하는 곰들! 겁쟁이 전사 같은 고래잡이들!’이라고 생각한다.

 

 

퀴퀘그 역시 날카로운 작살을 식탁에 올려놓고 설익은 비프스테이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말없이 먹는 데 집중한다. 이슈메일은 고드름처럼 차가운 그의 예절을 높이 평가할 수 없다고까지 말한다. 물론 오지를 여행하는 과거의 탐험가들처럼 사교술을 터특하기에 어울리지 않은 환경에 있던 사람들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교술은 어디서나 얻을 수 있다고 평한다.

 

 

다시 보면 서양에서 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침묵으로 서로를 무시한 채, 음식을 먹는 행위에만 몰두하는 일은 예의바르지 않은 행동이다. 다시 말하면 이 행위가 예의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배운 이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곧 깊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아침식사 풍경은 오히려 이들 대부분이 지니고 있는 교양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나마 이슈메일은 카토와 피타고라스를 이야기하고, 성경에 익숙한 교양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시에 교양인이라면 으레 하게되는, 혹은 갖게되는 행동양식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면을 이슈메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식탁에서의 침묵행위를 예절바르지 못하다고 언급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일 것 같다.

 

 

이번 5장에서는 아침식사 풍경을 통해 포경선원들의 일면을 보여줌과 동시에 퀴퀘그의 세세한 행동양식을 보여주기에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이 포경선을 타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기 전에 소설의 장면은 이들이 다니는 뒤를 밟아 퀴퀘그의 면모를 조심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이슈메일이 퀴퀘그를 관찰하는 부분은 당분간 간간이 더 나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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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마라톤] <모비딕> 4장 천천히 읽기

모비 Moby-Dick or, The Whale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4] 이불(The Counterpane)

 

[4장의 기본 줄거리]

 

여인숙 주인 요나의 중재로 퀴퀘그라는 이름의 작살잡이와 한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이슈메일. 퀴퀘그의 팔이 다정하게 자신의 몸 위에 혀 있는 것을 확인한 이슈메일은 퀴퀘그를 힘겹게 깨운다. 이슈메일은 마침내 일어나 침대 밖으로 나온 퀴퀘그의 몸치장을 비롯하여 외출을 위한 아침 준비 과정을 관찰한다.

 

 

 

 

 

4장의 제목은 ‘이불’로 번역되어 있는데 영어로는 counterpane라고 되어 있다. 이 단어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침대 덮개용 이불, 침대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의 이불을 덮고 잔 두 남자는 침대를 매개로하여 마치 부부나 다름없이 허물없는 우정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따라서 침대란 공간은 한 이불을 함께 덮고 잔 남자들만의 우정을, 그리고 앞으로 동고동락하게될 운명을 암시하는 소품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인간적인 우정은 마치 부부의 연을 맺은 사람들처럼 죽음만이 이들을 갈라 놓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4장은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통해 퀴퀘그의 인물을 소개하고 이슈메일과 퀴퀘그의 조우를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이슈메일) (퀴퀘그) 팔을 움직이려고 했다. 신부를 끌어안은 신랑 같은 그의 팔을 풀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는 깊이 잠들어 있는데도 나를 끌어안고 있어서, 죽음만이 우리를 갈라놓을 있을 같았다. (…) 대낮에 낯선 집에서 식인종과 도끼와 침대에 누워 있다니! ‘퀴퀘그! 제발 일어나, 퀴퀘그!’ 나는 한참 동안 몸부림을 치고, 남자끼리 부부라도 되는 것처럼 다정하게 끌어안는 것이 얼마나 온당치 못한 짓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훈계를 늘어놓은 끝에 마침내 그에게서 하는 소리를 끌어내는 성공했다.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마침내 퀴퀘그는 잠에서 깨어나고, 상황판단을 한 식인종 친구는 침대를 나와 몸치장을 시작한다. 이 때부터 이슈메일은 퀴퀘그를 다시 보기 시작한다. 퀴퀘그를 미개한 식인종으로만 보았던 이슈메일은 그를 예의바르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한 인간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은 낯선 야만인에게 무례하게 굴었음에도, 이 야만인은 도리어 이슈메일을 예의바르게 대하고 존중해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멜빌이 설정한 침실과 침대보는 한 이불을 덮고 잔 이 두 남자의 우정의 시작을 매개하고, 문명인 대 야만인(식인종)의 만남에서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상징적인 공간이자 소품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먼저 침대 밖을 나와 몸치장을 시작하게된 퀴퀘그과 그를 관찰하는 이슈메일을 상상해보라. 1인칭 화자인 이슈메일은 호기심을 가지고 이 ‘예의바른 식인종’의 식전 아침일과를 묘사한다. 이슈메일에 따르면, ‘문명화된 기독교도’는 누구나 세수를 했을 것이지만, 퀴퀘그는 가슴, 손과 팔만을 씼었다. 이어 면도를 시작하는 퀴퀘그는 작살의 날을 부츠에 문질러 날을 벼린 다음 곧바로 면도를 하는 것이다. 이슈메일은 그를 보고 ‘얼굴에 작살질을 시작했다’라고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어쨌든 이 ‘물보라 여인숙’에서 만나게 된 이슈메일과 퀴퀘그는 앞으로 포경선에 올라 함께 생사를 나누게 될 관계가 된다. 말 그대로 ‘죽음’만이 이 둘을 갈라놓게 된다. 4장은 모비 에서 상당히 짧은 장에 속한다. 멜빌이 서서히 드러나는 등장인물과 배경을 설정함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에 해당하는 이슈메일과 퀴퀘그가 조우하는 배경을 마련하고, 이들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잠시 쉬어가는 장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20세기 후반까지도 금기시되었던 화제인 동성애적인 상상을 유발하는 이런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활용하여, 거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선원들(남자들)의 우정을 예비하는 설정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 소설을 집필하던 시기가 거의 170년 전인 1850년 여름이라는 것을 염두해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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