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다시 쓰는 시시포스의 과업’ -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생명이란 무엇인가》
: 5단계로 이해하는 생물학
폴 너스(Paul Nurse) 지음 | 이한음 옮김 | [까치]
‘생명을 다시 쓰는 시시포스의 과업’
대학 시절에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What is Life?》라는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물리학의 관점에서 생명의 본질적인 특성을 설명해보려는 시도였다. 물론 슈뢰딩거가 활용하는 다양한 물리학 개념을 따라가기엔 벅찼지만, 생명 또는 생명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어떤 법칙에 대한 슈뢰딩거의 신념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신념은 종교적 신념과는 달랐다. 그 대신 열역학법칙이나, 볼츠만의 통계적 관점에 토대를 두고 타당한 논리를 구성하여 설명해보고자 했다. 물론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부분도 많았지만, 한 물리학자의 대담한 제언이 얼마나 많은 자연과학도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떠올려보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후 다양한 학자들이 동일한 제목을 걸고 생명현상을 이해하고자 했다. 후대의 우리는 많은 이들이 생명 현상에 대해 설명하려고 고심했던 흔적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를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작업을 요구하는지는 지금까지 나온 책들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다시 한 생물학자가 이 커다란 주제를 건드린 셈이다. 이번에는 영국 유전학자 폴 너스가 집필한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현대 생물학이 바라보는 생명 현상을 살펴본다. 그는 세포 분열의 조절에 관한 주제를 오래 연구했고, 암치료 분야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2001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인물이다. 이 책에서 여러 번 등장하지만 그는 효모균을 주요 실험 대상으로 하여 세포 분열 주기에 관한 메커니즘을 연구했고, 여기에서 결실을 맺었다.
이 책을 읽은 후의 인상은, 저자가 슈뢰딩거가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과 시각을 반영했던 기획과는 성격이 다소 다르다는 점이다. 대신 저자가 생명 현상을 정의하는 여러 측면을 일관되고 통합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를 정리하고자 고심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부단히 발전하고 있는 최신 생물학의 이해에 바탕을 둔 설명이기에 새롭게 배운 부분은 상당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복잡하고 잘 드러나지 않는 생명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상당한 통찰력을 발휘하고 있다. 생명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다섯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밝혀진 세부 사항과 지식들을 포괄적이고 전체적으로 설명해보려는 시도를 했다.
이 책은 생물학 서적이지만 보통 등장하는 세포 혹은 유전자를 설명하는 그림은 단 한 점도 나오지 않는다. 저자는 물 흐르듯 다섯 가지 키워드를 따라 생명 현상을 설명하지만, 어떤 문장에 담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마 몇 시간의 수업과 책을 읽어야 하는 밀도 있는 내용들이 나오기도 한다. 저자가 핵심적인 사항들만을 뽑아서 설명해 나가기 때문에 책이 빨리 읽히진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책의 성격상 저자가 설명하고자 했던 생명 현상의 특징적인 다섯 가지 측면에 대해, 그리고 내가 이해한 범위 내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간추려 각각 두 문장 정도로 요약해보았다.
(1) 세포: 세포는 모든 생물의 구조적/기능적 기본 단위로서, 이 세포의 분열은 생물이 성장 및 발달하는 토대가 된다. 우리는 엄청난 수의 신체 세포와 그 외의 세포가 모여 끊임없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변하는 존재다.
(2) 유전자: 유전자는 생명의 설계도로서, 생명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을 담당하는 단백질을 합성하도록 하는 명령문이다. 이중 나선 구조로 이루어진 유전자는 생물에 필요한 정보를 저장하며, 오랜 시간을 견딘 안정성을 지니고 있다.
(3)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 자연선택은 다윈이 제안한 모든 생물의 진화 메커니즘이다. 유전학적 관점에서 생명이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가 이루어지려면, 개체가 번식할 수 있어야 하고, 유전 체계를 지녀야 하며, 이 체계에 다양성이 존재하여 변이를 허용해야 한다.
(4) 화학으로서의 생명: 생명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생화학적 관점(특히 생명을 물리·화학적 기계로 바라봄)에서 설명한다. 선형 단백질 중합체 사슬이 3차원 구조를 갖추며 독특한 물리화학적 특성을 갖게 되어, 생명활동에 토대가 되는 촉매 역할을 비롯한 모든 화학 반응을 수행하게 되었다.
(5) 정보로서의 생명: 전체로서 기능하는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 정보의 이동과 저장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세포막으로 구분하는 생명 내부의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생명은 외부 세계와 내부 상태의 정보를 끊임없이 모으고 활용하여 이에 대응한다.
저자는 이렇게 생명현상을 몇 가지 주요 키워드에 입각하여 설명했는데, 각각이 사실상 따로 떨어진 내용이 아니라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는 단지 관점을 옮겨 생명의 다른 측면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저자 폴 너스는 오랜 시간 (효모)균의 세포 분열을 기반으로, 그 중에서도 세포 주기를 제어하고 결정하는 유전자를 찾고 그 메커니즘을 연구했다. 그러므로 생명의 기본 단위인 세포가 분열하는 현상 그리고 외부 세계와 분리하는 세포 막 내부의 모든 화학 반응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그가 발견한 연구 결과는 암세포에 대한 이해와, 치료에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었다. 책에서 줄곧 드러나듯이 그는 생명 현상에 대한 이해를 더할수록 우리가 생명 활동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진다는 입장을 취한다.
‘자연선택’ 개념은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제시한 생명의 진화 기작이다. 이번 독서는 유전학의 발전 이후 세포 혹은 분자 수준에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적 측면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과 동일한 대상으로 ‘분열’하는 원핵생물과 달리 대부분의 다세포 생물들은 진핵생물로서, 유성생식을 통해 유전 체계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곧 진화의 관점에서 어떤 생물 집단의 유전 체계에 다양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변이의 가능성이 높고 이를 대물림할 수 있다면 그 집단이 살아남을 가능성 또한 높아진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가 일어나기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 저자가 언급한 사항 세 가지 중 마지막 항목에 해당한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생물이 경쟁에 유리한 유전자 변이체를 지닐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생물이 죽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경쟁에 유리한 유전자 변이체를 지닐 가능성이 있는 다음 세대가 그들을 대체할 수 있게”(79)되기 때문이다. 모든 생물이 격어야만 하는 현상인 ‘죽음’이 내겐 새롭게 다가왔다. 다시 말해 자연은 각 개체가 소멸하는 대가를 지불하는 대신, 매번 세대를 거듭할 때마다 새로운 변이를 도입하거나 발현하여 새로워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중요한 것은 자연이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생명체에게 요구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우연’에 의한 자연선택의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전에는 ‘죽음’이란 현상을 한 번도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생물학을 이해하게 되면 오히려 스토아 학파나 몽테뉴처럼 죽음에 초연해지는 인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생명체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경계(세포막) 밖의 세계에 대응하여 경계 안의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하며 생존해야 하는 입장에서, 생명의 소멸, 죽음 역시 생명 활동의 일부라는 점에 비로소 수긍이 간다.
저자는 생명 현상을 설명하는 다섯 단계를 지나 생물학 연구의 의미와 역할을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바라본다. 전체적인 인상은 생명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과학자로서, 과학자가 적극적으로 세계에 ‘개입’해야 한다고 본다. “생명의 화학적, 정보적 토대를 더 깊이 이해할수록 생명을 이해하는 능력뿐 아니라, 생명 활동에 개입하는 능력도 늘어난다.”(165) 그는 앞선 장에서 시도한 생명 현상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새로운 장에서 새로운 기술 가능성과 그 기대를 이야기하고, 이와 관련한 윤리적 문제들도 언급한다. 다만 유전학자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인지, 황금벼와 같은 유전자 변형(GM)작물과 합성생물학에 대해 낙관으로 일관하는 인상을 받았다. 이 부분은 아직 보다 공정하고 지속적인 후속 연구를 통해 활용 가능성과 우려 사항, 가능한 부작용 등에 대해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인간에 의한 인위적 선택으로 품종을 개량해온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현대 생물학에서 유전자 편집 등을 통해 생물체에 변이를 도입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결과가 인간이 자연에 주고 있는 ‘스트레스’에 한 가지 더 추가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 우려는 지금까지 과학이 밝혀 준 사례들을 고려할 때 타당하며, 그래서 전문가뿐만 아니라 비전문가 모두가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하지 않을까. 유전자 변형 작물이나 새롭게 만들어낸 생명체가 인간과 함께 사는 모든 생물과 환경에 예기치 못한 충격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닐지는 분명히 검토되어야 할 사항이라고 본다. 이 부분은 아직 많은 사람들이 우려할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주장대로 이런 사항들은 사회 전체가 주도하여 공공의 논의와 다양한 관점에 대해 비판적 검토가 요구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기본적으로 ‘생명 현상에 대한 개별적이고 세세한 지식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부분을 넘어 생명을 포괄적이고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래서 생명을 이해하는 다섯 단계의 개념 중에서도 ‘정보’의 관점에서 바라본 생명 현상을 보다 중요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본인이 언급한 바에 비추어 이해해보면, 생명은 복잡한 화학 반응이 일어나는 계라는 시각에서 더 나아가 ‘목적을 가지고 전체로서 작동하는 살아 있는 화학적/물리적 정보 기계’이다. 곧 생명은 외부와 내부의 정보를 관리하고 조정하며 제어하는 존재로서 바라보고 있다.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의 발달로 가능해진 유전자 발현 메커니즘은 유전자나 촉매 반응에 주로 의존하는 효소가 일종의 ‘스위치’로서 기능한다고 설명하는 것이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스위치 제어는 생명이 존속하기 위해 일정한 조건을 유지하고, 자신의 유전자를 대물림할 수 있는 방향으로 조직화되어 있는 것이다.
정리하면, 이 책은 아주 간결한 언어로 담백하게 생명 현상에 대한 특징들을 담아 낸 책이다. 물론 ‘간결한 언어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내용이 쉽거나 가벼운 것은 아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오랜 질문에 유전학자이자 암 연구에 오래 매진해온 대가 나름의 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생명 현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맥을 짚어준다고도 정리할 수 있겠다. 물론 지금까지 수많은 연구자들이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쩌면 이 작업은 결코 도달하기 힘든 목표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생명 현상을 다시 쓰는 이러한 작업은 인류가 생명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깊게 하면서 끊임없이 다시 시도해야할 ‘시시포스의 과업’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