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한 20세기를 살았던 문학비평가의 자서전’ - 《나의 인생》

 

 

《나의 인생 Mein Leben》

: 어느 비평가의 유례없는 삶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Marcel Reich-Ranicki) 지음 | 이기숙 옮김 | [문학동네]

 

‘파란만장한 20세기를 살았던 문학비평가의 자서전’

 

80세가 되도록 하루에 두 번 씩 면도하는 노인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태어나 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20세기를 마무리하던 1999년에 자신의 삶을 기록한 문학비평가가 있다. 그런데 그는 이 책을 집필하던 당시까지도 하루에 두 번 씩 면도한다고 언급했다. 다소 강박적으로 보이는 이런 행동을 보였던 이유가 뭘까? 그 실마리를 찾으려면 약 60년 전에 저자가 겪었던 체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우선 회고록의 제목은 《나의 인생》이다. 저자는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라는 인물이며, 20세기 독일 최고의 문학평론가였다. 좀 더 단서를 추가하자면, 그는 폴란드에서 출생한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나치 점령기에 폴란드의 유명한 바르샤바 게토에서 있었고, 기적적으로 탈출하여 살아남았던 인물이다.

그러니까 마르셀이 80세가 다 되도록 하루에 두 번 면도를 하게 된 이유는 바로 게토에서의 체험과 관련이 있었다. 나치에 의해 바르샤바 게토에서 수용자로 생활하던 어느 날 나치는 유대인 ‘이주’를 명령한다. 이 때 ‘이주’ 명령은 유대 사회에서 추방, 곧 가스실에서의 죽음을 의미했다. 이 ‘이주’ 대상자에 선정되는 사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예를 들어 나치 협력 기관에 고용되지 않은 경우, 그리고 특히 ‘옷차림이 지저분하고 추레한 사람, 거기다 면도까지 하지 않은 유대인은 곧장 가스실로 가는 줄에 가서 섰다(231). 특히 저자처럼 머리가 검었던 이는 수염이 자라 금방 지저분해져 보일까봐 하루에 두 번 면도를 하게 되었다 것이었다. 그러니까 게토에서 면도를 잘 하는 것은 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중요한 습관이었던 것이다. 미미한 사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특히 유대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이 에피소드를 통해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문득 대학시절 수강했던 화학수업 시간이 생각난다. 강의를 맡았던 한 노교수는 어느 날 자신이 겪은 한국전쟁에 관한 개인적인 체험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전쟁 중에 가족 상당수가 북한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 때 상당히 흥분하셨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전쟁이 끝난 지 4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그런 기억을 하나의 트라우마로 안고 살아오셨던 것 같다. 전쟁의 상흔을 가졌던 사람의 모습을 처음 접했던 기억이 난다. 저자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도 이런 맥락에서 이 경험을 분기점으로 하여 다른 인물이 된 것만 같다. 특히 마르셀은 연로하신 두 부모가 가스실로 가는 기차를 탈 때까지 부모를 배웅해야 했다. 어느 날 저자는 이 기차를 탈 뻔했던 아내를 구출하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극한의 경험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표현한다. “사형선고를 받고 가스실로 떠나는 열차를 바로 앞에서 본 사람은 그 상흔을 평생 안고 살아간다(240)고 말이다.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

저자는 게토에서 언제나 함께 하기로 약속하며 결혼했던 아내와 가스실로 향하게 될 열차로 가는 도중 극적으로 탈출했다. 이후 게토 지역을 탈출하고, 어느 폴란드 식자공 부부의 집에 숨어 나치의 폴란드 점령기를 보내면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저자는 참혹한 게토에서의 삶에도 사랑은 있었다고 증언한다. 다만 사랑하는 연인들을 매일 같이 매순간 짓누른 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내일도 살아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고 한다. 죽음의 공포 속에 내일이 없는 삶을 살아가야 했던 이들의 원체험은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각인되어 생존자들에게 평생 트라우마를 안겨주었을 것이다.

저자 마르셀은 전쟁을 겪고 살아남았지만 한 가지 의문을 끊임없이 되묻는다. “왜 하필 우리가 살아남았을까?(280면) ‘형은 왜 죽어야 했으며, 자신은 왜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말이다. 물론 이건 우연이긴 했지만 이후 70년 간 살면서 이 질문을 계속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런 경험 자체가 없는 나에게는 지나치게 단순화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나는 이를 일종의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으로 이해한다. 마르셀은 이 느낌을 이렇게도 표현하고 있다. “동포가 죽어갈 때 우연히 살아남은 사람은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272) 이러한 감정은 어떤 사고로 가족과 지인을 잃었을 때, 특히 현장에서 같은 경험을 한 생존자에게도 볼 수 있는 감정으로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가족이나 지인, 그리고 옆에 있던 사람들을 구할 수 없었다는 무기력감과 더불어 겪게 되는 일종의 죄책감 같은 것이 아닐까. 나는 나치 시대에 수용소에서 생존했던 또 다른 작가 프리모 레비의 증언에서도 생존자로서 수용소에서 죽어간 동포에 대한 부채의식을 읽은 기억이 있다.

휴대용 조국이 된 문학

괴테를 비롯한 대문호를 배출하고, 칸트와 헤겔과 같은 대철학자를 배출한 독일이 20세기에 ‘유대인 절멸’이라는 잔혹한 인간성의 극단을 낳았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 책을 읽으며 종종 떠올렸던 생각이었다. 20세기를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새겨진 집단적 트라우마로부터 저자를 구원했던 건 무엇보다 문학, 특히 독일 문학이었다. 나치 병사들이 유대인들에게 모욕과 굴욕을 안기고 수모를 주었을 때 저자는 문학을 통해 견디고 스스로를 돌볼 힘을 유지했던 것 같다. 특히 아내가 된 토지아와 문학을 이야기하며 기쁨을 느끼고, 문학을 알았던 이유로 게토에서 번역 일을 하며 버틸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게토에서 탈출하여 폴란드 부부 집에서 숨어있을 때에도 문학은 유용했다. 마르셀은 매일 밤 주인을 도와 일을 하면서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처럼 자신이 읽은 문학을 이용하여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자신의 민족을 핍박한, 그것도 절멸시키려 했던 국가의 언어를 모국어로 쓰면서, 이 언어로 이루어진 문학을 사랑하고 알리는 역할을 했던 저자의 입장이었다. 저자에게 이런 상황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자. 한 재일동포 작가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모국어로 익히고 야만의 시대를 겪고 살아남았다고 말이다. 그리고 전후 일본 문학을 예찬하고, 이를 널리 알리는데 평생을 바친 결과 일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면 마르셀의 경우와 비교하여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국인의 정서로 바라보았을 때 이런 상황은 사실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저자가 폴란드에서 태어났음에도, 마르셀에게 독일어는 모국어나 다름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10대가 되기 전에 이미 독일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독일어로 독서를 시작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유명 평론가로서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와 교류한 경험을 기록하는데, 그 중에서 20세기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명인 예후디 메뉴인과의 인연을 기록한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1940년대 바르샤바 게토 시절, 아내 토지아와 함께 이웃집에 초대되었는데, 음반을 통해 메뉴인의 연주를 처음 들었다고 한다. 당장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시기에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처음 듣는 메뉴인의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였다고 증언한다. 저자뿐만 아니라 당시에 이 음악을 들었던 아내와 이웃들은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잠시나마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저자는 바르샤바에서 메뉴인의 연주를 직접 보았고, 1960년 초에는 열차에서 우연히 만나 메뉴인과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1978년 가을, 중국 난징의 길거리에서 우연히 메뉴인을 만나 나눈 이야기가 특히 흥미롭다. 메뉴인은 마르셀에게 이렇게 언급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유대인이군요. (...) 우리가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면서 독일 음악을 연주하고 독일 문학을 전파하는 것, 그건 정말 좋은 일이죠.(476) 고국과 멀리 떨어진 도시 한복판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다 서로 말없이 우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을 두 사람을 상상해 본다. 독일어가 모국어인 유대인 예술가 혹은 평론가의 심정이란 이런 것일까.

저자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때 반복해서 언급한 것은 문학에 대한 사랑이었다. 폴란드가 나치로부터 해방된 후 저자는 곧바로 아내와 폴란드 장교로 입대했다. 이후 정보장교 및 영사관 업무로 베를린과 영국을 다녀오고 귀국했지만, 폴란드 공산당 노선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감되기도 했다. 이후 출판사에 배치되어 독일문학 담당 편집자로 일하며, 독일 작가들과도 교류하기 시작했다. 이 기회는 이후에 마르셀이 ‘연구여행’을 가장하여 독일로 망명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독일에서는 생존을 위해 하루아침에 문학평론가로서 본격적으로 경력을 시작하게 되었다. 저자가 기록한 이런 에피소드를 따라가 보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삶의 ‘우연’이 아닌 ‘운명’이라는 것이 정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는 “내가 가는 곳에는 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독일문학이 있었다(274)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인상도 저자의 탁월한 글쓰기 솜씨에 힘입은바 크겠지만 말이다. 마르셀에게 문학은 그의 삶을 이끌어준 신탁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문학, 그것도 독일 문학이 내 휴대용 조국(335)이라고 했다. 조국 폴란드를 떠나 독일로 망명한 사건도 그에겐 독일 문학과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을 말해주는 것 같다. 20세기 초에 태어나 방랑하던 유대인들, 특히 작가나 예술가들에게 문학 또는 예술은 정말로 이들의 휴대용 조국이었다는 견해에 공감할 수 있었다.

문학비평가라는 자리는 태생적으로 작가들과 가까워지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 작가의 모든 작품이 늘 좋은 것도 아니며, 비평가의 열렬한 찬사와 호평에도 불구하고 평을 듣는 작가들은 으레 비평가가 비판한 것을 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평론가로서 그가 많은 작가들과 경험했던 우정과 반목을 기록한다. 저자는 비평가와 작가와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한다. “작가와 평론가의 관계는 평론가가 작가의 최근작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471) 그러니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 하인리히 뵐이나 지크프리트 렌츠와 같이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경우도 있지만, 페터 한트케처럼 저자를 증오한 나머지 심지어 마르셀이 죽기를 바랄정도였던 관계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무엇보다 우선했던 것은 자신의 삶에 기쁨을 주는 존재로서의 문학, 곧 문학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에 대해 마르셀은 이렇게 답했다. “아무리 되풀이해 말해도 지나치지 않은 말, 그것은 바로 문학에 대한 사랑 없이는 비평도 없다는 말이다.(393) 저자에게 문학은 ‘세계 변화를 목표로 한’ 거창한 기획으로서의 문학이 아니었다. 대신 문학이 자신에게 주는 기쁨을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길 원했던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아내와의 대화였다. 저자는 아내의 80세 생일날 자신의 자서전을 마무리하는 말을 생각했다며, 조용히 시집을 읽던 아내에게 머뭇거리다 알려준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죽음의 고비를 함께 넘고 60년을 지켜보면서 배우자를 바라보는 느낌이란 어떤 것일까 상상해보았다. 두 사람은 가스실로 떠나는 열차로 가는 행렬에서 극적으로 함께 탈출했고, 극도의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를 함께 겪었다. 게다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부모들을 배웅해야 했다. 또 수많은 지인들이 가스실에서 사망했던 반면, 자신들은 왜 살아남게 되었는지를 평생 물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외도 경험도 솔직하게 밝히고 있는데, 아내를 힘들게 했던 이런 경험도 결국 두 사람을 헤어지게 하지는 못했다. 이들은 참혹한 시기를 함께하면서도 절대로 헤어지지 않기로 약속했고, 죽음이 다가올 때까지도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마르셀이 마지막에 사용한 문구는 “꿈이야, 현실일 리가 없어, 우리 둘이 함께 있다니.(497)였다. 이 소박한 문구처럼, 저자는 게토에서 탈출할 때에 나이든 배우자가 생일날 편안히 시집을 읽는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말 그대로 두 사람은 꿈같은 삶을 살아왔다고 서로 느꼈을 법하다. 마지막 장면까지도 마르셀의 자서전은 감동적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이 책에는 동료 독일 작가들의 언행과 ‘역사가 논쟁’을 통해 전후 독일 지식인 사회에 지배적이었던 독일인들의 견해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가해국의 지식인들이 갖기 쉬운 수정주의적 역사관을 비롯하여, 피해자의 관점에 공감하지 못하고 이들의 시선에서 바라보지 못했던 독일인들의 시선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개인의 내밀하고 자세한 기록이면서, 동시에 20세기에 인간이 경험할 수 있었던 가장 참혹한 역사를 겪은 인물의 생생한 역사적 증언이기도 하다. 나는 저자가 자신의 고통과 두려움에 맞서 이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느낀다. 우리가 과거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 사회에 살고 있다면, 바로 이런 인물들의 삶과 용기에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발췌문 모음]

[1] "1958년 10월 말, 알고이 지방의 그로스홀츠로이테에서 ‘47그룹‘총회가 열렸다."(11)

 

[2] "야만과 잔혹함이 우연이나 자의와 한패가 될 때 의미와 논리를 따지는 질문은 현실을 모르는 한가한 생각이라는 것을 그때만 해도 우리는 알지 못했다."(169)

 

[3] "게토에서의 사랑을 매일 같이 매순간 짓누른 것은 우리가 내일도 살아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곳에서의 사랑은 불안하고, 재빠르고, 초조하고, 성급했다. 그건 굶주림과 발진티푸스의 시대, 끔찍한 공포와 처절한 굴욕의 시대에 나누는 사랑이었다."(196)

 

[4] "당시 ‘옷차림이 지저분하고 추레한 사람, 거기다 면도까지 하지 않은 유대인은 곧장 가스실로 가는 줄에 가서 섰다. 나처럼 머리가 검은 사람은 당시 하루에 두번 면도를 했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매일 두 번 씩 수염을 깎는다."(231)

 

[5] "부모님을 연세 때문에라도 - 어머니는 58세, 아버지는 62세 였다 - ‘생명번호‘를 받을 가능성이 없었다. (...) 그 때가 부모님을 뵙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234)

 

[6] "사형선고를 받고 가스실로 떠나는 열차를 바로 앞에서 본 사람은 그 상흔을 평생 안고 살아간다."(240)

 

[7] "굶주림보다 무서운 건 죽음의 공포였고, 죽음의 공포보다 무서운 건 끝날 줄 모르는 굴욕이었다."(254)

 

[8] "그 때 나는 정확히 몰랐지만 예감은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동포가 죽어갈 때 우연히 살아남은 사람은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272)

 

[9] "내가 가는 곳에는 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독일문학이 있었다."(274)

 

[10] "죽음의 공포는 수년 동안 우리의 일상사였다. 그런데 전쟁의 끝이 다가올수록 해방된 우리를 더 무겁게 짓누르는 의문이 있었다. 아주 단순한 의문이었다. 왜? 왜 하필 우리가 살아남았을까?"(280)

 

[11] "문학이 있어야 비평이 생기는 것이다. 사실이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문학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작가들에게 우리가 빚지고 있는 것을 과소평가하거나 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308)

 

[12] "훌륭한 평론가란 언제나 명료함을 위해 글을 단순하게 쓰는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자신이 전달하는 내용을 알기 쉽고 투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위태로울 만큼 극단까지 밀고 나갔다."(392)

 

[13] "내 경우야말로 취미와 일, 열정과 직업이 완전히 일치한 사례였다."(442)

 

[14] "작가와 평론가의 관계는 평론가가 작가의 최근작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471)

 

[15] "나는 세계 변화를 목표로 하는 문학에는 전혀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런 문학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480)

 

[16] "꿈이야, 현실일 리가 없어.

우리 둘이 함께 있다니."(496)

- 아내의 80세 생일날 떠올린 문구

‘경계를 넘다, 경계에서 저항하다’ (다시 쓰기 혹은 속편)

 

‘경계를 넘다, 경계에서 저항하다’

(다시 쓰기 혹은 속편)

- 《야만인을 기다리며》(2019), 《시간 時間》(2020)을 읽고

 

작년 말에 일러스트 《모비 딕》(2019), 그래픽 노블 《모비 딕》(2019), 《야만인을 기다리며》(2019)를 묶어서 간단한 리뷰를 써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오늘은 《모비 딕》을 제외하고, 일본 작가 혼타 요시에의 장편소설 《시간 時間》(2020)을 더하여, 전에 썼던 리뷰의 구조를 그대로 차용해서 리뷰 다시쓰기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번 글은 큰 틀에서 보면 작가 또는 작중 인물의 ‘경계 넘기’와 ‘경계에서 저항하기’의 구도 속에서 다른 두 소설에 대해 다시 써보려고 했던 시도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J.M. 쿳시의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경우, 이전의 리뷰에서 대부분 가져오되, 홋타 요시에《시간 時間》과 비교해보며 읽어본 것이다.

 

‘경계를 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백인’ 작가 쿳시는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이었던 ‘아파르트헤이트’가 법률로 공식화된 1948년보다 조금 이른 1940년 태어났다. 그리고 이 소설은 야만적인 인종차별 정책이 한창이던 1980년에 출간되었다. 외견상 소설의 시간 및 공간상의 배경은 배제되어 있지만, ‘작가의 시공간’을 염두에 두고 읽어 나갈 수 있다. 소설을 관통하는 배경은 제도의 경계 밖에 있던 존재를 ‘야만’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정복하고자 했던 ‘문명’의 제국주의적 맥락과 닿아있다. 백인 작가 쿳시는 ‘내부고발자의 시선’으로 문명과 야만의 경계 넘기를 시도하며 화자의 입으로 문명의 야만성을 고발한다.

 

소설의 화자는 제3제국에 고용되어 변방에서 30년을 보낸 치안판사다. 이 변방은 제국이 구축한 식민지에 요새를 만들어 스스로를 ‘가둔’ 곳이기도 하다. 치안판사는 변방에서 ‘아무 일 없이’ 권태롭지만 조용하게 살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취미로 유목민들의 폐허를 발굴하고, 이따금 유곽을 들르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앞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제3제국 소속 경찰 졸 대령이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뒤바뀌어 버린다. 졸 대령의 임무는 ‘야만인’들을 정복하고 몰아내어 야만인들의 위협으로부터 ‘문명’ 세계를 보호하는 일이었다.

 

제3제국 경찰 졸 대령이 보이지 않는 유목민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르고 잡아들였던 것은 무지로 인한 공포가 만들어 낸 증오 때문이다. 치안판사가 제국의 경계를 넘어가 졸 대령이 잡아들였던 유목민 여자를 유목민에게 넘겨주고 복귀하자, 치안판사는 ‘적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수감된다. 이처럼 사회의 질서,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계를 지우고, 경계의 ‘안쪽’에 자리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치안판사는 졸 대령이야말로 ‘문명’에서 온 ‘야만인’이라고 비판하고, 경계의 어느 쪽에 서기를 거부한다. 그는 이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꿈꾸었기에 고초를 당해야 했다.

 

치안판사는 ‘역사의 바깥에서 살고 싶었다. 제국이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아니 사라져버린 백성에게조차 강요하는 걸 원치 않았다. 이것이 치욕의 원인이라고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254)라고 지나간 시간을 회상한다. 그렇다면 치안판사가 ‘야만인을 기다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기록된 역사의 표면 아래에 묻힌, 진정한 삶과 마주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문명이 야만으로 규정한 유목민의 시간은 문명과 상관없이 도도히 흐른다. 계절의 법칙에 따라 오고 가는 ‘아이들과 같은 시간’ 속의 삶을 살 뿐이다. 제3제국의 경찰의 만행으로 유목민의 삶이 파괴되고 땅은 생산력을 잃어버린다. 판사는 건강하고 진솔한 삶을 바랬기에 부조리한 이데올로기, 관습의 억압을 통과하지 못하고 수모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제국이 보여주는 무자비한 만행을 지켜보는 치안판사의 시선은 인종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슈미얼의 시선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앞선 리뷰에서 언급한 《모비 딕》에서는 문명화된 퀘이커교도가 소유하여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포경선의 이름이 백인들의 정복활동으로 멸종한 인디언 부족 ‘피쿼드’에서 따온 것임을 상기해보았다. ‘문명’화된 백인들이 ‘야만인들’을 몰아내고자 스스로가 ‘야만인’이 되어버린 역설을 두 소설에서 발견한다. 쿳시가 소설에서 구체적인 시공간을 배제한 이유도 제3국의 하수인들이 보여주는 행동이 특정 시기, 특정 사회의 문제만이 아님을 제시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 문제는 백인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문명사회가 지니는 편견과 억압적 관습에 관한 것이며, 쿳시는 이 문제의 본질을 예리하게 파헤친다.

 

쿳시의 소설에서 검은 선글래스를 쓰고 나타난 ‘문명인‘의 모습은 일본 작가 홋타 요시에의 《시간 時間》에서 ‘검은 뿔테 로이드 안경’을 쓴 일본인 장교 기리노 중위와 오버랩 된다. 이 소설의 시공간은 1937년 중국 난징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중국을 점령한 일본군이 수 개월간 자행한 학살사건이 소설의 배경이다. 소설의 화자는 중국군 정보 장교 천잉디. 그는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했을 때, 하인까지 데리고 모두 탈출한 형의 가족을 배웅했다. 반면 화자는 탈출하지 않고 집에 남아 일본군에 의해 임신한 아내와 아들을 잃는 고초를 겪는다. 소설은 화자가 대학살 전후 1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기록한 일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작가의 색다른 ‘경계 넘기’에 있다. 작가 요시에는 대학을 졸업한 뒤, 태평양전쟁 당시 징집되어 중국에서 복무 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복자’가 아닌 ‘피정복자’의 시선에서 소설을 써내려갔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다른 역사소설과 다른 이 소설만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소설의 몇 군데에 일본인의 무의식이 드러나긴 하지만, 작가는 ‘입장(인식)의 경계를 넘어’ 피정복자의 시선에서 바라보고자 했다. 작가가 이러한 시도를 하지 않고, 몇 개월 만에 자국의 군대가 30만 명의 중국인을 학살했던 만행을 고발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길가에 있던 시체의 목을 물어뜯던 짐승들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경계에서 저항하다’

 

홋타 요시에의 소설 《시간 時間》은 1955년에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나에게도 충격이자 울림으로 다가오지만,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기에 가해국의 작가가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상상해보려 했다. 작가의 ‘경계 넘기’는 목숨을 거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작가의 ‘경계 넘기’와 화자인 천잉디의 ‘경계에서 저항하기’가 대비되는 지점에도 주목해본다. 천잉디는 인간비인간의 경계, 인간(사랑)물질의 수준(질서/비인간성) 사이의 경계 넘기를 필사적으로 거부하고, 인간으로 남길 선택하는 것이다. 화자는 자신의 집을 점거한 기리노 중위의 하인으로 지내면서도, 엄혹한 ‘운명 속에서 익사해서는 안 된다(138)고 다짐하며, ‘노예적인 숙명과 파괴적인 인생관에 굴종하지 않기(109)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쿳시의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도 치안판사는 ‘경계에서 저항하기’를 시도한다. 쿳시가 ‘인식의 경계 넘기’를 시도하는 반면, 소설의 화자는 문명과 야만, 비인간과 인간 사이의 경계에서 저항한다. 치안판사는 제3제국 경찰들에게 몽둥이로 얻어맞아 손이 부러지고, 코가 부러진 상태에서도, 잡혀 와서 노예처럼 끌려온 유목민들을 보고 “우리는 위대한 생명의 기적이야! (...) 이 사람들을 봐라! (...) 사람들이다!(177)라고 항변한다. 그리고 치안판사가 “나와 졸 대령은 다르다(76)라고 생각했을 때의 인식은 《시간 時間》에서 천잉디가 인간/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넘지 않고자 했던 양심이 내는 소리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시간 時間》의 마지막에 이르러 화자는 ‘비인간적인 세상과 인간의 세상, 그 둘 사이의 경계를 헤매고(125) 갖은 고초를 겪고 살아남아 회복 중이던 사촌 동생 양양에게서 생명의 강한 회복성과 희망을 발견한다. 인간은 각자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야 해야 하는 것(250)이라고 보고, 엄연한 생의 질서를 한 번 더 믿기를, 그리고 인간의 존엄에 대해 한 번 더 의지하고자 한다. 곡식을 수확하는 것처럼 ‘인생은 몇 번이라도 발견되는 것(250)을 믿는 것이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마지막에서는 야만의 시기가 지나가고 다시 평온을 되찾은 변방에 첫 눈이 내린다. 치안판사가 눈사람을 만드는데 열중해있는 아이들을 향해 나아가는 장면은 긴 여운을 남긴다.

 

지금까지 전편의 리뷰와 마찬가지로 ‘경계 넘기’ 그리고 ‘경계에서 저항하기’의 관점에서, 인종차별과 대학살을 다룬 《야만인을 기다리며》《시간 時間》을 함께 읽어보고자 했다. 흥미로웠던 것은 이 작품들에서 파악되는 대립되는 세계가 어떤 경계에서 충돌하되 어느 접점, 곧 정지와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지난 리뷰에서 읽어본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떠올릴 때, 나는 이 소설의 이야기가 끝나면 지면의 한계를 벗어나 또 다시 바다에서의 삶이 이어질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아가 이것이 ‘경계에서의 저항하기’를 너머 ‘경계를 무화하기’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언급했다. 마찬가지로 《야만인을 기다리며》《시간》에서는 야만적인 문명에 의해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가 훼손되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여기에 저항하는 인간의 ‘꿈틀거림’을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은 계속되는 삶과 질서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다시 발견하는 일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 다시 해가 뜬다는 엄연한 질서를 한 번 더 믿는 것이라 믿었던 천잉디의 독백처럼 말이다.

 

책을 덮고 나는 성년이 한참 지나 읽기 시작한 책읽기, 그리고 소설 읽기란 내게 무엇을 의미할까 생각해보았다. 책을 펼칠 때마다 나는 책을 경계로 나와 다른 세계와 마주했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아마도 어떤 종류의 ‘경계’에 다가가고, 때론 이를 넘는 시도를 상상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이 작업이 경계의 자리를 ‘선택’하거나 혹은 그 경계를 ‘무화’시키는 노력을 요구하기도 할 것이다. 문학작품에서 이질적인 두 세계가 있을 때, 두 세계는 으레 그 경계에서 팽팽한 긴장 관계를 이루며 존재한다. 이 세계의 ‘안과 밖’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내가 ‘경계의 자리’를 가늠하고, 그 경계를 넘을 것인지, 혹은 경계의 어디에 설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묻는 작업인지 모른다.

 

 

 

‘한 아이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며’ - ‘아이들은 영혼에 바르는 연고’임을 잊지 말라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

: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전기

옌스 안데르센(Astrid Lindgren) 지음 | 김경희 옮김 | [창비]

 

한 아이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며’  - ‘아이들은 영혼에 바르는 연고’임을 잊지 말라

 

나는 결혼할 때 텔레비전을 사지 않았다. 여러 집을 전전하고 현재 살고 있는 집에는 부엌에 인터넷으로 연결된 테블릿 크기의 티비가 설치되어 있어서 가끔씩 주방에 앉아 TV를 본다. 보통 TV를 보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가끔 뉴스를 볼 때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자주 접하게 되는지 깨닫고 놀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제는 뉴스를 볼 때마다 충격을 많이 받고, 심리적으로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지금 한 아이가 학대받아 사망한 일로 수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다. 나는 어제 저녁에나 뉴스를 보면서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런데 어제 본 뉴스시간에는 아이의 죽음뿐만 아니라, 차에 묶여 끌려 다니다 죽은 강아지에 대한 뉴스, 음주 운전 차에 치여 열심히 내일을 준비하던 젊은 여성이 사망한 사건 등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요즘 TV를 볼 때마다 나는 지금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이 아닌지 착각할 정도가 되었다. 매일 TV를 통해 뉴스를 보는 사람이라면 이미 이런 뉴스에 익숙해져있겠지만, 가끔씩 TV를 보는 사람이 이런 뉴스를, 그것도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한꺼번에 접하게 얼마나 충격을 받고 스트레스를 받을지 상상해보라. 어제는 뉴스를 보면서 정말 숨을 쉬기 힘들 정도였다.

 

나는 원래 새해가 되면 ‘삐삐롱 스타킹’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전기에 대해 좀 밝은 독후기를 작성해볼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에 겪은 개인적인 아픔과 시련을 딛고 많은 이들이 존경할만한 삶을 살았던 작가로서 말이다. 하지만 한 아이의 충격적인 죽음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기가 힘들어졌다. 다만 이 사건과 관련해서 다시금 린드그렌을 떠올렸다. 그녀는 보통의 부모들처럼 아이들의 심정과 미래를 고민하고 걱정하던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린드그렌은 단순히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캐릭터 ‘삐삐’를 창조한 아동문학 작가로 정리되는 인물이 아니다. 이 전기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을 읽고나면, 린드그렌이 인간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고, 매일 용감하고 진실하게 삶을 살았으며, 아이와 젊은이들의 미래를 고민하고 걱정했던 어른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 책의 작가 옌스 안데르센은 동화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전기와 프레데릭 왕세자의 전기를 쓰기도 했던 덴마크의 전기 작가라고 한다.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성과 같아서 그의 후손이거나 친척이 아닐까 추축해본다.

 

뉴스를 통해 한 아이의 안타까운 사망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이 책이 생각났고, 책의 제목이 된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이란 문구를 떠올렸다. 전기에 따르면 이 문구는 린드그렌의 동화 《미오, 나의 미오》에서 주인공들이 당면한 위험이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기적을 기대하며 암송하는 기도문의 일부였다. 사망하기 전까지 학대받았던 아이는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지 상상하기 힘들다. 매순간 여기를 벗어나게 해달라는 바램만을 갖지 않았을까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해볼 뿐이다. 아이들의 작은 목소리를 듣는 일은 어른들의 책임이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의 기도를 외면했던 ‘침묵의 카르텔’의 일부라고 해도 변명하기 힘들 것 같다.

 

린드그렌은 아동을 위한 작품에서도 삶의 주요 문제들, 이를테면 고독, 고립, 어둠, 죽음, 슬픔과 같은 삶의 보편적인 고민들을 담아, 아이들과 함께 생각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어른으로서 우리가 염려하듯이 ‘아이들이니까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이르다’, 라고 동화에서 배제해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린드그렌은 ‘합당한 방식‘으로 이런 주제들을 다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아직은 익숙하지 않지만 이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대하고, 아이들이 이런 충격에도 각자 나름대로 이를 소화해 나간다는 믿음을 견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린드그렌의 견해에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반대할 교육자들도 분명히 많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아이들을 단순히 미성숙한 인간으로만 보는 시각도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현대 사회에서보다도 더 삶과 죽음이 가까이 있었던 조상들의 삶을 떠올려보자. 아이들이라도 늘 부모나, 형제자매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일이다. 이에 대해 린드그렌의 생각을 좀 더 들어보자.

 

예술적으로 합당한 방법이라면 이야기를 통해 죽음이라는 주제도 진솔하게 다룰 수 있으며, 이를 소화해 내는 것은 어린이의 몫이다. 죽음과 사랑은 나이를 막론하고 인류의 경험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어린이도 예술을 통한 충격을 경험해야 한다. 이것은 잠든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일이다. 누구나 이따금 눈물 흘리고 두려움에 떨 필요가 있다.(337)

 

젊은 시절 첫 아이를 낳고 곧바로 고통 속에서 헤어졌던 경험, 사실상 싱글맘으로서 생계를 위해 분투했던 린드그렌의 청년기를 떠올려본다. 이 때의 고통스럽고도 생생한 체험은 이후 작가가 어떤 삶을 살아야하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린드그린은 앞서 언급한 《미오, 나의 미오》에서 ‘슬픔새’와 ‘노래새’를 언급하는데, “우리 머리 위로 슬픔새가 날아다니지 못하게 할 수는 없지만, 머리에 둥지를 틀지 못하게 할 수는 있어요(291)라고 자신의 어린 펜팔 수신인에게 말해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린드그렌은 어린 상대에게도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며 이들이 삶의 진실을 배우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이를 소화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린드그린은 특히 아이들에 대해, 그리고 이들의 교육과 미래에 대해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 같다. ‘세계의 운명은 요람에서 결정 된다(276)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고, 특히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녀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던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니까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마음가짐은 무엇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 지에도 연장되어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던 작가였다. 린드그렌이 지녔던 신념, ‘우리는 남들이 우리에게 해주길 바라는 대로 그들을 대해야 한다’, 라는 입장은 나이와 지역, 계급 및 시대와 무관하게 진리일 것이다. 이 진리가 부모와 자식 간에도 성립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린드그린에게 글쓰기는 무엇보다 특별했다. 특히 결코 만만치 않았던 그녀의 삶에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행복을 주는 행위이기도 했다. 린드그렌은 “어떤 때는 행복하고 어떤 대는 슬프다. 나는 글을 쓰며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290)라고 했다. 그녀의 동화를 보면 언제나 행복했던 시기를 보낸 사람이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개인적으로 힘든 시련과 2차 대전을 겪은 인물이다. 그면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서 행복을 찾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전기를 통틀어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린드그렌이 삶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그냥 살아갈 뿐입니다. (...) 나는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이 너무도 신나고 풍성해서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고민할 겨를이 없어요. 하루하루가 가져오는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요. 매일을 마치 삶의 마지막 날처럼 여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늘 하루가 인생이다.’ 하지만 가끔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데 그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 실제로 삶이란 재빠르게 스쳐가는 부조리이며, 그 후에 찾아오는 것은 커다란 침묵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짧은 시간 동안에는 최대한 풍성하게 채워야 합니다.(449)

 

린드그렌의 전기에는 인생의 후반에 작가가 실천적인 활동가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력들이 소개되어 있다. 그녀는 인본주의자로서, 문명비판론자로서, 또 정치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다만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는 어른으로서, 그리고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작가를 계속 따라가 보려 한다.

 

1973년에 한 매체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린드그렌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어린이가 최소한 한 명의 어른과 바람직한 정서적 유대를 가져야만 안전함을 느낄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삶을 견디기 어려울 거라고 나는 믿습니다.(383)

 

그녀가 공개적인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는데, 아마도 갓 태어난 자신의 아기를 멀리 떨어진 위탁 가정에 맡기고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던 몇 년 간의 절실한 체험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당장 내일이 불안한 나날 속에서 매순간 엄마와 떨어져서 지내야 했던 아이의 심정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책을 읽으면서 나는 린드그렌이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간’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전기의 작가 역시 린드그렌 철학의 핵심은 ‘살아가는 동안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449)이라고 강조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른과 정서적으로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한 아이, 아니 심지어 학대받고 방치된 아이의 삶이란 어떤 것이었을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다. 이 아이는 린드그렌이 아이들로부터 기대했던, 슬픔과 고독 속에서도 ‘매 순간 (삶에) 집중하면서 우리가 진실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느껴볼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차가운 땅속에 묻힌 아이에게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었을까. 린그드렌은 학대를 하고 방치했던 양부모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의 상처를 얻고 웃음을 잃어가던 아이를 외면한 어른들에 대해 분노했을 것 같다. 나아가, 아이에게는 고독과 외로움의 상처에 대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위로해주고 싶어 했을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고독 속에 갇혀 있지. 인간은 누구나 외롭단다”, “결국 모든 사람은 다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작고 외로운 존재야(447)라고 말이다. 린드그렌이 창조해낸 ‘삐삐’는 어쩌면 물리적으로, 감정적으로 방치되고 심지어 학대받은 아이들이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지키려고 했던 생에 대한 의지의 은유적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이를 학대하고 방치한 양부모뿐만 아니라, 이를 알고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은 입양기관, 그리고 신고를 받고도 이런 상황을 방치한 경찰들, 그리고 아동학대법방지를 위한 법제정에 한동안 무관심했던 국회위원들을 비롯한 기득권을 가진 모든 어른들, 이 모두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방치했다면, 우리 어른들은 가해자의 편에 가까운 혹은 그 일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들에게 린드그렌의 한 마디를 전해주고 싶다. “아이들은 영혼에 바르는 연고(368)임을 잊지 말라고. 아이들이야말로 오히려 병든 어른들의 영혼을 치유해줄 수 있는 귀한 존재들이라고 말이다. 한번도 ‘진실로 살아있음과 유대감’을 느껴보지 못했을 아이의 죽음을 애도한다.

"행복은 타인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221)



"교육에서 자유란 안정을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 대한 자녀의 존중과 애정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고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녀를 존중하는 것입니다."(250)



"어떤 때는 행복하고 어떤 때는 슬프다. 난 글을 쓰며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290)

"이건 마치 오늘 하루가 일생의 전부인 양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야. 매 순간 집중하면서 우리가 진실로 살아 있음을 느껴야 한다는 거지."(348)

- 열일곱살의 린드그렌에게 작가 엘렌 케이가 해준 토마스 토릴드의 격언

"모든 어린이가 최소한 한 명의 어른과 바람직한 정서적 유대를 가져야만 안전함을 느낄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삶을 견디기 어려울 거라고 나는 믿습니다."(383)

"우리 모두는 자신의 고독 속에 갇혀 있지. 인간은 누구나 외롭단다."

"결국 모든 사람은 다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작고 외로운 존재야."(447)

"‘오늘 하루가 인생이다.‘ (...) 실제로 삶이란 재빠르게 스쳐 가는 부조리이며, 그 후에 찾아오는 것은 커다란 침묵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짧은 시간 동안에는 삶을 최대한 풍성하게 채워야 합니다."(449)

-환갑의 린드그렌이 기자에게 해준 말

"아이들은 영혼에 바르는 연고야"(368)

- 손주들과 함께하던 시기,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쓴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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