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한 20세기를 살았던 문학비평가의 자서전’ - 《나의 인생》
《나의 인생 Mein Leben》
: 어느 비평가의 유례없는 삶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Marcel Reich-Ranicki) 지음 | 이기숙 옮김 | [문학동네]
‘파란만장한 20세기를 살았던 문학비평가의 자서전’
80세가 되도록 하루에 두 번 씩 면도하는 노인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태어나 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20세기를 마무리하던 1999년에 자신의 삶을 기록한 문학비평가가 있다. 그런데 그는 이 책을 집필하던 당시까지도 하루에 두 번 씩 면도한다고 언급했다. 다소 강박적으로 보이는 이런 행동을 보였던 이유가 뭘까? 그 실마리를 찾으려면 약 60년 전에 저자가 겪었던 체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우선 회고록의 제목은 《나의 인생》이다. 저자는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라는 인물이며, 20세기 독일 최고의 문학평론가였다. 좀 더 단서를 추가하자면, 그는 폴란드에서 출생한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나치 점령기에 폴란드의 유명한 바르샤바 게토에서 있었고, 기적적으로 탈출하여 살아남았던 인물이다.
그러니까 마르셀이 80세가 다 되도록 하루에 두 번 면도를 하게 된 이유는 바로 게토에서의 체험과 관련이 있었다. 나치에 의해 바르샤바 게토에서 수용자로 생활하던 어느 날 나치는 유대인 ‘이주’를 명령한다. 이 때 ‘이주’ 명령은 유대 사회에서 추방, 곧 가스실에서의 죽음을 의미했다. 이 ‘이주’ 대상자에 선정되는 사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예를 들어 나치 협력 기관에 고용되지 않은 경우, 그리고 특히 ‘옷차림이 지저분하고 추레한 사람, 거기다 면도까지 하지 않은 유대인은 곧장 가스실로 가는 줄에 가서 섰다’(231). 특히 저자처럼 머리가 검었던 이는 수염이 자라 금방 지저분해져 보일까봐 하루에 두 번 면도를 하게 되었다 것이었다. 그러니까 게토에서 면도를 잘 하는 것은 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중요한 습관이었던 것이다. 미미한 사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특히 유대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이 에피소드를 통해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문득 대학시절 수강했던 화학수업 시간이 생각난다. 강의를 맡았던 한 노교수는 어느 날 자신이 겪은 한국전쟁에 관한 개인적인 체험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전쟁 중에 가족 상당수가 북한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 때 상당히 흥분하셨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전쟁이 끝난 지 4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그런 기억을 하나의 트라우마로 안고 살아오셨던 것 같다. 전쟁의 상흔을 가졌던 사람의 모습을 처음 접했던 기억이 난다. 저자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도 이런 맥락에서 이 경험을 분기점으로 하여 다른 인물이 된 것만 같다. 특히 마르셀은 연로하신 두 부모가 가스실로 가는 기차를 탈 때까지 부모를 배웅해야 했다. 어느 날 저자는 이 기차를 탈 뻔했던 아내를 구출하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극한의 경험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표현한다. “사형선고를 받고 가스실로 떠나는 열차를 바로 앞에서 본 사람은 그 상흔을 평생 안고 살아간다”(240)고 말이다.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
저자는 게토에서 언제나 함께 하기로 약속하며 결혼했던 아내와 가스실로 향하게 될 열차로 가는 도중 극적으로 탈출했다. 이후 게토 지역을 탈출하고, 어느 폴란드 식자공 부부의 집에 숨어 나치의 폴란드 점령기를 보내면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저자는 참혹한 게토에서의 삶에도 사랑은 있었다고 증언한다. 다만 사랑하는 연인들을 매일 같이 매순간 짓누른 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내일도 살아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고 한다. 죽음의 공포 속에 내일이 없는 삶을 살아가야 했던 이들의 원체험은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각인되어 생존자들에게 평생 트라우마를 안겨주었을 것이다.
저자 마르셀은 전쟁을 겪고 살아남았지만 한 가지 의문을 끊임없이 되묻는다. “왜 하필 우리가 살아남았을까?”(280면) ‘형은 왜 죽어야 했으며, 자신은 왜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말이다. 물론 이건 우연이긴 했지만 이후 70년 간 살면서 이 질문을 계속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런 경험 자체가 없는 나에게는 지나치게 단순화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나는 이를 일종의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으로 이해한다. 마르셀은 이 느낌을 이렇게도 표현하고 있다. “동포가 죽어갈 때 우연히 살아남은 사람은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272) 이러한 감정은 어떤 사고로 가족과 지인을 잃었을 때, 특히 현장에서 같은 경험을 한 생존자에게도 볼 수 있는 감정으로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가족이나 지인, 그리고 옆에 있던 사람들을 구할 수 없었다는 무기력감과 더불어 겪게 되는 일종의 죄책감 같은 것이 아닐까. 나는 나치 시대에 수용소에서 생존했던 또 다른 작가 프리모 레비의 증언에서도 생존자로서 수용소에서 죽어간 동포에 대한 부채의식을 읽은 기억이 있다.
휴대용 조국이 된 문학
괴테를 비롯한 대문호를 배출하고, 칸트와 헤겔과 같은 대철학자를 배출한 독일이 20세기에 ‘유대인 절멸’이라는 잔혹한 인간성의 극단을 낳았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 책을 읽으며 종종 떠올렸던 생각이었다. 20세기를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새겨진 집단적 트라우마로부터 저자를 구원했던 건 무엇보다 문학, 특히 독일 문학이었다. 나치 병사들이 유대인들에게 모욕과 굴욕을 안기고 수모를 주었을 때 저자는 문학을 통해 견디고 스스로를 돌볼 힘을 유지했던 것 같다. 특히 아내가 된 토지아와 문학을 이야기하며 기쁨을 느끼고, 문학을 알았던 이유로 게토에서 번역 일을 하며 버틸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게토에서 탈출하여 폴란드 부부 집에서 숨어있을 때에도 문학은 유용했다. 마르셀은 매일 밤 주인을 도와 일을 하면서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처럼 자신이 읽은 문학을 이용하여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자신의 민족을 핍박한, 그것도 절멸시키려 했던 국가의 언어를 모국어로 쓰면서, 이 언어로 이루어진 문학을 사랑하고 알리는 역할을 했던 저자의 입장이었다. 저자에게 이런 상황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자. 한 재일동포 작가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모국어로 익히고 야만의 시대를 겪고 살아남았다고 말이다. 그리고 전후 일본 문학을 예찬하고, 이를 널리 알리는데 평생을 바친 결과 일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면 마르셀의 경우와 비교하여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국인의 정서로 바라보았을 때 이런 상황은 사실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저자가 폴란드에서 태어났음에도, 마르셀에게 독일어는 모국어나 다름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10대가 되기 전에 이미 독일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독일어로 독서를 시작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유명 평론가로서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와 교류한 경험을 기록하는데, 그 중에서 20세기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명인 예후디 메뉴인과의 인연을 기록한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1940년대 바르샤바 게토 시절, 아내 토지아와 함께 이웃집에 초대되었는데, 음반을 통해 메뉴인의 연주를 처음 들었다고 한다. 당장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시기에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처음 듣는 메뉴인의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였다고 증언한다. 저자뿐만 아니라 당시에 이 음악을 들었던 아내와 이웃들은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잠시나마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저자는 바르샤바에서 메뉴인의 연주를 직접 보았고, 1960년 초에는 열차에서 우연히 만나 메뉴인과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1978년 가을, 중국 난징의 길거리에서 우연히 메뉴인을 만나 나눈 이야기가 특히 흥미롭다. 메뉴인은 마르셀에게 이렇게 언급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유대인이군요. (...) 우리가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면서 독일 음악을 연주하고 독일 문학을 전파하는 것, 그건 정말 좋은 일이죠.”(476) 고국과 멀리 떨어진 도시 한복판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다 서로 말없이 우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을 두 사람을 상상해 본다. 독일어가 모국어인 유대인 예술가 혹은 평론가의 심정이란 이런 것일까.
저자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때 반복해서 언급한 것은 문학에 대한 사랑이었다. 폴란드가 나치로부터 해방된 후 저자는 곧바로 아내와 폴란드 장교로 입대했다. 이후 정보장교 및 영사관 업무로 베를린과 영국을 다녀오고 귀국했지만, 폴란드 공산당 노선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감되기도 했다. 이후 출판사에 배치되어 독일문학 담당 편집자로 일하며, 독일 작가들과도 교류하기 시작했다. 이 기회는 이후에 마르셀이 ‘연구여행’을 가장하여 독일로 망명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독일에서는 생존을 위해 하루아침에 문학평론가로서 본격적으로 경력을 시작하게 되었다. 저자가 기록한 이런 에피소드를 따라가 보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삶의 ‘우연’이 아닌 ‘운명’이라는 것이 정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는 “내가 가는 곳에는 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독일문학이 있었다”(274)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인상도 저자의 탁월한 글쓰기 솜씨에 힘입은바 크겠지만 말이다. 마르셀에게 문학은 그의 삶을 이끌어준 신탁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문학, 그것도 독일 문학이 내 휴대용 조국”(335)이라고 했다. 조국 폴란드를 떠나 독일로 망명한 사건도 그에겐 독일 문학과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을 말해주는 것 같다. 20세기 초에 태어나 방랑하던 유대인들, 특히 작가나 예술가들에게 문학 또는 예술은 정말로 이들의 휴대용 조국이었다는 견해에 공감할 수 있었다.
문학비평가라는 자리는 태생적으로 작가들과 가까워지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 작가의 모든 작품이 늘 좋은 것도 아니며, 비평가의 열렬한 찬사와 호평에도 불구하고 평을 듣는 작가들은 으레 비평가가 비판한 것을 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평론가로서 그가 많은 작가들과 경험했던 우정과 반목을 기록한다. 저자는 비평가와 작가와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한다. “작가와 평론가의 관계는 평론가가 작가의 최근작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471) 그러니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 하인리히 뵐이나 지크프리트 렌츠와 같이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경우도 있지만, 페터 한트케처럼 저자를 증오한 나머지 심지어 마르셀이 죽기를 바랄정도였던 관계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무엇보다 우선했던 것은 자신의 삶에 기쁨을 주는 존재로서의 문학, 곧 문학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에 대해 마르셀은 이렇게 답했다. “아무리 되풀이해 말해도 지나치지 않은 말, 그것은 바로 문학에 대한 사랑 없이는 비평도 없다는 말이다.”(393) 저자에게 문학은 ‘세계 변화를 목표로 한’ 거창한 기획으로서의 문학이 아니었다. 대신 문학이 자신에게 주는 기쁨을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길 원했던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아내와의 대화였다. 저자는 아내의 80세 생일날 자신의 자서전을 마무리하는 말을 생각했다며, 조용히 시집을 읽던 아내에게 머뭇거리다 알려준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죽음의 고비를 함께 넘고 60년을 지켜보면서 배우자를 바라보는 느낌이란 어떤 것일까 상상해보았다. 두 사람은 가스실로 떠나는 열차로 가는 행렬에서 극적으로 함께 탈출했고, 극도의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를 함께 겪었다. 게다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부모들을 배웅해야 했다. 또 수많은 지인들이 가스실에서 사망했던 반면, 자신들은 왜 살아남게 되었는지를 평생 물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외도 경험도 솔직하게 밝히고 있는데, 아내를 힘들게 했던 이런 경험도 결국 두 사람을 헤어지게 하지는 못했다. 이들은 참혹한 시기를 함께하면서도 절대로 헤어지지 않기로 약속했고, 죽음이 다가올 때까지도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마르셀이 마지막에 사용한 문구는 “꿈이야, 현실일 리가 없어, 우리 둘이 함께 있다니.”(497)였다. 이 소박한 문구처럼, 저자는 게토에서 탈출할 때에 나이든 배우자가 생일날 편안히 시집을 읽는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말 그대로 두 사람은 꿈같은 삶을 살아왔다고 서로 느꼈을 법하다. 마지막 장면까지도 마르셀의 자서전은 감동적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이 책에는 동료 독일 작가들의 언행과 ‘역사가 논쟁’을 통해 전후 독일 지식인 사회에 지배적이었던 독일인들의 견해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가해국의 지식인들이 갖기 쉬운 수정주의적 역사관을 비롯하여, 피해자의 관점에 공감하지 못하고 이들의 시선에서 바라보지 못했던 독일인들의 시선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개인의 내밀하고 자세한 기록이면서, 동시에 20세기에 인간이 경험할 수 있었던 가장 참혹한 역사를 겪은 인물의 생생한 역사적 증언이기도 하다. 나는 저자가 자신의 고통과 두려움에 맞서 이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느낀다. 우리가 과거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 사회에 살고 있다면, 바로 이런 인물들의 삶과 용기에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발췌문 모음]
[1] "1958년 10월 말, 알고이 지방의 그로스홀츠로이테에서 ‘47그룹‘총회가 열렸다."(11)
[2] "야만과 잔혹함이 우연이나 자의와 한패가 될 때 의미와 논리를 따지는 질문은 현실을 모르는 한가한 생각이라는 것을 그때만 해도 우리는 알지 못했다."(169)
[3] "게토에서의 사랑을 매일 같이 매순간 짓누른 것은 우리가 내일도 살아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곳에서의 사랑은 불안하고, 재빠르고, 초조하고, 성급했다. 그건 굶주림과 발진티푸스의 시대, 끔찍한 공포와 처절한 굴욕의 시대에 나누는 사랑이었다."(196)
[4] "당시 ‘옷차림이 지저분하고 추레한 사람, 거기다 면도까지 하지 않은 유대인은 곧장 가스실로 가는 줄에 가서 섰다. 나처럼 머리가 검은 사람은 당시 하루에 두번 면도를 했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매일 두 번 씩 수염을 깎는다."(231)
[5] "부모님을 연세 때문에라도 - 어머니는 58세, 아버지는 62세 였다 - ‘생명번호‘를 받을 가능성이 없었다. (...) 그 때가 부모님을 뵙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234)
[6] "사형선고를 받고 가스실로 떠나는 열차를 바로 앞에서 본 사람은 그 상흔을 평생 안고 살아간다."(240)
[7] "굶주림보다 무서운 건 죽음의 공포였고, 죽음의 공포보다 무서운 건 끝날 줄 모르는 굴욕이었다."(254)
[8] "그 때 나는 정확히 몰랐지만 예감은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동포가 죽어갈 때 우연히 살아남은 사람은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272)
[9] "내가 가는 곳에는 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독일문학이 있었다."(274)
[10] "죽음의 공포는 수년 동안 우리의 일상사였다. 그런데 전쟁의 끝이 다가올수록 해방된 우리를 더 무겁게 짓누르는 의문이 있었다. 아주 단순한 의문이었다. 왜? 왜 하필 우리가 살아남았을까?"(280)
[11] "문학이 있어야 비평이 생기는 것이다. 사실이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문학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작가들에게 우리가 빚지고 있는 것을 과소평가하거나 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308)
[12] "훌륭한 평론가란 언제나 명료함을 위해 글을 단순하게 쓰는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자신이 전달하는 내용을 알기 쉽고 투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위태로울 만큼 극단까지 밀고 나갔다."(392)
[13] "내 경우야말로 취미와 일, 열정과 직업이 완전히 일치한 사례였다."(442)
[14] "작가와 평론가의 관계는 평론가가 작가의 최근작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471)
[15] "나는 세계 변화를 목표로 하는 문학에는 전혀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런 문학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480)
[16] "꿈이야, 현실일 리가 없어.
우리 둘이 함께 있다니."(496)
- 아내의 80세 생일날 떠올린 문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