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음에 대한 새로운 발견 [1부]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 호모 루덴스를 위한 철학사
정낙림 지음 | 책세상
우리 인간에게 ‘놀이’는 본질적인 특성일까? 나는 ‘놀이하는 인간’의 의미를 담고 있는 호모 루덴스에 관한 고찰을 담고 있는 이 책을 집어들며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이었다. 지난 주 신문을 보니 흥미로운 뉴스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독일 연구소의 한 연구팀이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호모 사피엔스의 존재보다 무려 10만년이나 더 오래된 호모 사피엔스의 뼈를 모로코에서 발견했다는 소식이었다. ‘직립인’으로 이해되는 호모 사피엔스는 두 발로 무게 중심을 잡고 걸어다니며 손의 자유를 얻었으며, 엄지의 독특한 구조로 도구를 단단히 잡고, 섬세한 가공을 할 수 있는 매우 독특한 존재이다. 다시말하면 지난 주에 발표된 연구결과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놀이’도 그토록 오래된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따라온다. 이번에 만나게 된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을 읽으며 책에 또는 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바로 호모 사피엔스에게 ‘놀이’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였다.
철학을 전공한 저자 정낙림 박사는 ‘놀이’라는 의외의 주제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이 학위 지도교수의 영향이라 밝히고 있다. 곧 오랜시간 ‘놀이’라는 주제에 대해 천착해왔고, 니체의 저서 제목과 유사한 지도교수의 책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했다>을 통해 니체가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하나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언급하며,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과의 인연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놀이’에 대한 태도 내지는 관점에 대한 치밀한 논의를 시작으로 플라톤이 헤라클레이토스의 긍정적인(것으로 해석되는) ‘놀이’에 대한 입장과 달리 ‘놀이’에 대해 다소 부정적, 제한적인 견해를 갖고 있음을 소개한다. 나아가 근대 사유에 큰 영향을 준 사람들인 칸트와 실러가 ‘놀이’의 수단적인 가치로 보는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면, 니체와 하이데거가 ‘놀이’를 하나의 주체로서 새롭게 주목하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다음 다시 놀이에 대한 가다머와 핑크 그리고 비트겐슈 타인의 ‘유희’에 대한 견해를 소개하고나면 저자가 많은 시간을 연구하느라 할애했을 것으로 보이는 니체의 예술생리학 소개와 함께 현대 예술미학에 어떤 ‘놀이’의 흔적을 발견한 수 있는지를 정리하는 흐름으로 되어 있다. 이번 글에서는 두 개의 부로 나누어 1부에서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놀이’에 대한 견해를 문헌을 통해 해석하기 위해 추적하는 과정을 따라가보며, 근대의 문을 연 철학자들인 칸트와 실러가 ‘놀이’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이해해보려고 하였다. 2부는 사실상 이 책의 핵심적인 부분인 니체, 하이데거의 ‘놀이’에 대한 관점을 다음 편 글에서 좀더 이해해보려고 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 책은 저자가 심혈을 기울여 고민하고 정리한 ‘놀이’에 대한 다양한 고찰을 담은 학술서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철학 거장의 개념이 등장하고 이들의 관점이 텍스트로 표현되어 이들이 ‘놀이’라는 맥락에서 치밀하게 비교되고 있는만큼 한 눈에 이해될 것이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나에게 어려운 책인 만큼 보다 천천히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려고 했다. 온전히 이해가되지 않은 내용에 대해 쓰려고 고민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 책을 읽어가면서 새롭게 발견하게 된 사항들과 즐거움을 이야기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다소 머리는 아프지만 ‘놀이’에 관한 철학책을 ‘놀이’하듯 읽어나가면 되지 않겠는가. 책을 읽어가다 흥미로운 부분이 나오면 멈추고 옆길로 새어 딴 생각을 하기도하고, 언젠가 다시 돌아와 읽을 때는 나의 지혜가 더 성장하여 좀더 이해가 깊어질 것을 믿으며 넘어간다. 또 저자가 언급하는 다른 철학자의 책들을 뒤적여 보며 찬찬히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는 재미는 나에게 또 하나의 ‘놀이’과정이었다. 나에게 이 책은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이 ‘놀이’, ‘예술’, ‘미학’의 관점에서 서로 충돌하고 만나는 다접점의 공간을 보여주었다. 또 다시 이 책에 소개된 철학자, 사상가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놀이’에 관해 주목한 독일(계) 철학자들의 계보임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저자가 철학적 전통이 강한 독일에서 공부한 원인일 수도 있겠으나, 그만큼 독일철학이 놀이-현대예술에 대해 갖는 ‘관념적’인 해석의 전통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오늘날 관념적이고 철학적 성격이 매우 강한 개념예술의 메카가 독일 베를린이라는 점도 ‘놀이’라는 주제에 대해 천착한 독일철학의 전통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고대 그리스인의 ‘놀이’ 철학 】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한 둘이 아닐터인데,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라톤 두 사람만을 언급하며 ‘고대 그리스인’이라고 통칭하기에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다만 ‘놀이’라는 관점에서 이 두 사람이 세계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을 것이며, 문헌이 충분히 남아 온전한 이들의 철학을 파악하기 힘들기에 본질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는 없겠다. ‘플라톤 이후의 서양철학은 그의 주석에 불과하다’라고 화이트헤드가 말했다고 했던가. 아마도 ‘놀이’에 대한 관점에서는 화이트헤드의 간결한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놀이에 대해 플라톤이 갖고 있던 제한적, 부정적인 견해는 이후 많은 이들에게 놀이의 ‘평가절하’ 현상에 분명히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에게 놀이는 어린 아이들에게만 교육적 목적으로 적용되는 제한적인 의미만을 가진 듯하다.
“(플라톤에게 있어) 놀이는 대상에 대한 재현활동으로 진리와 무관할 뿐만 아니라 영혼을 감각적으로 치우치게 하여 젊은이를 타락시킨다.”(97면)
하여 시인을 공화국에서 추방해야한다니!
플라톤에 인간의 ‘감정’과 ‘욕망’이란 불길한 대상으로 비쳐진 모양이다. 온전한 진리를 파악하는데 방해가 되는 존재로서 말이다. 그리고 ‘놀이’는 바로 이 ‘감각적인 쾌락’에 근거한 것으로 진리 추구와는 거리가 있는 행위라는 것이다. 숱한 전쟁과 영아살해의 시대에 살았던 플라톤에게 ‘놀이’는 미숙하고 쓸모없는 ‘아이’라는 존재에게만 교육적으로 필요한 수단으로만 받아들여졌을 것같다. 플라톤에게 있어 장애가 있거나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않거나, 혹은 어떤 역할에 적합하지 않은 아이는 말그대로 도태시켜도 상관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이런 플라톤에게 아이들이 보여주는 미성숙함, 숱한 실수를 통해 배우는 그 과정은 중요하게 보지 않았을 것같다.
이에 반해 헤라클레이토스의 ‘놀이’에 대한 관점은 여전히 정해지지 않고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오히려 긍정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담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보다 면밀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놀이’철학은 다음 글에서 보다 찬찬히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볼 것이지만, 저자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놀이’철학은 긍정적일 수 있음을 조심스럽게 암시하고 있다. 그 근거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의 다음과 같은 전언때문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번잡함을 피해 아르테미스 사원에서 아이들과 장기놀이를 즐겼다.”(78면)
이런 가능성도 한 번 생각해본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암시적으로 드러나듯 당대의 ‘남자’ 철학자들이 어린 남자아이(이 책에서 pais라고 언급되는 ‘사내아이’)와 동성연애적 ‘향연’을 즐겼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헤라클레이토스도 ‘이들 중 하나’였고, 아이들과의 ‘장기놀이’를 긍정적으로 본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말하자면 헤라클레이토스도 당대 문화와 시대성에 종속된 존재이기에 플라톤과 유사하게 놀이에 대해 제한적인 가지면서도, 긍정적으로 표현한 ‘아이와의 놀이’에 대해 복합적인 감정을 갖고 대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 이유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남긴 조각글이 상징적이고 은유적이므로 해석의 다양성을 허용한다.’(45면)는 저자의 언급때문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부분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B52의 해석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해석의 다양성을 허용하는 부분인 만큼 이 부분을 해석하는 다양한 견해들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왕국이 아이에 속한다’는 B52의 마지막 부분의 해석문제는 그 자체로 ‘유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물론 이 책을 읽어나가는 과정은 더디지만 나에게 이러한 유희는 보기드문 호사이기도 하다. 물론 나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 또한 ‘놀이’의 한 과정으로서 이 해석에 동참해보기도 하였다. 과연 ‘왕국’은 뜽금없이 왜 여기에 나왔을까. 그리고 ‘아이’는 저자의 말대로 은유적인 표현일까. 점점 의혹과 질문만 던지다 미궁에 빠진다. 하지만 재미있기도 하다. 내가 이해하는(마구잡이로 추측해낸 해석)은 이러하다. 장기놀이하는 아이에게 장기판은 규칙을 따르면서도 우연성이 존재하는 하나의 축소된 세계이다. 반면 ‘왕’말을 조종하는 아이는 이 세계의 창조자 및 조종자이자 곧 ‘신’이 된다. 나아가 놀이에 ‘몰입’한 아이에게 이 축소된 세계는 진실이며 이 세계가 전부가 된다. 다시말하면 장기놀이에 몰입하는 아이에게 이 세계는 전부이다. 곧 이 왕국은 전적으로 아이의 것이 아니겠는가. 너무 당연한 해석일까. 여기에 ‘장기놀이하는 아이의 원형이 <일리아드>의 아폴론’이라는 베르나이스의 해석(66면)은 어쩌면 지나친 지적 호사가 아닐까 나혼자 반격해보기도 한다. 이런 나의 엉뚱하고 무례한 생각들을 돌이켜보면 ‘놀이의 사회성’을 언급하면서 오늘날의 ‘토론’, ‘논쟁’은 놀이적 성격이 강하게 남아있다(21면)는 저자의 지적이 잘 이해되기도 한다.
【근대 철학자들이 본 놀이】
플라톤 이후 부정적인 관점으로 받아들여진 ‘놀이’는 중세를 지나 근대를 시작하며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칸트와 실러를 불러들인다. ‘놀이’가 갖는 위상의 변화가 근대에 이루어지기 시작했음은 기독교가 절대적으로 지배했던 중세를 지나 ‘미학’이 신학과 형이상학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다. 곧 우리가 ‘미학’이라고 이야기하는 아름다움에 관한 견해를 다루는 분야는 근대에 정립된 개념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칸트와 실러의 ‘놀이’에 대한 세세한 철학과 입장은 온전히 이해되지 않음을 인정해야겠다. 다만 ‘놀이’에 대한 입장이 칸트에 있어서 제한적이고 하나의 수단으로서만 기능한다는 점, 그리고 칸트의 ‘놀이’ 철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했다는 실러도 결국 ‘놀이’가 수단으로서의 위상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정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문득 칸트에게는 ‘놀이’와 ‘미에 대한 판단’이 어떤 관계를 가질까가 문득 궁금해진다.
“칸트는 미에 대한 판단이 상상력과 지성 사이의 조화와 일치에서 성립한다고 본다. 상상력과 지성이라는 이질적인 인식능력이 자유롭게 우연히 일치하여 획득되는 것이 바로 미적 쾌감이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놀이이다.”(108면)
곧 칸트에게 ‘미에 대한 판단’은 상상력과 지성이라는 인식능력의 조화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며 이를 매개하는 ‘수단’이 바로 놀이라는 점이다. 이 수단으로서의 놀이가 갖는 위상은 여전히 실러에게도 나타난다고 하였다. 단 “인간은 오직 그가 그 말의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일 경우에만 놀이하며, 놀이할 경우에만 온전한 인간이다.”(159면)라는 대목에서처럼 칸트의 놀이에 관한 관점 보다 놀이를 진지하게 놓고 그 역할을 인정하는 듯 보인다. 다만 실러의 놀이 철학도 분열된 인간의 총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위상에 한정된다는 비판을 받는 듯하다.
또 다른 흥미로운 부분은 칸트가 ‘미에 대한 자율성의 확보’에 관해 설명한 대목이다. 칸트에 따르면 미에 대한 자율성은 ‘주관적 보편성’을 통해 가능하다고 하였다. 곧 미에 대한 판단이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이의 주관적인 느낌과 감정에서 출발하지만 동시에 타자의 보편적 동의를 획득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나에게 이 부분이 특히 흥미롭다. 이 부분이 롤랑 바르트가 자신의 <밝은 방>에서 언급한 사진미학에 관한 관점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머니 사진을 바라보며 ‘다시 만나게 된’ 어머니에 관한 추억들은 분명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담은 순간과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며 느끼는 주관적인 느낌과 어머니에 대한 감정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롤랑 바르트 어머니의 사진을 보며 느끼게 되는 감정들은 동일한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연유될 수 없다. 이러한 감정들은 지극히 개인적, 개별적인 체험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억으로부터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며 다시 어머니와 만날 수 있다. 따라서 칸트가 말하는 ‘타자의 보편적 동의’는 물론 동일한 내용(기억)에 대한 보편성을 의미하기 보다는 어머니의 기억을 되살리고 어머니와 만난다는 형식의 동일성에 그 보편성의 근거를 둘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을 떠올려보면 칸트가 언급한 ‘주관적 보편성’의 개념은 현대의 사진미학에도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에도 암울하게 그려지고 있듯이 유럽 자본주의의 발달과정에서 일어나는 노동분업과 그에 따른 인간의 소외문제는 이미 프리드리히 실러도 주목한 모양이다. 이 분업과 전문화의 과정을 통해 반쪽짜리 불구가 되어버린 인간에게 그 본래의 건강함(실러의 표현으로 인간의 총체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예술을 통해 가능하다는 주장은 아마도 모든 미술학원 경영자들이 가장 좋아할 표현일 것이다. 독일의 대 문호라고 불리는 괴테와 오랜 교류를 한 것으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실러가 실추되는 인간에 주목한 것은 어쩌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면이 있다. 칸트와 다소 다르게 느껴지는 점은 인간성을 획득하기 위한 교육적 방편으로 훈육이 필요함을 말한 점이라면, 실러는 이성과 감정에 기반한 충동을 조화/제약하기 위한 방편으로 문화와 교육, 그 중에서도 예술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국내에서도 많이 주목을 받고 있는 독일의 교육이념인 발도로프 교육도 어쩌면 실러와 같은 독일 철학자들의 인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교실의 벽 색깔을 괴테의 색체론에 근거한 6가지 색상을 적용하고 있는 사실에서도 그 철학적 전통을 짐작해볼 수 있다.
【1부 마무리】
다음에 쓰게 될 2부에서는 보다 본격적으로 현대철학에서 ‘놀이’가 어떤 경위로 새롭게 해석되게 되었는지를 ‘놀이하듯’ 살펴볼 생각이다. 여러 현대 철학자들의 ‘놀이’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게 될 것이고, 끝으로 현대 예술에서 ‘놀이’의 특성을 확인하는 작업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학술서이긴 하지만 이 책이 제공하는 흥미로운 점은 ‘놀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여러 철학자들의 관점이 접접을 갖기도하고 대립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달리 보면 각각의 철학자들을 다시 접하게 될 때, 이들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보다 깊은 이해를 제공해줄 수 있겠다는 점이다. 플라톤이 그러하고 니체가 그러하다. 예컨대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을 통해 이진우 교수의 <니체의 인생 강의>에서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전통을 따른다’는 표현의 이유에 대해 보다 설득력있는 이해를 할 수 있다. 또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낙타-사자-아이의 비유에서 ‘아이’가 갖는 의미에 대한 보다 설득력 이해를 이 책이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의 광고대로 2500년을 아우르는 놀이의 철학을 한 번의 독서로 다 이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에게 이 책은 각 철학자의 저서를 읽을 때 옆에 두고 다시 돌아와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책이다.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은 쓸모없다고 오래도록 여겨진 ‘놀이’에 대한 발견과 그 재발견의 철학사를 이 책에서 다룬다. 그리고 현대예술은 그 쓸모없음의 쓸모를 증거하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우리에게 보다 가깝게 느껴지는 현대철학에서 ‘놀이’가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 이해해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