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전문가가 전하는 절망의 시간을 보내는 법
<절망독서>
가시라기 히로키 지음 | 이지수 옮김 | 다산초당
대학재학 중 난치병으로 13년 간 투병생활.
이 한 문구의 기록만으로도 저자 가시라기 히로키가 겪었을 법한 절망의 깊이를 어느정도 가늠해볼 수 있다. 짐작컨대 저자의 20대 전체를 이 난치병과 함께 싸우고, 어르고 달래며 보냈을 것이다. 군복무와 같이 스케줄이 정해져있는 일들과는 달리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을 것 같다.
<절망독서>는 이 ‘절망의 전문가’가 우리에게 귀뜸해주는 절망의 시간을 보낸 경험을 솔직하게 소개하고 절망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1부에서는 절망의 시기에는 우리에게 ‘이야기’가 필요함을 말한다. 그리고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가 중요함을 전하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2부에서는 절망의 시기를 보내고 있을 독자에게 권할 수 있는 책, 영화, 드라마 등을 소개하고 있다.
책을 덮은 후 잠시 인상을 돌이켜보면 무엇보다 저자는 자신의 절망을 피하지 않고 마주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피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대상, 자신만이 겪어야하는 이 절망과 정면승부하기로 결정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사실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문제의 근원을 들여다보고 이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는다는 아이디어는 합리적이다. 당연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절망의 시간을 보내는 경우, 이 합리적인 아이디어가 ‘그럴듯해보이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당사자에게 공감과 수용이 안될 수 있다는 점이다. 끝을 모르는 절망을 느껴본 사람이 깨달은 인생의 교훈 하나를 저자는 전해준다. 바로 자신의 절망을 정면으로 마주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저자는 조급하게 이 절망을 극복하려고 하지말 것을 주문한다. 곧 자신의 절망을 들여다보고, 배우고, 이를 자신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라는 의미로 나는 이해한다.
저자는 내가 공감하는 ‘도피성 긍정적 사고’를 언급한다. 우리는 보통 긍정적인 사고를 장려하지만, ‘부정적’인 (거의 모든) 것을 피하려한다.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자신의 저작들에서 현대사회를 ‘긍정성이 제거된’ 사회라고 지적하고 있듯이, ‘부정성의 제거’는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에서 매우 최근의 일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문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병철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에게 거슬리는 어떤 것(부정성)을 없애고 매끄럽게 만들기 위한 강박의 징후가 보인다고 느낄 때가 있다. <절망독서>를 읽으며 한 가지 확신을 갖게 된 것은 ‘부정성’과 ‘긍정성’이 동전의 양면을 구성한다는 점이다. 이 둘은 하나의 전체 속에서 공존해야 온전하다는 것. 우리는 어떤 상황에 대해 ‘긍정적’일 것을 우리가 속한 집단이나 사회에서 요구받는다. 하지만 ‘부정적’인 태도가 일방적으로 배척을 받는다는 것이 더 문제다.
여기에서 나는 ‘부정적’ 태도와 ‘비관적’ 태도를 분명히 구분해야한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는다. ‘나는 어떤 일을 해봐야 소용없다’는 태도는 ‘비관적’이다. 반면 ‘이런 방식은 이 일을 할 때 이러한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다르게 시도해볼 수 있다.’라는 태도는 분명 ‘부정성’에 속하는 것이지만 ‘비관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예스맨’이라고 우스개소리로 표현하는 이런 태도는 곧 ‘부정성이 결여된’ 무한 긍정으로 자기를 혹사시키고 소진하는 사람이라고 봐야한다. 중요한 것은 저자 가시라기 히로키가 <절망독서>에서 우리에게 이러한 ‘부정성’이 반드시 필요함을 역설하는 점이다.
저자는 TV드라마 작가 야마다 다이치가 한 어느 인터뷰를 인용한다.
(214면) "지금 사회는 지나치게 부정적인 것을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양쪽 면으로 성립됩니다. 인간은 부정적인 것을 통해서도 성장한다는 사실을 다들 깨달으면 살기 편해질 겁니다." "부정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재빨리 잊거나 극복하는 데에만 너무 열중하는 것 같습니다. 어두운 면을 마주보지도 않고 적당히 자신을 속인 채 살아가는 것이죠." |
곧 우리가 절실하게 필요로하는 이 ‘부정성’은 우리의 절망을 마주대하게하고, 우리의 위치를 확인해주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절망 또는 어떤 문제를 회피하기만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것은 단순히 기적을 바라는 일일 뿐이다. 내가 겪고 있는 절망을 제대로 바라보고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단순히 절망의 시기를 보내는 데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수 천년 간 갖고 있던 삶의 기술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부정성을 스스로 제거하려고 애씀으로써 우리의 절망을 성숙의 기회가 아닌 자기 파괴의 거대한 흐름에 우리를 내몰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진실로 절망의 바다라는 심연의 바닥까지 내려가 바닥을 쳐본’ 저자와 같은 사람만이 이러한 깨달음을 이야기해줄 수 있을 것이다.
<절망독서>에서는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가 ‘문학’의 범주를 이야기할 때 모든 예술 장르를 포괄하는 것으로 보듯이, 저자는 절망의 시기를 보내는 방편으로 ‘책’만을 권하지 않는다. 저자는 보다 넓게 우리가 우리의 절망을 마주할 때 공감하고 따라갈 수 있는 ‘이야기’구조를 갖는 모든 대상을 포함한다. 다만 영화나 드라마는 일본의 작가들을 위주로 언급하고 있기에 다자이 오사무 같은 국내에 비교적 잘 알려진 작가들 외에는 나 개인적으로 생소한 동시대 작가들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문학적 소양의 폭이 좁은 나로서는 아무래도 이름을 들어본 세계문학의 무대 속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예를 들면 카프카나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나는 보다 친근함을 갖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카프카를 소개하는 부분은 내가 막연히 갖고 있던 카프카에 대한 이미지를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군복무 시절 훈련소에서 처음 읽었던 책이 바로 진중문고판 카프카의 <변신>이었다. 훈련소가 절망의 시간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외부와 차단되어 있던 나의 존재를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한 주인공의 모습과 견주어봤을 뿐이었다. 문학적인 어떤 메시지를 이해할 정도의 경황이나 이해도는 없었다. 그 당시는 그냥 기묘하고 기괴한 이야기다라는 정도로만 받아들였던 소설이었을 것이다. 내가 카프카의 삶에 대해 좀더 이해를 하고 삶의 보편성을 좀더 이해하고 있었다면, 또 다르게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카프카의 소설이 주는 매력은 ‘그 이야기의 모호한 진실 속에 무수히 많은 삶 또는 삶의 진실을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에 있지 않을까. 카프카의 소설은 우리가 국어시간에 객관식 문제의 해답을 찾듯이 하나의 해답을 전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카프카에 관해 저자가 이야기할 때 나의 눈이 한동안 머무는 문장이 있었다. 바로 저자 자신의 책 <절망은 나의 힘>에 인용해둔 카프카의 말을 재인용한 부분이다.
(98면) 이를테면 프란츠 카프카.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저는 미래를 향해 걷는 것은 못합니다. 미래를 향해 좌절하는 것, 그것은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쓰러진 채로 있는 것입니다." |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쓰러진 채로 있는 것’이라니. 하지만 이것은 자신이 마주하는 절망을 제거하기위한 몸부림이 아니다. 좌절한 채 자신의 절망을 인정하고 응시하는 것. 이것은 오히려 자신과의 ‘거리두기’를 의미할 것이다. 나는 나의 경험을 통해 통렬한 절망의 시기에 ‘그밖에 무엇을 우리가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인용된 한 문장으로 인해 나의 ‘잃어버린 절망의 시기’를 되돌아 볼 수 있었다. 나의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절. 나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카프카의 말처럼 침대에 그대로 쓰러져 나의 절망을 마주하고나서야 나는 그 절망의 시기를 보낼 수 있는 기력을 회복했다고 해야겠다.
절망의 강도를 비교할 수는 없으나 나의 경우는 저자 가시라기 히로키의 경우처럼 육체적인 고난이 가져다 준 절망의 시기는 아니었다. 나는 정신적인, 나의 영혼의 고난 속에서 근 20년 동안 허우적 대었다. 절망의 시기를 함께 보내는 대상으로 저자는 책이나 영화 드라마를 이야기하는데, 나의 경우 이 모든 것을 포함하여 ‘사진’이 있었다. 책을 비롯하여 사진이란 매체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이 되어준 동시에 나를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저자도 책, 영화, 드라마만을 제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육체적인 제약으로 인하여 자신의 절망을 마주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대상을 이것만 제시했을 뿐, 사진을 비롯한 다른 활동 모두 포함할 수 있다고 본다.
【책을 덮으며】
20대 전체를 난치병과 싸우며 길어올린 저자의 깨달음을 이 책 <절망독서>는 조심스럽게 전달해준다. 우리의 삶은 세대를 거듭하여 반복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 저자가 언급했듯이 매우 개인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절망도 마찬가지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일깨워주듯 우리의 절망, 우리의 불행은 매우 보편적이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나의 절망의 한 시기에 내 머리를 깨주던 도끼와도 같은 말 한마디는 빅토르 프랑클 박사의 한 마디이기도 했다. ‘내가 내 삶에서 무언가를 기대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내 삶이 나로부터 뭘 기대하는지 들여다보라’는 말 한마디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절망의 시기를 보내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게 해주는 말 한마디, 한 구절은 모든 이에게 다를 수밖에 없다. 절망이라는 피할 수 없고 보편적인 현상을 마주대하고 이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경험을 통해 ‘절망 끝’이라고 선언하게 해주는 계기는 우리가 각자 찾아야할 것이다. <절망독서>는 자신의 방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보내고 자신을 추스릴 수 있는 계기를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실마리를 던져준다. 이 책은 절망의 기간을 어떻게하면 잘보낼 수 있을까에 대한 조언이며 제안이다. 결국 쓰러진 다음 두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서야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에. 우리는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고 가면 되는 것이다.
"고뇌는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경험해야만 치유된다."
- 마르셀 프루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