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들의 흑역사에서 잉태한 좀비문학의 고전
<좀비 연대기>
로버트 어빈 하워드 외 지음 | 정진영 엮고 번역 | 책세상
이 책 <좀비 연대기>는 기대이상으로 재미있다. 나는 공포소설, 스릴러 등 일종의 장르소설로 분류되는 소설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작품들은 무언가 작가의 작위적인 결과물들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역자는 ‘좀비가 대세’라고 역자 후기에서 귀뜸해주지만, 그동안 나는 좀체로 좀비영화나 좀비가 나오는 소설, 심지어 오락마저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좀비 연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좀비소설 역시 문장력과 이야기의 전개에 흡인력이 있다면 다른 장르 소설과 다를바가 없겠다는 점을 느꼈다. 다시말해서 소재보다 더 중요한 소설로서의 탄탄한 기본기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 다.
‘클래식호러’라는 문구가 시사하듯, 이 책에는 주로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작가들의 좀비를 소재로 하는 단편들이 실려있다. 사실 각각의 단편들은 나름의 개성이 있는 독특한 작품들이라 생각한다. 모두 자연의 질서를 벗어나 ‘죽었으나 살아있는, 피와 살을 지닌 시체’인 좀비를 매개로 하고 있다. 하지만 SF소설 혹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환상소설과 같이 새로운 상상력으로 우리를 자극하는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도 좀비는 일차적으로 부두교와 관련이 있고 마술사를 통해 비밀스런 주술과 마법을 통해 되살아난 시체다. <좀비 연대기>에 나온 소설들만을 통해 정리를 해보자면, 좀비는 ‘아프리카-아이티-미국남부’의 열대에 준하는 지역적인 배경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흑인(크레올과 같은 혼혈인들을 포함하여) 또는 흑인노예의 역사라는 맥락 속에서 탄생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좀비문학 속에서 좀비와 관련된 특징을 떠올리자면 항상 부두교의 마법사가 어떤 의식을 통해 죽은 자들을 ‘되살아나게’ 만든다는 점이다. 마법과 주술을 통해 되살아난 좀비들은 이따금 중얼거리긴 하지만 대개는 말없이, 아무런 자유 의지나 판단능력 없이 마법사의 지시를 따르는 자동인형 또는 마리오네트 인형과 같은 존재들이 된다. 따라서 여러 작품들에서 보이듯 좀비는 ‘농장’에서 월급도 받지 않고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좀비가 ‘흑인노예’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도 고려해볼 수 있다(《노예에게 소금은 금물》,《나트에서의 마법》,《화이트 좀비》등). 여러 소설에서 이러한 구도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당시에 좀비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흔히 활용하던 ‘좀비 사용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드라큘라를 언급할 때, 이들이 무서워하는 존재가 빛, 십자가, 마늘과 같은 대상이 떠오른 반면, 좀비에게 이런 대상은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듯하다. 좀비는 마법사의 주술의 힘으로 낮에도 다니는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좀비들에게 치명적인 대상은 바로 소금으로 보인다. 이는 여러 작품을 통해 활용되고 있는데, 좀비가 소금을 먹게되면 정말로 죽는다. 소금이 생명을 가진 유기체에 매우 중요하고 귀한 물질이면서도 죽은 유기체의 부패방지에 활용된다는 양면적인 특징을 떠올려보면, 좀비 문학에서 좀비들이 소금을 먹으면 ‘영원히’ 죽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은 또한 모순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좀비가 결국 ‘되살아난 시체’라는 이율배반적인 초자연적 존재이기에 소금이 이들을 죽인다는 발상도 아이러니하지만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좀비는 말을 하지 않고, 항상 앞쪽만 응시하기 때문이다. (…) 좀비는 소금을 먹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좀비에게는 소금 맛을 보고 나면 자신이 죽었음을 깨닫고 무덤이 어디에 있든 기필코 자신이 묻힌 곳을 찾아가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다!”
(220면) 이네즈 월리스의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중에서
실제로 피와 살을 지닌 시체이기에 좀비들은 특이하게도 총을 맞거나 칼을 맞으면 역시나 피를 흘리는 모습도 공통적이다. 이런 점들은 좀비문학의 클래식 작품들을 수록한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살펴본 좀비의 특징들이라고 볼 수 있다.
좀비문학에 대한 나의 편견을 깨준 것은 무엇보다도 이 책의 첫 두 소설인 로버트 어빈 하워드의 작품들이었다. 로버트 어빈 하워드의 문장은 긴장감과 속도감을 주기에 독자로 하여금 상황에 몰입하도록 만들어주었다. 1845년 흑인 노예들의 폭동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검은 카난》에서 주인공 백인(커크 버크너)이 ‘사악한’ 흑인 좀비들을 죽이는 구도는 다소 거슬리는 데가 있다. 한편 전지적 작가 시점에 준하는 1인칭 시점의 친절한 설명과 진행은 다소 생경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커크 버크너가 어떤 주술적인 힘에 의해 카난이라는 삼각주 지역으로 ‘끌려가는’ 장면을 떠올려보면 상당히 인상적이다.
“나는 최면에 빠진 사람과는 달랐다. 완전히 깨어 있었고, 정신도 말짱했다. 노호하는 검은 강물이 쇄도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멍한 상태에서도 내 정신은 말짱했고 생각은 명료했다. 이것이 바로 고통의 지옥이었다.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분명하게, 통렬하게 깨닫고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무력감. 내가 고문과 죽음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계속 가고 있었다. 이성을 송두리째 앗아 가버릴 것만 같은 이 주술을 깨려고 기를 쓰면서도 계속 가고 있었다. 이 충동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97면) |
이 부분은 마치 과거 내 꿈의 일부를 써놓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나의 통제를 벗어난 어떤 거대한 물줄기 속에 몸을 맡긴 채 어딘가로 가는 꿈. 나는 너무나 자주 꾸던 유형의 꿈이었다. 분명 이 어딘가의 종착지는 ‘죽음’과 관계할지도 모른다. 다르게 보면 이러한 무기력한 나의 꿈과 주인공 커크 버크너가 경험하는 이 충동의 모습은 어쩌면 비판적인 사유없이 자본이라는 거대한 강물 속에 무기력한 존재로서 따라가는 현대인의 모습과도 병치되어 다가온다. 나만의 지나친 비약일까.
“나의 통제력을 능가하는 어떤 힘이 나를 고션으로, 그 너머로 이끌고 있었다.”(97면)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중 여타 작품들과 다른 느낌을 주는 작품은 단연 잭 런던의 《천 번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부두교나 흑인과 관련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좀비 소설이라기보다는 디스토피아적인 SF소설에 더욱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죽은 유기체의 소생방법을 찾아내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으로보면 마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도 닮아있다. 마찬가지로 《천 번의 죽음》에서도 생명을 주는 아버지와 그 실험대상이 되는 아들과의 대립구도가 보인다. 아버지는 실험대상인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네게 생명을 주었으니, 그것을 가져갈 권리 또한 나한테 있지 않겠냐?”(127면) 이어서 아버지는 수없이 죽을 운명인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물론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지만, 너는 받아들여야 한다. 인생이란 게 원래 위험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127면) 아버지의 이 말은 ‘살아있는 존재’를 말할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 ‘인생’을 끌어오는 것은 작가인 잭 런던이 설정해둔 신랄한 유머가 아닐까. 어찌되었든 이 작품에서 아버지는 창조자인 신의 위치에 놓여있다. 아들을 죽이고는 다시 다양한 방법으로 아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이러한 모티브는 생물학, 의학의 발달과 함께 생물체를 복제하거나 이들을 변형하는 것에 대한 원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 영생이나 인간이 갖지 못한 특별한 능력이라는 욕망을 투사하는 대상으로서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한편《천 번의 죽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 구도에서 흔히 빠지지 않는 ‘친부살해’의 모티브가 나온다. 우리가 흔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부르는 이 개념은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의《나트에서의 마법》에서 나트섬의 마법사 바카른과 두 아들 보칼 및 울돌라와의 대립구도에서도 중심 사건으로 이어지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역시나 이 생명을 주는 존재인 아버지를 살해하는 아들의 구도는 또다시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리게 해준다. 아버지는 아들의 삶에 큰 영향을 주는 존재인데, 특히나 갈등을 유발하는 아버지는 아들의 사회적 역할에 제약을 가하거나 구속하는 측면이 있다. 나아가 (생명을 주는)아버지와 대립하는 아들의 갈등 구도를 보다 폭넓게 해석해보면 농장주와 여기에서 착취당하는 노예 또는 좀비와의 갈등구도에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가넷 웨스턴 허터의 작품《노예에게 소금은 금물》에서 150살로 추정되는 크레올 노파가 이야기해주는 에피소드를 떠올려본다. 농장의 노예들은 농장주가 없는 동안 농장주의 명령을 거스르며 주인의 샴페인과 소금을 약탈하고 건물을 파괴한다. 이러한 행위는 바로 ‘친부살해’ 모티브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이 책에 수록된 여러 단편들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은 분명 ‘좀비’라는 대상은 (흑인 혼혈인들을 포함하여)흑인 노예제도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좀비 문학에서 배경으로 등장하는 아프리카-아이티-미국남부라는 지리적 특징은 모두 흑인 노예들이 이동했던 지리와 일치한다. 오늘날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좀비의 이미지와 다르게 좀비 문화는 사실 흑인노예제도라는 극도로 가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흑인들의 어두운 원체험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폐쇄적이고 미신적인 이들 집단 내에서 주술을 통해 자신들이 간직한 원한이나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자 공간을 부두교라는 미신적 행위가 제공하고 있다. 자연현상과 유사하게 ‘사회적 스트레스’도 억압 속에서 쌓이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어디에서든 터져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좀비를 단순히 ‘인간이 지닌 욕망의 결과물’이라고 본다면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인 맥락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썩 만족스럽지 못하다. 좀더 구체적으로 ‘억압받아온 흑인들의 인간적 욕망이 어두운 컬트 문화로 표출된 존재’가 바로 좀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클래식 호러 작품을 수록한 <좀비 연대기>는 나의 편견을 보기좋게 깨도록 해준 흥미로운 시도였다.
인상적인 첫 문장 “어디서나 밤은 상상을 공포로 물들이는 모호함과 환영을 가져온다. 그러나 열대 지방에서는 밤이 유난히 강력하고 불길한 효과를 만들어낸다.”(161면) – 라프카디오 헌의 《귀환자들의 마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