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모비딕>에 다시 주목하는 이유
《사악한 책, 모비딕》
(원제: Why Read Moby-Dick?)
나타니엘 필브릭(Nathaniel Philbrick) 지음 | 홍한별 옮김 | 저녁의책
(책을 읽으며 기록했던 메모들)
이 책은 <주홍글씨>의 작가 나타니엘 호손의 이름과 같은 이름(나타니엘)의 저자가 <모비딕>을 다시 읽어내려간 독서기록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나타니엘 호손과 <모비딕>의 작가 허먼 멜빌과의 관계이다. <모비딕>을 거의 완성할 즈음인 1850년대 초에 이웃에 살던 나타니엘 호손과 친해진 멜빌과의 친분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하며 <모비딕>이 완성되는 시기 전후에 멜빌에 미친 호손의 영향을 좀더 자세히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 두 작가는 매우 상반된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호손은 나이가 멜빌보다 10살 이상 연상이었으며, 보다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멜빌은 포경선과 해군에서 바다생활을 수년 간 하고 돌아온 매우 에너지 넘치고 말이 많은 성격인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미국의 시대를 조금 들여다보면 1850년 대를 전후하여, 미국은 ‘노예제도’와 관련하여 마치 불붙은 다이너마이트를 안고 있는 것과 같이 긴장된 사회의 분위기를 <사악한 책, 모비딕>의 작가는 잘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동북부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는 포경산업이 이미 성황을 이루었던 시기였으며, 포경산업의 중심에는 퀘이커 교도들이 있었고, 포경산업을 통해 퀘이커 교도들은 당시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저자 나타니엘은 ‘주로 퀘이커 교도들인 낸터킷 포경 상인들은 (고래)기름을 팔아 미국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되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한 때 흑인 노예였다가 탈출, 자유인이 되어 작가 및 활동가로 변신한 프레데릭 더글라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적은 책 <미국인 노예 프레데릭 더글라스의 삶 이야기>(1845)에서 언급했던 말을 병치시킨다. 곧 ‘가장 잔혹한 노예주가 가장 경건한 사람이기도 하다’ 는 모순되어 보이는 진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수많은 고래의 생명을 담보로 큰 부를 축적했던 퀘이커 교도들은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지적하고 있는 부분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례로 볼 수 있겠다. 결국은 종교적인 양심과 부의 축적 문제를 어떻게 ‘조화’시키냐의 문제를 미국인들은 ‘(신의) 소명 (calling)’이라는 장치로 합리화했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악한 책, 모비딕>의 작가 나타니엘이 간단히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모비딕>은 그야말로 고래 및 포경업에 관한 방대한 백과사전과도 같은 책인 동시에 당대 미국사회의 모습을 여실히 반영해주는 거울과도 같은 책으로 읽힌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노예제도가 존재했던 시기, 그리고 여성이 이보다 조금 나은(?) 상태였던 이 시기에 식인종 고래작살잡이 퀴퀘그와 친한 동료가 되고, 흑인이나 백인이나 황인종이나 식인종들과 상관없이 모두 ‘동일한 사람일 뿐’이라는 말을 남기고 있는 허먼 멜빌의 견해는 지금의 진보세력과 비할바가 아닌듯 하다. 말 그대로 포경선이라는 한 배를 타고 모두가 하나의 목적으로 가지고 서로 협력해야만 하는 선원들은 피부가 어떤 색이냐보다 더 중요한 실존적인 기본 요구사항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작가가 강조하고 있듯, <모비딕>이 후대에 다시 조명을 받고 수많은 작가들로부터 ‘위대한 미국의 문학이자 복음서’라고 인정받고 있는 것은 그만큼 시대를 앞서나간 작가의 예민한 시각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한 가지 또 흥미로운 점은 <모비딕>의 시작 부분에 멜빌이 읽은 책 중에서 ‘고래’와 관련한 문장들을 발췌한 부분이 나오는데, 몽테뉴의 <에세(수상록)> 중 ‘레이몽 스봉의 변호’ 대목에서 인용한 대목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짐승이든 배든, 다른 것들은 모두 이 괴물(고래)의 아가리, 그 무시무시한 심연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당장 삼켜져서 모습을 감추지만, 오직 바다모샘치만은 그곳으로 안전하게 물러가 잠자리로 삼는다.”
물론 나의 상상이긴 하지만, 멜빌이 <모비딕>의 초입 부에 주인공 이슈마엘의 첫 동료를 식인종 작살잡이 퀴퀘그를 설정한 것도 몽테뉴의 <에세>에서 힌트를 얻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종교와 계급을 불문하고 사람과 상대방에 대해 배우고 대화하기를 즐긴 몽테뉴의 열린 자세 뿐만 아니라, 몽테뉴가 유럽을 방문한 식인종족 몇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식인종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은 <모비딕>에 큰 영향을 준 실화 ‘에섹스 호’의 이야기에서도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에섹스 호’ 사건은 <모비딕>에 보다 직접적으로 스토리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은 1810년 도에 포경선 에섹스 호가 거대한 흰 색 향유고래를 잡으려 시도하다가 이 고래가 배를 여러 번 들이받고 파선된 사건을 말하는데, 세 대의 구조선을 타고 탈출한 선원들이 바다에 표류하다가 결국 동료를 잡아먹으며 3달 넘게 버티다가 구조되었던 사건이다. 특히나 이 사건은 당시 미국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퀘이커 교도들인 선원들이 바다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다가 죽은 동료의 시신을 먹고, 심지어는 제비뽑기를 하여 한 명을 희생하여 시신을 먹은 사건이기에 그러하다. 허먼 멜빌을 비롯한 지각있는 작가들은 분명 동물로서의 인간의 본성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더하는 기회였을 것이다.
<사악한 책, 모비딕>을 읽어나가다 이런 대목을 발견했다.
“자신의 불멸성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사람에게 삶은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다. 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살아갈 방법을 찾는게 삶이다.”
이 대목을 아주 잘 보여주는 소설이 떠올랐다. 바로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이다. 이 소설에는 미국의 한 지식인(영문과 교수)의 삶이 온전히 묘사되는데, 어떤 면에서는 교수로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으로 보이지만, 평생토록 ‘패배만 하는’ 소시민의 모습을 답답하리만치 보여준다. 극적인 사건도, 그렇다고 촌철살인의 유머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다만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처럼 패배하는 인간의 모습만을 잔잔하게 제시하고 있다. 어쩌면 존 윌리엄스도 <모비딕>에서 큰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도 자신의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데 우리 삶의 위대함이 있다고 <스토너>는 나에게 말을 건네주었듯, <모비딕>은 또 다른 방식으로 ‘삶을 읽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것 같다.
여기까지 <사악한 책, 모비딕>을 읽어나가면서 떠올린 단상들을 묶어보았는데, 역시나 두서가 없다. 하지만 보다 잘 다듬고 싶어서 고민하다보면, 메모해둔 단어들을 보더라도 기억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조급한 마음으로 적어보았다. 아직 <모비딕>을 다 읽어보진 못했으나, 미국 그리고 인간이라는 키워드를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해볼 수 있는 ‘무언가’를 담고있는 책으로 보인다. 인간과 인간 사회라는 거대한 배에서 일어나는 양상들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비유와 은유가 풍부한 책으로 볼 수 있을까. 앞으로의 독서에 더욱 기대가 된다. <사악한 책, 모비딕>은 이런 점에서는 나에게 보다 큰 동기를 준 책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의 원제가 ‘모비딕을 왜 읽는가?’라고 직역해본다면, 나는 ‘우리는 왜 모비딕에 주목하는가?’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