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틈 사이에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광인의 수기>

이반 일리치의 죽음·광인의 수기

레프 톨스또이 지음 |  석영중·정지원 옮김 |  [열린책들]

 

 

 

톨스토이가 자신의 80 인생 중에서 절반인 40여년에 이르는 동안 죽음이라는 무형의 진실과 대면하고 주제에 천착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마흔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고등법원 판사 이반 일리치의 부고 기사를 신문에서 확인한 동료의 대화로 시작한다. 다시 소설 속의 장면은 이반 일리치의 시신이 안치된 장례식장으로 옮겨졌다가 이반 일리치라는 인물의 생애를 거꾸로 더듬어 올라가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소설이 발표된 당시(1886, 당시58) 거의 비슷한 시기에 씌여 발표된 <광인의 수기>(1884, 당시 56) 인간의 삶과 죽음을 탐구하는 작업으로 50 후반에 발표된 소설이다. 전체적인 인상을 다시 떠올려보자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인간의 죽음을 계기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대면하여 삶을 성찰할 기회를 준다면, <광인의 수기>에서는 짧지만 삶의 의미 탐구하려는 작가의 강한 의지를 읽을 있었다. 나아가 <부활>이나 <안나 카레리나>에서 살며시 드러나는 삶의 태도, 진실을 추구하려는 흔적이 집약된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이반 일리치는 결혼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소설 속의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관리의 아들로서 법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엘리트이자 집안의 자랑이었다. 톨스토이가 표현했듯이 유쾌하면서도 품위있는 엘리트의 누리는 것이 중요한 삶의 가치이자 목적이었다. 사교모임에서 부인을 만나긴 했으나 사람에 대한 사랑없이 결혼을 하고, 높은 연봉이 보장된 자리를 찾아 기회를 노리는 부류가 되어갔다. 이반 일리치에게 결혼은 마디로 안정적인 보험이자 사회(상류층 사회) 통념에 바람직한 방향을 따르는 통과의례일 뿐이다. 이반 일리치는 마디로 사회가 만들어 놓은 궤도에서 평생 벗어나 적이 없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아내의 임신 이후 나날이 심해지는 아내의 변덕과 질투, 트집은 이반으로 하여금 일에 매진하도록 하였다.

 

중요한 것은 사회 통념이 정해 놓은 외적인 품위와 형식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37)

 

개인의 역할에 대한 사회의 강요에 스스로를 밀어넣는 사람들은 이후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결국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기 쉽다. 삶의 의미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오로지 속에서만 삶의 재미를 느낀 이반 일리치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가장들과 많이 닮아있다. 가족을 위해 평생 직장에 평생을 바친 가장들이 은퇴한 이후 가족이라는 구성원으로 돌아가기란 쉽지 않다. 많은 가장들이 은퇴이후 잃어버려 흔적만 남은 자신의 자리 주변을 유령처럼 배회한다. 가정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평생 사회의 고정관념을 따라 사는 삶을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그래서 끔찍한 이라고 톨스토이는 생각했던 같다. 130 러시아의 대문호가 날카롭게 지적한 것들이 여전히 빛을 바래지 않고 유효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삶의 조건들은 개선되고 향상되었는지 반문해볼 있다. 아니 외적인 삶의 조건에 대해 물을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여전히 위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물어보면 일이다.

 

공무를 수행하며 느끼는 기쁨은 자존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고 사교활동을 하며 느끼는 기쁨은 허영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의 진짜 기쁨은 빈트 게임이었다.(<이반 일리치의 죽음>, 53)

 

겉으로 보이는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사회의 덫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 있다. 현재보다 연봉이 높은 자리로 가기위해 청탁을 하고, 집을 구하고 집을 꾸미기 위해 지출을 늘리고 자주 만찬을 열어 사교계 사람들을 초대해야만 한다. 오늘날 아파트를 장만하는 것이 인생의 꿈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의 모습과 다를바가 없다. 욕망의 충족을 위해 대출을 받고, 고가의 외제차를 할부로 구입하여 살면서도 언제나 돈이 부족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이반 일리치로 대표되는 인물상과는 상당한 유사점을 갖는다.  사회의 통념에 따라 결혼하고, 상류층의 사람들이 믿는 바대로 행동한 이반 일리치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죽음을 둘러싼 풍경 - 금기시된 죽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

원인모를 병으로 한 인간이 갑자기 죽어가는 풍경은 때론 불편하게 다가오지만, 강력한 진실성을 담고있다. 죽음이라는 무지가 주는 거대한 공포는 근원적이고 모든 생명체에게 해당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시작부분에서 이반의 직장 동료들이 이반의 부고 기사를 보고 자신의 죽음이 아닌 것에 안도하고, 남편의 사망으로 국가에서 나오는 지원금을 궁금해하는 것은 속물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오늘날의 우리도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행동들이다. 장례식장에서 화투를 밤새 치는 우리의 장례식 풍경처럼 이반의 직장 동료/지인들은 어떻게하면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카드 게임을 있을지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강박적으로 떠올렸던 죽음이라는 문제는 특히나 오늘날 언급을 하거나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마저 금기시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다. 과거에는 죽음이라는 삶의 행사가 보다 우리 주변에 가까이 존재했다. 아픈 이들은 대부분 집에서 요양을 하다가가 돌아가신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죽음 처리가 외주화되었다고 해야할까. 집에서 맞는 죽음이 금기시되어버린 느낌이다. 문명 속 사는 대부분의 이들에게 죽음이란 병원에서 맞아야하는 사건이 되었다. 톨스토이가 기록하고 있는, 이반 일리치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둘러싼 풍경은 매우 현실적이다.

 

불결함과 창피함과 냄새가, 그리고 용변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너무나 괴롭혔다.(<이반 일리치의 죽음>, 85)

 

이반 일리치가 원인 모를 병으로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데도, 이반의 부인과 딸은 연민은 커녕 죽어가는 이를 비난한다. 나아가 자신들이 오히려 고통받는 피해자임을 자처하는 행동을 보이고 있다. 의사마저도 병자에게 솔직하게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병의 진단에만 관심을 두는 것같다.  죽음에 대한 금기는 여전히 병원에서도 . ‘죽음 대한 금기로 인하여 죽어가는 모든 이들, 오늘날 다른 이반 일리치들은 오히려 더욱 고립되고 절대 고독 속에서 절망하며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죽어가는 이들에 대한 존엄역시 방치되고 있다.

 

그나마 이반에게는 방치된 존엄 추락하지 않게 붙들어주는 인물이 있다. 바로 농부 출신 게라심의 존재 때문이다. 오직 게라심만이 이반의 처지를 이해하고 연민을 보낸다. 죽음에 대해, 죽어가는 이에 대해 진실한 농부의 말과 행동에 이반은 심지어 위안을 느끼고 있다. 배운 없는 농부에게 풍부한 학식과 재산을 가진 판사 출신 이반 일리치가 느낀 위안은 우리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게라심은 죽음 또한 삶의 일부로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언젠가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91)라고 담담하게 이반 일리치에게 털어 놓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소설의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놀랐던 것은 톨스토이가 죽음의 과정에 대해 기술한 일련의 묘사들이 너무나 사실적이라는 점이었다. 특히 죽어가는 이들이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사라진다는 점이나, ‘검은 구멍속으로 빨려들어간 이후 나락으로 굴러떨어져 보는 과정과 최후의 모습에 대한 묘사는 죽어가는 환자 1000여 명을 17 관찰하고 기록한 스위스의 의사 모니카 렌츠가 저술한 <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 나타난 죽음의 과정과 너무나 흡사한 것 같다. 톨스토이의 작품을 점점 대하게 되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어느 소설이나 죽음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광인의 수기>에서처럼 보다 직접적으로 톨스토이 자신의 경험을 드러낸 작품에서 죽음 이미지가 더욱 비범하고 강렬하게 분출된다. 특히 <광인의 수기>에서 하인과 멀리 떨어진 곳의 영지를 매입하러 가는 길에 네모난 하얀 에서 덮져온 발작증세, 그리고 겨울 사냥을 하다 눈으로 덮힌 사방 천지에서 길을 잃고  경험했던 발작의 장면이 특히 인상에 남는다. 장면 모두 주인공은 나는 , 여기에 왔고,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자문하고 있다. 실제적인 공간에서 주인공이 느꼈을 법한 방향감각의 상실과 백색 공포 죽음에의 공포 이어지고 있다. 미완성인 자전적 소설을 읽노라면, 절대 진실인 죽음이란 실체 앞에서 모든 인간들의 허위와 거짓의 삶은 아무런 존재이유를 상실해 버린다.

 

 

 

 

그렇게 그는 죽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카이사르도 죽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 필멸의 존재다.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 <광인의 수기> 보노라면 50 후반에 이미 죽음이라는 주제에 천착했고 진지하게 고민했던 톨스토이의 진지한 모습과 젊은 시절 주색잡기와 방탕한 생활을 했던 젊은 톨스토이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사람은 누구나 변하지 않는다는 세속화된 믿음을 아무런 의문 없이 믿고 있던 나에게는 너무나 커다란 격차이자 변화이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극적인 삶을 살아보았기에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으며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의 과오에 대한 성찰과 반성은 삶에 대한 명민한 관찰과 감성의 소유자가 아니면 거치기 힘든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톨스토이는 죽음 대한 자각 이후에 크게 변한 사람으로 이해된다.

 

소설 이반 일리치는 모든 평범한인간을 대표한다. 사회가 정한 통념에 의문없이 따르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반의 죽음으로부터 톨스토이는 인간의 보편적인 생애를 더듬어 나가며 죽음이라는 인간 실존의 절대 고독 고찰했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도중에 멈추더니 온몸을 뻗었다. 그렇게 그는 죽었다.”(<이반 일리치의 죽음>, 126)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모습을 보노라면 평범한 인간들의 마지막 모습을 군더더기 없이 써내려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렇게 끝나버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을 것인가? 책을 덮으면서 톨스토이는 마치 나에게 바로 지금 진정으로 살아있는가?라고 묻는 듯했다. 이반 일리치가 생의 마지막에 생각한 그것 무엇인지 톨스토이는 명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가 겪은 죽음의 과정을 통해 톨스토이는 각자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삶의 조건이 만들어내는 허구의 거미줄을 모두 걷어낼 . 그리고 삶의 본질을 바라보고 삶을 누리라는 것이 이반의 그것 아니었을까?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