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생태계에서 살아가는 지구인의 자화상 <위험하지 않은 몰락>

위험하지 않은 몰락: 불안과 화해의 시대론

(원제: 세계최종전쟁론 )

강상중·우치다 타츠루 대담 | 노수경 옮김 |  [사계절]

 

 

 

일본의 사상가 강상중과 우치다 타츠루가 처음 만나 지구라는 우주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그리고 우리 시대에 관하여 대화를 나눈다. 현재 지구라는 우주 속의 미세한 지구에서 벌어지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이 <위험하지 않은 몰락> 관심사이다. 예컨대, 지구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난민 문제나 테러리즘,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가는 세계의 우경화 양상 등을 있다. 지구인들이 우주선이라는 배를 공동 운명체라고 한다면, 특히 유례없이 서로가 연결되어 있는 우리 지구인들은 사상가의 대화에서 주목하는 모든 문제들과 우리 삶이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테러/우리가 모르는 프랑스]

 

요즈음은 국제 여행이 과거 보다 많이 수월해졌다. 교통기관의 발달 뿐만 아니라 외국을 나갈 기회도 많아지고, 여행지에 대한 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유럽은 많은 이들이 번쯤 가보기를 꿈꾸는 곳이기도 한데, 특히 프랑스는 가보고 싶은 유럽 나라에서도 단연 높은 순위를 차지할 같다. 하지만 <위험하지 않은 몰락>에서는 안타깝게도 2015 11 프랑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테러 사건부터 시작한다. 그러면 도대체 ? 우리는 궁금해진다. 인류문화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온 프랑스에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테러가 발생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강상중과 우치다는 어쩌면 필연적인 테러 사건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진실을 알려준다.

 

 

2015 당시 프랑스의 테러 사건은 일련의 무슬림 프랑스인 의해 발생한 사건이었다. 역시 의문이 든다. 도대체 프랑스인이 자국의 국민을 테러하는가라고. 우치다와 강상중 선생에 의하면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독특한 역할을 해왔다. 다름아니라 프랑스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중동에 군사 개입을 나라들이다(27)’라는 사실. 나아가 프랑스에는 인구의 10% 달하는 500 명의 프랑스인 무슬림 있는데, 이슬람 이민자를 비롯하여,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이들마저 뿌리 깊고 아주 단단한 차별정책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무슬림이라는 이유만으로 500만명의 프랑스인이 자국의 커뮤니티에 통합되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담자들은 이번 프랑스 테러의 성격을 예견된 사태라고 말한다. 특히 미국에서 일어난 9.11사건(2001) 비교해보면, 9.11사건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인데 반해, 프랑스의 테러는 사회에서 나고 자란 홈그라운드 테러리스트 의한 내파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다.  

 

 

한편 대담자의 대화를 통해 프랑스의 다른 면을 새롭게 보게 되었는데, 이들은 프랑스가 2 세계대전의 패전국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패전국이라함은 당시 나치 독일 유대인에 대한 인종멸절프로그램에 결과적으로 협력한 사실상의 전범국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강상중과 우치다가 지적하는 프랑스의 중죄는 패전국으로서 자아비판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특히나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하지 않으면 사회가 병들어 가기 시작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우리 나라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며 영토를 지배했던 외부의 세력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넘어갔음에도, 도망갔던 친일파 세력이 다시 돌아와 대한민국의 지도층이 되고 중심세력이 되었던 사례를 떠올려본다. 새로운 나라의 주인이 친일파 세력들이 일제 강점기 시대의 친일파를 찾아 벌을 줄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프랑스도 일면 비슷한 사례가 것이다. 비시정부에 적극 협력한 세력들, 레지스탕스를 잡아다가 독일에 넘긴 이들이 해방을 맞고 나서도 면면이 이어지는 극우세력을 구성했으리라 예상할 있다. 특히나 프랑스의 극우세력은 근본적으로 인종차별적이기까지 하다. 아무리 우리가 문화의 나라라고 부르는 프랑스도 자체적으로 지식인들의 반성이 없다면 우치다가 이야기하듯 지성은 곧바로 쇠퇴하기 시작함을 보여준다. 프랑스는 미국과도 같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자기분열적인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 다른 지구적 문제 난민 그리고 전쟁]

 

우리도 최근 제주도에서 임시 난민을 받아들일 것인가하는 문제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였다. 곳에서만 벌이지고 있는 현상인줄로만 알았는데, 우리도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실감했던 사례다. 우치다는 난민은 국가가 거절하고 말고 문제가 아닙니다. 난민이란 미국과 유럽이 주도한 글로벌화의 귀결이기 때문입니다.”(86)라고 명료하게 정리한다. 급격히 가속화된 세계화 과정에서 국가가 맡았던 부의 재분배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써 양극화가 심화되었고, 빈곤층은 이민자와 난민이되어 유동하기 시작하였다. 난민의 발생 또한 후기 자본주의의 심각한 병폐현상이라고 이해할 있게 되었다. 이로서 난민과 테러의 문제는 자본주의가 초래한 부작용으로 있다.

 

 

이러한 난민과 테러의 관계와 더불어 자본주의와 전쟁의 문제를 연결지을 있다. 자본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들이 생산해내는 물건을 있는 시장의 존재이다. 일반 생활용품을 무한정 만들어도 소비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수요가 있지 않게 되면 잉여 제품의 축적만 생겨난다는 말이다. 자본가들에게 이러한 패턴을 깨버릴 있는 품목이 있으니 무기 것이다. “무기는 절대로 포화되지 않는 시장을 가진 꿈의 ”(111)이라는 말이다.  자본가들이 영원한 시장을 개척할 있는 확실한 분야는 무기 산업 되며, 이를 위해 자본가들은 전쟁이라는 수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특히 1990년대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된 이후 세계는 사실상 자본주의로 이루어진 지구촌이 되었다. 냉전 구도가 사라진 지구촌에서 자본가들에게 시장 확보를 위한 타개책은 전쟁에 있었다. 우리 시대의 자본가들은 자본주의 세계의 '시바신'(흰두교 파괴의 )이라 할만 하다. 앞서 말한 프랑스와 미국이 중동에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고 폭격과 같은 군사 작전에 개입한 이유를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해볼 있다. 결국 우리가 흔히 금융자본주의로 일컫는 지구촌 생태계에서 전쟁은 없어지리라 기대하긴 힘들다. 우치다는 전쟁을 근절하기 위한 최종 전쟁이란 세상에 인간이 살아가는 불가능한 일입니다.”(106)라고까지 말한다. 아울러 그는 전쟁을 없애는 원리의 문제보다 사망자수를 줄일 있는 보다 현실적인 정도의 문제 관심을 갖고 궁리를 해야한다고 조언한다. 제한적이지만 당장은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 노력을 기울여야 같다.

 

 

 

[일본의 경우 - 싱가포르화]

 

우치다와 강상중은 다시 자국의 상황으로 화제를 옮긴다. 일본 사회가 싱가포르화되어 간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들은 싱가포르 사회를 파놉티콘 같은 도시 국가로 묘사한다. 파놉티콘은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제안한 일종의 원형 감옥으로서, 수감자가 있는 감옥의 중심은 밝고 사방으로 노출되어 있어 간수가 주변의 어두운 곳에서 수감자를 지켜볼 있는 감옥을 말한다. 간수가 수감자를 지켜보고 있지 않아도, 수감자는 간수가 언제든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심리적 압박감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효과가 파놉티콘이 의도한 결과일 것이다. 따라서 대담자는 싱가포르가 나라 전체를 통해 보이지 않는 감시망이 펼쳐있으며 정부의 활동에 비판적인 언론과 미디어를 통제하거나 없애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진단한다. 다만 일본이 싱가포르와 다른 하나는 풍부한 천연자원과 풍요로운 산하를 가졌다는 점이다. 싱가포르는 천연자원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따라서 일본 정부가 국민을 통제할 있는 여지가 현재로서는 제한적이라는 의미가 된다. 반면 싱가포르는 일본의 젊은이들처럼 자본주의의 폭주 맞서서 느린 경제 일구어내는 대안적인 시골의 삶을 구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현재 일본 정부는 자국을 이렇게 싱가포르화 되는 양상으로 변화시켜 가고 있다고 대담자는 비판한다. 비즈니스를 위해 국토를 개발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한국과 마찬가지로 국민을 도시의 삶에 의존하도록 만들어간다. 결국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문제도 도쿄와 같은 대도시에 전력을 지원하기 위해 향토를 개발하였던 것인데, 원전 사고를 통해 수많은 국민의 생활 터전과 국토를 상실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고향을 떠나야 했던 수많은 거주민들은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 난민 되어 버렸다. 사례는 전쟁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난민을 만들어내는 다른 방식으로도 이해될 있다.

 

 

 

[우리가 있는 일은?]

 

<위험하지 않은 몰락>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지구라는 우주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양상들을 짚어주고 있다.

강상중과 우치다가 직접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대담 속에서 유목민을 이야기한 부분을 떠올려본다. 항상 유동하는 삶을 살아가는 유목민에게 생존의 기회를 높일 있는 행동양식 내지는 도덕율이라면 희사의 문화 환대의 문화라고 있다. 개인의 이기적인 행동은 자신의 생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자신이 안전한 상태에 있을 타인을 환대하고, 나누는 이타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이 유사한 상황에서 이와 대등한 생존 조건을 확보할 있다는 기대를 있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도 자신의 천막에 찾아온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유목민들에게는 일종의 문화적 유전자로 남게되었을 것이다.

 

 

대담자가 주목하는 다른 자세로서, 불안한 현대사회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호인정 배려 모습이다.

한쪽이 옳고 나머지는 틀렸다 아니라 각각이 로컬한 가치관이자 고유의 민속지적 습관일 뿐이라는 점을 서로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253)  

다시 말하면 내가 옳다면 상대방도 옳을 있다 점을 인정하는 태도가 차이를 가져올 있다. 여기서 우치다는 실은 내가 옳거든이라고 생각해도 그걸 밖으로 꺼내지 않는 일종의 자기 억제 필요하다.”(253)라고 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이를 다르게 이야기하여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바꾸어 말해보고 싶다. 이러한 태도는 책의 후반에서 이야기하는 약자를 위한 건축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근대의 건축물은 약한 개체 고려한 반면, 현대의 건축물은 사람을 긴장 또는 흥분시키고 전투력을 높여 최고의 효율성을 추구하는데 모든 노력이 집중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결국 현대의 건축물은 사람을 포용하고 보듬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습관(최고의 효율성 추구) 매몰된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위험하지 않은 몰락>  일본의 사상가가 나눈 대담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책을 읽기에는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중요한 주제를 많이 언급하고 있다. 내가 모르고 있던 프랑스의 이면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자본주의라는 맥락 아래에서 서로 연관짓고 틀에서 이해할 있게 해주었다. ‘무기 산업 자본주의의 상징이 되었는지, 그리고 냉전 이후 일어나는 전쟁의 필요는 어디에서 오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성장 내지는 이익 추구만을 위한 자본주의는 결과로서 난민과 테러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배웠다.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자 우리는 배를 지구인이라는 생각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있는 일을 알고 있다. 다만 우리가 보고도 못본체하거나, 지금은 애써 실행으로 옮기지 않을 뿐이다. 혼자 살아갈 없는 존재인 인간으로서 우리는 타인에 대한 배려 환대 태도를 실천하는 것이 불안하고 잔혹한 시대에서 생존을 보장받을 있는 길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목민이었고, 언제든 새로운 형태의 유목민(난민) 있기 때문이다. 이를 기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같다.  

 

 

 

 

 

 

 

 

 

 

 

 

[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