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목표를 향해 던져져야 할 작살과 같다" - 시인이자 전쟁광인 단눈치오 평전

 

《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 시인, 호색한, 전쟁광》

(원제: The Pike: Gabrielle D’annunzio, Poet, Seducer, and Preacher of War)

루시 휴스핼릿(Lucy Hughes-Hallett) 지음 | 장문석 옮김 | [글항아리]

 

 

 

 

 

 

 

[1] 단눈치오는 어떤 사람인가?

 

 

한 사람의 이면을 온전히 글로 묘사한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단눈치오와 같은 인물에게 몇 가지 키워드 만으로 인물을 특정짓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아닐까한다. 단눈치오는 17세 때 시인으로 자신을 먼저 세상에 내놓았다. 단테, 페트라르카, 레오파르디를 위대한 이탈리아의 시인으로 꼽았던 단눈치오는 16세 때 이미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로 편지를 썼던 언어의 귀재이기도 했다. 반면 여성들과 숱한 염문을 뿌리고 다니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재화를 다 소비할 것처럼 게걸스럽게 가산을 탕진하며 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시도한 사람이기도 했다.

 

 

저자는 단눈치오의 다채롭고 복잡한 명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그는 성적으로 난잡한 연인이자 고급스런 탐미주의자, 호전적인 민족주의자, 이탈리아 건축물의 복원 캠페인에 나서는 호고주의자, 최초의 비행기에 몸을 싣고 창공으로 비상했을 뿐만 아니라 연대적으로는 도저히 믿기 힘든 크고 소음이 심한 자동차를 타고 토스카나의 길들을 누빈 근대성의 찬미자였다.”(352면)

 

 

이 진술에 단눈치오라는 인물의 몇 가지 주요 특징이 간결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타인의 제안에 거절을 잘 하지 못하고,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도 어려움을 느끼던 인물이 ‘삶의 모험’에는 불나방처럼 단호히 자신을 던져 넣는 모습은 그 자체로 매우 분열적이다. 저자는 부단하고 분열적이기까지 한 이 인물의 특징을 책에서 크게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곧 ‘자연과 신화를 서정적으로 노래하는’ 안전한 단눈치오와 자신을 따르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세상을 피로 흠뻑 적시라고 요구하며 위험한 애국주의와 영광의 이상을 내세우고 강탈 행위의 서막을 열어젖힌’ 위험한 전쟁광 단눈치오. 이 두 가지 상반된 페르소나는 분명 한 사람의 것이다.

 

 

역사적으로 전쟁의 시기는 사람들에게 어느 노선을 취할 것인지 강요하곤 한다. 종교 전쟁에서는 신교의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구교의 편에 설 것인지, 교황과 왕권의 대결에서는 교황의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왕권을 지지할 것인지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혹은 냉전의 시기에 자본주의의 편에 설 것인지, 공산주의의 편에 설 것인지를 개개인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단눈치오는 이런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잠시 어느 노선을 지지한 적은 있어도, 어느 편의 선봉에 서서 이들의 명령을 받는 일은 거부했다. “내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노래를 불러야 한다면, 나는 일용한 양식을 포기할 것이다.”(543면) 단눈치오라는 인물은 이처럼 혼돈과 폭력의 세기에 스스로 특정 노선에 한정되지 않는 ‘특이점’으로서 끊임없이 부유했던 인물이었다. “나는 개인주의자이고 또 그렇게 남을 겁니다. 철저하고도 극단적으로 말이지요.”(342면) 사회주의를 한 때 찬성했다가 몇 년 후 이를 비판하며 자신만의 길을 선택한 단눈치오는 본인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어느 노선에 투항하기를 거부한 철저한 개인주의자였다.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했던 단눈치오는 17세 때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한 후, 자신이 말을 타다 낙마해서 요절했다는 가짜뉴스를 익명으로 신문사에 투고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유명인사로 만드는 자기 홍보의 달인이기도 했다. 단눈치오가 피우메로 입성하여 권력을 잡은 후 가장 먼저 자신의 보도 부서를 만든 일은 그에게 지극히 당연한 절차였다. 단눈치오에게 가장 우선하는 관심사는 ‘자기 자신’이었다. 단눈치오의 행동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동인은 모든 관심사가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이 구심력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단눈치오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세심한 신경을 쓰거나 자신의 연인이 어떤 옷을 입는지 관여하고, 값비싼 여러 수집품들로 실내를 장식하는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단눈치오가 탐미주의자이면서 지극한 쾌락주의자였다는 저자의 평가 또한 수긍이 갈 것이다.

 

"나는 이탈리아의 '탁발승'도 아니고, 또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아. 그저 내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을 뿐이야."(824면)

단눈치오는 1년 남짓한 피우메 정부 시절 이후 권력을 이양하고 자신의 마지막 은둔처 '비토리알레'에서 말년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 기간에는 특히 무솔리니의 감시와 선물을 동시에 받게 된다. 단눈치오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표명하지는 않는다. 반면 무솔리니는 단눈치오를 여러 번 방문하여 단눈치오가 무솔리니를 지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대중에게 심어주기위해 노력했다. 파시스트 정권은 이러한 기회를 철저히 이용했다. 사실 현실 정치에 무관심한 단눈치오는 자신이 원하는 일이란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향유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전부였는지 모른다. 단눈치오는 말년에 집에서 은둔한 채 44권에 달하는 전집 출간 작업을 하며 비교적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

 

단눈치오는 비행기가 세상에 나온지 채 15년도 안된 시기에 이미 비행에 매료된 인물이기도 했다. 심지어 대공포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의 상공을 날아 폭탄을 떨어뜨리거나 선전물을 투하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는 일에 스스로 극적인 배역을 선택하여 맡았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배역을 할 때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을 보호해야겠다는 어떤 욕구도 없었다. '삶이란 목표를 향해 던져져야 할 작살과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 중요한 것은 오직 다음 번의 예정된 출격이었고, 그것만이 '전부'였다."(532면) 이 책의 원제 가 암시하듯, '' 또는 '작살'의 이미지는 단눈치오가 자신의 삶에 대해 갖는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호'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하나의 상징으로서 ''(기사 또는 궁수의 이미지)이자 본인 스스로를 창의 목표물(희생자) 곧 '순교자'(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이미지)로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이 책의 저자 루시 휴스핼릿이 단눈치오에 대한 평전을 기획하면서 떠올린 주제 이미지가 바로 창과 순교자가 아닐까.

 

 

 

 

[2] 단눈치오의 시대

 

 

단눈치오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단눈치오가 태어나기 직전인 1861년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공식 출범했다. 이 시기의 이탈리아는 통일 이탈리아에 강력한 구심점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이 구심점 중의 하나가 국왕을 중심으로 힘을 모을 수 있는 강력한 ‘민족주의’였다. 단눈치오가 젊은 시절 민족주의에 그토록 경도되었던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가리발디의 추종자가 ‘이탈리아가 “위대한 민족”으로서의 지위를 입증하려면 ‘피의세례’가 필요하다’고 외쳤듯이 외곬수적인 민족주의는 구성원의 희생을 예비하며, 이들의 ‘’를 요구한다. 특히 19세기 말, 두 번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통해 이탈리아의 호전적인 민족주의가 힘을 크게 얻은 정황을 휴스핼릿은 잘 묘사하고 있으며, 단눈치오의 시대에 나라 전체가‘거대한 전쟁’으로 향해가는 배경을 잘 포착하여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단눈치오의 피우메 정부 시절 이후, 그리고 1차 대전이 끝난 후 이탈리아 내부는 그야말로 혼돈의 상태였다. 정부와 군대에 대한 분노와 불신으로 이탈리아는 분열 양상을 보였으며, 정치적 불안 증세가 심화되었다. 재정침체와 전쟁으로 국채가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도시에 실업자가 넘쳐나던 국면이었다. 이렇게 사회가 아노미 상태에 있던 상황을 탈출할 수 있는 대안으로 주목받았던 것이 ‘파시즘’이었다. 히틀러의 나치즘도 비슷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파시즘의 지도자였던 인물 이탈로 발보의 견해에 따르면 “파시즘은 전후 남은 분노를 표출할 대안적 출구를 제공하였으며, 이탈리아를 사회주의 혁명으로부터 구했다”(635면)라고 하며 파시즘의 당위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과 전체주의적 독재체제의 출현은 그 양상에 있어서 많은 부분이 파시즘과 나치즘이 공유한다. 독일의 경우도 1차 대전 이후 국내 정치경제적 불안 요소가 만연해 있던 위기상황에서 국민들의 절망과 분노를 표출할 기회를 마련했다. 무솔리니가 파시즘을 구현해내었듯이, 히틀러의 나치 독일도 파시즘의 강령을 비롯한 많은 부분을 가져다 충실히 활용했다. 여기에서 이 나치와 파시스트들에게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던 인물이 바로 단눈치오라는 사실이다.

 

 

이 책은 놀라운 ‘초인’(비호감이긴 하지만)의 일대기를 조명한 책이면서 동시에 이 인물이 살았던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세계사의 한 부분도 함께 아우르고 있다. 단눈치오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의 세기는 산업혁명 이후 급속한 발달을 가져온 기술의 혜택을 받아 인간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던’ 시기였다. 기차를 타고 장거리를 여행하거나, 전신을 이용하며 대서양 너머로 소식을 전하고, 커다란 증기선을 이용하여 대서양을 건너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저자가 여러 차례 ‘미래주의 운동’에 주목하고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1902년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는 프랑스의 <르 피가로> 1면에 ‘미래주의 선언’을 게재했다. 마리네티는 이 선언을 통해 새로운 세기를 열며 산업혁명의 성공적인 결과물, 특히 매끈한 금속, 강력한 기계, 빠르고 효율적인 것을 다음과 같이 찬미했다.“강철 철로를 달리는 열차 속에서, 강물과 바닷물을 가르고 나아가는 배 속에서, 그리고 노동과 부를 낳는 모든 기계 속에서 경이로운 아름다움이 잉태되고 있다.”(420면) 미래주의자들의 이러한 표현들에서 퇴폐주의적이고 상징주의적인 움직임은 분명히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무모한 젊은이들의 주의를 끌었을 것이다.

 

 

마리네티가 단눈치오와 만날 수 있었던 ‘접점’은 당시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자동차와 비행기(모두 강력한 엔진과 빠른 속도를 상징한다)에 대한 관심에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이 시대의 분위기와 정서는 많은 지식인들도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르셀 프루스트나 앙리 베르그송 등도 에어쇼를 보고 큰 감명을 받거나 에어쇼를 보기위해 여행을 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미래주의자들의 주장을 보면 이들의 ‘미래’는 산업혁명의 시대가 낳은, 매우 자본주의적인 발명-개념으로 이해된다. 과거와 현재에 대한 비판은 있을지언정, 다가오지 않은 미래, 특히 인간이 이룩할 성취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느껴진다. 이러한 무모함은 현재를 살아가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마리네티가 피우메 시절 단눈치오 곁을 떠난 이유도 결국 두 사람이 생각하는 ‘미래’에 접근하는 태도 또는 관점에 메워질 수 없는 큰 간극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눈치오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오히려 지극히 철저하게 ‘현재를 살고’, ‘현재에 집착했던’ 인물이었다면, 마리네티는 단눈치오처럼 몽상가였지만 미래주의자들의 무모함과 산업기술에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곧 기술문명의 힘과 잠재성은 오히려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보여주던 폭력성과 호전성에 더 잘 부합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분명 단눈치오와 마리네티 사이에 ‘미래’를 보는 관점에 큰 간격이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현실정치에 기반을 둔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현재를 기반으로 장밋빛 미래를 약속할 수 있었다면, 단눈치오는 어쩌면 미래에 무관심한, 오로지 자신의 현재적 관심을 유지하고 현재를 향유하는데 보다 근본적인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전쟁’을 ‘정화’의 수단으로 보고 ‘전쟁이 유럽의 위생학’이라고 주장한 마리네티의 견해에 단눈치오는 분명히 공감을 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눈치오에게는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 우선 전제가 되어야하며, 이것이 마리네티의 공감을 얻지 못했을 것 같다.

 

 

19세기 후반 통일 이탈리아가 강력한 구심점을 민족주의로부터 구했다면, 20세기 들어 호전적인 민족주의에 대항하여 평화를 지향하던 사회주의가 그 대척점에서 힘의 균형을 어느 정도 유지했던 것 같다. 저자 휴스헬릿은 민족주의를 지향하고 ‘라틴민족’의 우수성을 확인하고 싶어하던 호전주의자들과, 신중하고 평화를 지향하던 사회주의자와의 대립이 심심치않게 존재하며 꿈틀대던 당대의 이탈리아를 세심하게 그려내었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민족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립 구도는 급속하게 균형을 잃게 된다. 파시스트 정권은 공갈협박과 폭력을 통해 통해 등장하여 사회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고 제거하며 전체주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정황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단눈치오가 살았던 시대는‘조국’이라는 절대 기호와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하여금 개개인의 희생을 요구했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19세기가 낳은 신낭만주의 성향의 젊은 시인이 점차 민주주의 정부에 도전하는 급진주의적 우파 반란선동가로 변모하는 모습을 잘 묘사해내고 있다. 개인으로서 한 인간은 당대의 사회와 시대 속에서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모든 인간은 이들이 속한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피우메 정부 시절 단눈치오가 기초했던 정치 조직의 모든 면모를 철저히 ‘표절’했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는 단눈치오를 예수의 등장을 알린 ‘세례자 요한’처럼 파시즘의 메시아로 만들어 놓았다. 예수의 잉태를 수태고지한 천사 가브리엘의 이름을 지닌 단눈치오는 파시즘의 잉태를 수태고지한 인물로도 이용된 셈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를 성실히 참고한 히틀러의 나치 정권 또한 단눈치오가 의도치 않게 만들어둔 문화의 착실한 수혜자였다. 단눈치오는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히틀러의 나치즘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결국 이들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셈이다. 지금은 우리에게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로 통용되는 ‘홀로코스트’는 사실 유대교에서 짐승을 통째로 구워 신에게 바치는 ‘번제’를 의미했다. 단눈치오의 문학적 상상력은 자신의 피우메 시절 피우메를 ‘가장 아름다운 번제(holocaust)의 도시’로 명명한 데서 정점을 찍었다. 파시즘의 성격에 인종주의가 강하게 결합한 나치즘은 분명 단눈치오의 상상력을 흡수하며 이 용어 ‘홀로코스트’에서도 주목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파시즘의 등장이 단눈치오 한 사람에 의해 형성된 것은 아니다. 휴스핼릿은 ‘파시즘이 예외적인 역사 운동의 기형적 산물이 아니라 유럽의 지적·사회적 삶에 깊이 뿌리내린 경향들로부터 유기적으로 성장해 나온 어떤 것임을 알게 된다.’(16면)라고 하며 사회적 맥락을 잊지 않고 언급한다. 곧 이 모든 현상은 당대의 시대와 사회가 그 구성원들 함께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낸 결과물로 이해해야 옳을 것이다.

 

 

단눈치오가 누누이 주장하던 자신의 정치 기조, ‘시학의 정치’와 피우메에서 꿈꾸었던 자신의 유토피아는 ‘철학자-왕’이 국가를 통치해야한다고 주장했던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다. 여기에 더하여 단눈치오가 니체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해볼만 하다. 현재 신보수주의로 불리는 ‘네오콘’의 사상적 기반 또한 다름아닌 ‘플라톤’과 ‘니체’에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적인 ‘이데아의 세계, 순수한 진리의 세계’는 몽상가 단눈치오가 주목했던 이상향이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역사이래 서양인들의 정신구조를 지배해온 패러다임이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이 세상에 ‘하나의 진리’가 존재한다는 일원론적인 시각과 부합하며, 유일신을 상정하는 서양의 기독교와도 모순되지 않는다. 단눈치오가 매료되었던 ‘성 세바스티아누스’ 역시 황제를 섬길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 신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도록 강요받았고, 세바스티아누스는 신을 믿기로 하여 순교자가 되었다. 서양문화의 이러한 ‘단일성’과 ‘배타성’의 정신구조는 플라톤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단눈치오의 정치적 사유에 토대를 제공한 또 다른 인물은 니체였다. 단눈치오는 여러 철학자들의 견해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를 한 후 내놓았는데, 니체로부터는 ‘엘리트주의’나 니체의 저술에서 보이는 선언문의 형태, ‘초인’의 이미지와 디오니소스적 생명력에 대한 관심,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정황을 저자 휴스핼릿은 기록하고 있다. 나는 신보수주의자들이 단눈치오의 사상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단눈치오의 정치적 사유와 신보수주의자들이 기반하는 사상가들이 플라톤과 니체라는 점에 주목해보고 어떤 연관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100여년 전 단눈치오가 의도치 않게 뿌린 씨앗은 분명 파시즘과 나치즘에 이용된 바 있다. 역사 속에서 돌연변이를 거치고 구체성을 띠어 현재의 신보수주의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준 부분이 있으리라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겠다.

 

 

 

 

 

[3] 저자의 균형 감각과 글쓰기

 

 

시대를 관통하듯 자신을 몸소 시대 속으로 던져넣으며 살았던 단눈치오. 이 인물의 다층적인 인물됨과 시대 상을 900페이지가 넘는 원고에 담는 것, 그것도 지루하지 않게 담아내는 작업을 마주하는 일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대체로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책의 첫머리는 이 인물의 정치적 삶에서 정점을 이루던 시기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저자는 단눈치오가 활동했던 극적인 시기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저자의 연극적 상상력으로 독자들은 단눈치오가 활동했던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돈의 시대상을 함께 목격하는 것같다. 어느 순간 독자들은 단눈치오가 시인으로 등단하던 17세 당시로 돌아간다. 막 등단한 젊은 시인은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자신이 낙마하여 사망했다는 거짓 뉴스를 퍼뜨리게 된다. 독자는 단눈치오가 만들어내는 거짓 뉴스의 생산 현장을 상상하게 된다.

 

 

한 개인의 인간적인 면모만을 살펴보았을 때, 단눈치오는 단연코 호감을 주는 인물은 아니다. 그는 대의를 위해 사람들의 희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전쟁광이면서, 숱한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던 호색한이자, 무분별한 낭비가이고, 정치 지도자로서는 현실 감각이 전무한, 신뢰하기 힘든 몽상가였다. 그러나 저자가 이러한 인물을 조명하는 방식은 매우 신중하면서도 균형잡혀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저자는 단눈치오를 “단순히 혐오스럽거나 광적인 인물로만 치부될 수 없으며 (…) 완전히 정상인 존재”라고 평가한다. 단눈치오를 비판하면서도 저자는 그의 문학성과 예술적 재능, 그리고 섬세한 감수성을 충분히 조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정상적인 인간으로서 한 인간의 복잡다단한 층위를 보여주려고 의도했음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이를 가능하게 해준 것은 우선 단눈치오가 남긴 방대한 양의 수첩때문이기도 하다. 휴스핼릿의 구체적이고 섬세한 인물 묘사는 분명 메모광 단눈치오가 남긴 유산에 힘입은바 크다. 단눈치오에게는 글쓰기의 모든 원천과 글감이 결국 자신이 보고 관찰한 모든 것을 담은 수첩 안에 있었다. 저자 역시 방대하고 자세한 단눈치오의 메모를 따라가며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 것이다.

 

 

그의 공적인 삶은, 가까이에서 보면 전체적인 윤곽을 가늠할 수 없는 모자이크 조각처럼 미세한 관계들을 포함한 사적인 삶과 공존했다.”(524면) 저자가 평가하는 단눈치오의 삶의 양태(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의 공존)는 단눈치오의 삶을 담은 이 책의 글쓰기 방식과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곧 단눈치오라는 인물의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을 모자이크 조각처럼 번갈아가며 독자에게 제시하여, 방대한 글이 가져올 수 있는 지루함을 효과적으로 차단한다. 책의 차례를 다시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한다. 1부는 단눈치오의 정치적 경력이 정점이던 시기부터 시작하여, 시인으로 등단하던 시절, 그리고 스스로 전설을 만들던 인물의 주요 시기를 스케치하듯 빠른 전개로 보여준다. 2부에서는 단눈치오의 다양한 면모를 구성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여러 키워드를 각 장의 제목으로 하여 한 인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니체의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하는 “엘리트주의”나 “초인”, 그리고 디오니소스적 생명력에 대한 열망을 암시하는 “생명”과 같은 장()을 설정해놓은 부분을 들 수 있다. 혹은 자신의 출신 성분에 대한 단눈치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장() 인 “고향”, 단눈치오가 되고자 했던 “귀족”에 대한 취향, 그리고 단눈치오가 유달리 관심을 보였던 혹은 페티시적인 대상을 암시하는 “순교”, “질병”, “”, “속도” 등과 같은 장들도 인물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3부에서는 1부에서 보여주었던 정치 경력의 정점기에 전쟁 영웅으로서 활약하던 시기와 피우메 점령 시기, 그리고 물러나 말년의 은둔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끌어내며 한 인물의 일대기를 마무리짓고 있다. 정치 무대에서 물러난 후, 단눈치오는 은둔지 비토리알레에서 자신만의 세계 속에 매몰되어 살아갔다. 코카인과 아편, 수면제 및 진통제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면서 무솔리니가 종종 보내주던 선물을 받거나 장군 서열로 진급되면서 자축하는 등의 행보를 보인다. 단눈치오가 파시스트 정권에 길들여지며 잊혀져가는 말년의 모습은 당시 이탈리아의 권력을 점점 장악해가는 파시즘 세력의 행보와 교차되며 극적으로 대비되고 있다.

 

 

 

 

 

【정리하며】

 

한 개인은 누구나 당대의 사회 속에서 태어나기 마련이다.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로부터 개개인은 결코 자유롭지 않다. 단눈치오의 분열적이고 극단적인 이면들은 마치 혼란스러웠던 시대상을 꼭 닮기도 했다. 특히 이 책은 단눈치오라는 인물이 허물어져가는 모습과 함께 1차 세계 대전 이후 정치경제적 불안정 속에서 광기로 치닫고 있는 이탈리아 사회를 잘 묘사해내고 있다. 역사의 한 가운데에 스스로를 던져 세상과 긴밀하게 호흡하던 단눈치오는 스스로 전설이 되었다. 세상의 주목을 받았던만큼, 단눈치오는 점점 권력을 잠식해들어오는 파시즘 정부에 모든 것을 강탈당하듯 이용되기도 하였다. 무솔리니 파시즘의 거의 모든 현현은 단눈치오의 상상력에 기원한다. 나아가 나치 독일에도 단눈치오의 상상력은 바이러스처럼 전이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플라톤과 니체로부터 받은 사상의 관점에서 단눈치오의 상상력은 소멸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신보수주의에도 이어지고 있지 않은지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저자는 니체와 단눈치오에게 동시에 영향을 준 인물이 바로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옙스키라고 저자는 언급했다. 한 가지 궁금해지는 것은 그렇다면 니체의 ‘초인’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미지에서 영향을 받았을까 하는 점이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단눈치오의 소설 <무고한 존재>(문학과지성사, 윤병언 옮김, 7쪽에서 인용한 부분을 재인용함)에서 단눈치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의 정의는 나를 건드리지 못한다. 이 세상의 어떤 법정도 나에게 판결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초월한 인간’, ‘정복되지 않은 자’, ‘초인’으로서의 인물상과 유사한 맥락이 그 증거이다.

 

 

정확히 기억 나지는 않지만 어느 문인이 ‘시인은 자신의 온 존재를 걸고 스스로를 들이밀며 시를 쓰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던가. 시인으로서 단눈치오는 이처럼 자신의 존재를 걸고 ‘창’처럼 세상을 향해 스스로를 밀고나가며 삶을 살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단눈치오는 어쩌면 평생을 자신이 꿈구는 문학적 환상의 영역에서 살아간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19세기라는 시대의 무대에서 스스로 주인공을 맡아 공연하는 연극 배우이자 광대이기도 했으며, 세계 최고의 나르시시스트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물론 단눈치오를 미화하거나 현재의 도덕적 기준으로 그를 소급하여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세상의 판단기준 너머에 존재했던 사람이다. 옮긴이는 단눈치오를 가리켜 ‘초인으로서 지상의 맥락을 벗어난 기호’라고 표현했다. 그는 ‘탈맥락화된 기호-인간’이었다는 말이다. 현실 정치에 뿌리는 내리고 있던 무솔리니와는 달리 실천으로서의 정치와 무관했던 단눈치오는 어디에도 안착하여 뿌리를 내리지 않는 ‘부유하는 기호’였기에 오히려 파시즘에 도구로서 이용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단눈치오는 분명 결점이 많은 사람이었으며 우리가 어떤 교훈이나 배움을 얻을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는 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의 극한을 시도해본 사람이자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마도 저자 루시 휴스핼릿이 단눈치오에 주목하고 오랜 시간을 이 책에 할애한 이유가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