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 마라톤’ - 《모비 딕》3장 천천히 읽기

 

 

[3] 물보라 여인숙(The Spouter-Inn)

 

 

모비 마라톤’ - 모비 3 천천히 읽기

 

 

[3장의 기본 줄거리]

 

추운 겨울 저렴하게 잠잘 곳을 찾아 전전하던 이슈메일은 물보라 여인숙이라는 음침하고 바람이 들이치는 여인숙에 들어간다. 불길해보이는 유화와 거대한 고래 턱뼈가 장식된 현관을 지나 술청(public room) 들어간 이슈메일은 성경에서 저주받은 요나(Jonah)’ 같은 이름을 쓰는 여인숙 주인에게 하룻밤 묵을 방을 요청한다. 마침 방이 모두 있어서 요나는 이슈메일에게 침대가 있는 방에서 작살잡이와 침대를 쓰라고 권한다. 추운 겨울 이상 여인숙을 전전할 없어 이를 수락하게 된다. 커다란 침대에서 잠들 무렵 찾아온 퀴퀘그라는 이름의 작살잡이는 식인종이었다. 와중에 이슈메일은 여인숙 주인 요나의 중재로 퀴퀘그에 대한 편견을 깨고 침대에서 단잠을 자게 된다.

 

 

 

3장의 주요 사건은 이슈메일이 물보라 여인숙에 들어가 곳을 찾는 과정에서, 우연히 침대에서 밤을 보내게 되는 식인종 작살잡이 퀴퀘그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퀴퀘그는 남태평양에서 작살잡이로 몸에 문신을 고래의 향유로 처리한 뉴질랜드 원주민의 머리를 팔러 나간 상황이었다. 모비 놀라운 점은 소설의 중간중간에 지금부터 170 정도 전의 작가가, 백인들이 사람의 피부에 대해 갖고 있던 보편적인 사고 방식과 확연히 다른 에피파니(순간에 다가오는 깨달음 같은 ) 순간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내가 미지의 작살잡이에 대해 부당한 편견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잠시만 기다려보자.”(51)

 

 

식인종에게 붙들려 강제로 문신을 당했다는 어느 백인-그도 역시 고래잡이였다- 이야기가 기억난 것이다. 작살잡이도 바다를 항해하다가 그와 비슷한 일을 당한 분명하다고 나는 결론지었다. 결국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것은 그의 표면일 뿐이다. 사람은 어떤 피부를 가졌든 관계없이 정직할 있다.” (56)

 

 

이런 생각들을 노예제가 존재하던 시기에, 그것도 백인의 집단에 있던 사람이 으레 있는 사고는 분명 아닐 것이다. 이슈메일이 잠시만 기다려보자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는 순간이 바로 에피파니의 순간이며 반성적 사고의 순간일 것이다. 멜빌은 내가 내린 결론, 내가 판단이 과연 옳은가라고 반문할 아는 소양을 갖춘 인물이다. 그렇다고 해도 당시에 백인 작가가 사람은 피부색과 무관하게 정직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1장에서 세상에 노예가 아닌 사람이 있는가?라고 반문했던 것처럼 당시의 시대 상황 속에서 놓고 , 상당한 논란의 여지를 남겼을 같다. 하지만 작가 허먼 멜빌은 어떤 사람인가. 몰락해버린 자신의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지금으로 말하면 고등학교 졸업할 즈음에 거친 바다로 나가 배를 타기로 사람이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1장에서 언급한 있는 대가를 받은 에는 신분이나 피부색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가난한 이들이 당시 경제 공황의 여파로 더욱 극심한 곤궁 속에서 살아가던 , 젊은 남자들이 있는 일로서 배를 타는 일은 나름의 보상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충족시켜줄 창구가 되었을 것이다. 멜빌의 경험은 당시에 많은 젊은이들이 이러한 경험을 했으며, 멜빌과 같은 성찰적인 사고를 있는 이들에게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아도 놀랍고 한편으로 귀담아 들을 만한 지혜를 모비 통해 우리에게 남겨놓았다고 있겠다.

 

 

소설을 읽다가 흥미로운 부분은 무언가 불쑥 지나가듯 작가가 자신의 의식을 문장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다. 마침내 문신으로 가득한 새로운 룸메이트 퀴퀘그가 등장한 , 이슈메일은 그의 몰골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친다. “결국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것은 그의 표면일 뿐이다.”(56)라고 말하는 것이다. 원서의 표현으로는 ‘outside’ 번역자는 표면으로 옮겼다. 결국 상대방의 겉모습 보고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멜빌의 판단이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소설 속의 이슈메일은 온전히 멜빌의 분신은 아니기에 일반적인 백인의 편견을 보여주기도 한다. 결국 3장에서 화자인 이슈메일이 퀴퀘그라는 인물을 만나면서 백인들의 시선을 보여주며 멜빌의 인식과 처음으로 충돌하고 있는 장이기도 하다.

 

 

(퀴퀘그) 30 전쟁에 참전했다가 속옷 대신 고약을 처바르고 전쟁터에서 방금 탈출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다리도 짙은 초록색의 청개구리 떼가 어린 야자나무 줄기를 뛰어 올라가고 있는 것처럼 얼룩덜룩했다. 그가 남양에서 포경선을 타고 기독교 국가에 상륙한 혐오스러운 야만인인 것은 이제 분명해졌다.”(58)

 

 

백인들의 사회, 특히나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는 미국과 같은 서양 문명의 사람들이 이교도를 바라보는 무의식적이고 일반적인 시선으로 이해할 있겠다. 따라서 다시 정리해보면 3장에서는 새로운 인물 하나를 자연스럽게 소개하면서 등장 인물의 면면을 재미있는 에피소드 속에서 보여주며, 동시에 이슈메일과 퀴퀘그의 만남을 준비한 장이다. 상징적으로는 서양 문명에 속한 사람과 비서양 문명의 사람이 만나는 자리, 이들의 삶과 문화가 충돌을 시작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의 만남에서 우여곡절 끝에 사람이 같은 침대에서 단잠을 자며 마무리하는 모습은 재미있는 장면이면서도 의미심장하다. 특히나 이슈메일이 여인숙의 현관에 있던 거대한 턱뼈를 통과하여 들어온 것을 떠올려본다면, 둘은 마치 거대한 괴물 리바이어던, 혹은 성서에 나오는 요나의 이야기처럼 고래 뱃속에서 이루어지는 서구인과 비서구인의 만남, 우정이 시작되는 장면이라고 바라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부분은 다시 말하면 저자가 자신을 소설 속에서 불쑥 드러내는 부분인데, 3장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드러낸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퀴퀘그) 나와 똑같은 인간이야. 내가 사람을 두려워했다면, 같은 이유로 사람도 나를 두려워했을 아닌가. 술에 취한 기독교도보다는 취하지 않은 식인종과 함께 자는 나을지도 몰라.”(61)

 

 

170 가까이 과거에 이러한 말을 있었던 것도 놀랍지만, 부분도 멜빌이 자신이 남태평양 마르키즈 제도의 식인종족 타이피족과 수개월간 생활했던 경험이 없었다면 이런 문장은 나올 없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멜빌은 함께지내던 타이피족에게 잡아먹히기 전에 탈출했다고 하는데, 그의 이러한 경험을 고려한다면, 문장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게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멜빌 자신의 목숨을 경험을 통해, 그리고 살아남았기에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문장을 나는 좋아하게 되었다.

 

 

 

 

식인 풍습과 야만 대한 시각

 

우리가 고전이라고 하는 작품을 읽다 보면 은연중에 지나치는 부분이 바로 식인 풍습 관한 사항을 만나게 되곤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분은 내게 흥미를 주는 주제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수록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정체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멜빌은 135장이나 되는 소설의 앞부분인 3장에서 이미 퀴퀘그라는 식인종 등장시키고 있다. 게다가 퀴퀘그가 밤늦게 돌아다니는 이유가 고래의 향유로 처리를 뉴질랜드 원주민의 머리를 기념품삼아 백인들에게 팔러다니고 있다는 설정은 독자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무척이나 자극한다. 나는 부분에서, 그리고 3장의 마지막 부분, ‘술취한 기독교도보다 멀쩡한 식인종과 침대에서 자는 것이 낫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수상록 몽테뉴를 떠올렸다. 분명하게 예상해볼 있는 사실은 멜빌도 몽테뉴의 수상록 읽었다는 점이다. 모비 표지 다음에 바로 나오는 어원편을 지나 발췌록 보면 멜빌이 수상록 읽고 고래 관해 언급한 부분을 발췌한 부분이 나온다.

 

 

짐승이든 배든, 다른 것들은 모두 괴물(고래) 아가리, 무시무시한 심연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당장 삼켜져서 모습을 감추지만, 오직 바다모샘치만은 그곳으로 안전하게 물러가 잠자리로 삼는다.(14, 재인용)

[미셸 몽테뉴의 에세(수상록) 수록된 레이몽 스봉의 변호’]

 

 

지금 부분을 다시 읽어보면서 떠오른 생각은 3장에서 이슈메일과 퀴퀘그가 여인숙의 침대에서 자게 되는 에피소드는 마치 부분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든다. 여인숙에 있던 고래의 턱뼈를 통과하여 여인숙 내부(고래 뱃속) 들어간 이슈메일과 퀴퀘그는 바다모샘치마냥 고래의 심연에서 안전하게 잠자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심연이라고 하는 장치는 무지와 죽음의 세계를 상징할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 근원적인 공포를 주는 개념의 한가운데에서 이슈메일과 퀴퀘그는 마치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것을 맹세하는 부부처럼 침대에서 우정을 나누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심지어 여인숙의 주인장 별명을 요나라고 설정해둔 것도 생각을 더욱 그럴듯하게 하지 않은가.

 

 

잠시 옆길로 빠졌지만 다시 식인의 풍습으로 돌아오면, 몽테뉴 역시 흥미로운 점을 기록하고 있는 대목이 나온다. 몽테뉴의 수상록(동서문화사판, I, 218면부터)에는 식인종에 대하여라는 항이 있는데, 스키타이 족을 예로 들면서 이들 전사 각자는 자기가 죽인 적의 머리를 전리품으로 가져와 자기 문에 매달아 두는 습속을 언급하고 있기도하다. 마치 남태평양의 식인부족에서 서양문명을 보기위해 자신의 부족을 떠나왔던 퀴퀘그의 행동처럼 말이다. 물론 스키타이 족의 행위는 몽테뉴가 지적하고 있듯이 먹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극단적인 복수를 보여주기 위함이긴 하지만 말이다.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유럽에 발을 들여놓은 식인종 3명과 만나 대화하는 대목이 나오는데(이후에 정확한 부분을 찾게 되면 다시 언급해보겠다), 이들과 대화하며 이들을 야만인으로 보기보다는 다른 풍습을 가진 이들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알아낸 사항들을 기록한 대목도 있다. 멜빌이 모비 쓰면서 읽었던 수많은 책들과 자신의 30 상당시간을 보낸 바다에서의 경험을 통해 몽테뉴의 책을 읽고 공감하는 바가 많았을 것같다. 수상록을 다시 들쳐보며 눈에 띄는 부분은 몽테뉴가 사람들이 자기 습관이 아닌 것을 야만적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들을 야만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이 그 자체로 여느 상태로 나가며 이루어 놓은 성과를 야만이라고 부르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오히려 우리의 기교로 사물을 그 평범한 질서에서 틀어 변경해 놓은 것들을 차라리 야만이라고 불러야 할 일이다.

[미셸 몽테뉴의 수상록, (동서문화사, 222) ‘식인종에 대하여’]

 

 

이 표현이 다소 어려운 듯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상당히 흥미롭고 놀라운 표현이다. 마치 현대를 살고 있는 내게 나의 편견을 지적하고 있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연 그대로의 것, 문명화되지 않은 것을 야만이라고 부르고 있던 것인데, 몽테뉴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과연 야만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게 해주고 있는데, 몽테뉴는 자연의 순리대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들을 인간의 잔꾀와 기술로 이 자연의 질서를 변경시키는 것이 오히려 야만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반문하고 있다. 허먼 멜빌이 수상록을 읽다가 이 부분에서 자신의 작고 깊은 눈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기지 않았을까 싶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몇몇 고전을 읽으면서 발견하게되는 인류의 식인풍습에 대해서 점점 관심이 많아지게 되었다라고 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나치 정권의 유대인 학살의 표현으로 사용하는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사실 번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대 유대교의 풍습에서 어린아이를 제물로 삼아 불에 태워 신에게 바치는 의식으로서의 번제말이다. 이를 히틀러의 나치는 자신들의 민족주의와 결부시켜 만들어낸 유대인 학살로서의 의미로 사용했는데, 이 용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결국에는 인류의 유아살해 내지는 식인풍습의 흔적과 만나게 된다.

 

 

식인풍습과 관련하여 동양의 기록도 보인다. 청나라를 수개월간 여행하고 《열하일기》(1783)를 남겼던 박지원 선생도 중국 도사들이 어린 아이를 먹는 풍습에 대해서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가 《열하일기》에서 재미있는 부분만 많이 접할지 모르지만, 박지원 선생은 여러 군데에서 이 식인풍습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여러 자료와 함께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다시 고민을 해볼 생각이다. 식인풍습은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할 때 한번쯤 만나게 되는 주제가 아닐까한다.

 

 

 

 

여인숙 현관에 있는 그림이 주는 불길한 전조와 숭고미

 

3장에서 이슈메일이 물보라 여인숙 현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발견하는 것이 한쪽 벽에 걸려있던 커다란 유화 이었다. ‘불가사의한 그늘과 그림자들의 집합체 보였던 그림의 정체에 대해 이슈메일은 궁금증을 갖는다. 마치 마녀 시대에 야심 있는 젊은 화가가 저주받은 혼돈의 세계를 나타내려고 듯한 그림, 정체불명의 그림을 유심히 뜯어보는 장면이 페이지 넘게 지속되고 있다. 마치 괴물과도 같은 무언가 길고 유연하고 불길해보이는 검은 덩어리 가닥의 푸르고 희미한 수직선 위에서 떠돌고 있는 형상에서 이슈메일은 상상할 없는 숭고함 있다고 까지 말한다. 그림의 정체에 대해 더욱 궁금해진 이슈메일은 여러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만 그가 생각하는 화가의 의도를 정리하면 다소 불길한 내용이다. 이슈메일의 해석은 곶을 돌다가 허리케인을 만나 좌초한 배의 돛대에 성난 고래 마리가 선체를 뛰어넘으려다가 돛대에 꽂힌그림이라는 것이다. 황당하기도하고 기발하기도 이슈메일의 평가는 결국 무서운 장면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마치 소설의 방향이나 결말과 관련이 있는 불길한 전조가 아닐까 생각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슈메일이 여러 공상을 하며 그림의 의미를 알아내는 과정은 마치 스위스 정신과 의사가 개발했다는 '로샤(Rorschach) 테스트'를 닮았다. 오늘날 검사 방법이 얼마나 신뢰성을 얻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추상적인 그림을 보고 자유 연상을 하는 과정을 통해 개인의 심리적 특성을 알아낼 있다는 것이 검사의 목적일 것이다. 정체불명의 , 신의 섭리에 의해 이슈메일이 바다로 다시 나가게 1장의 사연을 떠올린다면 멜빌이 3장의 시작을 정체모를 유화에다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는 것은 소설의 기본적인 전말에 대한 저자의 의도를 추측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한편 멜빌이 사용한 숭고함(sublimity)이란 개념에 주목해 보게 된다. 용어 뒤에 숨어 있는 역사적 맥락은 연구해볼만할 주제라는 생각을 적이 있다. 우리가 숭고함이란 단어를 어떤 상황에서 사용하는지 떠오르는 대로 언급해보자면, 나는 우선 니체가 알프스 산맥의 실즈 마리아에서 보았다는 거대한 구름바다를 떠올리곤 한다. 니체가 영원회귀사상을 떠올렸다는 알프스 산맥말이다. 동시에 독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가 그린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 떠올리곤 하는데, 바로 인간이 대자연 앞에 섰을 느끼는 그런 압도감과도 같은 것일까 생각해본다. ‘숭고미 대해 미학자들이 책을 쓴다면 아마도 권을 써도 모자를 같다.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1790) 유명한 영국 보수주의의 기수 에드먼드 버크는 숭고 개념과 미학적 개념에 대해서 저서(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남긴 것으로 알고 있다. 멜빌은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저서와 숭고미에 대한 저서를 읽지 않았을까 상상해보게 되는 대목이다. 숭고함이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아마도 버크의 저서에 나와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직 버크의 저서들을 읽어보진 못했으므로, 서적들은 앞으로 내게 남은 숙제가 될터이다. 멜빌은 모비 집필하면서, 그리고 20대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보내면서 망망대해에서 거대한 해양동물과 마주친 경험, 자연의 숭고함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없는 불가항력적인 힘을 다시금 기억해 냈을 것이다.

 

 

모비 3장은 다소 편이다. 하지만 멜빌은 소설이 나아갈 불길한 전조에 대한 짤막한 암시와 새로운 등장인물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제시해주고 있는 장이기도 하다.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멜빌의 글쓰기 방식은 불쑥불쑥 저자 자신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부분을 조규형 교수는 영미 문학, 어떻게 읽는가: 감성과 실천(2019)에서 사건의 전개와 더불어 이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로 구성되어 있다’(196)라고 정리한다. 결국 이슈메일의 입을 통해 멜빌의 사유가 드러나는 대목을 나는 좋아하게 되었다. 엄청난 독서량을 통해 고래와 포경업에 관한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망라한 부분을 앞으로 지나게 것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 부분을 되풀이해서 정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기록해 두려는 사항은 모비 읽으며 내가 반응한 흔적을 입자 검출기처럼 기록해두자는 것이다. 생각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 자연히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고 이를 들여다볼 것이다. 마치 멜빌이 모비 집필하면서 그랬을 처럼 말이다.

 

 

 

[참고도서 자료]

 

모비 ,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Moby-Dick or, The Whale, Herman Melville, [Penguin Classics]

 

수상록(I), 미셸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동서문화사]

 

영미 문학, 어떻게 읽는가: 감성과 실천, 조규형 [세창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