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는 에피파니의 경험을 예비한다

《모든 것은 그 자리에》

(원제: Everything In Its Place)

올리버 색스(Oiver Sacks) 지음 | 양병찬 옮김 | [알마]

 

 

‘도서관’편 을 읽으며 - 아날로그는 에피파니의 경험을 예비한다

 

언젠가 ‘아날로그(analogue)’와 ‘에피파니(epiphany)’라는 단어를 써둔 메모지를 최근에 발견한 적이 있다. 내가 왜 이 단어를 써두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책상 앞에 메모지를 붙여 놓고 있다가 그 이유를 다시 깨닫게 된 순간이 있다. 바로 신경과 전문의로 활동하며 수많은 글을 썼던 올리버 색스의 《모든 것은 그 자리에 Everything In Its Place》을 읽을 때, 메모지의 진실을 다시금 기억하게 되었다. 자서전 《온더무브 On The Move》가 자신의 인생을 연대기적으로 돌아보며 정리한 글이라면 이 책은 자신이 ‘평생을 걸쳐 애착하던 모든 대상’을 담았다. 생소한 의학용어가 등장하곤 하지만 올리버 색스의 글쓰기와 옮긴이의 정성어린 주석을 통해 용어에 집착하지 않는 한 충분이 읽어 나갈 수 있다.

 

 

그 중에서 ‘도서관’편을 보면 올리버 색스가 어린 시절 좋아하던 ‘자신의 실험실’ 외에 아버지의 ‘서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사면이 책으로 빼곡히 들어찬 아버지의 서재에서 어슬렁거리며 ‘발견’한 책들과 이 책들을 읽으며 저자가 경험했던 달콤하고 강렬한 희열을 전한다. 3-4살 때 이미 읽는 법을 익힌 올리버 색스에게 ‘부모님의 서재는 어린 시절 기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짜여진 커리큘럼을 제공하는 학교보다 도서관에서 진정한 자유를 느꼈다는 올리버 색스는 아마도 이러한 ‘자신만의 것’을 주도적으로 찾고 발견하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직 도서관에는 많은 책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더 이상 물성을 가진 책을 찾지 않는 새로운 ‘디지털 세대’를 위해 이 책들을 줄곧 보관하지는 않을 것 같다.

 

 

올리버 색스가 1990년대에 이르러 느낀 큰 변화도 바로 도서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였다. 도서관에서 책을 쌓아 놓고 책을 읽곤 하던 올리버와 달리 젊은 학생들은 서가를 외면하고 컴퓨터로 도서를 검색해서 바로 찾아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 도서관에서는 오래된 책을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먼지가 쌓여 있던 도서들을 처분하고, 넘쳐났던 서가가 썰렁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도 이런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정말 오래된 고서들이 파손되거나 보관의 어려움 때문에, 그리고 관심있는 이들에게 접근성을 높이는 방안으로 디지털화가 도움이 되는 점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이 디지털화되었기에 책을 처분해도 된다는 생각을 올리버는 일종의 ‘분서갱유’에 비유한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 Fahrenheit 451》에서 책을 소유하는 모든 시민을 죄악시하고 책을 말그대로 ‘불태우는’ 소설 속의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던 올리버에게 책과 정기간행물까지 사라진 데 대한 상실감은 대단히 컸을 터이다. 태어나서부터 태블릿을 손가락으로 넘기는 새로운 ‘디지털 세대’는 올리버가 느꼈던 상실감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은 나만의 노파심일까?

 

 

무엇보다 올리버처럼 도서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흥미로운 책을 발견하는 경험, 한 권의 책으로 인해 새로운 인식의 장을 열게되는 가능성을, 디지털 도서관을 이용하며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20여년 전 중고서점에서 잠시 일할 때를 기억한다. 마침 중고서점에서는 찾는 책을 검색할 수 있게 전산 목록을 만드는 데이터베이스화 과정을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사실 책을 거의 읽지 않았던 때이고, 약간의 관심만 있었을 때였다. 1년에 읽는 책이라곤 4-5권 정도 되었을까. 중고등학교 때 학교 도서관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중고서점에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어느 위치에 어느 분야가 주로 모여 있으며, 어떤 책이 있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되었다. 이후 내가 좋아하게 된 인문분야 책장에 주로 관심을 갖고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책을 재배열하기도 하며 일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그 때의 경험이었을까, 나는 검색으로 원하는 책을 찾더라도 책방 주위를 배회하며 서가마다 정리된 책들을 구경하곤 했다. 그리고 그 결과 내가 호기심을 가지게 된 주제를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올리버 색스는 어린시절부터 도서관에 머물며 책이 꽂힌 대부분의 서가를 거닐면서 우연하고 새로운 책과의 만남을 즐겼다.

 

 

잠시 잊고 있었던 ‘아날로그’와 ‘에피파니’의 이야기로 돌아가본다. 언젠가 내가 이 단어들을 메모지에 적어둔 이유는 아날로그 (종이에 인쇄된) 신문과 디지털 신문을 생각해보다가 떠오른 단어였다. 내가 신문 구독을 언젠가부터 중단하게 된 이유는 사실 요즘 신문 구독자가 줄어들다보니 새벽에 배달되던 신문이 출근시간이 한참 지나 배달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피곤에 지쳐 저녁에 집에 돌아와 맞는 신문을 읽을 기력이 없을 때가 많았다. 신문만 점점 쌓여가고, 신문을 보관하는 공간이 부족하기에 가족들의 원성만 높아져갔기 때문이다. 디지털 신문의 장점은 원하는 과거의 기사를 검색하여 효율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 내게는 가장 큰 장점으로 보인다. 반면 1면부터 종이를 넘기며 훑어보게 되는 아날로그 신문에서 나는 새로운 사건, 흥미로운 책이나 행사에 관한 정보, 사회의 이슈들을 우연히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올리버 색스의 도서관 경험과 비교하긴 힘들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신문을 훑어보면서 관심이 가는 부분을 줄을 쳐가며 읽고, 스크랩하였고, 관련된 책을 찾아보거나 사회의 현상에 의문을 가져보던 때가 나의 호기심이 최고로 성장했을 때였다. 새로운 생각거리, 지식 습득의 기회를 만들게 되는 이 ‘우연한’ 만남이 아날로그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가능했다. 자신의 관심과 호기심에 따라 산책하고 소요하는 과정이 가능했다는 말이다. 나는 아날로그 매체와 디지털 매체 사이의 우월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매체가 내게는 전혀 다른 매체로 다가온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두 매체는 서로가 갖는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 보완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이유로 내가 메모지에 ‘아날로그’와 ‘에피파니’를 적어두었던 것인데, 한동안 잊고 있다가 올리버의 책을 읽다가 다시 이러한 ‘에피파니’의 순간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 도서관에서 책은 물론 정기간행물까지 사라진 데 대해 깊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물리적인 책에는 대체될 수 없는 무엇, 즉 겉모습, 향기, 중량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67면)

 

 

서로 보완적일 수 있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두 방식을 함께 구비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성이라는 명목 하에 아날로그 매체를 곧바로 폐기하는 것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까. 올리버 색스도 정기간행물과 책의 물성이 우리 몸과 상호작용하며 각인되어버린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아울러 물성을 가진 매체를 통해 호기심을 불러내는 ‘우연한’ 만남의 가능성을 상실해버린 허탈감을 말하려 했을 것이다. 책을 읽는 강력한 즐거움은 많은 책을 읽는 것에 있지 않다. 나는 중년이 되어 좀더 진지하게 독서를 생각하면서, 좀 더 많은 책을 읽고 싶은 생각에 조바심을 낸 적이 있다. 이제는 주변에 책을 많이 읽었다고 은근히 자랑하는 이들을 보아도 부럽지 않게 되었다. 늦게 독서를 시작한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어온 독서가들을 따라잡을 수는 없는 노릇임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올리버 색스처럼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저작을 ‘우연한’ 기회에 발견하고 ‘내 인생의 책’,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를 만나는 경험을 소망하게 되었다. 느릿느릿 소요하며 좋아하게 된 혹은 흥미를 유발한 책들을 우연히 만나기를 더 기대하게 되었다. 나아가 저자의 존재를 느끼며, 책을 읽고 또 읽음으로써 온전히 나의 것이 되는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디지털 매체를 통해 정보를 효과적으로 찾아내고, 화면을 통해 어디서든 수많은 책에 접근할 수 있을 지 몰라도, 디지털 매체를 통해 우연한 만남, ‘에피파니’의 순간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나는 여기에 디지털 매체와 다른 아날로그 매체만의 고유한 성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인들이 최상의 혜택을 얻기위해서는 아날로그 매체와 디지털 매체를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이해하고 이 매체들이 ‘공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두 매체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디지털 매체가 아날로그 매체를 대체하는 성격이 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여기에 새로운 지식과 지혜에 대한 우연한 만남, 그리고 ‘에피파니’의 순간이 아날로그 매체에만 예비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