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역사를 이해하는 다른 방법

 

 

《문장(紋章)과 함께하는 유럽사 산책》

김경화·고봉만·이찬규·안상원·김연순·김문석 지음 | [글항아리]

 

 

문장(紋章)은 가문 혹은 단체의 계보나 권위를 상징하는 시각적인 체계이다. 본격적인 문장의 기원은 중세 유럽문화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특히 문장은 중세의 전쟁터에서 각각의 진영을 표시하여 아군과 적군을 식별하는 표시였다. 최소한 아군의 등에 칼을 꽂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적인 상징은 중세 이전, 고대 국가의 군인들이 전쟁터에 들고 나가던 방패에도 등장하기도 한다. 《문장(紋章)과 함께하는 유럽사 산책》(이하 《문장(紋章) 산책》)은 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는 이 시각적 상징체계인 문장(紋章)에 대한 연구를 대중 독자에게 소개하는 국내 연구진들의 첫 결과물이다. 문장은 우리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의 일상 곳곳에 침투해있다. 우리가 열광하는 유럽 축구 클럽의 엠블럼이나 기업에서 널리 사용되는 회사 로고 등은 모두 이 문장이 보유한 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만나게 된 《문장(紋章) 산책》은 유럽사에 등장하는 ‘문장’이라는 키워드로 인간이 만들어온 이 독특한 시각적 상징체계를 역사적으로 조명한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역사의 여러 장면을 통해 문장의 기능과 역할을 개관하고 그 역할의 변화를 소개한다. 그런 다음 보다 본격적으로 문장을 구성하는 형태와 색채의 조합을 통해 문장을 만드는 ‘문법’의 기본을 정리한다. 문장에는 조형적인 요소와 색채의 배합이 중요하며, 이들 간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현대에서 만날 수 있는 문장의 흔적을 찾아 몇 가지 사례를 정리하고 문장 연구의 의의를 독자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왜 문장(紋章)연구일까?】

 

그렇다면 하필 중세 유럽의 역사에 기원을 둔 ‘문장’연구일까? 그리고 우리와 무관해 보이는 유럽의 문장 연구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저자에 따르면 ‘문장은 문장이 사용되던 시기의 보편적인 관념과 시대적 감수성이 드러나는 리트머스 시험지의 역할을 한다(163면)고 한다. 그렇다면 문장의 본격적인 기원으로 보고 있는 중세 유럽 이래로 ‘1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유럽인의 의식과 감수성을 지배한 팔레트(105면)로서의 역할을 이해하는 일은 나름의 큰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겠다.

 

책의 내용을 다시 떠올려보고 문장연구의 의의를 내 언어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문장은 인간이란 존재가 사회적 관계망 속의 ‘관계의 존재’임을 보여주는 실마리라는 것이다. 자기 혼자만을 위해 이러한 시각적 상징체계를 만들리 없다. 문장은 인간의 관념과 의도를 밖으로 드러내어 알리는 도구이자 연장의 역할을 하는 압축된 상징체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장은 유럽에서 오랜 역사를 거쳐 사용된 간결한 메시지 전달 수단이기도하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인간의 모든 활동에 관여하고 있다. 문장이 인간의 오랜 역사와 함께 해온 만큼 다양한 사람들의 의도와 생각이 투영되었고, 그 의미와 역할에 무수한 변형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인간을 연구하는 어느 학문이라도 ‘문장’에 대한 연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주장은 타당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문장’은 이제 전세계 어디에서든 여전히 현재진행중인 역사이기 때문이다.

 

 

【문장(紋章)의 역할 변화】

 

저자에 따르면 문장은 중세 시대에 본격적인 주목을 받아 사용되기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 아군과 적군을 식별하는 기호로서 사용되었다. 분명 같은 진영을 규합하고, 아군에 의한 죽음을 방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단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개인이 사용하는 문장도 있었다. 무엇보다 중세에는 자신을 소개하고 신분을 드러낼 수 있는 명함의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언젠가 사진을 통해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명함을 본 적이 있는데, 한자문화권인만큼 한자위주로 사용되어 정보 전달의 역할에 충실한 명함이었다. 그러나 중세 유럽의 명함처럼 그림이 들어간 디자인적인 요소는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한자 자체가 상징적인 기호체계로서 그림을 대신하는 디자인적인 요소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오랜 시간 발달해온 서예의 전통으로 글자 하나에도 조형미와 균형미의 요소가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동양의 명함에는 한자만 나오는 대신 글자 자체의 균형감과 명함 내에 여백과 조화를 이루는 배치가 중요해진 반면, 중세의 명함에는 이를 문장이 대신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최근에 18세기 프랑스의 화가 프랑수아 부셰가 그린 <마담 드 퐁파두르 초상>이란 제목의 그림을 어느 책을 통해 보게 되었다. 그림에 나온 퐁파두르 부인의 결혼 전 이름은 잔-앙투아네트. 결혼 후 마담 드 에티올르라고 했다. 이 그림의 인물 설명을 따라가다가 문장(紋章)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기록이 보인다. 에티올르 부인은 남편과 이혼한 후 이웃에 있는 사망한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라는 사람의 칭호와 집안의 문장을 사들였다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문장이 공동체 내에서 ‘개인의 신분과 지위’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곧 개인의 신분을 주장하는 기능에 기꺼이 자신의 재력을 투입하고 있다. 문장이 개인의 욕구를 충족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양반의 지위를 사고 팔던 유행과 유사한 것 같다.

 

개인의 신분을 드러내는 역할과 관련하여 또다른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문장이 방계표시(자녀들의 서열표시)를 하기도 했다는 것. 곧 아버지의 문장에 덧붙여 자녀들의 위계를 문장에 추가하고 있으며, 여기에 나름의 규칙과 약속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16세기에 미혼 여성의 문장에 마름모형 문장이 사용되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저자에 따르면 이 두 가지 현상이 가부장적인 제도가 확립된 상황뿐만 아니라 이혼과 재혼이 보다 자유로워진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앞서 문장이 ‘당대의 보편 관념과 감수성이 드러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는 말은 바로 이런 역할을 가리킨다.

 

문장을 중심으로 유럽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보다 풍성한 이야기를 얻을 수 있다. 1789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프랑스 혁명 당시, 문장은 귀족 계급을 상징하는 과거의 산물로 취부되어 뭇매를 맞았다. 중국의 문화혁명 시기의 분위기처럼 혁명 당시 프랑스에서는 문장이 폐기되어야 할 과거의 산물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이후 프랑스에서는 문장과 관련된 모든 전통이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물론 문장 자체라기 보다는 왕실을 상징하던 ‘백합’이 프랑스의 민중을 상징하는 ‘수탉’으로 전화되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겠다. 문장은 이렇게 역사를 통해 부침을 거치며 그 역할과 기능이 분화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프랑스 축구팀의 심벌이 된 ‘수탉’은 현재 남아있는 문장역사의 흔적이기도 하다. 저자의 말대로 문장의 역사는 현재로 까지 이어지고 여전히 진행중인 것이다.

 

 

【문장(紋章)과 현대인의 삶】

 

문장은 유럽에서 태동했다고 하지만, 전 세계가 국경을 초월하여 하나의 지구촌이 된 오늘날 문장은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각 나라가 사용하는 국기의 모태 또한 문장이며, 이는 단체를 대표하고 ‘국가’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다양한 색채와 형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세계적인 기업에서 사용하고 있는 로고는 어떤가. 이들 모두 문장의 역사가 현재로 이어지고 있는 사례이다. 구상적이든 추상적이든 모든 문장에는 시각적인 상징체계로서의 기능이 여전히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오늘날 문장은 분명히 개인뿐만 아니라 기업, 국가를 초월하여 범지구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무엇보다 문장의 기능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문장과 결부되어 ‘이야기’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문장이 없다면 거대한 서사 판타지는 작동이 불가능했을 것이다(210면)라고 한다. 책에서 이 말은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하는 인터넷 게임 개발과 관련하여 언급된 표현이지만, 게임의 이야기 구성을 위해 문장이 중요하게 활용되고 있는 것은 이렇게 다양한 맥락에서 적용된다. 국가에 적용되면 국가의 역사라는 서사를 상징하는 체계로 사용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저자가 언급하는 ‘포스트모던 부족주의’ 내지는 ‘신부족주의’도 고려해볼 수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는 이 ‘포스트모던 부족주의’를 “비슷한 취향을 지닌 사람들끼리 함께 어울리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공동체적 충동(197면)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 역할을 두드러지게 볼 수 있는 것이 유럽 축구 클럽의 심벌들이다.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나 FC바르셀로나를 응원하는 팬들은 각자 응원하는 축구팀의 심벌이 박힌 옷과 수건 등을 들고 하나로 뭉치게 된다. 현대 가족은 해체되고 핵가족화되어가는 오늘날 이렇게 다양하고 큰 집단으로 ‘해쳐모여’할 수 있는 데에 ‘문장’의 역할은 무시하기 힘들다. 내가 응원하는 팀의 엠블럼이 박힌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보면 ‘또 하나의 가족’이 따로 없다. 가족대신 각자의 취향과 관심사에 따라 모이는 동호회를 비롯하여, 유사한 취향을 가진 집단과 단체의 형성은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또하나의 키워드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 시대를 들여다보는데 문장 연구가 중요하게 활용될 수 있는 사례다.

 

《문장(紋章) 산책》에서 ‘문장의 문법과 언어’편에 이르면, 문장(紋章)에는 그 형태와 색채의 조합 및 배열에 나름의 규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양의 경우와 달리 서양의 문장에는 시각 디자인적인 요소가 상당히 강함을 알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유럽에서는 문장 연구가 점차 부활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문장에 관한 사항이 유럽인들에게는 역사의 일부인 만큼 보다 폭넓은 사료와 연구 기반이 갖추어져있을 터이다. 문장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문장의 구체적인 형태와 색이 있다. 조형적인 형태에 비하여 색채에는 보다 강한 추상성과 모호하면서도 하나에 국한되지 않은 상징의 개방성이 존재한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이미 자신의 저서 《색채론》에서 6가지 기본 색에 따른 색채 심리학적인 탐구를 진행한 적도 있다. 이 책을 과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면 여러 가지 모순점과 비과학적인 부분을 찾아낼 수 있지만, 심리학적인 관심으로 본다면 흥미롭고 색이 인간에게 주는 정서적인 효과 등 시사하는 바를 여럿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문장(紋章) 산책》의 저자들이 여러 번 언급하는 색채 연구에 관한 미셸 파스투로의 연구는 《우리 기억 속의 색》(안그라픽스, 최정수 옮김)이라는 책을 통해 좀 더 이해를 깊이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노라면 색채가 갖고 있는 상징성이 이토록 풍부했던 가에 놀라게 된다. 아울러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색채에 대한 인상도 역사성을 지닌다는 것을 알게된다. 다시말하면 색의 상징만 하더라도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변용되고 새롭게 의미부여가 되어 왔다는 말이다. 《문장(紋章) 산책》에서도 중세에는 초록색이 악마의 색이었으며 현대에 들어 그 상징적인 의미가 긍정적으로 변화되어 기업의 로고에도 활용되고 있음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파란 색도 처음에는 부정적인 이미지였다가 중세 프랑스 왕가에 의해 채택되어 왕가의 색으로 사용되었던 역사를 언급하고 있다. 파스투로의 연구를 첨가하여 읽노라면 문장에 사용되는 색의 상징성은 오히려 단순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문장의 한 요소로서 ‘색채’는 그만큼 풍부한 역사적 배경과 ‘상징성’을 갖는 추상적인 개념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문장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문장에는 디자인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이 상징 체계가 문화와 시대상과 결부되어 파악될 수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문장은 무의식의 창고(155면)로 여겨질 수 있을 정도로 당대 사람들의 보편 관념과 감수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을 그대로 묘사하여 간단히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추상적 관념을 담은 상징성은 분명히 인간이 지닌 ‘상상력’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화적 발명품은 인간의 ‘상상력’과 결부되어 무한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전파되었다. 비록 유럽의 문장이 18세기에 들어 급격히 쇠퇴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쇠퇴한 것이라기 보다 상상력의 힘으로 그 의미와 기능이 분화되고 변용되어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다. 오늘날 우리는 매일 문장의 변형된 형태를 만나고 있으며,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문장 연구의 가치는 단순히 역사 연구의 하위 장르로서가 아니라 포괄적인 문화 연구의 키워드로서 시대를 이해하는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있을까. 《문장(紋章) 산책》은 군데군데 편집과 내용상의 아쉬운 점이 보이긴 하지만 서양의 역사를 이해하는 다른 경로로서도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동양의 문화 연구에서 서양의 문장과 유사한 사례를 비교해볼 수 있는 비교문화연구적인 목적에서도 나름의 길을 열어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문장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위상을 지니는지에 대한 문화연구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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