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잘 살기위한 선언 - <해러웨이 선언문>을 읽고

 

《해러웨이 선언문

(원제: Manifestly Haraway)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 지음 | 황희선 옮김 | [책세상]

우선 책을 겨우 다 읽어낸 후 내게 남은 인상은 ‘흥미롭지만 아직은 매우 낯설음’이었다. 좀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무엇보다 페미니즘의 담론에 생소한 독자로서 책을 읽어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통시적으로 또는 공시적으로 여러 층위의 맥락들이 한데 어우러져 표현되는 도나 해러웨이의 사상은 자신이 ‘진창(muddling) 속에서, 진창이 되고 있다’고 표현하듯, 실천적인 의지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페미니즘의 기본적인 담론은 둘째 치고, 심지어 푸코의 생명정치에 관한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는 첫 페이지부터 커다란 벽과 만난다. ‘포기할까’와 ‘그래도 다시 한번 도전해보자’라는 마음이 팽팽히 맞서며 갈등을 하고 있던 와중에, 《반려종 선언》에서 언급된 말에서 일말의 희망을 발견한다.

 

남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태도는 용납하기 힘든 신경증적 환상이다. 반면, 골치 아픈 조건들을 맞춰가면서 사랑을 지속하려는 노력은 아주 다른 문제다. 친밀한 타자를 더 잘 알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별수 없이 겪게 되는 우습고도 비극적인 실수들은, 그 타자가 동물이건 인간이건 또한 무생물이건 간에 내 존경심을 자아낸다.”(161면)

 

이 부분을 내가 해러웨이의 책을 끝까지 읽겠다는 선언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익숙하지도 않은 대상(책)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서 완전히 이해하길 원하는 태도는 용납하기 힘든 착각이다. 반면, 골치 아픈 글을 계속 읽어내려는 노력은 아주 다른 문제다. 타인의 오랜 사유를 오롯이 담은 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시행착오들은 그 자체로 유의미한 위대한 시도다.’라고 말이다. 내가 책에게 아무런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데, 책이 나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스마트폰에 익숙해져 ‘공들여 읽기’에 게을러진 나에게 해러웨이의 한 마디는 ‘읽기에 관한 사랑론’으로 우선 다가온다.

 

한 번 읽어서 모든 내용이 이해되는 책이라면 오히려 던져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물론 지금까지 그런 책은 없었다). 나는 해러웨이의 책을 읽으며 내가 ‘새로운 세계’와의 희미한 경계 어딘가에 발을 디디고 있음을 자각하며, 그 경계는 내가 속해 있는 이 세계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세계와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시도중이다. 그리고 나는 헬렌 베란의 표현대로 (이 세계 속에서 타자와) ‘함께 잘 지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을 배우고 있다고 나에게 타이르며 끝가지 읽어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온전한 이해라는 상태는 현재 요원한 일이긴 하지만, 머리를 싸매고 무언가를 이해해보려는 이 기회가 내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해러웨이의 《해러웨이 선언문》에 들어있는 <사이보그 선언><반려종 선언>은 생물학, 철학, 문학을 전공한 과학자이자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서 해러웨이 교수가 이런 관점에서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개인과 사회의 관계성 혹은 정치성 혹은 타자성에 대해 다시 바라보기)에 대한 통찰력있는 진단과 면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사이보그 선언>에서 사이보그는 ‘인공두뇌 유기체’이자 순수하지 않은,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이자, 사회현실의 상상적 피조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사이보그는 단순히 생명과 기계의 모호한 경계 어딘가에 존재하는 대상을 지칭하는 무언가는 아닌 것같다. 이 개념에는 무엇보다 젠더 개념과 인종, 계급 개념이 결부되어 있다. 또한 사이보그 개념에는 하이테크 첨단 공학 시대에 새롭게 등장하는 정치적 정체성에 관여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정보가 우리의 삶을 단단히 지배하며, 전쟁의존적인 경제와 강한 유착을 보이는 자본주의의 구조 속에서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개념은 푸코의 생명정치를 벗어난 그 무엇이다.

 

기술이 인간의 삶 전반을 새롭게 바꾸어줄 것이라는 약속이 앞서 말한 젠더와 인종, 계급의 고질적인 문제점들을 빗겨나가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어 미래에 대한 전망을 더욱 암울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러웨이는 이 선언이 나왔던 20세기 후반을 살아가던 여성들에게 있어 “노동, 문화, 지식 생산, 섹슈얼리티, 재생산의 모든 양상과 맺는 관계의 함의가 순전히 우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67면)라고 분석한다. 대신 해러웨이가 지적하는 일말의 희망은 ‘이 범주들 자체가 다채로운 변환을 겪고 있기 때문’이며, ‘현재의 패배보다 정치가 발휘하는 모순적 효과에 주목하고 기대해볼 수 있다’는 입장에 근거한다. 저자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냉전의 시대에 소련의 스푸트니크 위성의 발사 성공의 여파로 해러웨이 같은 재능있는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오히려 정부에 비판적인 시각을 지닌 지식인으로 될 가능성을 내포하는 ‘모순적 효과’에 대한 희망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해러웨이의 낙관적인 입장은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언급한 인권선언과 마그나카르타를 대비하여 발견해내는 희망과 유사한 인상을 준다. 덧붙이자면, 1789년 프랑스 혁명을 통해 ‘인민이 주권자’라고 선언한 ‘화려한 인권선언’과 대비하여 지나친 노동시간을 줄여 ‘표준노동일’을 제정했던 마그나카르타(노동법 관련 협정)를 마련한 사건이 오히려 마르크스에게는 ‘위대한 변화’로 다가왔던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의 발견이다. 자본가의 계약에 눌려 비인간화된 노동 기계와 같은 처우를 받았던 노동자들은 저항행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패배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숱한 희생과 고통을 통해 ‘표준노동일’이라는 작은 변화를 지켜냈던 사례를 떠올리게 해주었다.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페미니스트로서 해러웨이도 이러한 역사적 사례에 주목하지는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분명 해러웨이도 이런 ‘사소한 것의 사소하지 않음’에 주목하고 희망의 근거를 찾았을 것같다. 바로 이런 사소한 것의 변화에 ‘인간적인 위대함’이 깃들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반려종 선언>은 앞서 소개하고 있는 <사이보그 선언>보다 좀더 친근하고, 흥미롭게 다가온다. <반려종 선언>에서 해러웨이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양치기 품종견 카옌과 파수견 롤런드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 생물의 함께 살기에 대해 다양한 층위에서 고찰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사이보그 선언>이 ‘기술과학 속 현대의 삶이 내파하는 현상을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이해’(119)하려 시도한 글쓰기였다면, <반려종 선언>은 ‘개와 사람이 서로에게 소중한 타자가 되면서 함께 살아가는, 역사적으로 한결같이 특수한 삶 속에서 자연과 문화가 내파하는 현상과 관련’(136면)이 되어있다고 글쓰기의 취지를 밝히고 있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두 선언 모두 문명-문화와 인간사이의 공진화의 맥락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좀더 간결히 표현해보자면 <반려종 선언>은 개에게 홀닥 빠진 과학자 겸 페미니스트가 말하는 반려종으로서의 개는 ‘함께 살기위해’ 존재한다는 맥락에서 나온다. 당연한 듯하면서도 다시금 음미해보면 다양한 가능성과 틈이 잠재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곧 아직 결정되지 않은 무언가가 하나의 가능성으로 ‘관계’ 속에 내재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 가능성이 어느 쪽으로 뻗어나갈지는 두 존재의 ‘존재론적 안무’의 양상에 달려 있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모든 존재하는 대상들은 ‘관계’에 선행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상들 사이의 존재-관계에는 ‘소중한 타자성’이 깃들어 있으며, 여기에는 아직 발현되지 않은 가능성으로서의 ‘창발된 실천’이 ‘소통’이라는 과정을 통해 따라와야 한다라고 이해된다. 인간과 개, 여성과 암캐, 교수와 파수견의 존재로서 이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각자가 연결된 타자성으로서의 역할(저자는 이를 ‘존재론적 안무’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을 해냄으로써 이루어지는 그 관계를 주목해야한다는 의도로 읽힌다. 그렇기에 저자는 “아기 대신 친족을 만들자!”라고 선언하고 있지 않은가.

 

우선적으로 흥미를 갖게된 부분은 저자가 ‘반려종’과 ‘반려동물’을 구분하는 지점에 있다. 반려종의 이 ‘종species’개념은 무엇보다 ‘차이’를 인식하고 정의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반려종’은 ‘반려동물’보다 크고 이질적인 범주라는 표현도 새롭게 다가왔다. 해러웨이가 의도하는 사랑은 보다 ‘상호관계적’이며 동시에 ‘상호참여적’인 양상을 띤다. 내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저자가 의미하는 ‘반려동물’의 개념에는 두 존재 사이의 ‘차이’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존중보다는 그저 무조건적인 애착관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조건적인 귀여움과 보살핌을 받는 일방적인 관계 말이다. 여기에는 창발적 실천이 들어설 여지가 매우 적다.

 

반면 ‘반려종’이라는 개념에는 두 존재의 ‘차이’에 대한 인정과, 따라서 ‘소중한 타자성’이라는 인식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일방적인 사랑의 양상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종)에 대한 ‘존중’과 ‘신뢰’가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해러웨이는 ‘반려종’개념을 떠올릴 때 저자가 부를 수 있는 좀더 정밀한(혹은 구체적인) ‘사랑’의 개념이 이해가 된다.

 

개를 아기로 만들며 차이의 존중을 거부하는 문화적 관행으로 오염된 말이 아닌 한에서는, 사랑이라는 말로 매케이그가 개를 다루는 방식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66면)

 

내 개인적인 기억을 떠올리자면, 중학교 때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국어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던졌던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사랑-소망-믿음 중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물으셨다. 학생들 여러 명에게 물으셨고, 친구들 각자 나름의 대답을 했다. 나는 ‘믿음’이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선생님의 답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내가 말한 ‘믿음’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 세 가지 성경의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세대는 ‘소중한 타자’ 혹은 ‘차이의 존중’에 대한 경험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당시에 국어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정답’인 ‘사랑’이란 무엇일까 다시금 궁금해지기도 한다. 반면 나는 해러웨이의 ‘반려종’관계에서는 ‘신뢰-믿음’이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울러 이 ‘신뢰’의 실천적인 행위를 오히려 ‘사랑’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해러웨이의 반려종에 대한 사랑이란 나의 보살핌에 기대고 나에게 의지하는 종에 대한 보답, 나의 자비 행위에 합일되는 타자로서의 관계는 분명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서로의 다름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귀찮고 머리아프지만 서로의 존재영역을 인정해주는 방식으로서, 온전한 두 존재를 지켜낸다는 개념이 분명 들어있다는 점이다. 무심코 생각했던 ‘반려동물’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새롭게 검토해볼 수 있었던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면 ‘공진화적인 관점’에서 이 ‘사랑’의 개념이 ‘함께-되기’가 되어야한다는 해러웨이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시 생각해보면 해러웨이의 ‘사랑’개념은 남성 중심의 과학분야에서는 다소 낯설은, 오히려 기독교적인 사랑의 개념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냉담하는 신자라는 표현 대신, 스스로를 ‘세속적인 천주교인’이라 말하는 저자는 상대 종에 대한 ‘배려’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에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은 바로 ‘함께 잘 살기’를 통해 ‘나의 자유 혹은 구원에 이르는 일’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두 단계를 이어주는 것은 물론 ‘사랑-배려’가 될 것이다. 물론 이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것은 이 반려종에 깃든 사랑의 개념이 다시 말하지만 철저하게 ‘양방향적’이라는 점이다. 반려종은 ‘함께 빵을 나누어 먹는 존재’(company의 어원 cum panis)로서 한 식탁에 둘러 앉아 있으며, 서로에게 얽힌 채, 함께 만드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반려종의 존재와 관계를 통해 나 또한 변화하며 새로운 상태로 나아가기 때문이다(창발적 실천).

이외에도 이 책 《해러웨이 선언문》에는 아직은 알듯모를듯 하지만 낯선 개념, 신선하고 진지한 생각들이 양피지처럼 겹겹이 싸여 있다. 하지만 ‘개에 관한 글쓰기가 페미니즘의 한 갈래가 될 수 있다’는 저자의 선언은 무엇보다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사실 <반려종 선언>에서 나타난 해러웨이의 글쓰기는 개에 관한 지식을 전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무수하게 적용될 수 있는 ‘차이의 관계’를 개라는 반려종을 통해 설파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보다 보편적이고 모든 이의 삶과 무관하지 않은 함의를 찾아낼 수 있겠다. 아직도 생소하지만, 다시 책장을 들쳐보며 눈에 띄는 문장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 더 익숙해지는 부분이 있다. 이 책은 페미니즘과 생명정치의 담론에 전무한 지식을 가진 나같은 독자에게 친절히 길을 안내하는 책은 분명 아니다. 대신 《해러웨이 선언문》은 반려종과의 관계 만들기에 관한 비유를 빌려온다면, 골치아프지만 시행착오와 오독의 과정을 감수하면서 조금씩 의미의 확장을 경험해가는 독서의 경험을 기대하게 하는 책이다.

참고로 책의 번역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책이 어려운 이유가 결코 번역에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번역은 상당히 조심스럽고 많은 숙고 끝에 나온 결과물임을 느낄 수 있었으며, 번역자의 주석을 보면 독자들을 위해 최선의 배려를 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책이 이해되지 않았다면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좀더 들여다보고 고민해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번역은 독자에게 여러 모로 배려를 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