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아>가 읽고싶어지는 시 '이타카'
이번 휴가 기간에 우연히 파울로 코엘료의 <오 자히르>를 집어들었다가 첫 페이지에 발견한 시를 공유해볼까 합니다.
저는 아직 호메로스의 저작들을 읽어보진 못했습니다만,
시를 읽고나니 호메로스의 저작은 언젠가 꼭 읽어싶어집니다.
<오디세이 세미나>에 대한 서평을 작성하신 분들의 글을 읽다보니,
오디세이아라는 인물이 트로이전쟁과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오랜 여정의 기록이 담긴 서사시라고 알게되었네요. 그리고 이타카는 오디세이아의 고향으로 이타카라는 지명은 여러 문학 작품에서 사용되고 있네요.
어떤 이는 '이상향'으로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너무 단순화한 이미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가닿을 수 없는 '고향'의 이미지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W.G. 제발트라는 독일 소설가의 <이민자들>에서는 전 세계를 떠도는 유대인들 혹은 여러 이유로 이민자가 된 이들에게 '잃어버린 고향'의 이미지로 활용됩니다. 또는 문명사회로부터 소외된 이가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장소로서의 이미지로 말이죠.
다시 소개하려던 시 '이타카'는 그리스 시인
콘스탄티노스 카바피스(Konstantinos Petrou Kavafis)[1863-1933]의 시를
<오 자히르>의 번역자가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중에는 <콘스탄티누스 페트루 카바피스 시전집> 한 권이
출간되어 있지만, 시번역에 대해 독자들의 반응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미리보기 기능에서 동일한 시 '이타카'의 번역일 일부 보았는데,
번역이 적응하기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단어 단어가 이어지지 않고 분절되어 있는 표현이 시에 접근하는데 어려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혹시 이 한국어 번역이 영화 <페터슨 Paterson>에 주요 모티브가 되고 있는 미국 뉴저지의 의사이자 시인이었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의 모더니즘/이미지즘 시의 느낌으로 번역을 한 것인가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만큼 단어의 의미연결보다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만 다가옵니다. <오 자히르>의 번역자(최정수)가 번역한 시 '이타카'는 읽기가 좀 더 편합니다. 한번 감상해보세요. 시를 다시 읽어보니 그리스인 조르바의 삶의 흔적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코엘료의 소설 <오 자히르>의 첫 장 제목이 '나는 자유다'인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과 일치하기도 합니다. 우연일까요?
아무튼 호메로스의 저작들은 언제 꼭 읽어보고 싶네요.
“네가 이타카로 가는 길을 나설 때,
기도하라. 그 길이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오랜 여정이 되기를.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
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 마라.
네 생각이 고결하고
네 육신과 정신에 숭엄한 감동이 깃들면
그들은 네 길을 가로막지 못하리니.
네가 그들을 영혼에 들이지 읺고
네 영혼이 그들을 앞세우지 않으면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와 사나운 포세이돈
그 무엇과도 마주치지 않으리.
기도하라, 네 길이 오랜 여정이 되기를.
크나큰 즐거움과 크나큰 기쁨을 안고
미지의 항구로 들어설 때까지,
네가 맞이할 여름날의 아침은 수없이 많으니.
페니키아 시장에서 잠시 길을 멈춰
어여쁜 물건들을 사거라,
자개와 산호와 호박과 흑단
온갖 관능적인 향수들을.
무엇보다도 향수를,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최대한.
이집트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가
현자들에게 배우고 또 배우라.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내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되더라도
늙어져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길 기대하지 마라.
이타카는 너에게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고
이타카가 없었다면 네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설령 그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이 없고, 길 위에서 너는 현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역주-최정수 옮김)
*라이스트라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식인 거인족
**키클롭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