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주체적으로 어떻게 살것인가를 묻는 책 <건강의 배신>

 

《건강의 배신》

(원제: Natural Causes)

바버라 애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 지음 | 조영 옮김 | [부키]

 

 

나의 지인 중에는 자신의 신체 컨디션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 있다. 그는 각종 측정기구를 통해 자신의 신체 상태를 체크하고 반드시 숫자로 표기된 결과가 건강한 영역 내에 포함되는지를 따진다. 물론 결과 여부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체중이 좀 늘었는데, 약한 비만 기준을 넘었다는 이유로 음식을 줄여야 하며 맛있는 식사를 피하거나 조금 밖에 즐기지 못한다. 옆에서 보면 마치 스스로에게 벌을 준다거나 학대를 하는 사람 같아 보일 때가 있다. 그리고는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나의 몸을 ‘관리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는 한 수 가르쳐주려 한다. 오늘 만나게 된 바버라 애런라이크의 신간 건강의 배신에서는 바로 이렇게 지나친 건강 염려증의 허상을 파헤치기도 한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건강을 지나치게 염려하는 현대인들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 의료화된 우리의 건강에 대한 관점을 검토하고,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할까를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 책의 저자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노동의 배신을 시작으로 하여 여러 종류의 ‘배신’시리즈를 출간한바 있다. 그녀는 첫 번째 책에서 현대 자본주의 영향력 아래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마주하는 문제점들을 파헤치고 조사했다. 나도 저자의 ‘배신’시리즈를 익히 들어서 다른 도서들을 조만간 읽으려고 하던 차에 건강의 배신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저자의 책들에 주목하게 된 이유는 그녀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 미국사회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건강을 둘러싼 의료 현실은 미국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이미 우리 사회의 모습을 이 책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일부 지역이나 한 국가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에 더욱 주목해볼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이번에 출간된 이 책은 사상가 이반 일리치의 저작들(병원이 병을 만든다전문가들의 사회와 같은 저작들)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나는 이반 일리치의 저작을 인상깊게 읽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 책 건강의 배신에서는 크게 두 가지 점에 주목해보게 되었다. 하나는 자본주의라는 맥락에서 현대의 의료문화가 어떻게 진행되어가고 있는가하는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건강의 개념이란 무엇이고, 우리의 삶에 어떻게 귀결될 수 있는지에 관한 점이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주제다. 하지만 나는 두 항목으로 나누어 생각해보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의료화된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이 책에서 의료서비스의 소비자들이 어떤 의료 환경에 놓여있는지를 다각도로 고찰한다. 책을 읽다보면 현대인이 의지하는 의료문화가 자본주의체제라는 맥락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현대의 의료 환경은 의학 전반 분야의 발달과 함께 거대한 의료 산업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 사회의 의료 문화에서도 과잉 진단, 과잉 진료가 화제에 오르고 있다. 환자들 혹은 내담자들이 불필요한 검진 및 검사를 받는 이유는 의사들이 그렇게 하라고 권하기 때문이다.

 

검사와 검진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의 원인 하나는 바로 이윤이다. (…) 영리를 추구하는 민영 의료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29면)

 

고가의 장비를 빚을 내어 개원하는 개인 클리닉의 경우, 의료인들은 이윤 추구라는 현실에 더욱 내몰리게 된다. 책에 소개된 의료 산업의 이윤에 대한 집착 혹은 광기를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가 있다. 어느 의학 세미나에서 ‘100세 여성이 생애 최초로 유방 조영 검사를 막 마쳤다’고 보고된 뒤 청중들이 엄청난 환호를 터뜨렸다는 이야기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노인은 왜 검사를 받으면 안되는가를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문제의 본질은 ‘그 자체로 암 발병의 위험 요인’이 되는 유방 조영 검사를 ‘과잉 진단’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는 것, 그리고 이를 광고한 것 뿐 아니라, 수많은 의사들, 의료관계자들이 보여준 반응 때문이다.

 

저자는 건강에 대한 정보 제공의 명목으로 건강에 대한 우려를 하는 이들에게, 의료 엘리트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를 이용하여, 건강한 이들로부터 돈을 버는 시스템이 형성된 점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모든 의사가 동의하는 것은 아닐 것이나, 관찰되는 양상은 의사와 병원, 제약회사가 연관되어 있다. 의료 소비자가 충분히 많은 검사와 검진을 받게 하면, 의사들은 추가 검진을 유도하기도 한다. 저자는 ‘검사를 권하는 의사가 검진 및 영상 장비에 경제적 이해관계가 있을 때 과잉검사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또 의례화된 건강 검진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의례’라고 표현한 것은 개별 환자의 의료행위가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느 공동체, 사회에서 의례는 당대의 ‘사회문화적 목적에 기여’하고 있으며, 그 목적에 부합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나는 건강 검진이 전국민의 건강을 확인하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보장제도’로서의 장치가 아닌가라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오히려 서구 의학의 의례화된 검진이 원시 부족의 치유 의례와 유사성이 더욱 크다고 본다. 구성원들에게 확신과 가르침을 주거나 단결을 강화하던 원시 부족의 의례와 비슷하게, 의례화된 검진은 건강 염려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환자의 권익 보호’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몸이 보살핌을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저자의 경우, 의료 대상자 본인들의 주체적인 참여와 함께 실질적인 효과와 건강의 증진을 가져오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무력감과 패배감을 주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예컨대 일반적인 치과진료를 받던 저자가 치과의사로부터 수면 무호흡증으로 ‘자다가 죽을 수도 있으니’ 자신이 추천하는 의료기기를 구매하면 안전하게 수면을 취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분노를 떠올려보면 더욱 수긍이 간다. 나아가 여성의 경우 적어도 사춘기부터 폐경기에 이르기까지 의료 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상황은 저자에게 더욱 무력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이에 저자는 의례화된 검진에서 의사의 지배적 위치와 환자로서의 복종적 관계에 주목한다. 이 문제는 남성 의사에 의한 여성 검진 대상자에 허용되는 프라이버시 침해 상황에서 더욱 불거진다. 사회가 용인하는 의사의 권위에 여성 검진 대상자는 자신의 몸에 대한 프라이버시 접근 권한을 ‘무기력’하게 양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여성 환자 혹은 검진 대상자의 ‘생명을 구하거나 질병의 위험을 줄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여기에 연례 건강검진에 적용되는 신체의 부위가 개별 의사들과 해당 검진에 대한 비용 부담에 동의하는 보험회사 및 기타 기관들의 이해관계가 더해진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의례화된 정기 건강검진의 무용론을 이렇게 지적하며 반문한다.

 

환자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관심과 염려의 표현이라면, 의료행위가 연구실과 실험실에서 양성되어 고도로 자본집약적인 의료 기관에서 일하는 의사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일까?”(51면)

 

한편 저자는 연간3조 달러의 산업으로 성장해버린 미국 헬스 케어 시스템 산업의 본질은 ‘우리 몸에 대한 통제를 제안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산업화된 시스템’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미국적 자기계발 운동의 맥락과 불교 및 신비주의적인 종교의 영향이 결합되어 우리의 ‘몸’과 ‘마음’이 자본의 통제아래 놓이게 되었다. 나아가 현대인들이 스스로 자기 통제라는 유행에 기꺼이 참여하고 있는 현실에 주목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건강 혹은 건강한 상태라고 믿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에 보다 가까워지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내몰고 있는 형국이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몰두하며,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통제한다는 미명하에, 피트니스가 자기계발과 성장의 수단으로 확산된 것처럼 말이다. 고용상태가 불안한 직장에서 소진된 현대인들은 퇴근 후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피트니스 센터에서 또 다른 노동에 내몰리게 된다. 이런 맥락에는 부지런함이나 자신의 몸을 잘 돌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도덕적인 판단과 도덕적 의무의 문화가 개입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어김없이 ‘건강보험의 존재’가 빠지지 않는다. 이 대목에선 한병철 교수가 피로사회에서 피력했던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서 소진되고, 소진됨에 기꺼이 참여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것이다. 그러므로 이 상황을 다시 단순하게 정리하면 저자는 이 책에서 ‘현대인은 누구나 자본화된 의료 산업의 영향력과 의사들의 지배아래 우리의 몸과 마음이 통제받게 되었음’을 다각도로 검토하여 보여주고 있다.

 

 

 

건강 패러다임에 대하여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지인의 사례는 줄곧 내게 ‘건강’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한다. 의사가 아닌 평범한 직장인인 지인에게 건강이란 몸에서 측정한 ‘수치’가 ‘정상’ 범위 내에 있는 것이다. 이건 무슨의미일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생각거리들이 존재한다. 물론 측정된 수치가 절대로 믿을만하다는 가정에 근거한다. 하지만 정확성은 제쳐두고라도 매순간 변하고 유동하는 신체상태를 고착화된 수치로 나타내는 것은 참고의 기준은 될 지라도 지나친 신뢰를 갖는 것에도 나는 의문을 갖는다. 한편 우리가 ‘정상’ 혹은 ‘건강’한 상태로 여겨지는 어떤 기준이라는 것도 나라마다, 문화마다 다르다. 게다가 우리는 이 기준을 정함에 있어 제약회사나 자본의 이해관계가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본 적이 있을까? 수많은 개별 인간의 편차를 두고 ‘정상과 비정상’ 혹은 ‘건강과 비건강’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이 과연 충분한가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이 문제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가령 건강과 비건강의 경계 기준 언저리에 있던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측정한 결과가 비건강의 영역으로 나왔고, 그리하여 평생 약을 먹으라고 권고를 받거나 호르몬 주사를 평생 맞아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건 분명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다른 장비로 동일 항목을 측정해보니 건강한 영역에 속했다고 하면, 과연 누구를 믿어야 할 것인가. 나 혼자 결정하기란 쉽지 않은 문제다. 의료계가 정한 어떤 ‘기준’은 분명히 ‘건강과 비건강’에 대한 주의를 주고 환자나 해당자가 이 결과에 대처할 여지를 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건강 패러다임으로는 ‘일시적인’ 신체의 일탈을 용납하지 않는다. 대개 우리는 이런 일탈의 상태에서 벗어나거나 문제를 제거하는데 모든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다. 그리고 현대 서구 의학과 약리학의 입장은 이러한 관점에 입각한다.

 

내 지인의 경우, 이런 건강 개념에 따르면 몸을 상하게 할 여지도 있을 것이다. 당장 두통이 있고 감기까지 겹친 경우, 바로 병원에 가서 처방을 받아오거나, 자가진단하는 경우, 감기약과 두통약을 함께 먹을 수 있다. 두통과 감기라는 비건강 요인이 있으며, 이 문제(두통과 감기)의 제거가 곧 건강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에 따라 이 두 종류의 약은 함께 복용하면 간 혹은 다른 신체 부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서에 나온다. 흔히 우리는 이런 점을 간과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나는 문제가 보다 분명하지 않는 한 내 몸의 회복력에 여지를 주는 편이다. 말하자면 내 건강에 대한 개념은 ‘문제가 없는 내 몸의 상태’보다 ‘문제가 있을 때에도 이를 극복하고 회복하는 능력을 포함한 상태’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나는 내 몸의 상태와 내 감각에 보다 더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물론 약을 거부하거나 진료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진료를 가기 전까지의 내 몸에 대한 판단과정은 저자의 관점과 유사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저자는 의학이 ‘과학과 손잡음으로써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의료 사업의 독점권을 획득’했다고 언급한다. 나아가 의학이 ‘실험 과학’으로 여겨지면서 의료 행위 자체가 샘플 등의 데이터를 필요로하는 ‘채취산업’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의료 검진에서 혈액, 소변, 혹은 조직 채취, X-Ray나 CT스캔 장비의 영상 자료 등 다양한 장비와 기구를 사용한 후의 증거, 신체에 대한 수치가 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저자의 입장은 분명히 ‘과학적 의료 개념’을 공격하고자 함이 아니다. 단지 객관적으로 여겨지는 이러한 신체 데이터의 권위가 너무 확고해지거나 비대해짐을 경고한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가 말하는 자신의 병력이나 보다 자세한 증상에 대한 정보는 ‘실증적 데이터’보다 중요도가 떨어지게 되었다. 미국에서 에볼라 바이러스로 처음 사망한 사례가 바로 이러한 상황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리고 데이터에 대한 신뢰의 형성에는 어김없이 건강 보험 산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보험회사의 경우, 확고한 증거에 기반하여 보장할 수 있는 치료 범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보험회사의 입장에서 치료 범위의 문제는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으로서의 의학에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맥락과도 맞닿아 있음을 상기하며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다시 ‘건강’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건강에 대한 나의 관점은 한편으로는 지식의 부족으로 인하여 온전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건강해지기 위한 책임을 개인에게만 지우고, 이에 더하여 건강을 유지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비난까지 곁들여지게 된 정황에는 민영화된 의료환경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여기에 미국이라는 문화적 맥락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문화적 맥락을 결정짓는 미국적 요소에는 자본주의와 손을 잡은 프로테스탄트의 문화(근면한 자들의 자기계발 문화)와 신비주의적 종교의 요소(뉴에이지 문화, 신비주의적 자기계발 문화)가 해당된다. 특히 60-70년대 반문화주의의 영향과 어우러진 신비주의적인 영향으로 등장한 전체론의 관점은 내가 우리의 신체를 생각할 대 좀 더 신뢰하고 주목하던 관점이었다. 전일적(holistic) 관점이라고도 하는 전체론의 관점은 ‘몸과 마음이 이어져 있으며, 심신이라는 실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몸과 마음을 독립적인 개체로 보았던 심신이원론의 데카르트적 관점은 일찌감치 나의 관심사는 아니었는데, 아마도 신체가 기계같이 느껴지도록 했던 관점이기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데카르트적 관점에서 ‘건강’의 문제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아마도 서로 독립적인 신체와 마음의 개별적인 건강 개념이 필요할 것 같다. 데카르트적 관점에서 더 나아가면, 환원주의적 시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현대 생물학이 20세기 중반에 DNA의 구조 및 역할에 대한 발견으로 극단적인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큰 지지를 받았다. 반면 전체론적 시각은 분자 수준의 기능을 넘어, 신체의 각 부분의 협력과 조화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70년대 이후 많은 지지를 받아왔다.

 

이번 독서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우리의 몸, 건강에 대한 기존의 관점(환원주의 및 전체주의 관점)이 불완전함을 보여준다는 사례였다. 바로 백혈구의 일종인 체내 대식세포의 이중적인 역할과 세포들의 개별적인 자율성에 대한 발견 사실 때문이었다. 대식세포는 신체의 외부에서 침입하는 세균 등을 잡아먹거나 노화된 세포를 먹어 청소하는 ‘좋은’ 세포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 대식세포가 암세포와 결탁하여 암세포의 성장과 전이를 돕는다는 결과였다. 암환자들은 면역력을 강화해야 암을 극복할 수 있다정도로만 알고 있던 나의 지식 수준으로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대식세포가 심근경색이나 뇌졸증은 물론이고, 관절염과 당뇨병에 긴밀히 관여하며, 심지어 치매와 우울증, ADHD, 노화와 여드름까지도 관여한다는 증거가 나오고 있다고 저자는 전한다. 뿐만 아니라 대식세포는 상당한 자율성을 갖고 독자적인 활동을 하며 단순히 타자(침입 세균, 혹은 노화된 세포)를 먹어치워 우리 몸을 건강하게 유지해주는 영웅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대식세포는 무엇보다 ‘나’와 ‘타자’를 구별하여 기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유기체를 파괴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 주목해봐야 한다. 곧 대식세포가 ‘나’를 공격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한다는 것이다.

 

바버라 애런라이크가 놀라면서 지적하고 있는 이 상황의 함의는 무엇일까. 의학계에서는 신체의 면역체계라는 관점에서 대식세포가 신체를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해왔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대식세포가 때로는 오히려 우리의 몸 자체를 공격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개별적인 자율성을 갖는 대식세포는 우리가 기대하는 바와 달리 ‘유기체 전체에 반하여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존재라는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좀더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저자는 우리 몸 내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토머스 홉스의 자연상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가까운 상태로 묘사하고 있다. 세포들의 집합체에는 이들을 통제할 왕이 없다. 따라서 우리 몸은 엄청나게 다양한 세포들의 공동체이며, 면역체계는 비유적인 공생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공생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구성 요소들 사이의 갈등과 동맹을 포함하는 전장이기도 하다는 뜻이된다. 저자는 대식세포가 보여주는 ‘배신’행위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몸의 세포들을 연결하는 모든 화학적, 전기적 커뮤니케이션에도 불구하고 다툼과 혼선이 발생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 안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조화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갈등까지 모두 포괄하는 패러다임이다.”(179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것인가?

 

첨단 과학의 도움과 개인의 건강을 증진시킨다는 명분으로 구축된 현대의 여러 제도적 측면은 우리의 건강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에 온전한 답을 주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저자가 암시하고 있듯이, 여기저기에 우리의 건강에 대한 ‘배신’의 요소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주위의 것들에 대해 아무런 의심없이 그저 수용하기만 해왔던 것은 아닐까 자문해본다. 건강의 배신은 자본의 영향으로 구축된 현대의 의료 산업의 현주소를 재검토해보며,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준다. 우리는 얼마나 ‘의료화된 삶’에 영향을 받고 있는지,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하는 ‘건강’이란 개념에 대해서도 말이다.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책의 서론에서 독자에게 전하는 본인의 바램 한 줄을 이렇게 적고 있다.

 

책이 몸과 마음을 향한 프로젝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은 의료 산업이나 우리의 건강 프로젝트가 어떠해야 하는지 답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반면 우리가 현재 어디에 서있으며, 주체적으로 우리 삶의 결정권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자문해보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로서 내게 주어진 과제는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판단하는 일이 될 것이다. 저자는 분명히 의료의 혜택을 거부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의료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혜택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여기에 근거하여 살아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 물론 저자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다음과 같이 슬쩍 내비치고 있기도 하다.

 

나는 예방 의료를 거부한 데서 걸음 나아가고자 한다. ‘의료화된 죽음이라는 고문에 반대할 아니라, ‘의료화된 받아들이는 것도 거부한다. (…) 죽기에 충분한 나이가 됐다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성취이며, 그것이 가져다 주는 자유는 축하할 가치가 있다.”(32면)

 

나는 이 부분을 ‘바바라의 건강 선언’으로 이름 붙이며 마무리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