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밍업》에서 발견한 스피노자의 흔적과 자유인에 관한 단상
《서밍업》 (원제: The Summing Up ) 서머싯 몸 지음 | 이종인 옮김 | [위즈덤하우스]
지난 번에 《달과6펜스》 에 대한 인상을 기록하면서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가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인의 모습에 근접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60대 중반에 이른 자신을 삶을 되돌아보며 남겼던 회고록 《서밍업》에서 서머싯 몸은 바로 자유인과 죽음에 관한 단상을 스피노자를 언급하며 시작하는 대목이 나온다. 다시 보니 서머싯 몸은 칸트도 읽은 모양이고, 과학자의 저서들도 읽고 생각을 남겨두기도 하는 등, 폭넓은 독서를 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죽음’에 대한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8세 당시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2년 뒤 아버지는 폐암으로 사망한다. 당시 파리의 공기가 어떠했는는 모르겠으나 보모 모두 폐에 생긴 병으로 잃고, 자신도 폐결핵으로 청년 시절 고생하는 기록이 보인다. 어쨌든 어린 아이로서 부모의 젊은 시절을 기억할 수 있을만한 나이에 부모를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이 어린 서머싯 몸에게 ‘죽음’은 불가해하면서도 너무나 강력했던 기억으로 남게 되었을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 91살에 세상을 뜨긴 했어도, 그는 평생 죽음의 강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짐작해보자면, 서머싯 몸이 스피노자의 저작 중에서 인상깊게 영향을 받았을 부분은 《에티카》의 4부 후반에 나오는 ‘자유인과 노예’에 관한 언급이 아니었을까. 스피노자의 자유인은 합리적인 ‘이성’의 명령에 따르는 사람이다. 몸은 《서밍업》에서 “스피노자는 자유인은 죽음에 대하여 딱 필요한 만큼만 생각한다고 말한다”라고 시작하는 글을 썼다. ‘딱 필요한 만큼’이란 말은 상당히 모호하긴 하지만, 죽음에 대한 강한 집착과 강박 혹은 죽음이란 진실에 대한 외면, 회피 또한 어리석은 일이라고 지적한다. 《달과6펜스》 에서 화자가 스트릭랜드와 대화하는 도중에 이렇게 묻는 대목이 나온다.
화자: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스트릭랜드: “내가 왜? 그게 왜 중요하단 말인가?”
40대 중반의 작가 서머싯 몸이 《달과6펜스》 을 집필하고 출간(그러고보니 올해가 이 소설이 나온 지 100주년되는 해이다)하는 과정에서도 ‘죽음’의 문제를 떨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등장 인물끼리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붙이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고민이 60대의 서머싯 몸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몸은 인간이란 존재가 피할 수 없는 이 ‘필멸’의 문제에서 자신은 어떻게 이를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응당 고민해야 했을 것이다. 작가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으로서 우리도 이 ‘죽음’이란 문제에 대한 생각들은 하나의 운명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스트릭랜드는 ‘내일’이란 없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내일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집착보다 당장 오늘 그림을 그림으로써 생의 의미를 구하는 인물이 아닐까. 화자가 갑자기 가정을 버리고 사라져버린 스트릭랜드를 찾아와 설득하려고 시도하는 대화에서 스트릭랜드는 이렇게 대답한다.
스트릭랜드: “난 과거를 생각지 않소. 중요한 것은 영원한 현재뿐이지.” (…) 화자: “지금은 행복하십니까?” 내가 물었다. 스트릭랜드: “그렇소”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스트릭랜드를 자유인에 가깝다고 판단한 이유는 그가 현실의 굴레로서 한 축이 되고 있는 가정, 다시 말해 처와 아이들을 버리고 떠나버린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스트릭랜드를 자유인에 가까운 인물로 생각했던 이유가 ‘현실을 벗어버리고 떠났기 때문’으로 오인할 여지가 있겠단 생각이 드는데, 이런 행동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자유인은 인식의 상태를 전제로 하는지도 모른다. 스트릭랜드는 인습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보기에 극도로 무례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예의를 차려야하고, 친절함을 가장하며, 사회가 기대하는 구성원의 어느 ‘역할’에 따라 살아갈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면, ‘무례’라는 개념과 ‘이기적’이라는 개념은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스트릭랜드는 이러한 관습의 영역을 초월한 사람이며, 그럼으로써 자유를 얻었다. 물론 스피노자가 이야기했던 ‘국가’로 대변되는 공동체 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조건과 부합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 나 자신에 대한 구원의 문제 뿐만 아니라 그의 윤리학이 기대하는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조건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스트릭랜드는 고독 속에서 문둥병에 걸려 죽어간다. 사람들은 이런 그의 운명을 동정하겠지만, 본인은 그렇게 ‘인식’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기력이 있는 한 자신의 그림을 그리며 그저 지속해나가는 것일 뿐이었다. 분명히 서머싯 몸은 이 과정과 마무리의 중요성에 더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듯하다.
《서밍업》에서는 이 인간 개개인의 실존적인 행위를 ‘패턴’으로 표현하는 것 같다. “이 패턴의 용도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런 건 없다고 대답하겠다”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이든) ‘패턴의 요점은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스트릭랜드는 완전하진 못했지만,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삶이 갖는 실존적 의미로서의 ‘패턴’을 완성해나가는 것, 그리고 이건 개인의 구원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 내 생각 거리이다. 이런 관점에서 스트릭랜드는 스스로를 구원했던 인물로서 봐야한다는 것이 현재 내 결론이다.
【참고】
다른 책에서 발췌하여 인용한 문장에 대한 쪽수를 적어두지 않은 이유로 나는 김경욱 작가의 소설 《위험한 독서》에서 저자가 각주로 밝힌 일종의 선언과도 같은 문장을 보고 따라해보았다. 그는 인용에 대한 출처를 ‘일부러’ 밝히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의도적인 불친절이 못마땅하거든 앞으로의 각주를 무시하면 될 일이다. 목마른 자 우물을 팔 것이니. 만에 하나 정확한 출처가 궁금하다면 해당 책을 찾아 첫 문장부터 읽어볼 일이다. 인용된 문장을 발견할 때까지, 정말로 그런 문장이 있기나 한 것인지 확인할 때까지. 무슨무슨 영화의, 이러저러한 드라마의 배경이 되었던 특정한 벤치나 삼나무 길을,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섬이나 계속을 실제로 찾아나서는 수고에 비하면 땅 짚고 헤엄치는 격일테니, 부디 당신의 독서가 당신을 자유롭게 하기를.”
‘자유인’에 관해 생각해본 글에서 ‘독서의 자유’를 선언하는 이 문장을 지나칠 수 없었다. 글의 인용을 확인하기위해 스스로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며 확인하는 자유를 회복하는 일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도서관에서 서가와 선반 사이를 오가며, 마음에 드는 책이라면 뭐든 골랐고, 그렇게 나를 만들어갔다”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해주었던 올리버 색스 할아버지의 지혜처럼, 어쩌면 무모하게 보이는 아날로그적인 행위를 통한 독서는 내게 또 다른 ‘자유인’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을 통해 새로운 인식의 세계로 나아갔던 올리버의 ‘자유 독서’ 또한 다시 생각하니 상당히 인상적이다. 지금은 전산화되어 검색을 통해 바로 책을 찾아 보면 되지만, 분야만 정해져 있지 정리가 되어있지 않던 헌책방에 대한 기억이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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