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 -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고실험

《드라이》

셔스터먼/재러드 셔스터먼 지음 | 이민희 옮김 | [창비]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고실험

 

인간의 조상은 상당히 오랫동안 ‘생존’이 유일한 목표였던 시기를 겪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타고 가던 배가 태평양의 한 가운데에서 조난을 당해 수십일 가까이 표류하다가 급기야는 죽은 동료들을 잡아먹은 실화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또 안데스 산맥에 불시착하여 생존했으나 조난 당해 눈 속에 두 달 넘게 갖혀 지내며 옆에 죽어 있던 사람들을 잡아 먹고 생명을 유지하다 구조되었던 사람들에 관한 실화를 우리는 알고 있다. 법과 규칙이 준수되는 현대 문명 사회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우리는 생존에 위협을 받는 나약한 존재다. 《드라이》의 저자인 닐 셔스터먼과 재러드 셔스터먼 부자는 심지어 우리 문명 사회에서 ‘생존’이 최우선과제가 되는 상황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다. 수도관 공사나 물탱크 청소 등으로 반나절이라도 단수를 경험해본 이들이라면 물의 공급이 예고도 없이 중단되는 상황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실감나게 구성해 내었다.

 

물공급이 중단된 배경은 물이 부족한 지역인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에 공급되는 배수관에 흘러드는 물의 공급이 지역이기주의의 결과로 중단된 것이 발단이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물공급 문제가 해결이 될 기미가 보이질 않자 대형 마트의 물과 음료 코너가 동이나고, 급기야는 사람들과의 다툼이 시작되었다. 심지어 단수 2일차에 이미 병원행 급수차에 있는 물을 탈취하려다 총을 맞고 사망하는 사람이 발생한다. 또 물이 당장 필요한 사람들 중에서 탈수로 사망하는 사건이 이미 단수 3일차가 되기 전에 발생한다. 우리가 공기오염과 미세먼지로 맑은 공기에 대해 새롭게 바라보기 전까지 공기에 대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얼리샤도 그랬다.

 

예전에는 물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도 못하고 신경도 썼다. 언제나 자리에 있었으니까.(16면)

 

우리가 일상에서 향유하는 모든 필수 생활요소와 물품은 우리가 결핍의 상황과 마주하지 않는 한 대상의 편리함과 가치를 생각해볼 기회가 흔치않다. 물은 응당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현금은 으레 현금지급기와 에서 나오는 줄로만 알게되는 것이다. 단수 조치는 지역끼리의 이기주의의 결과였기에 분명한 인재였다. 저자의 상상을 따라가다보면 실로 생각하기도 싫은 불편함과 바로 마주하게 된다. 샤워는 커녕, 용변의 문제로 인한 위생상의 문제가 곧바로 사람들을 취약한 상황으로 몰고감을 알 수 있다. 그 와중에 물을 갖고 있는 가정에 대한 시기심과 생존본능으로 작은 마을에서조차 반목과 다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상당히 현실감있는 문제다. 특히 우물물을 퍼서 마을 전체가 공동으로 물을 나누어 쓰던 부모님의 세대까지만 해도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개울에서, 산에서 물을 길어다가 나누어줄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거의 모든 수자원은 기업이 소유권을 주장하고 병에 물을 넣어 생수를 파는 세상이 되었다. 물과 지하수는 오염이 되었고, 기업들의 과도한 지하수 사용으로 지하수가 줄었다. 우리가 만약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혼돈의 상태가 될 것임은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겠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얼리샤 집안의 부모가 단수 조치 후 물을 구하러 나간 뒤, 큰딸인 얼리샤와 남동생 개릿, 이웃집 소년 켈턴이 얼리샤의 부모와 물을 찾아 떠나는 일종의 로드무비와 같은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장면마다 새로운 사건과 위기가 다가오기도하고 가장 어린 개릿의 실수로 전체가 위기에 처하기도 하는 등 안타깝고 긴장감을 자아내는 플롯이 곳곳에 등장하고 있다. 재난이라는 거대한 상황에 휘말린 주인공들이 겪는 일종의 호러 소설이라는 맥락에서 본다면 셔스터먼 부자가 애초에 드라마나 영화제작을 염두에두고 구상한 소설인지도 모르겠다. 문명 속의 인간에게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중 하나인 ‘물’의 결핍이란 사태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어둠을 어떤 양상으로 끌어내 보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읽어나가며 말 그대로 물을 마시기 위해 이성을 잃은 ‘워터좀비’들이 보여주는 폭력성과 인간이 갖고 있는 어두운 면을 다채롭게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해변에서 만난 소녀 재키가 물을 많이 보유하고 있던 켈턴 집안의 비극을 보며 “ (켈턴의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의 피뢰침이었다(208면)라고 혼잣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상황에서 물의 가치는 가격을 따지기 힘들 정도가 된다. 탈수로 고통받는 주인공들 역시 워터좀비가 되어간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도덕적’으로 보이던 얼리샤에게도 ‘생존’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생존이라는 경쟁에서 2등은 무의미하다. 오직 생존 아니면 죽음이 있을 뿐. 급기야 탈수 증상이 심해져 기력을 잃은 동생 개릿을 보며 얼리샤에는 이제 ‘도덕’이 무의미해진 단계에 이른다.

 

동생을 살리기 위해 누가 죽어야 한다면, 얼마든지 물을 빼앗고 죽게 내버려 둘테다. 헨리가 맞았다. 살아남기 위해 괴물이 돼야 때도 있다. 지금 나는 괴물이다.(406면)

 

산 속에서 불길이 일행을 뒤에서 바짝 따라오는 와중에 정신을 잃어가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 노인에게 유일하게 남은 물 컵 한잔을 빼앗아버리는 얼리샤의 모습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어두운 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런 상황은 우리가 자신의 혹은 내 가족의 생존을 위해 타인의 생존에 영향을 주거나 심지어 짓밟는 것이 정당한가, 혹은 윤리적인가하는 우선적인 문제와 마주하도록 한다.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심심치않게 ‘괴물은 되지 말자’라는 표현을 접하곤 하지만 물이든 식량이든 우리의 생존에 지장을 줄만한 상황 속에 놓이게 되었을 때, 소설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과 같은 ‘괴물’이 되지 않겠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소설 《드라이》는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보는 일종의 사고실험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드라이》는 일주일 정도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발생한 단수 사태로 평범한 사람들이 인간성을 잃고 20만명의 생명이 사라져버린 재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직접적인 단수의 원인(지역 이기주의의 결과)은 소설에 등장하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을 파헤치고 있지는 않다. 애초에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상존하는지를 고찰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의 방향은 무엇보다 인간의 본성과 윤리의 문제, 그리고 개개인의 투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영화나 드라마 제작을 염두에 두고 구상된 소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단수 문제가 미국내 여러 주 사이의 정치적인 문제와 얽혀있으므로 보다 큰 분쟁의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

 

만약 이 문제가 국가 간의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까. 사고실험만으로도 보다 큰 국가 간 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실제로 환경운동가 반다나 시바의 저서 《물전쟁》에서 저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이 어떤 점에서는 물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경우 관심의 대상은 요르단강이다. 요르단강은 이스라엘,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과 요르단강의 서안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하는 강이다. 요르단강은 이스라엘 물수요의 60%를 공급하고 있기에 수자원을 확보하는 문제는 인종분쟁과 종교분쟁을 떠나 전국민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에는 언제나 물의 결핍에 대한 우려 내지는 두려움이 함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세계에서 가장 긴 나일강은 어떨까. 나일강은 아프리카 북부지역의 10개 국가(에티오피아, 이집트, 수단, 우간다, 케냐, 탄자니아, 부룬디, 르완다, 콩고공화국, 에리트레아 등)를 지나는 강이다. 반나나 시바에 의하면, 이 지역은 이집트의 아스완댐 건설로 10만명의 수단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물분쟁을 가속화했다. 소설 《드라이》에서는 미국 내 주 사이의 정치적 이기주의로 인하여 일주일간의 단수에 머물렀으나, 현실에서 나일강과 같이 다른 민족과 다른 국가가 얽혀있는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음을 예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드라이》에서는 보다 큰 시스템과 국가 분쟁이라는 커다란 문제를 단순화하고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문제에 초첨을 맞춘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물과 관련한 문제는 단순히 물부족으로 시달리는 아프리카 어린아이들을 돕는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여러 문제들을 논의해볼 여지가 있다.

 

한편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주인공 일행이 만나게 되는 새로운 인물인 ‘헨리’가 어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자기계발 분야 구루들의 교훈을 끌어들이는 장면은 다소 어색한 부분으로 남는다. 이들이 처한 상황은 워터좀비들이 인간성을 잃고 폭도로 변하여 한치 앞도 예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예컨대 헨리가 가지고 있는 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과정에서 ‘위기는 곧 기회이며, 진정한 부는 사고방식에서 나온다’라는 식의 자기계발서들의 교훈을 꺼내드는 것이 소설의 전개과정과 인간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장치로 사용하기에는 다소 어색하게 다가왔다. 자신이 머무는 집에 침입한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감정에 굴복하지 말고, 감정을 이용하야 한다’라고 침착하게 되뇌인다고 문제가 해결될지는 미지수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재난이 벌어지고 있는 형국에 ‘이성적인 개인’으로서의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행동 강령이 과연 도움이 될 것인지는 의문이다.

 

일상으로 돌아온 얼리샤가 스스로에게 묻는 대목이 기억난다. “정녕 우리네 삶이 예전으로 돌아갈 있을까?(442면) 재난을 겪은 이들에게 재난 전후의 삶은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재난의 고통은 온몸에 각인될 것이고, 사람들은 이 기억과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다. 워터좀비가 살아남았다면, 다시 이성을 갖춘 문명인으로 돌아와 도덕적인 상처를 어딘가에 묻은 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란 문제에 관심을 둔 《드라이》를 읽으며 나는 ‘인간은 잔인한 동물이다’라는 말을 가려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의 본성이 ‘잔인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표현보다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라는 측면이 인간의 이해에 더 도움을 주는 전제가 아닐까. 곧 인간이란 주어진 환경 및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 소설 《드라이》이 전제하는 인간상의 모습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 판단해본다. 이 소설은 인간이란 존재에 필수불가결한 ‘물’이 부족한 상황이 되었을 때 이웃들이 워터좀비가 되어 잔인해질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점을 부각시켜준 흥미로운 사고실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