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에 대하여》 - 일본의 책임에 대한 오랜 물음의 대화
《책임에 대하여》
: 현대 일본의 본성을 묻는 20년의 대화
서경식·다카하시 데쓰야 대담 | 한승동 옮김 | [돌베개]
‘일본의 책임에 대한 오랜 물음의 대화’
얼마전 일본에서 전시되고있던 ‘위안부 소녀상’ 작품의 전시 중단 소식을 접했다. 이 뉴스와 후속 기사를 보면서 이 사건의 양상이 내게는 이전과는 다른 맥락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최근에 서경식 교수의 저서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를 읽고난 후 이런 뉴스가 내게 달리 보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뉴스에서는 이 사건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에 초점이 맞춰져 보도되고 있었다. 일본 내에서 소위 진보적이라고 자인하는 사람들도 뉴스에 보도되는 맥락만을 따져본다면 소위 ‘예술인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되었다’는 방향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한 사회의 시민이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는 일은 응당 중요한 사안이다. 그리고 시민이 가진 기본권을 제한하는 경우는 사회 존립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쉽게 제한 받아서는 안될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문제를 넘어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음을 그리고 이 사태가 또 하나의 우려를 재확인하는 사례임을 알게 되었다.
뉴스에 보도된 이 사건의 배경은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간 피해자들을 기억하는 작품 ‘앉아있는 소녀상’이 일본 내에서 전시되는 가운데, 일부 일본인들의 반발과 주최측에 가해진 압력으로 이 작품의 전시가 중단된 것이었다. 내가 느낀 위기감은 ‘표현의 자유’ 문제에 국한되어 해결의 초점이 맞추어지면, 일본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식민주의’의 영향으로 결과한 사건의 본질이 회피되고 심지어 무화(無化)되는 상황으로 종결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결국 일본의 입장에서는 식민주의라는 본질을 건드리지도 않고, 표현의 자유를 위해 ‘양보’할 필요가 있는가의 논쟁으로 소비될 수 있기에, 아베 정부에 동조하는 세력들에게는 편리한 변명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비판과 반성으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하는 구실이 마련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보도된 뉴스는 ‘표현의 자유 억압’문제에 관심이 맞추어지다보니 보다 본질적인 면이 소홀하게 다루어지거나 회피되고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이번 기회에 읽게 된 서경식 교수와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대담짐 《책임에 대하여》에서 바로 이런 사건이 일어나게 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서경식 교수와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 두 대담자들은 일본의 보수세력에 대항했던 리버럴파 지식인들이 보여준 식민주의에 대한 ‘인식’을 외면하는 상황을 ‘응답 책임의 회피’로 표현하고 있다. 90년대 이후 일본 사회의 비판적인 집단임을 자처하던 리버럴파가 몰락 내지는 자폭한 상황은 결국 아베 신조를 비롯한 강경파가 착실하게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기회가 되었다. 소녀상 전시 중단과 같은 사건이 일본 사회에서 계속 되풀이되는 이유는 일본 사회가 왜곡된 역사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강경파세력이 너무 비대해짐과 동시에 제한적이나마 비판적인 기능을 담당해왔던 일본의 리버럴파 지식인들의 붕괴에 가까운 무기력으로 비판기능이 제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의 리버럴파 지식인들에게는 보다 근본적으로 넘어설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바로 ‘천황제’의 존재다. 일본사회는 ‘천황’을 중심으로 어느 시기나 국민통합을 이루어내던 국가였기에, 천황에 대한 강력한 인정 정서에 기반하고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 책 《책임에 대하여》에서 두 교수는 ‘일본국의 본성에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식민주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일본 사회에서 ‘천황’이라는 단어가 수반하는 힘은 특별하다. 일본 국민과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천황=국가’라는 도식 속에 스스로가 ‘신민’이 되는데 이견이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한다. 분명히 정치와 종교를 헌법상에서 분리하고 명시하고 있음에도, 일본의 패전 70년이 다 되어 가는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천황에 대한 비판은 매국노가 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는 전 후 제정된 헌법 상에 명시되어 있는 개인적 자유의 보장이 일본인들 스스로 간절히 원하여 누리게 된 시민적 자유라는 소중한 가치를 얻어낸 경험없이 연합군에 의해 ‘주어진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에서 제대로 ‘자유’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후에 그나마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경험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이 기회를 여러 번 놓쳐 버린 것이 오늘의 전체주의적인 일본의 모습에 이르게 된 큰 원인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럼에도 천황은 평화주의자였다’라며 본질을 흐리는 발언을 하거나, ‘요새 그런 이야기(민족, 식민주의)를 하면 내셔널리스트라고 비난 받아요’라는 말을 리버럴파로부터 듣게되는 상황이 된 것으로 보인다.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가 지적하는 ‘희생의 시스템’에는 과거로부터 여전히 지속되는 위안부나 조선인 징용공 문제 뿐만 아니라 현재 진행중인 후쿠시마 원전사고 및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가 있다. 대담자들은 이 모든 사례가 바로 식민주의의 과거 및 현재의 형태에 다름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이 사례들에 공통적인 특징은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희생에의 강요’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서경식 교수는 한결같이 해당 문제의 이면에 잠재되어 있는 ‘식민주의’를 지적하고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두 대담자는 일본국의 본질적인 ‘식민주의’의 척결을 할 수 있었던 여러 시기를 일본 사회는 놓쳤다고 한다. 패전 이후 연합군에 의해 ‘주어진 자유’이긴 하지만 자국민 스스로가 천황제를 폐지하고 자주적인 국민으로서의 인식과 행동으로 이어졌다면, 아직까지도 이어져오는 여러 ‘희생의 시스템’을 목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상당수의 진보적인 일본 지식인들은 ‘천황’제라는 장벽을 극복하지 못했고, 이런 정서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일본의 ‘전체주의’ 시대가 도래하는데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풀이해볼 수 있다. 여기에는 일본의 정당 혹은 기타 정치 집단이나 매스 미디어 그리고 학계의 저항이 거의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다카하시 교수가 “그 결과로 늘 저항자는 가장 마이너인 입장으로 내몰리고 고립되어 버리는 것”이라고 한 말에서, 일본 내에서도 극소수인 이 두 대담자의 고립감과 어려움을 간접적으로나마 읽어낼 수 있었다.
전체주의 일본이 형성된 결과는 다시 일본인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고스란히 피해로 돌아오게 된다. 예를 들면 미일 안보체제는 일본의 헌법을 초월한 존재인 듯 비정상적으로 보인다. 미군이 기지를 아무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것에서 나아가, 미군들의 일본인들에 대한 우월적인 태도는 오키나와 대학에 떨어진 미군 헬기 수습 과정이나 미군에 의해 자행된 오키나와 여성에 대한 성폭력 사건에서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사건이 발생한 이후 미군측은 일본 검찰과 경찰이 수사에 접근도 하지 못하게 했는데, 더 놀라운 것은 일본 정부가 이런 미국 측의 대처방식에 대해 항의나 사고 수습에 대한 의지 조차 없어 보였다는 점이었다. 내게는 이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이에 대한 피해는 결국 자국민인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돌아가버리는 구조가 되었다. 자국민인 오키나와의 재산과 인명이 피해를 봤는데 뒷짐지고 구경만 하는 본토 일본인들과 정부의 행보는 충격적이었다. 그 결과 오키나와인들은 본토 일본인들에 의해 ‘버린 돌’취급을 받으며 또 다른 차별과 희생을 떠안게 되어 버렸다. 이 정황을 다시 정리해보면, 일본 사회의 ‘식민주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문제는 다시 자국민의 인권이 온갖 형태로 침해 받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서경식 교수는 이 책의 일본어판 후기에서 2017년 <치안 유지법>이 “‘적법하게 제정’되었으므로 손해 배상도 사죄도 실태 조사도 하지 않겠다”라는 법무대신의 국회 답변을 보고 ‘일본은 마침내 올 데까지 왔다’라고 판단했다. 1990년대 부터 일본의 긴 반동기(리버럴파의 몰락과 강경파의 장기집권)에 들어선지 사반세기가 지나자 이제는 국민과 국제적인 시선은 아랑곳 없이 자신들의 속내를 시원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런 말을 언론 앞에서 하기까지 그동안 얼마나 갑갑했을까.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아직 해결된 것은 없고,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할 더 큰 문제와 마주하는 일이 남았다. 이 문제는 일본제품 불매운동이나 일본여행을 취소하는 문제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최근 한 일간지의 뉴스를 보니 일본의 관광객이 크게 줄어 위기의식을 느낀 여당 정치인(자민당 간사장)이 “우선 일본이 손을 내밀어 양보할 수 있는 것은 양보할 일"이라고 말하며 동시에 “우리(일본)는 더 어른이 돼 한국의 주장을 잘 듣고 대응해 나가는 도량이 없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한국에 양보할 건 하자"…관광객 급감에 日온건파들이 움직인다
[출처: 중앙일보](2019년 09월 29일자 기사)
[ https://news.joins.com/article/23589845 ]
우선 총재 다음 자리인 자민당 간사장 니카이 도시히로( 二階俊博·80)의 이면에는 이번에 읽은 대담집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이 과거 식민주의 행보의 가해자라는 인식을 전혀 확인할 수 없었다. 아울러 한국에 대한 유아적인 우월의식에 젖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양보’라는 말은 사전적 의미로 ‘남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함’을 의미하는데, 그가 사용한 맥락에서의 양보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가 열등한 존재에게 관대함을 베푸는 행위의 맥락으로 감지된다. 나는 물론 양국의 경제적 교류가 정상화되기를 바라는 입장이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일본 제품 불매운동과 그 여파가 일본인들에게 보다 근본적인 국면에 대한 이해나 깨달음을 주는 데는 분명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은 언젠가 끝나게 되겠지만, 일본인들이 전후 이래 학습된 ‘사고 정지와 (천황제로의) 자발적 예종의 습관’으로 공고화된 일본의 전체주의적인 본성에 일말의 영향을 미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는 회의적이다.
책을 읽으며 한 가지 더 주목하게 된 것은(서경식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1990년대 들어 그나마 비판적인 지식인들이 될 수 있었던 리버럴파의 몰락으로 시작된 ‘일본 사회의 반동기’로 오늘날 ‘일본형 전체주의가 이제 완성되었다’고 이야기하는 대목이었다. 여기에 아직 역사적인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내가 배운 점은 오늘날 일본의 전체주의 형성에 미국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는 지적이었다. 이것은 서경식 교수가 “미국이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자국의 정책에 맞추기 위해 천황제를 잔존시켰기 때문”(255면)이라고 지적하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전후 일본사회 재편의 양상이 해방을 맞은 대한민국 사회의 정치사회적 양상과 그 궤를 같이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중심에 공통적으로 미국의 존재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해방을 맞았을 때, 도망갔던 한국인 검찰·경찰 세력이 ‘미군정’의 국내 장악과 함께 다시 복귀한 사실, 이들이 해방된 공간에서 다시 정치적 역량을 확보한 사례는 일본의 경우와 매우 유사함을 발견한다. 이런 정국에서 우리는 친일파에 대한 파악과 처벌 과정에 중요한 ‘골든 타임’을 놓치게 되었다. 이 상황은 일본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 두 유사한 패턴의 배후에 미국이 보인 행보를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패전 후 일본 내의 정치적 상황은 역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1947년 트루먼 독트린 이후 냉전 태세를 굳혀 가던 미국은 중국 공산화와 한국 전쟁을 계기로 일본 재무장을 핵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냉전적 대결 체제를 본격화하면서, 군국주의 일본의 전쟁 범죄 처벌과 ‘평화 국가 일본’으로의 개조라는 기존 정책을 전쟁 범죄자 재기용과 일본 재무장, 이를 위한 일본 경제의 재건이라는 방향으로 급회전시켰다. 이것이 일본 패전 후 지금까지 70여 년간 동아시아의 정세 흐름을 결정지었다.”(302면)
일본 사회 역시 패전 직후 미국은 천황제를 존속시키면서 전범자를 재기용하도록 방관하여 식민주의가 오늘날에도 건재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미구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특수를 일본이 누리게 해주면서 일본 사회의 전체주의화에 눈을 감았다. 그러므로 미국은 직·간접적으로 아시아의 평화유지에 악영향을 주었다는 점과 일본 사회의 전체주의 형성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앞서 서경식 교수는 일본이 이제 아베 정권의 장기 집권으로 일본적인 전체주의를 완성했다고 했다. 동시에 데쓰야 교수는 ‘제국 시기의 식민 지배 책임을 계속 부인’함으로써 과거의 ‘단절’을 극복하지 못하고 ‘국제 지도 속에서 고립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를 데쓰야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150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은 그 계속되는 식민주의를 통해, 근린 민족들과의 신뢰 관계를 구출할 수 없게 된 현실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까.”(284면)
일본이 이렇게 무모하게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자처하면서도 자신만의 행보를 유지하는 것은 그 배후에 미국과의 유착 혹은 상당한 정도의 대미 의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상황은 결국 우리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도 적신호가 켜져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만 잘 살려고 노력해도 그럴 수 없는,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임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일본 정부는 전근대적인 천황제를 폐지하고, 식민주의를 극복하여 일본인들이 헌법에 보장된 바 대로, 자유로운 개인적인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천황제의 종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일본 국민의 다수는 기꺼이 자발적으로 ‘신민’으로 회귀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발언대로, 자유민주주의의 이념과 천황제는 원리적으로 서로 양립하기 힘들다. 일본 사회에서는 일본정부를 비롯한 대다수 일본인들이 회피해왔던 ‘책임’을 다시 바라보고 인식하는 과정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역사 수정주의’의 문제나 일본 사회 전체의 문제가 되고 있는 ‘모럴의 붕괴’가 계속 진행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다. 국내에서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것은 이미 옛날의 일이다. 과거의 허물을 그만 들추라’는 논리로 대응하곤 한다. 이런 논리는 가해자, 기득권자가 가장 좋아하는 레토릭이라고 서경식 교수는 말한다. 보다 밝고 건강한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피해자들이 언제나 함께하는 가운데 과거사 해결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사건의 진상이 명명백백하게 알려져야 하며, 후세는 또 이를 알아야만 한다.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는 행위는 미래에 같은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마무리 - 대담자들을 다시 보며】
다카하시 교수의 가차없는 일본 정부 비판을 보노라면 일본 사회에서 매우 보기 드문 인물임을 알게 된다. 과연 대한민국 사회에서 대다수가 이야기하는 논리에 정면으로 반박을 하는 학자라면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우려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일본 내에서도 이렇게 극소수에 속하는 학자에 대해 서경식 교수의 평가는 남다르다.
“(다카하시 선생은) 대단히 중요한 장면에 서 있는 사상가라고 생각해요. 일본이라는 곳에서 그런 사람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른바 아카데미즘과 현장이라는 것의 경계를 오가며 생각하는 것, 소수파와 다수파의 경계에 서서 생각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205면)
서경식 교수에 대한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신뢰와 평가 또한 남다르다.
“서경식 선생은 언제나 나에게는 스승과 같은 벗이자 벗과 같은 스승이었다.”(286면)
20년 넘은 대화와 고민의 세월을 지내며 두 대담자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지닌 ‘도반’이 된 셈이다. 그리고 소수의 입장이나마 끊임없이 소수의 입장에서 다수를 비판하고 의견을 개진하며,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의 왜곡된 시선을 갖는 이들이 펼쳐 놓은 문제점들을 지적해왔다. 이번 대담집 《책임에 대하여》에서는 일본 사회에 만연해있는 책임 회피 기작을 분석 비판하고 ‘응답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일본 내에서 이 두 지식인의 입장이 소수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식민지 종주국으로서 일본 국민 다수에 내재되어 있는 식민주의적 심성과 싸우는 일에 오랜 시간을 바친 이들이기도 하다. 이들의 다음 세대에 이분들의 역할을 이어갈 비판적인 지식인들이 더 많이 나와 한일간의 연대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데쓰야 교수가 후기에서 인용한 오키나와 이시가키지마의 시인 야에 요이치로의 시로 마무리를 해보려고 한다.
▶ 야에 요이치로의 새 시집(2017) 《일독(日毒)》에 나오는 시 재인용.
‘대동아 전쟁 태평양 전쟁
300만의 일본인을 죽음으로 몰아갔고
2,000만 아시아인을 괴롭히다 죽이고는 그것을
모두 잊었다는
의지 의식적 기억 상실
그 교활함 야비함 그 거무칙칙한
광기의 공포 그리고 나는
확인한다
실로 이것이야말로 지금 일본의 암흑을 통째로 표상하는 한마디
‘일독’(日毒)
▶서경식 교수: 여기서 ‘일독’(日毒)은 스스로 중독되어 제정신을 잃은 채로 타자에게 계속 재앙을 뿌려대는 모습을 의미한다.(11면)
▶데쓰야 교수: 여기서 시인이 과제로 삼은 ‘일독의 제거’는 메이지 유신 150년을 관통하는 일본의 식민주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의미한다.(28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