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 中心》- 나는 당신의 거울이다
《중심 中心》
: 마음을 지키는 중국 그림의 힘
김선현 지음 | [자유의길]
우리는 회화라고 하면 무의식적으로 서양의 그림들을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대학의 서양화과 커트라인이 동양화과보다 다소 높은 경향이 있다는 것도 공공연한 사실이다. 서양의 예술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 차지하는 위상은 동양의 예술과 대등하지 않아 보인다. 이런 모습들은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를 바라보는 우리가 어쩌면 중심(中心)에 서 있지 않기 때문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우리 삶의 모습들은 그럴만한 원인이 분명히 있으며, 어떤 대상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이러한 현실에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림에 관한 도서라면 서양화가 대부분인 상황에서, 그리고 수묵화와 같은 전통 동양화가 아닌 동시대 중국 예술가들의 작업은 어떨지 궁금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번에 만난 도서는 현대 중국 예술가들의 작업을 소개해주고 있는 국내 저자의 책이다. 저자인 김선현 교수는 미술을 전공하고 미술치료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전문가이다. 곧 그림을 통해 상대방의 심리 분석과 치료에 접근해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저자가 연구를 위해 교환교수로 해외로 나갈 기회가 생겼을 때, 미국이나 호주와 같은 의료 선진국이 아닌 중국을 선택한 것도 오늘 만나게 된 이 책의 출발점이 되었을 것이다. 발달한 의료 장비나 기술을 보고 배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급속한 변화로 중국인들이 겪게되는 트라우마와 심리 상태를 연구하기 위해서’라는 저자의 간결명료한 선언을 만났을 때, 이 책이 또 한번 달리 보였다. 이 책에는 중국을 대표하고 있는 현대 작가 30인과 그들의 작업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저자는 중국과 한국을 수십 번 오가며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작가들 만나서 친분을 쌓고 이들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결과가 바로 이번에 읽게 된 《중심 (中心)》이다.
이 책의 제목은 다의적이다. 저자는 중심(中心)의 의미를 ‘마음을 굳게 해 흔들림 없이 자신의 삶을 바로잡고, 온 정성을 다해 자기 인생의 줏대를 든든히 지키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문장 어디에도 ‘가운데’를 의미하는 표현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흔들림 없이 자신을 지키는 것’에 방점이 있다. 친척분이 지어주신 내 호에도 ‘중(中)’자가 하나 들어가는데, 여기서 ‘중(中)’은 ‘천하의 근본’이라는 의미에 가깝다고 이해했다. 곧 내 호에 적용된, ‘중(中)’은 나의 본질, 나의 참모습 나아가 세상의 근본이라는 맥락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러므로 내게 ‘중심’이란 의미는 ‘세상의 근본을 향한 마음’이라고 하면 너무 멀리 나간 것일까? 여기에는 자신의 삶을 바로잡는 ‘균형감각’과 ‘의지’를 내포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여기에서 나아가 저자는 이 중심을 ‘중국인의 마음’으로 해석하고 있기도 하다. 이 의미는 창작자가 예술행위를 통해 자신의 감정과 의식을 결과물에 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편적으로 창작자들이 속한 공동체의 보편성을 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난 뒤, 나는 동시대 중국 작가들의 고뇌와 감정의 표현물을 통해 나와 다른 문화에 살고 있는 이들의 생각과 공감을 아울러 발견할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현대 중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이룬 요소들】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현대 중국 작가들의 작업과 배경을 보면, 공통적으로 몇 가지 특유한 경험들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현대 중국인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친 사건들은 ‘문화혁명’과 ‘천안문사태’로 정리된다. 여러 작가들은 어린 시절 ‘문화혁명’의 모습을 몸소 체험했다. ‘대머리 건달들’을 주제로 여러 그림을 그렸던 화가 팡리쥔이 겪은 중국 현대사의 모습은 시대성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개인들에 대한 문제를 절실히 보여주었다. 다섯 살에서 열 다섯살까지 겪은 ‘문화혁명’ 시절에 대지주였던 자신의 할아버지가 이웃사람들 앞에서 ‘인민의 적’이라는 비난과 저주의 함성 속에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천안문 사태’ 현장에서 총을 맞고 피흘리며 죽어간 친구들을 보았을 때 작가가 받았을 충격과 혼란은 그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와 트라우마를 남겼을 것이다. 그는 생존했지만, 대신 평생 거대한 중국 현대사가 남겨준 생채기를 온 몸에 기억으로 남겨두었을 것이다. 등장인물이 모두가 대머리인 남자의 힘없어보이는 혹은 생각이 많아 보이는 뒷모습, 하품을 하는 대머리 남자의 무기력한 모습은 오히려 이러한 표현 자체가 작가의 감정과 의식의 강렬한 표출임을 느끼게 해준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겪었던 경험과 유사한 것도 있다. 바로 산업의 발달로 인한 도시 인구의 증가 현상이 그것이다. 한 나라의 산업화가 국가주도적인 성격을 띠게 될 때 더욱 두드러지는데, 농촌의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하여 도시의 가난한 공장 노동자로 살아가곤 한다. 이런 모습은 중국 뿐만 아니라 산업 혁명 이후 산업화의 영향이 미친 전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우리의 경험도 다르지 않다. 화가 쑹이거의 <부츠 한 짝>을 그린 그림이나, 류쿵씨가 그린 <먹는 기쁨이 크다>에서는 도시 생활을 하는 노동자의 ‘고단함’을 엿볼 수 있다. 나의 부모님 역시 60-70년대 지방에서 서울로 두려움과 설렘을 가지고 도착하셨을 것인데, 이런 경험을 가진 누구나가 중국 화가들이 그린 이런 작업을 통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양상은 다르지만 이런 부분들은 현대 중국 예술가들 역시 삶의 보편적인 경험에 주목하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친근하게 현대 중국 예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중국여행을 하며 들은 사항 중 하나는 베이징에서 중국인들이 들어와 살려면 일종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베이징 시민이 될 자격을 얻어야 한다는 말인데, 저자가 이 부분을 책에서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1990년대 말 중국 정부가 밀려오는 농민들의 이동을 막기 위해 선택했던 ‘호구제도’는 주택을 비롯한 거주의 권한 외에 의료 혜택이나 교육에도 도시의 거주자들과 차별적인 제도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예컨대 도시로 이동해와 가족을 이룬 이들의 자녀들은 대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부모가 나온 지역으로 다시 돌아가 시험을 봐야만 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중국 예술가들의 작업을 통해 우리와는 다른 중국 특유의 문화 속에서 우러나온 이런 경험들은 다소 생소하지만, 한편으로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공감이 되기도 한다. 아마도 이것은 서양과 달리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비극의 체험을 공유하는 한편,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압축적인 경제 성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의 감상자들은 창작자들이 녹여낸 경험을 통해 보편성을 발견하고 확인하고 있기에, 현대 중국 예술가들이 작업에도 충분히 공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당신의 거울이다】
1980년대 중국 미술에 등장하는 신사조 운동은 무엇보다 창작자 자신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데 주안점을 두는 것으로 이해된다. 서양미술의 전통과 견주어보면, 100여년 전에 예술가의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던 예술 사조인 ‘낭만주의’의 맥을 잇는, 혹은 ‘낭만주의’의 현대적인 변용과 같은 관점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대 중국 예술가들은 문화 혁명이나 천안문 사건과 같은 중국사의 큰 사건을 몸소 겪기도 하고, 특히 예민한 감성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 이들은 자신의 이런 상처와 아픔을 들여다보고, 작품을 통해 다시 직접 대면하며 아픔과 트라우마를 극복해내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쉼없이 파안대소를 보이는 남자들을 그린 화가 웨민쥔의 그림을 보노라면, 자연스럽지 않은 상황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의학 연구에 의하면 억지로라도 얼굴 근육을 움직여 웃는 얼굴을 지으면 마치 행복감을 만들어내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반대로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는데 억지로 미소를 지어야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행복하기를 선택할 수 있을까? 현대 사회의 일부인 우리는 사실 후자의 상황에 더 많이 놓이게 되지 않을까. 작가 웨민쥔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아무 생각도 없이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며 행복해 하는 사람들을 표현한다. 이들은 곧 내 초상이자 친구의 모습이며 나아가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50면)
작가 웨민쥔의 말마따나 그가 그린 작품 속 인물은 하나 하나가 곧 자기 자신이기도 하며,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저자가 트라우마 자살관리 센터에서 상처받고 찾아온 사람들의 치료과정에 참여해본 후, ‘이 세상에 상처 받지 않은 영혼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한다. 결국 예술가들은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돌아보며, 이들이 만든 작품을 보고 자신의 아픔이나 상처를 발견해내는 과정을 통해 서로 교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들은 이들의 예민한 촉수와 감수성을 통해 우리와 시대의 거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환하게 웃는 인물을 그린 웨민쥔의 그림 <세상 구경> 에서는 남자가 허리를 굽혀 다리 사이로 세상을 거꾸로 보는 모습을 담았다. 세상은 뒤집힌 채 다르게 보일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쑹이거의 <부츠 한 짝> 에서도 부츠의 위치를 서로 반대편으로 벗어놓은 것을 알아볼 수 있는데, 이 그림도 평범하지만 ‘고단한 하루’의 흔적을 담고 있는 일상 생활 속에서 발견하는 ‘낯선 시각’을 알아볼 수 있다. 사실 다른 예술가들이 내놓은 결과물들을 보면 하나 같이 우리의 삶을 조금씩 다른 시각에서 포착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예술가는 각자의 경험과 삶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온 아픔이나 관심사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를 자신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세상에 내놓는다. 그 과정이 이들 예술가들이 하는 궁극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낯선 시각’은 예술가들만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저자는 ‘삶이란 얼핏 보기에는 시시해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것들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저자의 말을 한 자 한 자 따라읽다가 언젠가 그늘이 드리워진 동네 골목길을 지날 때 보았던 장미 사진이 생각났다. 건물 사이로 한 쪽 벽에 비치는 햇살을 쬐던 장미 한 송이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아래 사진 참고). 멋진 풍경이 있거나 역사적인 기념물이 있는 곳도 아닌 동네 골목에서 어느 날 이 한 송이 장미가 조각 햇살을 받으며 나의 눈길을 끌었던 모양이다. 길거리에서 갑자기 서서 꽃을 찍는 중년의 내 모습을 상상하면 부끄럽긴 하지만, 햇살이 비치는 좁은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를 당당히 드러내고 있는 이 녀석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나에겐 이런 기회가 내 주변을 ‘낯설게 보는 순간’이다. 이런 행위들을 중국 현대 예술가들이 보여준 작업과 견줄 수는 없다. 다만, 이 장미 사진은 나의 하루를 다르게 만들어준 ‘내 삶의 자극제’라고 생각한다. 예술에 대해 접할수록 내가 배우게 되는 것은 바로 타인 뿐만 아니라 내 삶의 현재성에 대한 관심과 이해인 것 같다.
【나가며】
책을 읽으며 한 가지 혼란스러웠던 점은 이 책의 방향성에 관한 의문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현대 중국 예술가들의 작업을 소개하고 있다. 다만 순수하게 저자가 현대 중국 예술가들을 친절히 소개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전공인 미술 치료와 관련한 정보와 경험을 일부 함께 전달하고 있기에 책의 정체성이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 책이 현대 중국 예술가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 및 입문서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지만, 일부 작품에서 저자의 미술 치료와 관련한 이야기를 더하고 있는 부분은 책의 일관성에 혼동을 주고 있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중국 작품들에 대한 저자의 감상을 기록하는 부분은 이 책이 현대 중국 미술에 대한 개인적인 에세이로서의 성격을 띄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 책의 방향을 어디에 두고 있다고 이해해야할지, 저자는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있을까가 다소 혼란스럽게 다가왔다. 개인적으로는 현대 중국 예술가들에 대한 소개와 저자 개인의 감상을 전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저자가 본인의 전공과 경험을 살려 화가 랴오야오야오의 <기인> 시리즈에 대한 심리분석을 넣은 부분은 특히 책의 방향을 혼동스럽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저자가 현대 중국 예술가와 작품을 소개하는 것이 주안점인지, 아니면 그림에 대한 미술치료의 관점에서 심리 분석을 해보는 것인지를 명확히 하여 분리하거나 아니면 매 그림마다 심리분석을 추가하여 책의 방향을 분명히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몇 군데서 그림에 대해 저자가 독자에게 격려하는 듯한 부분도 책의 방향을 다소 모호하게 만드는 요소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아니면 서문에서 책의 방향에 대해 미리 힌트를 주었으면 독서에 다소 혼란이 덜했을 것같다.
몇 가지 혼란스러운 부분을 제외하면, 이 책을 통해 현대 중국 예술가들과 이들의 대표작품들을 알게 되어 흥미로왔다. 여러 현대 중국 예술가들이 간직한 경험들과 고민들을 통해 지구라는 행성에 함께 살고 있는 인간의 보편성을 새로 발견한다. 나아가 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예술가는 시대의 모순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사람들이란 생각도 해보게 된다. 현대 중국 예술가들이 묘사한 그림과 사진 작품들에는 이들이 감지해낸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들이 담겨있다. 이 부분은 이들에게 보편적이면서 동시에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게는 특수한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회의 한 부분, 구성요소로서 인간을 이해할 때, 사회로부터 받는 스트레스, 상처, 트라우마 등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예술가들의 작업이 인간으로서 각자 지니고 있는 감성에 크게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 독서를 통해 저자가 소개해주는 현대 중국 예술가들의 작업들을 조금 알게 되었다. 이들 역시 자신이 속한 사회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자신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평범함 인간이기도 했다. 다만 이들은 시대에 공감하고 분노하기도 하며, 자신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화가는 자신의 감정을 그림이라는 작업으로 대상화하고 이를 들여다보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한편 감상자는 화가의 작업을 통해 자신의 기억(경험)과 공감을 통해 주관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또 다른 보편성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바로 경험과 기억, 그리고 공감을 통해서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예술가들은 범인(凡人)을 초월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끊임없이 극복해가는 인간으로서 ‘초인’들인지도 모르겠다. 상처와 아픔을 지닌 자신의 삶을 그대로 들여다보고, 자신의 의지로 이를 ‘있는 그대로’ 껴안고 나아가는 것은 끊없는 허무주의나 냉소주의에 빠져있다면 추구하기 힘든 긍정의 자세일 것이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상처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며, 자신의 상처를 돌보고 아픔을 긍정하고 극복할 때, 내 안의 나이테는 근사한 모습으로 자라나게 될 것이다. 여러 현대 중국 작가들의 작업을 보면서 나 자신도 역시 조금씩 위로를 받는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처음 만나게 중국 작가들이었지만, 저자의 자연스러운 글쓰기 덕분에 현대 중국 예술이 처음인 나도 중국 예술가들의 작업들에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앞으로 현재 중국의 예술계를 이끌고 있는 이들의 다음 세대, 주목받는 젋은 중국 예술가들에 대한 소개도 기대 해보게 된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