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서평'이란 이런 것
《길 위의 독서》
전성원 지음 | [뜨란]
【그렇게 나는 만들어졌다】
가끔 내가 갖고 있는 책갈피 중에 올리버 색스가 쓴 표현을 들여다보곤 한다.
“도서관에서 서가와 선반 사이를 오가며, 마음에 드는 책이라면 뭐든 골랐고, 그렇게 나를 만들어갔다.”
나는 삶이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는 나이가 되었을 때,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경험보다 훨씬 늦게 도서관을 발견했다. 헌책방과 도서관은 분명히 내 삶에 위로를 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물론 나한테만 그럴까. 내가 늦게 이 장소를 발견했을 뿐이다. 이런 장소에서 무심코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다가 어느 순간, 어느 부분에서 가벼운 충격이나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낄 때가 있다. 시인 장석주 선생이 고등학생일 때 정독 도서관에서 니체를 발견한 순간의 전율이나 충격은 아닐지 모르겠다. 나의 삶이 역시 불안하고 막막하다고 느낀 어느 날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펼처본 적이 있다. 콜필드가 맨해튼 밤거리를 배회하는 장면을 읽었을 때, 내 안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오던 순간이 기억난다. 이 책이 예전에는 분명히 나를 위로해 줄 만한 책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 순간이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이 순간을 통해 무언지모를 위로를 받았다. 가끔 도서관에서 어슬렁거리며 이 책 저 책을 꺼내 살펴보기도 하는데, 이번엔 우연히 전성원이란 작가의 《길 위의 독서》라는 서평집을 발견했다. 저자가 읽고 쓴 책 중에는 내가 읽은 책이 거의 없었지만, 최근에 후쿠시마에 관한 도서들을 읽어보았기에 저자가 《후쿠시마 이후의 삶》이란 책을 읽고 쓴 서평부분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저자의 서평은 약간 긴 분량을 지닌 서평이었다. 하지만 천천히 읽어나가자 곧바로 마음에 들었다. 시중에 나온 가벼운 서평들과는 다른 점이 나의 시선을 붙들었다. 비교적 짧게 느껴지긴 했지만 저자는 후쿠시마에 관하여 꽤나 디테일한 사실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저자는 《후쿠시마 이후의 삶》을 읽으며 시인 파울 첼란을 떠올렸다고 했다. 저자에게 이 두 대상(후쿠시마와 파울 첼란)이 어떤 이유로 이어졌을까. 저자는 파울 첼란으로 대표되는 홀로코스트의 기억(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 역시 파울 첼란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을 통해 홀로코스트와 원전을 작동시키는 힘이 다르지 않다라고 본 것 같다. 특히 몇 일 전 101세로 사망한 일본의 전 수상 나카소네 야스히로를 비롯한 일본 내 보수 세력이 1954년 3월 1일에 있었던 수소폭탄 실험(태평양의 비키니 섬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일본의 참치잡이 어선이 피폭되는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날 핵발전소 건설을 위한 예산을 승인한 사례를 언급한다. ‘희생의 시스템’이란 개념을 주장한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핵발전소 관련한 문제는 ‘국가가 국민을 기만하고 무시하는 시스템’으로서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런 시스템은 결국 홀로코스트가 작동되는 메커니즘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저자는 떠올리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뜨거운 서평’이란 이런 것】
저자는 파울 첼란으로 대표되는 홀로코스트의 역사와 핵발전소의 접점을 찾아내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한홍구 교수가 후쿠시마와 용산 참사를 연결시키는 장면에 주목한다. 결국 이 두 사건 역시 본질적으로 같은 논리와 시스템에서 나왔다는 한홍구 교수의 지적을 다시 곱씹고 있다. 저자의 문제의식과 《후쿠시마 이후의 삶》을 쓴 저자들의 문제의식이 만나는 지점을 잘 들여다보였다. 나는 이번에 처음 저자의 글을 발견하고 읽게 되었는데, ‘뜨거운 서평’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회의 이면을 뜨겁게 바라보려는 노력이 느껴지는 묵직한 글이었다. 쉽게 읽히고 가벼운 글들을 찾곤 했던 나를 반성하게 해주었다.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현대사의 여러 장면을 직접 목격하며 삶의 부조리함과 모순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초등학생이던 저자가 담임 선생님의 병문안에 갔을 때 병원에서 마주친 군인들(1980년 5월이었다)을 보고 두려움과 의문을 품게 된 경험 역시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삶의 이력을 보고서야 나는 그가 이토록 삶에 대해 깊은 애정이 느껴지는 뜨거운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나는 다시 생각해보아도 이런 글을 쓸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와 같이 사람과 사회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해에 도달하기에 나 자신은 아직 한참 멀었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인문학자 김경집 선생이 서평 쓰기에 대해 언급한 대목을 읽어본 적이 있다. 김경집 선생은 ‘따뜻한 시선과 냉정한 평가’를 겸비한 서평을 쓰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저자 전성원의 서평은 책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따뜻한 시선을 바탕으로 책에 언급된 현실을 본인이 직접 ‘냉정하게’ 직시하고 들여다보고 있다. 김경집 선생의 표현대로 시도하다가 ‘평가를 위한 평가’를 어설프게 하는 것 보다는 전성원 선생의 뜨거운 서평 또한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저자에게는 길 위에서 만난 모든 삶의 마주침이 세상이라는 책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모비딕》의 작가 허먼 멜빌이 화자 이슈메일의 입을 통해 ‘배를 타고 바다를 나가는 일이 나에겐 예일이자 하바드였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저자가 길 위에서 만났던 세상의 다른 책들도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