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베를린》 - 분단과 통합의 상징 베를린을 읽다

 

베를린, 베를린

이은정 지음 | [창비]

 

 

 

겨울의 재스민차를 떠올리며

 

구동독 출신의 시인 라이너 쿤체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체제에 비판적이었지만, 그의 시는 매우 서정적이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독일 자유대학교에서 정치사상분야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이은정 교수의 신간 베를린, 베를린을 읽으면서 쿤체 시인의 <한잔 재스민차에의 초대>라는 제목의 짧은 시 한편을 생각했다.

 

 

들어오셔요, 벗어놓으셔요 당신의

슬픔을. 여기서는

침묵하셔도 좋습니다.

 

 

동독과 서독이 분단되어 대치하고 있던 시절, 동독 정부에 저항적이었던 사람들은 이 시를 집 문에 붙여 놓아 눈에 띄지 않는 저항의 표시로 삼았다고 독문학자 전영애 교수가 시인의 에서 언급한 바 있다. 쿤체 시인이 한국을 방문하여 국내 대학생과 함께 시와 음악을 통한 교감을 나누는 자리에서 학생이 시인의 연애담을 물었다. 시인이 학생의 질문에 본인의 연애담을 이야기해준 대목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시인이 정치적인 이유로 학위를 받기 전에 대학을 떠나 자물쇠 제작 보조공으로 일하고 있을 당시(1959년), 베를린의 한 라디오 방송국은 쿤체 시인의 금지된 시 몇 편을 방송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 미래의 부인이 될 엘리자베트 쿤체 여사는 체코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감자를 깎고 있었다고 한다. 쿤체 여사는 체코에서 의사로 지내고 있었다. 방송이 나간 지 여러 달이 지나 쿤체 여사가 보낸 우편이 먼 길을 돌아 쿤체 시인에게 도착했고, 이후 이 두 사람은 시와 음악에 대해서 장문의 편지를 주고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기 직전이었지만, 두 사람은 직접 만날 수 없었다. 체코와 접하고 있던 국경은 폐쇄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쿤체 부부가 경험한 삶의 한 단면을 끌어와 냉전과 분단의 맥락에서 바라보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연합국이 구축해 놓은 새로운 정치질서의 구도 하에 개개인의 삶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를 실감나게 짐작해볼 수 있었다.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특수성

 

승전 연합국인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가 세계대전 이후 독일 지역을 동독(소련)과 서독의 연방정부(미국, 영국, 프랑스)의 영역으로 분할 통치하게 되었는데, 베를린 역시 도심 지역을 4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공동 관리하게 되었다. 특히 베를린은 동독의 영토 한 가운데에 위치한 대도시로서 소련이 점령하던 동독에 완벽하게 둘러싸인 일종의 섬과 같은 지역적 특수성을 지닌다. 오늘날 베를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베를린은 ‘분단체제의 상징이면서 분단 극복의 상징’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바로 베를린 장벽으로 상징되는 분단의 역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한 냉전 구도의 산물이다. 이 부분은 우리의 분단 현실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다만 독일이라는 공간이 대한민국과 달리 분할 통치 과정에서 전쟁이 없었다는 점은 이후의 나라 재건에 다행한 일이었다. 수백만 명의 사망자와 천만 명에 이르는 이산가족을 양산한 전쟁을 겪은 우리나라와는 이렇게 다른 현실이 있었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베를린 건물의 3분의 1이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독일 영역 내의 모든 도시가 크게 파괴되었음을 감안하면 이 부분은 베를린만의 특수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동독 영역 내부에 섬처럼 존재했던 이 도시는 50년대 말, 60년대 초에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두 진영 사이의 대립과 기싸움으로 위기감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베를린 장벽이 설치 된 후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이라는 이 특별한 공간은 ‘정치적으로 분단되었으나, 사실상 완전히 분리된 적은 없었다’고 한다. 민간 차원에서 엽서 한 장 왕래하기 힘들고 사실상 단절되다시피 했던, 그리고 이 현실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우리의 경우를 비추어볼 때 어떻게 이런 조건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저자는 이 책 베를린, 베를린에서 정치사적 관심에서 베를린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보고 있으며, 동서 양측이 제한적이나마 지속적으로 교류할 수 있었던 정황과 우리의 상황을 곁들여 비교해보고 있기도 한다.

 

 

 

베를린 장벽의 등장과 이후 상황

 

베를린 장벽은 1961년 8월 13일 새벽에 철조망 형태로 설치되기 시작하여, 곧이어 콘크리트 벽을 세웠고, 만 28년이 넘은 1989년 11월 9일에 붕괴되었다. 베를린 장벽은 동독 정부가 소련의 승인을 받아 기습적이고 일방적으로 구축하며 시작되었다. 장벽 설치의 주 목적은 당시에 늘어나던 동독 주민들의 동독 탈출을 막고 이들을 가두기 위함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 독일 영역이 베를린과 더불어 분할통치된 1945년 이후부터 1952년 11월 까지는 베를린 주민들도 왕래가 가능했고, 생필품도 구하러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장벽이 설치 후 동서 양측의 왕래는 거의 불가능해졌다. 여기서 저자가 더욱 주목하는 부분은 ‘정치적으로 제한적이나마 삶의 연결고리는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는 부분이었다. 경제나 우편, 통신이나 문화교류는 여전히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지정학적인 조건을 고려해볼 때 섬과 같았던 서베를린은 이러한 교류가 사실 대안이 아니라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보장받는 ‘유일한 기회’였을 것이다.

 

 

저자가 동서 양측의 교류가 반드시 필요했다고 언급하는 사례 중에서 지하 연결망인 하수도를 들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형성된 하수터널은 상당한 규모와 효율을 발휘하는 사회기반 시설이었다. 서베를린 하수의 대다수가 동베를린으로 흘러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장벽 설치 후 민간 차원에서 동서 양측의 기술적, 실리적 협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두 공간이 분리되었어도, 분리되지 않은 사회기반 시설을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두 진영의 접촉과 협업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어느 한 진영이 하수터널을 막거나 폭파시켜서 모든 것을 분리시키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국민의 혈세를 모아 새로운 하수터널을 건설하는데 오랜 시간과 자금을 쏟아부었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우리의 상황과 견주어 아쉬워하는 부분과 더불어 이런 부분들에 대해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우리의 과오가 안타까웠다. 베를린의 역사를 통해 다른 진영에 있더라도 실리적인 결정을 위해 타협과 합리적 선택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는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눈여겨보고 고민할만한 부분이라고 본다.

 

 

장벽이 설치된 이후에도 동독 주민이 탈출하려는 시도는 계속 되었고, 그 과정에서 탈출하는 사람들에게 총격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쿤체 시인처럼 체제에 비판적이던 시민들에 대한 압박도 물론 이루어졌다. 제한적이나마 우편 서비스가 유지되었지만, 모든 우편물은 검열당해야 했다. 저자는 80년대 초에 동독 주민들이 비밀경찰의 도청에 익숙해져 있었다고 했다. 특히 국제 전화는 이미 50년대 부터 도청당했던 모양이다. 쿤체 시인의 이야기가 담긴 시인의 에서는 동독에 있던 시인이 체코에 있던 미래의 아내 엘리자베트 쿤체 여사에게 청혼하기 위해 국제전화를 했던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당시(1959년)만 해도 모든 국제전화가 도청당했다고 쿤체 시인은 언급한다. 특히 정보국은 시인처럼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일거수일투족 감시했다. 당시에 시인이 휴가로 시골에 갔을 때 ‘물을 시에 양동이를 우물에서 길었는지’까지 구동독 정보부의 기록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정보국이 남긴 자신에 대한 모든 기록과 증거물들로 작성된 자료집을 참고하여 낸 시집이 파일명 서정시(1990) 라고 한다. 쿤체 시인의 사례를 떠올리는 이유는 베를린을 둘러싼 정치사적 장면에서 시인으로 대표되는 한 인간의 삶이 어떠했는지 상상해보고 싶어서였다.

 

 

 

장벽의 구멍들

 

암울하고 억압적인 조건 속에서도 삶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우리는 이제 장벽이 붕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당시의 정황을 되돌아보고 있는데, 이 장벽의 붕괴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은 이미 삶 속에 다양하게 내재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민간차원의 문화교류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독일 최대의 라이프치히 박람회나 17세기부터 이어진 독일 최대의 라이프치히 도서전은 ‘장벽의 구멍’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저자는 언급한다. 앞서 말한 하수터널과 같은 사회 기반시설에 대한 동서 양측의 협력을 포함하여 민간차원에서의 물적, 비물질적 교류는 거의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왔다는 것이다.

 

 

책의 전반에서 저자는 이 ‘장벽의 구멍’이 막히는 것을 방지하고 보다 많은 구멍을 만든 정치인으로서 브란트 전 수상을 주요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당시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아데나워 수상의 단절 정책과 달리 서베를린 시장 시절부터 브란트는 ‘공존 정책’을 강조하고 ‘접근을 통한 변화’, ‘작은 걸음 정책’을 통해 베를린 주민들의 고통 완화를 위한 실용주의 노선을 택했다. 브란트 전 수상에 대한 저자의 일방적인 평가인지는 모르겠지만, 브란트 전 수상의 행보는 분단 독일의 통일과정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61년에 장벽이 설치된 이후, 63년 말에 이루어진 제1차 및 제2차 통행증협정을 통해 동서 베를린 시민 간의 왕래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자신의 철학을 실천하려는 브란트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분명히 당시 브란트 서베를린 시장의 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와 노력은 이런 결과를 낳을 수 있도록 한 그의 리더쉽에 있었다고 보인다. 물론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어느 한쪽의 바람만으로 되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당연히 동서 양측의 실용적인 협력의 태도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런 행동의 바탕에는 무엇보다 ‘베를린 시민의 고통 완화’를 우선 순위에 놓았던 정치인이 있었음을 독일인들은 기억할 것이다.

 

 

우리의 경우 정부가 바뀔 때마다 대북정책의 급격한 변화로 인한 대화의 시도와 단절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독일의 경우, 1970년대 초에도 여러 가지 협력의 분위기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4대국 협정’(1971년 9월)을 통해 무력 사용을 금지하고 평화적 수단으로 분쟁을 해결하려고 했으며, ‘통과협정’(1971년 12월)을 통해 서독과 서베를린 사이의 동독 지역을 통해 민간인 및 화물통과를 가능하게 한 바 있다. 나아가 ‘여행방문협정’(1971년 12월)으로 66년 이후 거의 중단되어버린 동독 및 동베를린 방문을 허용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이번 독서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전쟁이 서독의 경제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점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50년대 이후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으로불리는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지구 반대편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내게는 새로웠다. 다시 정리해보면, 60-70년대를 거치며 베를린이란 공간을 둘러싼 동서 양측의 접촉과 실용주의적인 문제 해결 시도 노력을 저자는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라는 표현으로 정리한다. 특히 경제적으로 더욱 성장한 서독은 동독에 다양한 방식으로 재정적인 지원을 해왔고, 동독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해본다. 분명히 우리의 정서와는 많이 다른 부분이 이러한 점들이다. 단순히 정서의 차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우리에게 너무나 절실한 부분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이 ‘장벽의 구멍’에 한편으로 큰 영향을 주었던 요소는 ‘68운동’이었다. 저자가 근무하고 있는 독일 자유대학교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독일의 68운동은 ‘독일 민주주의가 질적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특히 당시의 68세대 젊은이들은 나치 협조자들에 대한 침묵을 유지하는 부모 세대에 반대하여 더욱 목소리를 높인 세대라고 한다.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과 비슷한 면이 있을까하는 의문도 가져본다. 저자는 독일의 68운동이 대한민국의 1987년과 비교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은 점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독일의 68운동과 우리의 1987년의 상황과 간단히라도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았으면 좋았을 부분이었다. 특히 이런 부분은 교과서에 자세히 나오지 않는 현대사의 한 장면이기에 더욱 아쉬웠다.

 

 

독일의 68세대의 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독일의 작가 W.G. 제발트를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1968년 당시 24살의 청년이었을 제발트는 부모 세대의 침묵에 분명히 불만을 품고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게 된 청년이 아니었을까. 소설을 비롯한 그의 다양한 글에서 직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은정 교수가 ‘나치 전력으로 인해 경질되었던 인사들도 원래의 사회적 지위를 되찾았다’고 전하는 말에서처럼, 독일 사회에도 과거사 정리에 대한 침묵과 한계가 동시에 존재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부조리한 모습들은 제발트와 같은 젊은 세대들이 비판적인 시각을 갖도록 하고, 이는 부모세대와 68세대 간에 갈등을 유발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동서 양측의 교류가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던 것처럼 이 68운동의 저항적 요소가 동독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이 68운동은 이후 70년대를 거쳐 신사회운동 및 녹색당 운동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게 된 요인은 1989년 여름, 동유럽의 서독 대사관에 동독 주민들이 대거 진입한 ‘대사관 난민’ 문제가 결정적이었다. 이 상황에서 동독과 서독, 체코슬로바키아(동독 옹호)와 헝가리(서독 옹호) 사이의 긴박한 외교협상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때에도 서독 정부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었지만 동독의 요구를 최대한 고려하여 수용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한 정황을 볼 수 있다. 서독 정부 측의 합리적이고 성숙한 접근법을 주목해보게 된다. 나아가 이 대사관 난민 문제의 해결과정에서 이어진 대규모 촛불시위(1989년 10월) 또한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 같다.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시작된 촛불시위가 대규모 정치 집회로 발전하면서 동독 주민들의 바람이 모이고 이는 다시 동독 당국이 여행 자유화 조치를 내리도록 하는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베를린 장벽의 붕괴 과정에는 오랜 기간을 거쳐 쌓여온 ‘구멍’의 요소들이 존재했고 이 요소들이 모여 장벽의 붕괴를 가져왔다.

 

 

 

베를린의 현재를 살펴보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꽤 오랜 시간동안 분리된 조직과 행정 단위의 통합, 그리고 사회기반 시설의 복구와 재정리 문제등은 불가피하게 따라오는 주요 문제들이었다. 베를린을 통일 독일의 수도로 정하는 과정에서도 이를 둘러싼 논란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독일 정치인들은 수도의 최종 결정 문제를 당론을 기본 입장으로 내세우고 고집을 부린 것이 아니라 의원 개개인의 ‘합리적 판단’에 따라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한 점이 돋보인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역시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이런 모습들을 우리 상황과 비교해보면 안타까운 점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현재 할 수 있는 일과 조건을 들여다보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일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지적대로 양측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우리가 시작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해질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목표를 관철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 이를 수단화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하려는 문제를 양측이 분명히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오늘날 베를린은 테크노 음악 팬들의 성지이기도하고, 유명 건축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젊은 인구가 늘어나고 예술가들이 모여 활동하며, 스타트업의 메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 내가 또 한차례 놀란 점은 독일에서 수많은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2015년에만 1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독일로 유입되었고, 그 중 5만 5천명이 베를린에 도착했다고 한다. 세계의 어느 대도시가 순식간에 늘어나는 인구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행정인력이 있을까. 내가 놀랐던 점은 많은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운 사실이다. 많은 시민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하여 난민의 정착을 도왔다고 한다. 우리는 점점 늘어나는 탈북자들도 제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물론 사회에 새로 등장하는 구성원들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시민들이 없을 순 없다. 하지만 베를린 시민들은 시리아와 중동 지여에서 몰려든 난민들을 받아들였다. 우려나 두려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결국 실천했다는 점이다. 우리의 탈북자 문제만 하더라도 우리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름을 인정하고 어떻게 하면 이들을 우리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행동해야한다. 이미 어려운 여건에서 봉사하는 시민들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베를린은 분단과 통합을 동시에 상징하는 도시이다. 특히 정치인 브란트가 서베를린 시장과 서독 연방정부의 수상을 지내며 ‘접근을 통한 변화’의 철학을 반영한 ‘신동방정책’으로 평화와 공존을 추구한 행보에 주목해보게 된다. 물론 한 사람의 지도력 이면에 양측의 협력과 민간 차원에서 사실상 교류가 끊이지 않았던 점은 무엇보다 핵심적인 요소이다. 서독은 상당한 재정지원을 하며 그 대가를 요구하지 않은 반면, 동독은 다양한 방식으로 교류를 위한 조건을 완화했다는 저자의 지적도 우리가 귀기울여 들을 만하다. 다만 개인적으로 저자가 베를린을 바라보는 여러 방식과 정치사적인 국면을 우리의 경우와 보다 대등하게 비교하며 제시하는 작업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다양한 시대적 사건이나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좀 더 유기적인 연결이 가능하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아울러 라이너 쿤체 시인의 삶을 일부 들여다본 것처럼 개별적인 주체들이 역사 속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도 곁들여 조명했다면 이들의 겪은 삶을 좀 더 깊이 이해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어느 나라든 정치라는 과정을 거치는 이유는 인간의 다양한 삶을 이해하여 이를 조화시키고 조율함으로써 최적의 공존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함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