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제2장 고전역학 읽기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2 고전역학: 견적(見跡) - 소의 자취를 보다

장회익 지음 | [추수밭]

 

 

근대 철학 근대 과학의 토대를 마련한 거인

 

 

[1] 데카르트

 

지난 1장에서는 조선 시대의 학자 여헌 장현광(1554-1637) 선생의 삶에 대한 이해를 더했고, 이치 추구의 바른 방향을 여헌 선생이 제시했던 배경을 확인했다. 여헌 선생이 77세의 나이였던 1631년에는 아직 서양의 과학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이었다. 따라서 여헌 선생이 사실상 독자적으로 자연의 이치 추구하는 바른 방향을 제시하며 우주설을 펴냈다. 그 안에는 <답동문>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는데, 여기에서 저자는 상상의 ‘어린이(동자)’를 설정하여 이 동자가 자연과 우주에 대해 묻는 장면에 저자(여헌 선생)가 이에 답하는 형식의 글을 썼다. 한편 여헌 선생은 17세가 되던 해에 우주요괄첩이라는 일종의 개인 비망록 혹은 가죽 다이어리(수첩)를 만들어 평생 자신이 추구해야할 학문의 분야와 공부에 대한 자신의 다짐을 써놓고 83세에 세상을 떠날 때가지 평생(임진왜란으로 집이 불타 떠돌며 생활하던 시기를 포함하여)을 품에 넣고 다녔다. 여헌 선생은 이 우주요괄첩를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 수첩은 소년 여헌의 학문적 출사표이자 포부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당시 사대부들의 공부방식이 학문의 스승이 되는 성인들의 인품과 학식을 따르고 경전에 대한 주석을 다는 정도의 학문 활동이었음에 반해, 여헌 선생은 학문의 영역에 성역이란 없음을 밝힌 것이었다. 여기에는 성인이라도 피할 수 없었다. 당시의 시대를 고려해보면 위험한 발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헌 선생은 자신이 판단하기에 의심스러운 점을 따져보고 이치를 캐묻겠다고 다짐했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사례이기도 하다.

 

 

서양(당시의 유럽)에도 여헌 선생과 비슷한 견해를 가졌던 두 사람이 있었다. 게다가 여헌 선생과 거의 동시대 인물들이었다. 바로 이번 제2장에서 주로 언급되는 데카르트와 뉴턴이다. 두 사람은 수학이라는 실증적 도구를 활용하여 ‘현실에 드러난 이치의 궤적’을 찾아냈다고 장회익 선생은 평가한다. 여헌 선생은 새로운 수학을 충분히 익히지 않았고(물론 당대에 조선에서도 예를 들면 ‘정수론’과 같은 이론은 서양의 학문에 뒤떨어지는 수준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이치를 밝히기 보다는 ‘인식의 틀’을 제시하는데 머물렀다는 아쉬움이 있다. 데카르트는 41세에 방법서설(1637)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데카르트는 학문을 위한 진리 탐구 방법론을 기술했다. 이는 방법론의 측면에서 여헌의 <답동문>에 견주어볼 만 하고, 데카르트가 보다 본격적으로 세상의 다양한 현상과 대상에 대한 지식을 논의하는 세계는 여헌의 우주설에 비견된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자기 자신 이외에 어떤 스승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앎을 추구하고자’ 했다.

 

 

세상이라는 속에서 공부하고 얼마간의 경험을 쌓는 년의 세월을 보낸 , 나는 어느 자신 속에도 연구할 있다는 것과, 길을 선택하는 데에 정신력을 기울여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방법서설부분 재인용)

 

 

데카르트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책’을 보고 싶어 대도시 파리로 갔다. 파리의 흥청망청한 사교계에 입문하여 유흥에 젖어 있던 생활을 하다가 당시에 유클리드 기하학을 거론하던 파리의 지성계에 매료되었다. 이후 거처를 옮겨 은둔하다시피 하며 수학과 과학에 몰두했다고 한다. 물론 데카르트는 공부만 한 것은 아니었다. 승마와 검술을 배우고, 자신의 시간을 확보하는 조건으로 보수를 받지 않고 군복무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데카르트는 군인의 신분으로도 앎에 대한 탐구를 지속할 수 있었다.

 

 

한편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을 썼던 해(1637년)에 메르센 신부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책의 의도에 대해 밝히고 있는 부분을 다시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나는 책의 제목을 방법에 관한 논고 아니라 방법에 관한 서설이나 견해 정한 것은, 여기서 의도가 방법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에 대해 말해보려는 것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방법서설)

 

 

다시 말해 데카르트는 이 책 방법서설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알려주마’의 자세로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라, ‘나는 내 앎에 이르는 길, 진리를 탐구를 위해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하겠다’라고 선언하고 있다는 점을 데카르트 자신이 이 편지에서 직접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여헌과 데카르트의 다른 공통점은 여헌과 데카르트 모두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다시피 했다는 점이다. 여헌 선생은 임진왜란을 만나 집이 불타고 지인의 집을 전전하며 다녔던 시기가 있으며, 데카르트의 경우에는 어머니의 유산을 물려 받은 후 여행을 다니며 지식인들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동적인 여건 속에서도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생애의 어느 시점에서 학문에 전념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뜻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 점이 특히 인상적이다. 여헌의 비밀 다이어리 혹은 가죽 수첩에 해당하는 우주요괄첩은 데카르트가 <올림피카 Olympica>라는 제목의 노트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다. 여헌이 앎에 이르는 길에 시도하는 회의의 과정에 성역이 없음을 이야기했다면, 데카르트는 자신이 앍고 있던 모든 진리를 의심하고 심지어 거짓으로까지 간주하며, 이성이 안내하는 바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쓰고 있다. 저자 장회익 선생은 이 인식의 순간이 바로 ‘서구 지성사에서 고전학문과 근대학문을 나눌 분기점이 된다’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회의를 거듭하고 이치를 따지던 과정에서 나온 명제가 바로 자신이 철학의 제1원리로 삼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인 것이다.

 

 

[그림: 데카르트를 그린 초상화에서, 데카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밟고 있다. 이것은 진리로 알려진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자신의 이성에 따르겠다는 의지를 상징처럼 보여주고 있다.]

 

 

[2] 데카르트라는 거인의 어깨에 오른 뉴턴의 등장


데카르트 사후 11년이 지난 1661년 9월,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19세의 청년이 입학했다. 아이작 뉴턴이라고 하는 이 청년은 대학에서 노트 하나를 사 들고 학기를 시작했다. 이 노트에는 당시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관련된 내용이 한동안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후 공백이 이어지다가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는 다시 ‘철학에 관한 의문들’이란 제목이 적혀 있다. 뉴턴의 대학 노트에 등장하는 이러한 변화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 노트에 적힌 단서를 들여다보면, 데카르트보다 46살이 어렸던 뉴턴(1642년 생)은 이렇든 대학생 시절 데카르트 철학의 영향을 크게 받은 정황이 보인다. 아울러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뉴턴의 노트에서 배제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뉴턴이 가지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여헌 선생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회의함에 있어서 성인도 성역이 없음을 말했던 것처럼, 청년 뉴턴의 지적 수련기에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대변되는 지배적인 앎의 스승을 따르기 보다 자신의 앎을 추구하고자 했던 청년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뉴턴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공부를 해나갔는데, 운좋게도 칼리지 특대생으로 선발된 행운을 누렸다. 물론 이것도 기본적인 실력이 바탕이 되어야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이후 1666년(당시24세)에 뉴턴은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노트에 기록했다. 이 때는 역병으로 학교를 떠나 시골 고향집에서2년여 기간(1665-1667) 동안 홀로 공부했던 기간에 이루어졌다. 바로 이 시기에 고전역학으로 불리는 분야의 기틀을 잡게 된 것이다. 데카르트 물리학의 관점을 받아들이고 데카르트 좌표계를 도입한 뉴턴은 이 3차원 공간에서 일어나는 물체의 운동을 기술하기 위해 새로운 수학적인 도구를 고안한다. 그것이 바로 ‘미분’과 ‘적분’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혹은 그 고민의 결과 뉴턴은 고전 역학에서 기존의 공간에 대한 개념과 다른 인식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이 책에서 저자 장회익 선생이 주목하는 부분은 공간을 인식하는 ‘관념의 틀’이 다르면 공간에서 물체의 운동에 대해 도출되는 질문이 달라지게 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공간에 대한 고대의 자연관은 평면(2D)에 ‘떨어지는 힘’이 작용하는 수직축(1D)을 상정하는 공간으로서, 공간의 세 축에 동일한 물리 규칙이 적용되고 있지 않다. 중력이 예컨대 수직축 방향에만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러한 공간에 물체가 있을 경우, 물체는 반드시 수직방향으로 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천체들이 “왜 떨어지지 않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도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중력과 무관한 공간이 정의되면 세 축이 “대등”하며(다시 말해 세 축에서 일어나는 물리 현상이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의미), 이 공간에 물체가 있을 경우,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사과가 왜 떨어지게 되는가?”를 질문하게 된다는 점이다. 정리하면, 공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바라보는지에 따라, 공간에서 일어나는 물체의 운동 현상은 완전히 다른 질문을 하게끔 한다는 점이다.

 

 

한편 여헌 선생의 삶과 여헌의 진리 추구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한 제 1장에서 여헌 선생은 ‘예측적 앎’에 대한 입장을 <답동문>에서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얻어진 이치를 통해 지난 일들을 추구해보면 오늘의 일로써 지난 만고의 일들을 가히 있으며, 앞으로 일들을 추구해보면 다가올 만세의 일들 역시 오늘의 일을 통해 가히 알아낼 있다.(53면)

 

 

저자는 여헌 선생의 이러한 ‘예측적 앎’에 관한 논리가 ‘뉴턴의 법칙(물체 운동 변화의 원리)을 통해 현재 물체의 상태를 알 때, 미래의 운동 상태를 알 수 있다’라고하는 뉴턴이 고전 역학에서 완성한 관념과 대등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물론 근대 과학의 두 거인, 데카르트와 뉴턴은 수학이라는 정교한 도구를 활용하여 이러한 현실 속에서 사물의 이치에 대한 궤적을 명백히 밝힌 반면, 여헌 선생은 수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고, 그 진리 탐구의 방법론 이상으로 ‘과학적인 결과’를 얻어낸 것도 아니었다. 아쉽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이 고전과학의 기틀이 되는 ‘예측적 앎’의 일반적인 구도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

 

 

절대적 공간과 절대적 시간을 상정하고 물체의 운동 원리를 알고, 대상 혹은 물체의 처음 상태에 대한 정보만 알면 일정한 시간이 지나 물체의 나중 상태에 대한 예측을 정확히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획기적인 업적이었다. 물론 뉴턴의 고전 물리학은 현대에 와서 입지가 크게 흔들리게 되는 계기가 등장하지만, 혜성의 운동과 같이 천체의 운동을 성공적으로 예측하는데 성공한 인식의 틀이다. 고전 물리학이 흔들리게 된 지점은 아마도 제3장인 상대성이론에 대한 장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러므로 제2장에서는 17세기의 두 거인, 데카르트와 뉴턴이라는 인물들이 ‘지상과 천상의 모든 물체들에 두루 적용되는 예측적 앎의 정교한 체계를 완성했다’는 점을 이번 장에서 인정하고 넘어가면 될 것 같다. 이러한 업적의 토대에는 두 거인이 바라보았던 공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먼저 이루어졌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 같다. 결과적으로 공간에 대한 고대의 관념(2D+1D)이 근대과학의 관념(3D)으로 전환될 수 있게 된 것이 고전 물리학이 가져온 중요한 영향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무론 이러한 업적이 가능했던 사건의 출발점은 데카르트의 초상화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나듯, 기존의 지식과 인식의 틀에 도전하기, 다시 말해 당연한 것에 대한 회의와 진리 탐구에 대한 강한 의지와 뜻을 세운 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고전역학을 인식의 틀로 하는 제2장에서는 지난 제1장과 마참가지로 동아시아의 조선과 유럽의 지식인들이 자연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예측적 앎’에 대한 태도를 비교해가며 살펴볼 수 있었다.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자를 소(진리)를 잃어버린 사람의 이야기에 빗대어 전개되고 있는 점도 이 책의 특징이기도 하다. 구도자는 무턱대고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소의 발자국을 찾듯이 진리의 실마리를 찾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로서 언제나 현재 상태를 알고, 변화의 원리를 알면 미래의 상태를 알 수 있다는 고전역학의 인식틀과 마찬가지로, 처음 상태와 나중 상태에 대한 변화의 원리라는 틀을 유지한 채, 자연을 바라보는 여러 관념틀을 적용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제3장의 관념틀은 바로 상대성원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