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결혼 이야기> ‘이혼 과정을 따라가며 생각해보는 결혼의 의미’

 

영화 「결혼 이야기(Marriage Story)

(감독) 노아 바움벡 (Noah Baumbach)

(주연) 스칼렛 요한슨 (Scarlett Johansson) | 애덤 드라이버 (Adam Driver)

‘이혼 과정을 따라가며 생각해보는 결혼의 의미’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배우 애덤 드라이버 때문에 선택한 영화였다. 그는 대작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 세 편과 <프란시스 >, <인사이드 르윈>등의 영화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정작 나의 눈길을 붙들었던 영화는 2016년 개봉작 <패터슨>이었다. 뉴저지 출신의 의사이자 이미지즘 시인이었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의 고향이면서 동시에 시집의 이름이기도 했던 ‘패터슨’을 제목으로 했던 영화였다. 이 영화에서 애덤은 무뚝뚝하지만 감성 충만한 시내버스 운전사이지만 그는 아마추어 시인으로 등장했다. 영화에서 주목한 그의 연기는 잔잔하지만 한 남자의 감성과 미묘한 심리를 잘 드러냈던 연기로 기억하고 있다. 이번에 보게 된 <결혼 이야기> 역시 스칼렛 요한슨(니콜 역)과 더불어 애덤 드라이버(찰리 역)의 섬세하고 미묘한 부부의 심리연기는 전작들(다 본 것은 아니지만)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스칼렛 요한슨도 연기력이 있는 배우인데 <루시> 같은 영화에서 다소 어울리지 않았던 기억 때문인지 사실 이번 영화에서는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주연의 연기는 아주 좋았다.

 

이번에 본 영화 <결혼 이야기>의 이야기는 뉴욕에 거주하는 극단 감독과 연극배우 부부의 이혼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연극이나 영화에서 통속적이고 흔한 소재가 사랑과 결혼에 관한 것이다. 노아 바움벡 감독은 이 흔하디 흔한 주제를 가지고 어떻게 볼거리, 생각거리를 만들어내는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영화 속 두 커플은 이혼하기로 상의했지만 실제로 이혼절차에 들어가게 되자 각각 변호사를 통해 양육권 분쟁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이 분쟁에서 중요한 것은 아이의 양육권에 대한 사안이었다. 뉴욕에 기반을 두고 지난 10년 간 살았던 찰리와 니콜 부부는 여전히 서로에 대해 애틋함과 존중의 마음이 자신의 강한 존재감 혹은 자의식과 충돌하고 있다. 두 사람이 각각 변호사를 선임하자 이혼 조정이 시작된다. 그러나 변호사에게 모든 일이 맡겨진 다음에 사건은 상대방 흠집내기와 인신공격성 난타전으로 전개되어 버린다. 두 사람은 이 상황에 대해 당혹감과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다. 니콜 입장에서는 가족의 일원만이 아니라 한 명의 배우로서 가정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이혼이었다. 그러나 이혼 분쟁의 양상이 점점 격한 상대 공격으로 나아갔고, 부모는 그 사이에서 아이가 스트레스로 지쳐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LA에서 태어난 니콜에게는 이곳이 삶의 터전이었다. LA에서 TV프로그램 배역을 제안 받은 니콜은 LA에 아들과 함께 와서 살기 시작한다. 찰리는 뉴욕의 극단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대륙의 반대쪽 끝에 있는 LA사이를 오가며 이혼문제와 아이 문제를 감당해야 했다. 이혼과정은 부부 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버거운 일의 연속이었다. 영화는 상대방에 대한 가정폭력이나 불륜 등의 이유로 이혼하는 사례가 아닌 어쩌면 싱거워보이는 사유일 수 있다. 하지만 ‘나’ 곧 ‘자아’의 시대에 ‘자신의 삶과 그 의미’를 되찾고 싶어하는 니콜의 욕구는 그동안 가정에서 남편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고 맞춰주는 방식과 양립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영화 중간중간 나오는, 서로에게 익숙해져버린 삶의 패턴을 니콜과 찰리가 깨닫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이혼 소송을 하는 과정에서도 두 사람이 이따금씩 만나 이야기하며 바라보던 눈길과 니콜이 찰리의 머리를 깎아주는 장면이었다.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면서도 언어로 투명하게 자신들의 마음을 전달하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니콜에게는 남편에 대한 애틋함과 자신의 길을 가고싶어하는 욕구가 충돌하고 있었지만, 남편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가위로 머리카락을 깎아주는 행위를 통해 서로가 상대방에 대한 감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이 장면은 톨스토이(1828-1910)의 장편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부분에서 안나와 버금가는 주인공 레빈과 키티가 등장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에서 레빈과 안나는 톨스토이의 또 다른 두 자아에 대응한다. 그만큼 레빈은 이 소설을 떠받치고 있는 두 중심 축이긴 하지만 실제로 두 사람이 소설 내에서 만나는 장면은 거의 없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다른 두 자아를 꺼내어 인생의 면모,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해보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한편 이런 중심인물 레빈과 키티의 가정은 행복해보인다. 영화 <결혼 이야기>에서 니콜과 찰리 부부의 이혼 과정에서 보여주는 가족의 현실적인 모습은 《안나 카레니나》 중에서 레빈이 아내와 키티와 대화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레빈은 소설 마지막에서 (톨스토이의 분신과도 같이) 인생의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이를 사랑스러운 아내에게 말해주고 싶어한다. 참고로 소설에서 레빈은 삶의 의미를 고민하며 깨달음을 얻는다. 선()이란 무엇이고, ‘나와 신(하나님)은 양립이 가능할까?’와 같은 종교의 문제 그리고 보편적인 가치란 무엇일까 등등을 고민했던 것이다. 레빈이 얻은 삶의 교훈, 자신이 가치있다고 믿는 무언가를 사랑하는 이와 나누고자 하는 행위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언급하는 ‘감정 모방’을 굳이 꺼내지 않아도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진행이다. 어쨌든 레빈이 아내 키티에게 전하고자 했던 자신의 깨달음을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결심한 것은 키티가 레빈에게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부탁을 하는 장면에서였다. 키티는 아이의 엄마로서 레빈에게 ‘아들의 잠자리가 준비되어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아내는 현실적인, 바로 지금의 문제에 충실할 뿐이었다. 아내의 현실적인 문제는 레빈의 형이상학적인 깨달음에 우선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문학평론가에게는 《안나 카레니나》의 이 장면이 어떤 의미로 분석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는 이 점이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인류의 결혼 제도 속에서 그나마 가느다란 행복의 실을 붙드는 길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공상가인 남자들과 현실적인 여자들이 ‘가정’이라는 기만(서평가 로쟈 이현우의 언급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죽음’이라는 인생의 진리 앞에서 가정과 예술은 기만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지점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남편과 아내는 각각 다른 세계에서 사는 개별 인간들이다. 하지만 지구라는 행성에서 나아가 가정이라는 테두리 아래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바로 ‘모든 결혼은 불행하다’는 톨스토이의 시각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온 상대방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고 지켜주는 것, 그리고 각자의 세계를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과 같은 방법들 말이다. 여기에서 나아가 알랭 드 보통이 결혼이란 주제에 대해 약간의 힌트를 남겨 놓은 것처럼, 서로가 상대방에게 배려하는 행위를 하며 노력하는 것이 ‘가느다란 행복의 실’을 찾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내가 믿는 진실은 상대방의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이해한다는 것이라고 할까. 물론 내 생각은 좀 더 살다 보면(?) 달라질 지도 모른다. 일단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므로 결혼생활의 지속성은 서로가 다른 세계에 사는 커플이 만날 수 있는 접점을 찾기 위해 함께 탐색하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영화 <결혼 이야기> 로 돌아오면, 영화에서 묘사하는 이혼 과정의 모습은 전혀 극적이지 않다. 이 세상에는 영화나 소설보다 더욱 극적인 이혼 소송 사례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 이야기>의 상황 설정은 어떤 양극단의 사례보다 지극히 담백하게 느껴질 정도다. 오히려 영화에서 이혼하는 커플의 마음 속에 떠오를만한 다양한 심리의 양상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상황은 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꺼지지 않았음에도 이혼해야하는 현실에서 이들에 대한 판단은 쉽게 내릴 수 없을 것이지만 결국 각자의 몫이기도 하다. 이 길고 지난한 삶과 이혼의 과정에서 개개인이 겪을 만한 삶의 장면들이 스냅사진처럼 스쳐간다. 영화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란 표현처럼 무한한 삶의 양태 중에서 한 단면을 담담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랑과 결혼이라는 오래된 혹은 낡은 주제를 이렇게 또 다시 이야기하고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삶의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수백 수천 세대를 거치며 반복되어온 그 무엇말이다. 어쩌면 톨스토이가 생각하는 이 삶의 진실은 톨스토이가 평생 강박적으로 천착했던 주제인 ‘죽음’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톨스토이에게 죽음이란 ‘절대 진리’ 앞에 모든 것은 기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류라는 가련한 존재들에게 필요한 것은 ‘죽음’에 대한 인식(메멘토 모리)을 통해 서로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고 지켜주는 것, 그리고 현실에 충실한 삶에 집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톨스토이나 영화는 이 반복되어온 삶의 진실을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 속에서 끄집어 내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이혼 후 각자의 삶을 사는 찰리와 니콜이 다음 할로윈 시즌에 다시 만나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비춰준다. 어쨌거나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혼 조정에서 니콜의 변호사는 양육시간 비율을 니콜에게 좀 더 유리한 55: 45로 확정했다고 스스로 내세우지만 니콜에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니콜이 아이와 놀아주게 되어있는 다음 날, 니콜은 찰리에게 아이와 놀아주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아이를 안고 돌아서는 찰리의 운동화 끈이 풀어진 것을 본 니콜이 되돌아가 끈을 묶어주는 장면은 바로 지금 그 순간의 삶을 통해 서로의 존재감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결혼을 이룬 가정이란 어쩌면 서로가 다른 세계에 속한 외계인들에게 각자의 세계에 이따금씩 머물 공간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없어질 수 없는 이 투명한 벽을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회피하기 때문에 모든 불행이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한 가정의 커플이 영화 속 니콜과 찰리의 마지막 모습처럼 서로가 교감하는 접점의 순간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만약 찰리라면 언젠가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니콜이 머리카락을 깍아줄 때 느꼈던 손길과 온기, 니콜이 자세를 낮춰 운동화끈을 묶어줄 때 맡았던 향수가 떠오를 것 같다. 톨스토이가 만약 결혼 생활의 99%는 불행하다고 단언했다고 상상해본다면, 내게는 그렇지 않은 1%가 있었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