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모비딕》 읽기 (1장-9장)
《일러스트 모비딕》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소설은 ‘나를 이슈미얼로 불러달라’로 시작한다. 실제 이름이든 아니든 간에 상관없이 이슈미얼은 번역자의 주석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아랍인의 조상’으로 여겨진다. 《모비딕》 이 신성모독적이고 이교도적인 요소는 바로 첫 문장부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오늘은 뉴욕 맨해튼에서 매사추세츠주 뉴베드퍼드 항구에 밤늦게 도착한 이슈미얼이 낸터킷 섬으로 가는 배를 놓치고 뉴베드퍼드에 머물며 벌어지는 장면들이 나온다. 소설의 중요한 조연인 식인종 작살잡이 퀴퀘그가 등장하고, 포경업의 중심지가 되어버린 뉴베드퍼드의 경제적 특수성에 대한 소개도 나온다. 오늘 읽은 부분은 주로 토요일 밤과 일요일 낮까지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을 때론 유머스럽게, 때론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소설의 처음에 인상적이고 재미있는 부분이 바로 퀴퀘그가 등장하는 대목이다. 남태평양 지역 출신의 이 작살잡이는 대머리에다, 얼굴과 전신에 문신을 한 식인종이다. 심지어 이슈미얼이 여인숙에 잘 곳을 찾아 들어왔을 때 퀴퀘그는 방부처리된 뉴질랜드 원주민의 머리를 팔러다니는 중이었다. 주머니에는 은화 몇 닢 뿐이던 이슈메일에게 잠자리의 선택권이 충분히 주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여인숙 주인은 퀴퀘그가 머무는 방의 침대가 크니, 함께 자라고 이슈미얼에게 제안하며, 흥미로운 ‘브로맨스’를 예고한다. 미리 침대에 들어간 이슈미얼이 밤 늦게 돌아온 퀴퀘그의 행동거지를 경악하며 바라보는 장면이나, 퀴퀘그가 알게되어 놀란 이슈미얼이 어린아이처럼 집주인을 부르는 대목은 비극적인 소설의 아마도 몇 안되는 희극적인 요소일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상황에서 이슈미얼은 ‘무지는 두려움의 아버지다’라는 웃픈 문장을 인용하며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부분이다. 이슈미얼은 “술취한 기독교인이랑 자느니 정신 멀쩡한 식인종이랑 자는 게 낫지”라며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상대방도 나처럼 겁에 질려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멜빌이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는 이런 인식은 당시 시대적인 배경을 떠올려볼 때 결코 흔하지 않다. 곧 이러한 부분은 멜빌이 각종 허드렛일과, 상선의 선원, 포경선원, 교사 등등을 전전하며 획득하게 된 문제의식이 표출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이 당시 ‘진지한’ 기독교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을까 상상해보게 된다.
한 가지 더 주목해보는 점은, 허먼 멜빌이 소설의 주인공(화자)과 여인숙 주인과 같은 인물들의 이름 설정에 관한 부분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화자 이슈미얼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을 고려하면 ‘사회에서 버려진 자’, ‘추방자’의 이미지를 암시한다. 귀족 신분도 아니고, 이런 저런 일을 하며 떠도는 인물, 일개 교사이기도 했던 인물로서 이슈미얼이 소설에서 맡고 있는 상징적인 역할은 9장(「설교」편)에 중심적으로 언급되는 요나와도 연결된다고 보인다. 이 점은 독서일기를 쓰는 마지막 날에 다시 언급할 수 있겠다. 지금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멜빌은 여인숙 주인의 이름을 ‘피터 코핀’으로 설정해두었는데, 이 또한 스쳐지나가는 인물이긴 하지만 하나의 잠재되어 있는 상징과도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코핀’은 사망자들을 싣는 관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피터’는 사실 ‘베드로’의 영어식 표현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어부로서 예수의 열 두 제자가 되는 사람이기도 하며, 예수가 유대인들의 모함을 받아 로마 집정관에게 체보될 때, 예수를 부인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피터 코핀’은 해석에 따라 ‘베드로의 관’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소설의 진행 과정에서 이 ‘관’이 크게 두 번 더 등장하는데, 이 또한 읽어나가면서 추후 연결지어도 될 것 같다. 오늘 읽으며 주목해본 것은 멜빌이 거대한 서사를 밀고 나가면서도 이러한 작고 세심한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설정해두고 있다는 점이다.
(주목해본 구절)
(42면)
“이런 연유로 나는 포경 항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경이로운 세계로 가는 거대한 수문이 활짝 열렸고, 나를 이 결심으로 이끈 열광적인 상상 속에서 끝없는 행렬을 지은 고래들이 두 마리씩 짝을 지어 내 영혼 깊숙한 곳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 그 모든 고래들 한가운데, 하늘에 우뚝 솟은 설산처럼 거대한 두건을 쓴 유령 하나가 떠다니고 있었다.”
: 이 부분이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기 보다는 나중에 등장하게될 ‘흰 고래’의 이미지를 예고하는 부분인듯 하기 때문에 주목해보게 되었다. 만년설이 덮여있는 거대한 산의 모습은 먼지와 같은 인간에게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산의 거대함과 동시에 인간의 왜소함을 동시에 인식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눈의 하얀 색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불가항력적이고 완전무결하면서도 두려운 감정들과 같은 이미지는 나중에 등장하게될 하얀 고래의 이미지와 연결되는 것 같다. 이슈미얼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야하는 당위가 다소 신비주의적으로 처리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만, ‘영지주의’ 혹은 ‘유대교 신비주의’에 일부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는 멜빌에게는 설득력이 있는 소설 전개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90면)
“설교단이 이 세상을 이끌어나간다. 하느님의 성마른 노여움이 제일 먼저 발견되는 곳이 바로 그곳이니, 뱃머리는 최초의 맹공을 견뎌내야만 한다. 순풍이나 역풍의 신에게 부디 순풍을 보내달라고 처음 기원하는 곳도 바로 그곳이다. 그렇다, 세상은 출항한 배와 같고, 그 항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설교단이 바로 그 배의 뱃머리다.”
: 소설은 아마도 잠시의 예외 없이 기독교적인 배경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예배당은 신의 말씀을 듣는 신성한 장소이면서도 기독교 국가의 국민들에게 하나의 지역적 구심점이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뉴베드포드는 포경산업으로 미국 내에서도 예외적으로 부유한 퀘이커 교도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이들에게 포경산업은 신이 허락해준 소명이기도 할 것 이다. 포경업이라는 특수한 산업이 중심인 이런 지역의 예배당을 맡고있는 매플 목사 역시 젊은 시절 작살잡이를 해본 적이 있는 카리스마있는 혹은 연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인물이다. 한편 뉴베드포드라는 지역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며 기독교 문명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어떤 점에서는 양가적 관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멜빌은 기독교 안에서 있으면서도 때로는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보는 일종의 ‘경계인’이란 느낌을 받는다. 이 ‘설교단의 비유’ 역시 세상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의 위치 혹은 역할 비중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번역오류)
(101면)
‘요빠로 가는 배를 탐으로써’ ▶ ‘요빠에서 배를 탐으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