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모비딕》 읽기 (11장-15장)

 

일러스트 모비딕(11장-15장, 110-132)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오늘 읽은 부분은 뉴베드퍼드 항에서 낸터킨 섬으로 들어가는 배를 타기로 한 월요일 새벽부터 낸터킷 섬에 상륙한 날까지의 장면이다. 앞의 독서에서 작가 허먼 멜빌은 일종의 ‘경계인’이라고 생각했던 이유가 제11장(잠옷)에서 보다 분명한 사례를 통해 드러난다. 화자인 이슈미얼은 ‘몸의 온기를 제대로 향유하려면 몸 어딘가가 반드시 추워야만 하’며,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특성은 오로지 대조를 통해서만 드러난다’라고 이야기한다. 작가의 이런 시각은 비교적 부유한 수입상인의 아들로 어린시절을 보내다가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그가 일찍 사망한 후 가세가 몰락했던 경험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삶의 양태를 멜빌은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몸소 체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빛과 어둠의 대조’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도 역시 이어진다.

 

 

진흙으로 빚어진 우리 육신에는 빛이 어울리지만, 실은 우리의 본질을 이루는 진정한 요소는 바로 어둠이라는 듯이 말이다.(111면)

 

 

이런 대목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멜빌은 현상의 양면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판단하려는 의식을 가진 인물이었으리라 생각해본다. 여기에서 좀 더 ‘과감하게’ 덧붙이자면, 소설에서 이슈미얼에게 익숙한 ‘기독교-단일신-일원론’적인 세계와 퀴퀘그에게 익숙한 ‘이교도적 이원론’의 세계가 서로 부대끼고 섞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인 공간으로서 멜빌은 두 남자의 침대를 상정한 것이라 해석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멜빌은 기독교적 세계와 이교도적 세계를 나란히 놓고, 이를 대등한 것으로 들여다보며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비딕이 영미문학의 유명한 비극 소설이긴 하지만, 두 남자의 ‘브로맨스’를 통해 두 가지 세계가 소설 속에서 희극적이고 상징적으로 화해하고 있다라고도 생각해보았다. 어디까지나 오독은 나의 자유이자 나만의 감상이니까. 물론 이렇게 상상해보는 것은 무턱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근거를 가질 때 시도해보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비딕은 바다 위에 길이 나 있지 않은 것처럼, 나의 엉뚱한 상상을 자유롭게 이끌어주는 힘을 지닌 소설이기도 하다.

 

 

제13장(외바퀴 손수레)에서 이슈미얼-퀴퀘그 ‘부부’는 낸터킷 행 소형 정기선 ‘모스’호(the Moss)를 타고 바다로 나간다. 이 장면에서 이슈미얼의 감상이 인상적이다.

 

 

보다 넓은 바다로 나오자 점점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고, 조그만 모스호는 어린 망아지가 코를 힝힝거리듯 뱃머리에서 재빠르게 물보라를 일으켰다. 야만적인 공기를 나는 얼마나 마음껏 들이쉬었던가! – 도로로 뒤덮인 땅을 나는 얼마나 경멸했던가! – 온통 노예의 뒤꿈치와 말굽에 움푹 자국들뿐인 흔해빠진 도로를 말이다. 도로가 나를 어떤 흔적도 남기길 거부하는 바다의 넓은 아량에 감탄하는 사람으로 뒤바꿔버렸다.(121면)

 

 

이 대목에서는 ‘노예제’에 반대하는 작가 허먼 멜빌의 자의식이 드러난다. 이문장에서는 일부의 자괴감도 느껴지는데, 그건 혁명을 꾀하는 이의 자의식이라기 보다는 노예제라는 불가항력에 압박감을 느끼고, 이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로서의 모습이다. 하지만 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길은 노예와 말의 노동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바다는 멜빌의 분신인 이슈미얼에게 보다 매력적인 공간이었던 것이 아닐까. 상선과 포경선, 해군으로 젊은 시절 여러 해를 바다에서 보낸 멜빌은 자신이 속한 문명과 대양에 대해서도 충분히 숙고해볼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백인의 기독교 문명과 이교도적 원시 문명 사이에서 멜빌이 설정하고 있는 대립적 요소는 소설의 곳곳에서 계속 발견된다. 낸터킷 행 ‘모스’호에서 퀴퀘그는 추운 겨울 바다에 떨어진 백인 촌뜨기 한 명을 바다에서 구해냄으로써 자신을 무시하던 선장과 놀리던 다른 백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다. 물론 퀴퀘그는 자신이 한 일을 당연히 해야할 일로서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바다에 빠진 백인은 퀴퀘그에겐 한 때 ‘먹이감’일 뿐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똑같이 위험에 처한 사람으로 보였을 뿐이다. 앞선 독서에서 이슈미얼이 퀴퀘그에게서 어떤 고결함의 징후를 발견했다면, 그 단서는 이런 사례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그리고 이슈미얼은 다음과 같이 이질적인 두 문명 세계에 대한 ‘대조’를 곁들이며 배 위에서의 에피소드를 마무리한다.

 

 

마치 세상은 어느 자오선에 있든 서로의 공동 자본으로 세워진 거야. 우리 식인종도 너희 기독교인을 도와야만 라며 혼잣말을 중얼대는 듯한 모습이었다.(123면)

 

 

배를 타고 꽤 오래 세계를 누볐기 때문일까, 멜빌은 자신이 속한 사회, 자신이 익숙한 모든 것과의 ‘차이’를 느끼기에 매우 민감한 감각기관을 지닌 작가인듯하다. 모비딕 의 앞부분에 인용되어 있는 발췌문 중에서 멜빌은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은 정황을 찾아볼 수 있는데, 소설을 읽어가면서 멜빌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마치 몽테뉴의 그것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우연하지 않은 필연적인 사건으로 다가온다. 나아가 이 생각을 좀 더 밀고 나간다면, 열하일기에서 연암 박지원이 보여주는 사물 인식, 현상에 대한 접근법과도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으며 점점 놀라게 되는 것은 모비딕이 바다처럼 ‘활짝 열린 텍스트’로 내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문학평론가가 보는 모비딕의 문학사적 의의와 위치가 어떻든 내게 이 소설은 상상력의 씨앗을 소설의 전반에 걸쳐 풍요롭게 심어 놓은 소설로 다가온다.

 

 

그리고 제14장(낸터킷)에서는 대서양에 떠있는 낸터킷이라는 섬과 역사에 대한 멜빌의 애정과 찬사가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멜빌이 소설을 쓰던 1850년 즈음에 낸터킷 섬은 이미 포경기지로서의 주도권을 뉴베드퍼드에 넘겨주었지만 말이다. 아니, 그렇기에 멜빌은 소설의 화자, 이슈미얼이 반드시 ‘낸터킷에서 출발하는 포경선만을 타겠다’고 결심하도록 설정했던 것은 아닐까. 소설을 쓰던 당시에 낸터킷은 이미 쇠락의 징후가 뚜렷한 곳이었지만, 미국의 역사를 간직한 이 장소를 멜빌은 소설에서나마 기억해두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작가가 살았던 당대에 대한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타임캡슐인지도 모르겠다. 낸터킷 섬과 이 섬사람들의 ‘호연지기’에 대한 멜빌의 애정을 보여주는 다음 대목도 흥미롭게 인상적이다.

 

 

육지와 물로 지구 전체의 삼분의 이는 낸터킷 사람들의 것이다. 바다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황제가 제국을 소유하듯 그들은 바다를 소유한다. 다른 선원들은 오직 그곳을 지나갈 권리만을 가질 뿐이다.(127면)

 

 

제13장에서 이슈미얼과 퀴퀘그가 소형 정기선 '모스'호(the Moss)를 타고 뉴베드퍼드 항에서 낸터킷 섬으로 향한다.

 

 

 

제14장의 제목이기도 한 '낸터킷' 섬. 화자 이슈미얼은 이 섬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저 작은 언덕과 굽이진 모래사장만으로 이루어진 그곳을. 온통 해변뿐,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다."(12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