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모리슨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들
《토니 모리슨의 현재성》
김미현 지음 | [창작과 비평 겨울호(186호)]
‘토니 모리슨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들’
이번 주에 《창작과비평》 겨울호 특집에서 관심있게 읽었던 글은 두 편이 있다. 하나는 문학평론가 복도훈의 한국 SF의 새로운 리얼리티에 관한 논의가 담긴 글이고, 다른 하나는 김미현 교수가 미국 소설가 토니 모리슨의 타계를 계기로 그녀의 문학적 유산에 대해 쓴 글이다. 나는 아직 SF장르에 대해 다소 낯선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한데다, 영화 <칼라 퍼플>을 통해 토니 모리슨에 대해 들어본 바가 있었기에 김미현 교수의 글이 좀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토니 모리슨은 미국 여성 흑인으로서 처음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더 관심이 갔다. 이번에 실린 글을 통해 나중에 그녀의 작품을 읽게 될 때 맥락을 짚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있었다.
지난해 여름, 토니 모리슨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 때 나는 젊은 오프라 윈프리가 노예 소녀를 연기했던 <칼라 퍼플>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이 영화를 본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학창시절에 이러한 영화를 보는 것은 때에 따라서는 상당한 충격을 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내게도 그러한 충격을 전달했던 영화로 기억한다. 미국의 ‘노예제’라고 하는 표현의 이면에 어떤 구체적인 삶들이 있었을지를 ‘그나마’ 정제된 수준에서 보여주었고, 상상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나는 토니 모리슨의 작품 중에서 《가장 푸른 눈》을 읽었던 기억만 난다. 내용의 상당 부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흑인과 백인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근본적인 편견의 벽과 흑인들에게 내재화되어버린 자기혐오와 같은 정서들을 갑갑한 마음으로 느꼈던 기억만 남아있다. 김미현 교수의 「토니 모리슨의 현재성」을 읽으면서 모리슨이 일생동안 일구었던 작품 세계와 노력들이 하나의 단단하고 통합된 덩어리로 다가왔다. 특히 작가에게 문학 인생은 본인이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와 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었을 테다. 그녀에게 ‘좋은 글, 좋은 예술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의식은 곧 소속감과 정체성 확립의 문제로 이어졌을 것이다.
토니 모리슨의 삶과 작품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인종주의/식민주의’라는데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 같다. 김미현 교수는 11권의 소설을 남긴 토니 모리슨의 문학적 인생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그의 소설은 미국 흑인의 정체성, 기억과 역사, 가족과 공동체 관계에 대한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탐구이자 인종주의에 물들지 않은 언어와 비전을 찾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72면)
여기에 더하여 모리슨의 글쓰기는 ‘과거를 되살리는 작업’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단지 과거에 대한 사실관계를 파악하여 이를 복원하거나 재해석하고 정리하는 작업이란 역사가의 일일 것 같다. 하지만 과거를 되살리는 소설가란 ‘의지가 가해진 창조’를 통해 ‘과거의 현재적 의미를 찾는 작업’이라고 그 의미를 살피고 있다. 곧 소설가로서 모리슨은 ‘지금 여기’의 삶에 우리의 과거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끊임없이 되물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삶 속에서의 정치성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음을 그녀의 문학 인생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해하기 쉽지는 않았지만 주목하게 된 다른 내용은 인종주의가 가져온 ‘심리적 분열’에 대한 부분이었다. 과거부터 미국인들이 경험했던 노예제의 한 가운데에는 흑인들의 자기 혐오나 흑인 내부의 심리적 갈등과 상처뿐만 아니라 백인을 포함한 모든 미국인들에게 역사의 모순과 분열의 경험이 있다는 점이었다. 일명 ‘백인들의 죄의식 white guilty’라는 단어가 시사하는 이 백인들의 분열적 심리는 이 글 전체의 제목과 같이 ‘인종주의/식민주의’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여전히 유효한 상태라고 이해된다. 모리슨이 이런 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자기 성찰을 했다고 평가한 윌리엄 포크너 같은 작가들 외에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인종과 상관없이 이 ‘인종주의/식민주의’ 문제를 정면으로 대면하기를 불편해할 것 같다.
나는 김미현 교수의 논평을 읽으면서 토니 모리슨이 일생을 통해 보여준 문학적 유산의 현재성은 미국 사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닐 수 있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인종주의/식민주의’는 식민지의 기억을 갖고 있는 우리의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리슨은 “작품을 쓸 때 나는 흑인 말고 다른 이들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78면)라고 언급했지만, 이 말은 ‘흑인’만이 중요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닐것이다. 작가로서 모리슨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본인에게 가장 중요한 대상이 흑인/흑인문제 였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모리슨은 인종주의 문제의 관점에서 천착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모리슨이 지니고 있던 문제의식이 바로 우리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곧 모리슨이 남기고 간 유산을 우리의 문제에 대입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재일한국인 서경식 교수가 여전히 일본사회에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식민주의’를 문제삼는 일은 모리슨의 문제의식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리슨의 현재성은 한일 무역분쟁의 이면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식민주의의 잔재를 이야기할 때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이러한 ‘인종주의/식민주의’에 대한 기억은 보다 분명한 ‘소속감’과 ‘정체성’의 범주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세계화’의 문제와 결부시켜보면, 다소 혼란스럽다. 세계화과정에는 국경과 국제법 등 전통적인 영역의 경계를 약화시키는 과정이 수반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전 세계가 다양성의 측면 보다는 문화적, 언어적 차이와 정체성을 무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점은 새롭게 유발되는 타자(혹은 낯선 것)에 대한 공포와 배제기작이 더욱 강화되지 않을지 우려가 되는 사항이다. 난민 문제를 떠올려보면 보다 더 구체적으로 이해되지 않을까. 많은 철학자, 사상가들이 현대의 난민 문제는 세계화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내게 이 문제는 좀 더 고민과 판단이 필요할 것 같다.
이번 특집을 통해 궁금했던 토니 모리슨의 작품과 삶에 대해 더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현장 학자가 이해하는 한 소설가의 문학 인생이 남긴 유산이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어떤 위치와 의의를 지니는지 엿볼 수 있었다. 김미현 교수가 조명한 모리슨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한 소개를 통해 나는 넓은 의미에서 예술가의 역할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모리슨에게 문학이란 삶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기억’하기이므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의 글쓰기는 이러한 ‘과거를 되살리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예술가는 과거의 기억과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에 무던히 되돌아가고 바라봄으로써 끊임없이 그 의미를 묻고 이에 응답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모리슨이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남겨준 성찰은 행동과 변화에 대한 기대도 품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모리슨은 이러한 노력들이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 안에 놓인 이 ‘언어’라는 새의 운명은 우리의 결정에 달려있다. 앞으로 모리슨의 작품들을 만나게 되면, 그가 남기고간 문학적 유산을 떠올리며 읽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