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모비딕》 읽기 (67장-83장)

일러스트 모비딕

(67장-83장, 477-567p)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오늘 읽은 부분은 앞 장에서 잡은 고래를 해체하는 작업이 주를 이룬다. 여기에 향유고래의 해부학적인 특징을 마치 돋보기를 들이대고 살펴보듯 고래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에 빠질 수 없는 것이 과정으로서의 삶과 그 경험에서 길어낸 멜빌 만의 통찰이다.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도 멜빌의 통찰은 환하게 빛을 발한다.

 

오오, 인간이여! 고래를 찬양하고 고래를 본받을지어다! 그대도 얼음 사이에서 온기를 유지하라. 그대도 세상에 살되 속에 속하진 마라. 적도에서도 냉정을 유지하고, 극지에서도 계속 피가 흐르게 하라. (…) 어떤 계절에도 그대만의 체온을 유지하라.(483면)

 

아마 이 문장은 지금까지 읽은 일러스트 모비딕 내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고 마음에 드는 문장이 될 것 같다. 따뜻한 피를 가진 포유동물 고래의 독특한 생물학적 지위와 지식으로부터 주조된 멜빌의 통찰이다. 멜빌은 ‘북극 고래의 피가 여름철 보르네오섬의 흑인들의 피보다 더욱 따뜻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오늘 읽은 부분의 후반부인 제82장에서는 포경업에 관련된 신화 및 성경 속의 풍부한 이야기들 곁들이며, 포경업이 육지의 사람들이 비난하듯 ‘천한 백정의 일’이 결코 아닌, 명예로운 일임을 강변한다. 멜빌은 포경업에 종사하는 이들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갖추고자 하는 것 같다.

 

 

 

우리의 , 원숭이 밧줄에 대한 비유

 

그러니까 우리는 가늘고 끈을 통해 샴쌍둥이처럼 연결되어 있는 셈이었다.(499면)


고래 해체작업이 한창인 현장이다. 퀴퀘그는 바다에 떠있도록 매어둔 고래 사체 위에 직접 올라가 해체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여기에 그가 물에 빠지더라도 바로 건져낼 수 있도록 배에 탄 한 사람과 줄을 연결해두고 있다. 누구에게 연결되어 있을까. 바로 죽음이 이들을 떨어뜨릴 때까지 함께 하겠다던 퀴퀘그의 짝, 이슈미얼이다. 이들은 가늘고 긴 끈을 통해 쌍둥이처럼 연결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상징적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삶과 죽음 앞에 운명을 함께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한층 깊이 생각해보니, 내가 처한 상황이 살아 숨쉬는 모든 인간이 겪고 있는 상황과 조금도 다를 없다는 알게 되었다. 다만 대다수의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인간과 샴쌍둥이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만일 당신의 은행이 파산하면 당신도 꼴까닥 죽는다. (…) 나는 퀴퀘그에게 묶인 원숭이 밧줄을 무척 조심스럽게 다뤘음에도, 그가 밧줄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뱃전너머로 미끄러질 뻔한 때가 종종 있었다. 그래도 나는 내가 아무리 용을 써도 뜻대로 조종할 있는 것은 밧줄의 한쪽 끝뿐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을 없었다.(500면)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70년 전에 멜빌은 이 모비딕의 초고를 쓰고 있었다. 우리 삶이라는 것이 이처럼 구성원들 사이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멜빌의 자각을 떠올려보면, 그는 시대를 앞서나간 것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이해, 삶에 대한 통찰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내성적이고 사색적인 나타니엘 호손과 대화할 때, 멜빌은 끊임없이 에너지를 분출하며 말을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내성적인 나타니엘 호손과 부인 소피아 호손이 부담스러워할만큼 말이다. 모비딕은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초고를 쓰고 나서 멜빌이 호손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플롯을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역사에 가정을 들이대는 일은 쓸데없는 일일 것이다. 중요한 건 호손이 좋은 청자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호손과 멜빌이 퀴퀘그(에너지 넘치는 멜빌)와 이슈미얼(관조하는 호손) 사이의 운명공동체처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읽는 모비딕을 만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참고래와 향유고래의 비교, 그리고 고래의 형이상학

 

제74장과 제75장에서는 향유고래와 참고래의 머리를 해부학적인 면에서 비교한다. 향유고래의 귀가 바깥으로 뚫려 있다면, 참고래의 귀는 평평한 막으로 뒤덮여 있다는 점도 언급한다. 또 향유고래의 머리가 로마시대 전차의 넓고 둥근 앞면을 닮았다면, 참고래의 머리는 구두코가 넓고 네모진 갤리선 모양의 구두처럼 생겼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기에 향유고래의 분수공은 이마 앞으로 향하며 한 개만 있는 반면, 참고래의 경우 분수공이 두 개나 나 있다는 차이가 있다. 향유고래에게는 참고래 입 내부에 있는 수염(당시 부인의 코르셋 살대/보강제로 사용되던)이 없다는 것도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책에 나온 지식만을 열거하는 것은 멜빌의 방식이 아니다. 이분은 그러실 분이 아니다. 이미 지금까지의 독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사항이다. 멜빌은 기존의 지식을 다르게 보려 시도한다.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서도 이를 비틀기도하고, 성경과 신화의 이야기를 가져와 변형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향유고래와 참고래의 해부학적 차이를 가지고 멜빌 만의 형이상학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더욱 인상적이다.


향유고래의 넓은 이마는 죽음을 초연하게 여기는 명상적 태도에서 생겨난 대초원 같은 평온함으로 가득한 같다. 하지만 또다른 머리의 표정에 주목해보라. 어쩌다보니 뱃전에 눌러 턱을 감싸게 놀라운 아랫입술을 보라. 머리 전체가 죽음을 대면했을 때의 위대한 실천적 결의를 대변해주는 듯하지 않은가? 나는 참고래는 스토아 철학자였고, 향유고래는 플라톤주의자였다가 말년에 이르러 스피노자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522면)


번역자의 주석에 따르면 스토아 철학은 ‘이성과 실천’을 중시하는 이들이었다. 곧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숙명’을 받아들이며, 이성에 따라 실천적인 선택을 하려했던 금욕주의자의 면모를 이르는 것일 테다. 턱을 꼭 감싸듯한 참고래의 ‘야무진’ 아랫입술을 떠올리면 단호한 성격을 가진 ‘금욕주의자’의 면모를 떠올릴 법하다. 고래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곁들어진 멜빌의 상상력에 놀라게 된다.


반면 멜빌은 향유고래의 넓은 이마에서 애초에 죽음이란 염두에 둔 적이 없었던 듯한 평온함을 느꼈던 모양이다. 멜빌은 관념론을 대표하는 이상주의자 플라톤의 면모를 향유고래의 머리 표정이 주는 인상과 연결짓는다. ‘말년에 스피노자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르는’ 향유고래의 면모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주저 에티카에서 언급한 ‘자유인’에 관한 철학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정리67] 자유인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보다 죽음에 대해서 가장 적게 생각하며, 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관조(meditation, 명상) 아니라 삶에 대한 관조이다.

(290면, 스피노자 에티카, 4부 인간의 예속 또는 감정의 힘에 대하여 중에서, 황태연 옮김, 비홍출판사)


스피노자는 에티카4부에서 인간의 감정과 여기에 예속되는 기작(mechanism)을 들여다보고 ‘노예’와 ‘자유인’을 이야기한다. 참고로 번역자가 ‘관조’라고 번역한 용어에 해당하는 영역본의 용어는 meditation이었다. 나는 이 관조를 ‘명상’이란 표현으로 인용문과 연결지어보려 했다. 멜빌에게는, 스피노자가 생각하던 ‘자유인’처럼, 향유고래의 이마가 죽음에 대해 가장 적게 생각하는 ‘자유인’의 면모를 닮았다고 생각되었을 법하다. 물론 실제로 ‘죽음’에 초연한 생물체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다만 멜빌은 고래의 해부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고래의 모습에서 형이상학적인 특징으로 이어지는 그 발상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이러한 ‘상상력’과 ‘다르게 보기’ 내공은 멜빌 만의 특징이자 장점인 듯하다. 여기에 배울점이 하나 있다면, 세상의 모든 현상에 대해 자신의 눈으로 들여다보고 판단해보려는 노력, 지적인 성실함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