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우리의 자연이다 - 시 ‘도시의 규격’과 ‘스피커’를 읽고
《‘도시의 규격’ & ‘스피커’를 읽고》
서영처 지음 | [창작과 비평 봄호(187호)]
‘도시는 우리의 자연이다’
코로나19의 전염으로 집에 갖히다시피 지내고 있지만 오히려 마음을 가다듬고 글자를 읽기가 힘들다. 왜일까?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재난 문자’와 ‘푸쉬음’소리에 놀라고 마음을 가라앉히기 힘들기 때문이다. 수시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하루 사용 시간이 두 세배 늘었다.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이용자가 부쩍 줄어든 지하철 에서도 사람들은 잠시도 스마트폰을 놓을 줄 모른다. 역에 내리려고 문가에 서 있는 동안에도 10초마다 스마트폰을 껏다 켰다를 반복하는 어르신도 있다.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내 모습이려니 생각한다. 나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착각이다.
이런 마음이 가라앉질 못하고 한동안 《창작과비평》 봄호가 제자리를 지키고만 있었다. 잠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다른 일들을 중단하고 이번 호에 실린 시들을 읽기 시작한다. 아직 시읽기는 자신이 없다. 시인들은 여전히 내게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만 같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글자를 따라간다. 그나마 한 시인이 묘사하는 풍경이 나의 기억과 맞닿았다. 서영처 시인의 ‘도시의 규격’을 읽었다. 주욱 읽어보기도 하고, 띄엄띄엄 읽어보기도 한다. 어느 새 시인이 바라보는 풍경은 내 기억 속의 한 장면을 불러내온다.
오래 전 친구와 술을 마시고 헤어진 후 걸었던 어느 늦은 밤거리, 일어날 듯 말듯 다가오는 거리의 불빛을 떠올렸다. 시인이 묘사한 도시의 거리는 커피점과 편의점이 마치 벽지나 화장실의 타일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어 나타난다. 편의점에서 세어나오는 하얀 빛과 24시간 카페에서 뿜어내는 누런 빛, 그리고 그 사이를 화려한 성형외과의 네온사인이 채우던 그 도시의 생경함을 기억하고 있다. 낮과 다른 밤의 낯선 모습과 새로운 규격들. 그리고 낮에는 성형외과에서 새로운 미의 규격을 만들어내고 있을 터였다.
우린 이런 일정한 간격으로 규정되는 삶에 익숙해져 있다. 시인은 도시 거리의 일정한 모습을 보고 그 도시에서 살아가는 ‘여공’을 생각한다. 여공이란 존재가 도시의 규격에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도시를 채우는 일정한 ‘간격’ 사이에 여공과 같은 존재가 여전히 어디엔가는 있다는 자각은 오히려 시간적인 간격에 대한 감각을 불러오는 것 같다. 성형외과의 네온사인 숲에서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는 잊혀져갈 지모르지만 70년대 여공들의 아들딸들은 여전히 콜센터에서, 시인이 언급한 편의점에서, 그리고 치킨집에서 일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담보대출의 일정하고 상환날짜 만큼이나 일정하게, 하지만 보다 큰 호흡으로 여공들의 삶이 어디에선가는 일정하게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시선은 이제 조금 다른 눈으로 도시의 거리를 바라본다. 보도블록 위의 총총한 껌 자국 처럼, 그리고 그 틈을 채우는 촘촘한 담배꽁초처럼, 도시인의 삶은 조밀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도심을 떠나버렸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전에도 식당과 기타 개인사업자들이 속속 문을 닫는 모습을 보고 있다. 도시는 촘촘하면서도 텅 비어있는 것이다. 청구서처럼 도시의 규격에 들어가 있어야 안심하는 도시인의 삶이란 바로 이곳이 우리의 ‘자연(自然)’임을 강변한다. 사전에 담긴 ‘자연’의 정의에는 ‘비인공적인’ 요소를 상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지구상에 ‘비인공적인’ 대상이 얼마나 남아있을까?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야생’의 장소는 이제 남아있지 않다. 고래 등 위에 붙은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들러붙어 사는 이곳이 바로 도시인의 자연이 아닐까.
따개비들의 꿈들은 자연스럽게 시인의 ‘스피커’라는 시로 안내해주는 것 같다. 봉분을 뭉개고 마련된 황망한 대지 위에 들어선 아파트들이 있는 도시의 공간이다. 고래 위에 오밀조밀 붙어 있던 따개비들이 꿈꾸는 대상. 아파트는 가장 노골적으로 도시의 규격을 생산하는 존재다. ‘깎아지른’ 봉우리에 나 있는 하나의 표정에 창과 벽돌이 일정하게 배치되고, 사람이 사는 공간은 이목구비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끔 해보곤 한다.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이 대지는 오랜 시간 수많은 동물과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어 묻힌 곳이라는 자각이다. 이 ‘자연’스러운 삶과 죽음의 역사 위에 도시인들의 ‘꿈’이라고 표현되는 욕망이 쌓이는 곳이 바로 도시의 아파트일 것이다. ‘도시의 규격’과 ‘스피커’는 구름들이 헛헛한 인간의 자연을 내려다보며 부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