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은 사람들 - 포스트코리안(post-Korean)의 자화상

박사랑 작가의 단편 서울의 바깥 읽고

 

박사랑 지음 | [창작과 비평 봄호(187)]

 

 

길을 잃은 사람들 - 포스트코리안(post-Korean) 자화상

 

 

이번 리뷰는 처음 알게 된 박사랑 작가의 단편을 선택했다. 소설의 줄거리를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소설의 배경 정도는 언급해야할 것 같다. 소설의 화자는 서울의 외곽에 살고 있는 30대 미혼 여성이다. 소설은 서울의 어느 고가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다. 화자는 아파트에 살고 있는 가정의 아이를 대상으로 입시 과외를 하기 위해 아파트를 들어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화자가 고액 입시 과외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가 점점 발을 들여 놓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대강 소설에서 묘사되는 상황을 눈 앞에 그려낼 수 있다.

 

 

소설에서 설정해 놓은 상황은 아직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종류의 것이지만,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과 상황에 대해 많이 감지하고 있기에 공감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만큼 소설 속에 묘사된 현실은 또 다른 진실로 다가왔다. 작가의 예리한 관찰가 묘사가 너무나 실감났기에 서글픈 마음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화자가 가르치는 학생은 온실 속의 화초와 같은 청소년이었다. 1분 단위로 엄마가 짜놓은 삶에 익숙해져야하는, 아니 적응해버린 아이는 마치 무균실에서만 살아가는 기니피그를 떠올리게 한다. 자신의 집에서 여러 개의 세균 막이용 압축 문을 통과할 때마다 ‘엄마, 나가도 ?’라고 묻는 아이의 묘사에 나도 모르게 연민이 들었다. 이런 아이들에 대한 묘사가 과장이 아님을 요즈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무균실에서 엄마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가는 이 인간 ‘기니피그’들은 세상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존재다. 스스로 세상과 부딪치며 아파본 적도 없는 존재들. 이들은 ‘회복’에 대한 경험마저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사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독립된 주체로서 자신의 삶에서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앎을 축적해놓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와이는 가봤지만 붐비는 지하철 역에 대해서는 ‘모르는’ 아이. 화자가 수업 시간에 고전 문학을 가르치는 장면에서 어떤 대목을 아이에게 이해시키려는 대목 역시 소름끼치도록 사실적이었다. 내가 요즘 감지하고 있는 ‘새로운 인류’의 한 단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공감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과 선생의 문답식 대화는 형식상 소크라테스식 산파술을 닮았지만,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보단 검색엔진 사용자가 단순히 어떤 정보를 찾는 과정과 좀 더 유사하다.

 

 

왜요? 말에 내가 동굴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학생은 동굴 밖에서 나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왜요, 왜요?(171면)

 

 

학생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에서 그녀가 화자에게 던지는 질문을 따라가다보면 내 안의 에너지마저 빼앗기는 기분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어쩌면 문학적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자신이 체화한 지식, 자신이 스스로 발견한 앎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확장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여기에는 분명히 어느 정도의 상상력과 함께 자신의 삶이 한계짓는 외연을 넓히려는 욕구가 필요하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은 삶에서 스스로 자신의 욕구를 발견할 기회마저 갖지 못한 존재같아 보였다. 도대체 무엇이 그리고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물론 작가가 묘사한 인물들의 모습은 과장되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학생과 화자의 모습에서 나의 일부를 발견하기도하고, 내가 만나고 아는 이들의 단면들을 소설 속 인물들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학생과 화자의 모습은 적어도 내게 상당히 실감나게 다가온다. 이런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안스러움과 연민이 들기도 했다.

 

 

화자가 가르치는 학생은 일종의 ‘클린룸’이 되어버린 집에서 엄마의 욕망을 먹이로 살아가는 존재다. 또한 사회가 만들어 놓은 관습과 경계의 틀 안에서 그나마 살아남기 위해, 자본주의의 모든 자원을 흡수하며 생을 유지해 가는 존재다. 소설 속에서 보이는 아이의 모습은 요즘 내가 사람들을 볼 때 확인하게 되는 일부 모습이기도 하다. 어쩌면 새로운 하나의 전형인지도 모른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실제로 소수는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특히 소설 속의 아이는 엄마와 한 몸을 이루는 존재다. 아직도 엄마로부터 심리적인 독립을 하지 못한 존재로 보인다. 아이는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되돌아볼 기회마저 없어 보인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 고민하는 기회를 박탈당한 존재가 아닐까. 엄마의 욕망이 곧 아이의 욕망이었다. 자기의 생에 대한 아무런 욕망과 의지가 없는 존재 같다. 자신의 욕구를 위해 엄마와 대립해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아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성인의 신체를 지니게된 존재다. 내가 요즘 종종 발견하는 대한민국의 신인류, 포스트코리안의 모습을 소설에서 발견했다.

 

 

소설 속의 학생과 대비되는 또 다른 인간상은 화자가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학생의 입시를 가르치는 과외선생으로 능력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서울에 있는 유명 대학을 나와 학력에 관한 한 자본주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상위권에 자리를 잡은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짐작할 수 있듯이 화자는 ‘시험이 특기’인 인물이다. 다만 화자 역시 학생처럼 유약하다. 시험을 잘 봐서 대한민국의 틈새에서 그럭저럭 버티며 살아올 수 있었지만, 그만큼 실패에는 취약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실패에는 아직 충분한 면역을 가지지 못한 인물임을 알고있다. 화자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과 달리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나마 첫 발을 잘 뗀 인물이지만 학생처럼 취약한 존재다. 하지만 화자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처럼 부모님의 도움으로 욕망을 충족할 형편이 못됨을 잘 알고 있다. 학생의 엄마가 ‘투 플러스 한우를 다져 만든 비빔밥’을 학생의 입에 넣어주는 존재라면, 화자는 자신이 번 돈으로 자신의 형편이 차지하는 빈 자리를, 이어폰이며 원피스, 명품 가방 등을 쇼핑하며 채운다. 화자는 무선이어폰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따라오는 고민과 염려마저도 돈으로 구매한다.

 

 

작가가 묘사하는 학생과 화자의 실감나는 모습에 공감을 많이 하게 되었다. 화자가 가르치는 학생이 무균실에서 태어나 자라는 금수저 ‘기니피그’처럼 느껴진다면, 화자는 흙수저의 위치에 있지만, 그나마 피나는 노력으로 먼저 ‘인서울’에 발을 디디고, 서울과 외곽의 경계 위에 ‘서 있기 위해 무릎에 힘을 주고 버티는’ 존재다. 화자와 학생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소비지향적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적응하게 된 하나의 종(species)과 그 변종과 같은 존재일 뿐이다. 각자 조금 다른 환경에서 조금 다른 역할을 맡은 자본 사회의 소비자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학생은 교육과 계급이라는 한국적 자본시장의 소비자로서, 화자는 개성과 힐링을 내세운 자본시장의 소비자로서 자신들의 역할 속에서 적응해가는 존재다. 태어나 한 번도 자신의 욕망에 따라 세상과 부딪혀보고, 길을 잃어보지 못한 존재가 소설 속의 학생이라면, 그녀는 애초에 잃어버릴 길을 가져보지 못한 존재다. 반면 화자는 자신이 ‘애초에 찾아갈 곳이 없었으니 길을 잃었다고도 없었다.’ 라고 생각한다. 학생과 화자는 그런 점에서 모두 ‘길을 잃은 존재들’이라고 느꼈다. 이런 맥락에서 학생과 화자는 2020년 대한민국이란 사회에서 살아가는 신인류, 포스트-코리안이라는 생각을 해본 것이다.

 

 

짧지만 강한 인상을 주는 이 소설에서 묘사된 인물들의 모습은 나의 일부이기도 하다. 화자의 독백처럼 나 역시 알 수 없는 길 어딘가 비좁은 틈새를 차지하며 멈춰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설을 이렇게 엉뚱하게 읽어도 될까하고 잡생각을 하는 사이, 작가가 풀어 놓은 이야기의 현실에 공감하며 여기까지 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