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황인찬 시인과의 인터뷰를 읽고

많은 아름다움이 있다」를 읽고

창작과비평 187(봄호) ‘작가조명

오연경(문학평론가) 지음 | [창비]

 

 

 

 

이번 호에서 황인찬 시인을 인터뷰한 글을 읽으면서 새롭게 눈여겨 본 것은 시인 역시 자신이 쓰는 시의 ‘정체성을 묻는다’는 점이었다. 시인은 ‘최근에 내 시를 봐도 그렇고 다른 시를 봐도 그렇고 ‘시의 화자를 시인과 분리할 수 있나’ ‘이게 시인가, 에세이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시인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고민인가 싶기도하다. 황인찬 시인을 만나면 시인에게 ‘시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물어보고 싶다. 그리고 이제 등단한 지 10년이 된 시인이 바라보는 ‘시의 정체성’에 그동안 어떤 변화라도 생겨났는지도 물어보고 싶다.

 

 

인터뷰 기사 처음부터 시인의 솔직한 고백이 나온다. 시인 역시 ‘좋은’과 ‘’이라는 단어로 자신이 써내려가는 시를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과연 이러한 형용사와 부사가 제한하는 한계에 대해 시인은 어떤 이유로 고민하게 되었을까 궁금해하는 동안, 어느 새 시인은 ‘리듬’이나 ‘이미지’와 같은 장치보다는 ‘쓰기’행위 하나만 남게 된다, 라고 말한다. 내게는 시인이 시를 대함에 있어 ‘좋은’과 ‘잘’이라는 형용사와 부사를 이제는 지우고, 시의 본질만을 보기 위한 시도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이러한 고민도 역시 등단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분투의 흔적으로 보인다. ‘쓰기’라는 행위만 남는 지점이 시의 본질에 대한 탐색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될 것 같다.

 

 

이번 인터뷰기사를 읽고 황인찬 시인을 새로 알게 된 무지한 독자이지만, 새로운 앎 또한 나에게는 소소한 기쁨이기도 하다. 오인경 평론가도 지적하듯이 시를 읽고 바로 파악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평론가 역시 이상과 김수영의 시를 예로 들며 ‘난해함’의 문제를 제기했다. 황인찬의 시가 ‘어렵지 않은 단어와 단순한 구문을 사용하지만, 의미가 단순하지 않고 잘 잡히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시인의 시는 난해한 시가 주는 ‘소통 불능’의 문제에서 보다 자유롭다고 했다. 독자의 정서적 몰입이 가능했다는 말이다. 독자를 고려할 때 황인찬 시인의 시가 지니는 독특함과 매력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황인찬 시인에게 또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점이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오인경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인은 ‘평이하면서도 풍부한 의미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시작을 위해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두고 시작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점이 독자와의 ‘소통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지는 작업인지도 궁금하다.

 

 

이런 궁금증을 가지게 된 이유는 시인이 본인의 시에 대해 ‘어떤 효과가 있다면 아주 다행’이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이상이나 김수영 시인이라면 ‘무슨 상관인가’라고 대답했을 것 같다. 이 ‘다행’이라는 표현에는 어쩌면 독자를 너무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궁금해졌다. 최근의 시에서 많이 보이는 ‘화자’와 거의 일치하는 ‘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인의 ‘독자에 대한 배려’가 혹시 독자에게 주어진 ‘자유의 영역’에 개입하게 되는 결과를 주지 않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의미의 파악이 쉽지 않은 시인의 시를 많은 독자가 읽고 있다는 점은 이것이 나의 기우임을 말해준다.

 

 

문득 내가 시를 어려워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동안 나는 시를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시인이 이러이러한 시를 쓰게 된 배경과 시인의 마음가짐, 혹은 시적 상황을 상상해보려는 노력 없이 나는 ‘이해’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시 한 구절이라도 주의를 기울여 곱씹어 본 적도 없이 시가 어렵다고 했던 것은 무엇보다 나의 문제인 탓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어쩌면 시를 읽을 때 직관과 상상력이 많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결론은 ‘나는 왜 시에 가 닿으려는 노력도 안하면서 시가 어렵다고 하는가’였다. 리뷰를 쓰다 보니 어쩌다 나의 고백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황인찬 시인과 오연경 평론가가 언급하는 것 처럼 난해함과 소통 불능의 문제는 시가 안고 가는 본질적인 딜레마 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시인이란 뭘까, 라는 의문도 불쑥 솟아 오른다. 인터뷰 기사에 나온 단어들을 이용해서 나름의 정리를 해보면, 시인이란 시대의 한 가운데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동시에 당대의 집단 무의식과의 싸움을 밤새 계속 해나가는 야곱과도 같은 이들이란 생각을 해본다. 누가 이기는지는 결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단편적이고 부분적이나마 시를 점점 접하게 되면서 ‘시를 읽는 일’이란 어쩌면 내 삶의 ‘놀라움’을 배우는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나에 대한 감수성, 삶에 대한 감수성을 예민하게 하고, 이를 몸에 새기는 일이라고 말이다. 반대로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예민해진 감수성을 몸에 새기고, 난해함과 소통 불능을 넘어설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는 것이 아닐까. 마치 자전거를 배우고 수영을 배우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