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비밀은 우리 안에 있다! 《네 번째 원고》 를 읽고
《네 번째 원고》
존 맥피(John McPhee) 지음 | 유나영 옮김 | 글항아리
“내가 쓰는 단어 하나하나가 모조리 자신이 없고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곳에 갇혔다는 느낌이 든다면, 절대로 써내지 못할 것 같고 작가로서 재능이 없다는 확신이 든다면, 내 글이 실패작이 될 게 빤히 보이고 완전히 자신감을 잃었다면, 당신은 작가임이 틀림없다.”(257면)
글쓰기로 몸부림을 치는 모든 이들이 공감할 만한 증상을 열거하고나서, 그러니까 당신은 ‘작가임이 틀림없다’라고 믿기지 않는 결론을 내린 이 사람은 존 맥피라는 논픽션 작가다. 그가 왜 이렇게 언급했던 것인지 궁금하다면 《논픽션 쓰기》를 따라 읽어가다보면 공감하게 되는 지점이 나올 것 같다. 이 책은 글쓰기의 비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픽션 글쓰기의 대가 존 맥피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또 다른 논픽션의 대가이자 퓰리처상 수상자 잭 하트가 쓴 《논픽션 쓰기》라는 책에서 였다.
‘해설 내러티브 논픽션의 대가’
‘존 맥피는 정확하고 신중한 스코틀랜드 남자다. 옷차림새도, 행동거지도 글 쓰는 스타일을 닮아 단정하다.’
잭 하트가 쓴 《논픽션 쓰기》에는 존 맥피에 대한 언급이 책의 두 번째 페이지에서부터 시작해서 여러 차례 나온다. 심지어 한 페이지 이상을 위에 인용한 것처럼 존 맥피라는 인물에 대해 묘사하고, 그의 글을 여기저기 인용하고 있다. 도대체 존 맥피라는 인물이 누구이길래, 이처럼 잭 하트 자신이 저술하는 책에서 이렇게 칭송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눈여겨보았던 부분은 존 맥피가 글의 구조를 설계할 때 사용했던 다양한 도표들을 가져와 자신의 책에서도 중요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번에 만나게 된 《네 번째 원고》는 저자의 면모에도 관심이 갔고, 이와 더불어 저자가 활용하던 글의 구조 설계 과정에 주목해보게 되었다. 책이 끝나는 부분에서 저자가 언급하듯이 논픽션, 특히 저자가 언급하는 창의적 논픽션은 ‘없는 것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가진 걸 최대한 활용하는 글쓰기’다. 이 책의 앞부분에 샘 앤더슨이란 사람이 「존 맥피의 정신」에서 언급하듯이 맥피에게 글쓰기의 고충은 상당부분 글의 구조를 설계하는 데에 있다. 이번 독서는 무엇보다 저자가 논픽션 글쓰기를 할 때, ‘구조’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왜 그렇게 ‘구조’에 집착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이유를 찾는 데서 출발한 것이기도 했다 .
다른 논픽션 작가들이 존 맥피를 많이 언급하고, 참고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구조에 대한 고민, 연구’를 무엇보다 중요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우선 독자들이 저자가 설계한 구조를 눈치채지는 못하게 하라고 주문한다. 이 정도의 선에서 구조를 세운 다음 키워드를 뽑아 기록하고, 분류된 자료를 가지고 견실한 도입부를 쓰라는 것이 주요한 골격이다. 논픽션인 만큼 글에 등장할 인물과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대상으로 한다. 대개 논픽션의 경우 연대기적으로 사건을 기술할 것 같지만, 존 맥피가 제시하는 구조의 설계도 그림은 마치 소설의 플롯 구성처럼 ‘플래시 백’과 ‘플래시 포워드’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단순한 연대기적 구성을 탈피하고 있다. 따라서 글의 시작 역시 반드시 시간 순서대로 배치 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 직전에서 마치 영화를 보듯이 바로 독자들의 눈길을 붙들고 나아갔다가, 어느 순간에 다시 ‘플래시 백’으로 되돌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언론에서 주로 사용하던 사건 보도 형태의 기사 작성 형식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존 맥피가 톰 울프와 함께 논픽션 글쓰기의 파격을 도입했던 ‘뉴 저널리즘’의 시대 배경 속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은 전통적으로 소설에 집중했던 잡지 <뉴요커> 역시 60-70년대를 거치며 논픽션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전속 필자를 많이 발굴했던 분위기와 겹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저자가 처음부터 논픽션 작가가 된 것은 아니다. 저자 역시 시나 소설 등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해본 뒤에야 자신이 논픽션에 보다 흥미를 지니고 스스로에게 적합한 장르라고 여기게 되었다. 물론 사람인 까닭에 한 단어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마비상태와 마주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경험도 들려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서 연필과 종이를 들고 아무 데나 누워서 뭔가가 떠오르면 휘갈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도 더 진행이 안될 때까지 ‘계속 써내려 가라’는 것. 그런 다음 다시 컴퓨터에 앉아서 종이에 적은 내용을 파일로 옮기면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기록하는 대목보다, 자신이 겪은 에피소드를 곁들이는 대목에서 저자 자신을 더욱 입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논픽션 작가인 만큼 자신이 써 놓았던 사항들에 대해 팩트 체크를 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 들이나, 편집자들과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며 긴장을 유지하며 옥신각신 하는 이야기, 혹은 은근한 유머들을 웃으면서 따라가다 보니 어느 새 존 맥피라는 인물이 눈 앞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반 세기 넘게 글을 써오면서도 여전히 ‘글쓰기 마비 상태’를 겪기도 하는 저자의 모습에서, 글쓰기의 본질과 고단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결국 글쓰기 비법이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2000년도 전에 《시학》에서 제시해 놓은 것들의 다양한 변주들에 불과하다는 점과, 여기에 이르는 길은 자기가 찾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닐까.
이 책에서 아마 가장 많이 언급되는 저자의 당부는 ‘글쓰기는 선별이다’라는 표현일 것이다.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 것인가의 문제다. 이 선별과정은 글쓰기 소재를 취재하는 현장에서 노트에 낙서를 하는 동안에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취재 대상을 인터뷰할 때도 받아 적은 말의 대부분은 생략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단 이 막연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도입부를 쓰거나 초벌 원고를 쓰기만 한다면, 그 때부터 집필 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저자는 알려준다. “수정이야말로 집필 과정의 본질이다”(260면)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은 ‘네 번째 원고’인데, 여기에는 저자의 개인적인 애착이 담겨있다. 저자는 세 번의 퇴고를 거쳐 손에 주어진 이 ‘네 번째 원고’에서 보다 나은 단어나 어구를 대체할 표현을 찾는다고 한다. 저자는 이 과정을 가장 즐겨한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단어는 이미 알고 있지만, 보다 적확한 단어 혹은 어구를 찾아내어 수정하기 위해 이 단어들을 사전에서 또 다시 검토하는 과정이 바로 저자가 ‘네 번째 원고’를 가지고 하는 작업이다.
저자는 자신의 글쓰기 철학을 자신의 삶 속에서 찾아낸 요소들로 마치 두서 없이 제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과정은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독자에게 전달된다.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를 포함하여, 프린스턴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의 이야기나, 이제는 구닥다리가 되어버린 텍스트 에디터 프로그램 사용 에피소드, 그리고 자신을 닮아 딸들이 모두 글쓰기와 관련된 삶을 살아가면서 보여주는 이들의 관계 역시 전체의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글쓰기의 비법을 기대하고 읽는다면 오히려 다른 글쓰기 책에서 언급하는 요령들 몇 개를 이 책에서도 확인하는 정도에 그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이 책은 글쓰기, 특히 논픽션 분야의 글쓰기 대가가 자신의 글쓰기 인생에서 건져 올린 글쓰기의 면면을 솔직하고 간결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가 도입부를 쓸 때 썼던 표현처럼 ‘견실한 글’을 쓰고자 여전히 노력하는 한 대가의 방법론을 공개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들 중에서 출판사나 잡지사에서 저자가 쓴 글에 대해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저자가 쓴 글에 대해 이렇게 엄정한 기준으로 사실을 확인한 후 세상에 내놓는 일은 그 글 뿐만 아니라 잡지사나 출판사의 신뢰와 권위를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공인들이 사실관계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아니면 말고’의 태도로 발언하고, 이를 그대로 받아 적고 글을 써내는 일부 언론의 모습과 분명히 비교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독자에게 주는 가장 큰 격려는 아마도 글의 머리에 인용했던 저자의 선언이 될 것이다. 바로 당신이 글쓰기에 좌절해본 사람이라면 당신은 작가임에 틀림없다는 이 말. 글쓰기의 비밀은 바로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는 걸 저자는 이 책에서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