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지성인의 모습을 읽다 - 조지 오웰의 《책 대 담배》

 

담배 (Books v. Cigarettes)

조지 오웰(George Owell) 지음 | 강문순 옮김 | [민음사]

 

 

 

자유로운 지성인의 모습을 읽다

 

 

담배는 조지 오웰의 글 몇 편을 모은 얇은 산문집이다. 조지 오웰에 대한 관심은 개인적으로 미국의 비평가이자 논쟁가였던 크리스토퍼 히친스로부터 비롯되었다. 히친스는 자신의 책 신은 위대하지 않다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비롯하여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영향력 있는 학자들도 신랄하게 ‘까면서도’, 조지 오웰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동물농장을 통해서 스탈린 독재를 비판한 사람이란 인상만 갖고 있던 조지 오웰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던 계기였던 것 같다.

 

 

이번에 읽은 담배는 소설에서 상상했던 오웰의 면모를 좀 더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었던 기회였다. 특히 짧은 산문임에도 오웰의 신랄한 비판의식과 글쓰기에 대한 고민, 그리고 예술과 정치와의 관계 설정에 대한 견해 등을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알렉세이 톨스토이 같은 문학 매춘부들이 막대한 돈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작가들에게 가치 있는 유일한 표현의 자유 같은 것은 박탈당하고 만다(38면)라고 말할 정도로 오웰에게는 비판에 성역이란 없었던 것 같다. 감히 톨스토이라니! 톨스토이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이 있을 것 같다. 특히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를 읽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던 톨스토이의 면모를, 그래서 자신의 재산과 저작권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하는 문제로 부인과 심각한 불화를 겪었던 톨스토이를 고려하면 오웰의 톨스토이에 대한 평가는 한 쪽을 다소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하여간 오웰이 비판하는 방식은 이처럼 비판의 대상에는 성역이 없었다고 보아야할 사례였다. 오웰이 더 중요시했던 것은 ‘독립적인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표현의 자유’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산문집에서는 글쓰는 사람, 특히 책을 읽고 쓰는 서평가로서의 면모가 여러 편의 글에 묻어난다. 책이 비싸서 안산다고 하는 이들의 말에 1년 간 이 불평분자들이 펴대고 마셔대는 담배와 술값을 계산해서 자신이 구입한 도서들의 가격과 비교하며, 책을 사서 보는 일이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지 않는 일임을, 말하자면 ‘구라치지 말라’고 전하는 것이다. 그냥 자신이 책읽기에 관심이 없다고 하면 될 것을 말이다. 그러니까 솔직한 것이 대체로 더 낫다.

 

 

한편 오웰은 이 책에 소개된 여러 편의 산문을 통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책들에 대해 주관적이지만 상당히 독립적인 견해를 표명한다. 토마스 칼라일이 ‘똑똑하긴 했지만, 정곡을 찌르는 영어 문장을 쓸 재능은 없었다’라고 돌직구를 날리거나,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가 ‘앞부분은 인간 사회를 가장 통렬하게 공격한다’라고 말하면서도 후반에서 ‘스위프트는 자신이 흠모하던 종족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실패한다’라고 주저함 없이 언급하고 있다. 아직 내가 읽은 오웰의 작품이 별로 없긴 하지만, 오웰의 신랄한 비판을 따라가다보면 통쾌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문학 혹은 보다 폭넓게 예술과 정치와의 관계를 언급하는 부분 역시 이 책에서 주목해볼 만한 부분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뿐만 아니라 르포르타주를 살펴보면 오웰의 삶은 자신의 글과 정말로 일치했던 사람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 점은 작가로서 오웰이 정치의 참여를 매우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이다.”(60면)

 

지난 동안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것이었다.”(63면)

 

 

특히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와 같이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고 쓴 이 책이 ‘노골적인 정치 저작’임을 인정하면서, ‘내 문학적 본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전체적인 진실을 말하려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라고 견해를 드러낸다.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늘날의 많은 지식인들의 표현을 왜곡하여 받아들이면 ‘애초에 유대인 학살은 없었다’라거나 ‘일본군 위안부는 없었다’라는 지적 태만과 허무주의로 빠져버리기 쉬울 것이다. 특히 거짓 권위를 갖는 이들에 의해 유포되는 거짓 사실이 그러하고,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중이 있는 한 말이다. 오웰의 삶은 이처럼 인간의 특정 집단들이 만들어내고 강요하는 ‘거짓’을 고발하고 이를 비판하는 삶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조지 오웰은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일 게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백미는 오웰이 유토피아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걸리버 여행기를 언급하는 가운데, 전통적인 유토피아로서의 ‘천국’을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단테의 신곡을 일부 읽으면서 느꼇던 것이지만, 천국에 올라간 ‘유일한 사람’으로서 단테가 유령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지옥부터 여행하며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른다. 단테가 묘사하는 지옥은 너무나 디테일하고 끔찍한 반면, 이들 일행이 천국에 이르면 천사가 노래를 부르고, 밝은 빛이 있는 곳으로 묘사하는 정도다. 한 마디로 천국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싱겁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어느 쪽이든 서양인들이 상상한 세계이긴 하지만, 천국에는 유독,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상상력이 잘 발휘되지 못한 영역이었다. 조지 오웰 역시 이 점을 지적했던 것이다. 오웰이 표출하는 신랄함의 백미는 다음과 같다.

 

 

기독교의 천국은 대개 어느 누구도 매력을 느끼지 않을 곳으로 그려진다. (…) 하지만 천국을 묘사할 때면 곧바로 황홀과 더없는 기쁨과 같은 단어에만 의존할 , 단어가 어떤 내용을 담는지 설명하려는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런 주제로 가장 중요한 글이 테르툴리아누스가 유명한 글일 텐데, 글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천국에서 누릴 있는 주된 기쁨은 저주받은 사람들이 고문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70-71면)

 

 

이렇게 짧은 몇 편의 산문에서 작가의 캐릭터가 확연히 드러난다. 지금 떠올려보니 신은 위대하지 않다에서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줄곧 보여주는 신랄함이 그대로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히친스에게 영감을 주었던 지점은 바로 오웰이 외부의 모든 대상을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력으로 평가하고 바라보는 ‘자유인’의 정신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이유로 ‘노예와 자유인’에 대해 고민하고 언급했던 철학자 스피노자를 히친스가 역시 좋아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보다 대상의 권위나 사회의 규범이 제한하는 범주를 벗어나 스스로 따져보고 판단하겠다는 ‘자유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히친스라는 걸출한 비평가에게 큰 영감을 주었던 오웰의 면모를 이 얇은 산문집에서 좀 더 들여다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