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존재하는가? - 《생각의 싸움》 김재인

《생각의 싸움》

김재인 지음 | [동아시아]

 

 

나는 존재하는가?

: 파르메니데스와 에피쿠로스를 중심으로

 

 

세 살 즈음의 나와 초등학생의 나, 그리고 대학생 시절의 나와 지난주에 지인과 함께 찍은 이미지에서 내 모습을 찾아본다. 지난주에 ‘기록된’ 내 모습을 제외한 사진들은 이제 오히려 낯설다. 나는 이들 네 종류의 이미지 속에 있는 인물을 모두 ‘나’라고 인식한다. 공통점은 모두 시간이 흘러 ‘과거’의 나라는 점뿐이다. 나는 이 이미지들에서 나라는 ‘자기동일성’을 확인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리고 무슨 근거로 모두 같은 ‘나’라고 판별할 수 있을 것인가?

 

고대 철학자들도 이와 같은 물음을 던졌던 모양이다. 기원전 6세기에 남부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파르메니데스는 엘레아학파에 속하는 학자다. 《생각의 싸움》은 파르메니데스의 ‘있음’, ‘존재’의 개념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개념으로 서로 다른 시기에 남겨졌던 사진 속의 네 인물이 바로 ‘나’인지 아닌지를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책에서는 영어의 ‘is'에 해당하는 표현의 세 가지 용법/개념을 소개한다. 우선 주어와 서술어의 대상이 동일함을 보여주는 ’술어적 용법‘과 주어가 존재함을 말하는 ’존재적 용법‘, 그리고 ’옳다/그르다‘를 판정하고 있는 ’진리적 용법‘의 세 용법을 소개한다(181). 동양 문명에 속한 우리는 언어의 세 가지 기능을 의식적으로 구별하여 사용하지만, 서양에서는 이 세 용법이 항상 함께 고려된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니까 말로 표현된 대상은 의심의 여지없이 참이며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희랍인들에게 이 세 가지 용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전제가 있었다. 이 용법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변화를 겪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달리 말하면 어느 ‘존재’라는 대상은 생성과 소멸을 겪거나 흔들리지 않고, 완결되고 온전해야 한다(182). 따라서 이 대상에 변화가 생긴다면 희랍인들은 이를 ‘존재’라고 부르지도 않으며 ‘있지 않다’라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희랍인들이 보다 적극적이고 분명해 보이는 ‘없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없다’라는 개념은 ‘무(無)’의 개념으로 이어져, ‘있다’와 ‘있지 않다’ 사이를 구별하기 위한 ‘’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184). 이 개념은 나중에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가 원자론에서 고입한 빈 공간(void)의 개념(320)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파르메니데스의 관점에서 보면, 40년이 넘도록 키가 크고 외모가 달라진 사진 속의 인물은 ‘나’라는 동일 인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나’라고 하는 지시대명사는 어려움 없이 사진 속의 네 인물을 곧바로 가리킬 수 있다. 그렇다면 사진 속의 인물이 ‘나’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에서 외형적으로 변화를 겪는 어떤 대상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언어로 진술 불가능한 사태라고까지 인식한다(183). 사진 속의 내가 나로서 ‘존재’하려면, 나는 태어난 상태에서 변함없이 그대로여야만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엘레아학파에 속하며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인 제논이 제기한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 역설에까지 이른다. 언어, 곧 논리만으로 상황을 설명하면 모순이 없지만, 현실에서 관찰되는 현상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188). 지금의 관점에서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 문제는 궤변이나 다름없지만, 파르메니데스는 경험 세계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은 논리학자였다. 아마도 엘레아학파의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이유는 언어 혹은 논리에 우선적으로 얽매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니면 이들이 살았던 시대가 아직 2,500년 전의 고대 문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할 것 같다. 아직 영원불멸인 신들의 세계가 고유명사라는 ‘언어’로도 사용되고 있었다면, 고대 희랍인들에게 불변하는 세계는 곧 존재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그동안 사용되던 고유명사로는 감각 세계의 현상들을 설명하기 힘들어지며 이들이 충돌하기 시작했음을 자각한 고대인들의 모습을 반영하는 사건일 수 있겠다.

 

이 ‘있고 없음’의 존재론 문제는 후대의 철학자들을 계속 괴롭히게 되는 문제였다. 파르메니데스가 보기에 존재한다는 것에는 생성과 변화가 불가능한 것이었다(182). 플라톤은 기하학적 사고방식을 적용하여 ‘있음 그 자체’인 이데아를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의 해결을 시도했다. 곧 현실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은 개별적인 ‘현상들’이며, 이 현상들에 공통된 어떤 것, ‘그 자체’가 바로 이데아라고 하면서 변하지 않는 존재 그 자체를 변하는 현상들과 구분해 놓았던 것이다(193). 이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파르메니데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논리(언어)와 현상과의 충돌문제는 나중에 쾌락주의로 알려진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변화하는 현실 세계의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이런 시도는 유물론의 관점에서 나온 것으로, ‘현상을 구제하라’라는 표현 속에 이들이 하고자 했던 의도가 잘 드러난다(320). 원자론에서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를 상정하고, 이 원자들이 우주 전체를 이룬다고 설명한다(320). 파르메니데스가 ‘존재는 생성과 변화를 겪지 않는다’라고 했던 반면, 데모크리토스는 ‘세계는 부단히 변하며, 원자가 모임을 달리하여 존재를 구성할 뿐 존재의 특성은 원자가 그대로 지니고 있다(321)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부단히 변화하는 대상도 원자들의 수준에서는 불변하는 존재로 인정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다. 따라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의하면, 네 장의 사진 속에서 내가 지목한 인물이 모두 ‘나’임을 비로소 인정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비록 키가 크는 등 외모에 변화를 겪었지만, 원자적인 관점에서 나는 여전히 ‘동일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또 파르메니데스가 경험 세계를 완전히 부정하여 감각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는 감각에 의존하여 세상의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본 점이 대비된다. 다만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는 약간의 차이가 존재하는데, 두 사람 모두 원자의 존재와 허공(void)을 인정하고 도입했다(320)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원자들의 운동 양상에 대해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가 기계적인 수직낙하 운동만을 하므로 원자들끼리의 충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결정론적 관점으로 이어지는 실마리를 남기고 있으며, 나아가 근대의 과학을 지배했던 결정론적인 고전 역학의 맥락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원자들의 운동에 ‘경로의 이탈’이라고 하는 추가적인 ‘자유도’를 인정하는데(322), 이 작은 차이로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비결정론적인 특성을 갖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원자들에 충돌의 여지를 주었다는 것은 고전 물리학에서 현대 물리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큰 역할을 했던 확률통계에 기반한 역학의 관점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의 존재론은 변화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통해 다양한 변주를 보여주었다. 파르메니데스가 존재하는 것은 운동과 변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면 에피쿠로스는 현상의 변화는 인정하되, 원자 개념을 도입하여 존재가 불변함을 설명할 수 있었다. 파르메니데스의 관점에서는 네 장의 사진에 나오는 각기 다른 시절의 ‘나’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기동일성’에 대한 고민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반면 에피쿠로스의 관점에서는 내가 존재하며, 네 장의 사진 속에 나오는 인물이 모두 변함없는 ‘나’란 존재임을 확증할 수 있게 된다. 에피쿠로스는 원자론에서 데모크리토스와 달리 ‘원자의 이탈(클리나멘)’이라는 ‘자유’ 요소를 도입했는데(322), 이것이 비결정론적 시각, 그리고 자유의지의 문제에까지 연결될 수 있다는 부분이 흥미롭다. 물론 에피쿠로스는 이 클리나멘으로 자유의지의 문제도 설명해보려 시도 했지만 실패했다.

 

이 부분은 ‘자유’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에피쿠로스와 일면 유사한 면(그리고 경험론자라는 관점에서도 유사한)이 있는 스피노자와도 좀 더 연관을 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스피노자는 애초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했다는 큰 차이점이 있다(334). 대신 스피노자는 앎을 통해 인간이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입장은 현대 과학도 기본적으로는 같은 입장을 공유하는데, 윤리와 법에서는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335). 자유의지의 문제는 앞으로 공부를 해나가며 관심 있게 생각해볼 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