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근현대사를 살아 낸 한 집안의 ‘작은 역사’ - 황석영의《철도원 삼대》
거대한 근현대사를 살아 낸 한 집안의 ‘작은 역사’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 (창비, 2020)
소설가 황석영을 처음 알게 된 계기는 장편소설 《손님》을 통해서 였다. 실제 있었던 ‘황해도 신천 대학살사건’을 중심 줄기로 하여 한국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어낸 가족의 아픔이 그려진 소설로 기억한다. 이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과 함께 내가 속한 이 사회, 내 자리를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황석영 작가의 이력 역시 소설 속에서 고난을 받았던 인물들을 많이 닮았다고 느꼈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에 만주 장춘에서 태어난 작가는 한일회담 반대시위와 베트남전에서, 그리고 5.18광주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직접 몸소 체험했다. 나아가 정치적인 문제로 독일과 미국 등 해외에 장기간 체류하다가 귀국하여 방북사건과 관련하여7년간 수감되기도 했으며, 일용직 노동자를 따라 전국을 떠돌기도 했다. 작가는 대한민국이 마주했던 거대한 운명이 만들어낸 또 한 명의 디아스포라이기도 했다. 고교 재학 당시 단편소설로 문단에 등장하여 지금까지 50여년 간 한국 문단의 대들보로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 이번에 만난 《철도원 삼대》(가제본)는 작가가 처음 구상에서 집필까지 30년에 걸쳐 이루어진 지난한 작업의 결과물이다. 책의 일부를 발췌하여 마련된 가제본을 읽었기에 소설의 결말은 아직 알 길은 없다. 분명한 것은 이 소설 역시 《손님》처럼 이 땅에서 지난 100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한 집안이 겪는 ‘작은 현대사’를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은 25년 간 공장노동자로 일해온 해고 노동자 이진오가 여의도가 내려다보이는 한강 주변의 발전소 공장 건물의 굴뚝 위에서 농성중인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는 노조 소속으로 공장주 측의 분할매각 처리 과정에서 해고되었던 노동자로 보인다. 50대 초반인 이진오는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을 주장하며 45 미터 상공에서 생활하고 있다. 소설은 다시 과거로 ‘플래시 백’되며 과거로 배경을 옮기는데, 시간적으로는 한일합방 이전의 시간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이진오의 큰할아버지 이백만과 할아버지 이일철, 아버지 이지산, 이렇게 삼대가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철길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된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씨 집안 3대가 겪는 일들은 어떠 식으로든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앞당겼다고 이야기되기도 하는 ‘철도’라는 상징적인 대상을 중심으로 엮이며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가로지른다. 소설에서 큰할아버지 이백만이 손자 이지산에게 “철도는 조선 백성들의 피와 눈물로 맹글어진 거다.”(가제본 59면)라고 했던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소설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우리가 믿어왔던 철도 신화 뒤에 가려진 구체적인 역사의 한 장면을 소설을 읽으며 비로소 상상할 수 있었다.
소설은 이 땅의 역사가 품게 된 이율배반적인 요소를 드러낸다. ‘철도원 삼대’의 일대인 이백만의 시대엔 한일합방 이전부터 경인선과 경부선이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이미 개통되어 있던 상황이었고, 한일 합방 이후에는 호남선과 압록강 철교가 개통되어 일본의 중국진출을 위한 사회기반 시설이 마련되었다. 일본 세력이 주변국을 식민화 하는 과정에서 소설은 이 땅에 살던 ‘조선인들’이 겪어야 했던 수난을 구체적이고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우선 철도 건설을 둘러싸고, 철도 주변의 부지가 수탈되어 수백만 명이 땅을 빼앗겼다. 집 뿐만 아니라, 삼림, 텃밭, 심지어 조상의 무덤까지도 헐값에 뺏겼다. 철도 건설 사업 초기에 대한 제국 정부의 고위직 벼슬아치들이 중역이었던 토건회사 마저 점차 일본인들이 들어와 조선인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평범한 소시민들이 일본인들 뿐만 아니라 같은 조선인들 한테서도 이중으로 고통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나아가 이들은 농가의 소와 말을 강제로 징발하고, 닭과 돼지 등을 강제로 탈취하는가 하면, 장정들은 강제로 동원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이 땅의 농어촌 사회가 붕괴된 연원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의 농부와 어부들이 자신들의 일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고, 자녀들이 대를 이어 나가지 못했던 배경에는 이런 역사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라가 있을 때에도 그리고 나라를 잃어도 당할 수밖에 없는 민초들의 모습이자, 일제 식민세력에 의해, 그리고 토착 왜구 세력에 의해 그저 무기력한 울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모습이다. 물론 이 와중에도 사람들은 자기 앞에 주어진 생을 살아야만 했다. 거대한 시대의 물줄기 한 가운데에 이들 삼대 가족이 있었다. 소설은 이들 가족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다. 어려운 시절에 이들 각자는 삶의 방편들을 마련하느라 발버둥을 쳤다. 누구는 점원 보조 일을 배우거나 선반 다루는 일을 배우고, 또 다른 이는 방직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이데올로기의 시대에 이진오의 작은 할아버지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사람들을 계몽하기 위해 위험을 무릎 쓰기도 했다.
이 땅에 ‘철도’가 갖는 상징성은 단순한 근대화의 이미지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진오의 큰할아버지 이백만은 한반도를 침탈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수백만 명의 삶을 파괴하면서 만들어 놓은 철도가 하나의 기회가 되었다. 철도원자리를 얻었던 것이다. 맹렬한 증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거대한 쇳덩어리는 누군가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이 철도원 삼대에겐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다.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기술을 배우고 흔하지 않은 기회를 잡았다. “우리는 그래두 운이 좋았다네”(71면)라고 말하던 식당 주인 민십장의 말은 철도원 삼대도 동의했을 것이다. 이렇게 철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철도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상징적인 모티프다. 소설은 어느새 21세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와 한강 여의도가 내려다보이는 굴뚝 위로 전환되어 진행된다. 해방 후 한국 전쟁을 겪은 이 사회는 사회 복구가 시작되고,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다. 이 와중에 대한민국은 “쌀보다 돈이 더 필요한 시대”(164면)가 되어버렸다. 평범한 이들은 농어촌을 떠나 도시로 모이면서 수많은 사회의 구성원들은 도시 노동자로 편입되었다. 소설 속의 해고 노동자 이진오가 새로운 산업사회의 ‘철도’에 해당하는 공장노동자의 자리를 찾게 된 배경이다.
일제 강점기에 이미 잘못된 단추를 꿰어 맞추었던 한국 사회는 새로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목격한다. 공장주들은 외국으로 공장을 옮겨가며 위장 파산하며 노동자를 해고하기도 하고,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여공들에게 엄청난 노동 강도를 일상적으로 강요하며 언어폭력 등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진오는 공장노동자로 25년 넘게 열심히 일해왔지만 해고된 노동자들을 대표하여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닌, 사람이 거처하는 공간이 아닌’(43면) 곳에서 100일 넘게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농성을 벌인다. 이진오의 아내 역시 대형 마트 계산원으로 교대근무를 한다. 저자는 소설을 통해 한 집안의 인물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내면서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추적하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철도가 담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요소는 후기 산업사회에 편입된 이진오의 가족이 처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산업사회는 이씨 집안의 후손이 엮이게 되는 새로운 ‘철도’의 모습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철도, 그리고 이 땅에 살면서도 자신의 삶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지 못하는 이들은 후기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새로운 유랑인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씨 집안 가족이 영등포에 있던 버드나무 집에서 살 당시, 3·1운동이 있던 시기 전후로 겪었던 대홍수를 피하고자 버드나무 위에 대피할 공간을 만들었던 것처럼, 후손인 이진오 역시 생존을 위해 굴뚝 위로 올라간 것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구체적인 모습들은 달라도 우리 삶의 근본적인 양상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진오의 굴뚝 농성은 바로 우리의 삶의 조건과 모습은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설의 일부만 읽었기에 결말이 어떻게 날지 모른다. 하지만 작가의 다른 소설 《손님》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철도원 삼대》역시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작가는 이 땅을 관통하는 역사 속에서 한 집안의 4대에 걸친 이야기를 소설에서 펼쳐 놓았다. 시간적으로 앞뒤를 오가며 가족 구성원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우리에게 이들의 ‘작은 역사’를 들려주며 치밀하게 소설을 구성했다. 대한민국 근현대 사회 속을 헤쳐 나가는 한 집안의 모습을 따라가면서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이 실타래를 풀기 위해 실의 처음과 끝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하는 막막함과 함께 소설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진오는 왜 굴뚝 위로 올라가야만 했는가? 그 대답은 각자의 소설 읽기에 달려 있을 것이다. 소설은 한 집안 4대에 걸친 이야기로부터 이 질문과 관련한 기원을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소설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이미 선조들의 삶에서 이미 심어진 씨앗이자 우리의 ‘오래된 미래’라는 것을 다시 확인케한다. 개개인의 삶은 시대와 장소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소설은 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고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여기에는 최소한 어려운 시대를 헤쳐 나오며 우리의 존재를 마련해준 부모와 조부모 세대들, 그리고 근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들 역시 풍부하게 담고 있다. 우리는 답을 찾기 위해 바로 이 자리에서 이렇게 물으며 다시 시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