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되돌아갈 길은 없다’ - 영화 <알바트로스>를 보고
‘우리가 되돌아갈 길은 없다’
: 크리스 조던(Chris Jordan) 감독의 영화 《알바트로스 Albatross》를 보고
영화는 영국 시인이자 문학비평가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1834)의 시
‘늙은 수부의 노래(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 한 구절로 시작한다.
The spirit who bideth by himself
In the land of mist and snow,
He loved the bird that loved the man
Who shot him with his bow.
연무와 눈의 나라에서
혼자 사는 정령,
그는 사랑했소
활로 자신을 쏜 사람을 사랑했던 그 새를.
[번역 출처: 윤준 지음, 《코울리지의 시연구》, 도서출판 동인, 144p]
이 시에서 ‘그’는 물안개와 눈의 나라에 사는 정령을 가리키며, 이 시에서 가리키는 ‘그 새’가 바로 알바트로스이다. 알바트로스는 자신을 쏘아죽인 인간을 사랑했다. 정령은 인간에 의해 죽어간 무고한 이 새를 사랑했다. 이 구절에서 무엇보다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새를 사랑함’이다. 새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사진작가이기도 한 영화감독 크리스 조던은 처음에 북태평양 한 가운데에 버려진 미드웨이 섬에 와서 이 새를 카메라에 담는 작업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인간이 버린 온갖 종류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발견된 알바트로스 사체를 촬영하는 작업으로 시작했지만, 감독의 시선은 점차 알바트로스라는 새 자체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감독은 인간의 영향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알바트로스에 대한 연민을 넘어 이 존재에 대해 진정한 ‘애도’를 보내게 된 것이다. 감독은 이를 ‘사랑’이라고 표현했는데, 영화의 부제를 ‘우리 시대를 위한 사랑이야기’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알바트로스가 겪는 재앙의 한 단면을 마치 다른 알바트로스가 옆에서 지켜보듯이, 새의 눈높이에서 가까이 다가간 시점에서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독특한 시점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알바트로스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 미드웨이섬은 태평양 한 가운데에 위치해있는 섬으로, 2차대전 당시 미해군의 태평양 기지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병력이 모두 철수하고, 최소한의 인력이 관리하는 정도로 버려진 섬이 되어버렸다. 영상 중간중간에는 인간이 떠나간 적막한 군사시설물을 볼 수 있다. 이런 미드웨이섬은 가까운 육지가 최소한 3,000 km 이상 떨어져 있는 고립된 섬이다. 알바트로스는 이 섬에서 처음부터 천적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 새들은 낯선 존재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인간에 의해 멸종한 새로 잘 알려진 인도양 모리셔스 섬의 도도새처럼 이 새도 역시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모리셔스섬의 도도새 역시 천적이 없었기 때문에, 심지어 날개도 퇴화되어 날지 않게 되었다. 다만 도도새는 이 섬에 처음 상륙한 유럽인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식용을 위해서든 단순한 오락거리를 위해서든 총과 칼을 들고 다가간 사람 앞에서 날지 못했고, 심지어 빠르게 도망가지도 못했던 도도새들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유럽인들을 바라보다가 죽어갔을 것이다. 알바트로스는 날 수 있지만 카메라를 들고 이들 무리 속에서 가만히 자신들을 지켜보는 감독에 적응하게 되었을 것이다. 감독이 카메라 렌즈를 새의 얼굴에 가까이 내밀어도 이들은 신경을 쓰지 않은 듯 보였다.
알바트로스는 현존하는 가장 큰 새로 알려져 있다. 태평양에 폭넓게 서식하며, 펼친 날개의 길이가 2 미터에서 최대 3.7 미터까지 달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양쪽 팔을 짝 펼쳤을 때 길이보다 길고, 심지어는 그 두 배 길이 가까이 되는 셈이다. ‘신천옹’이라고도 불리는 이 새는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에도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만난 신천옹이 뱃전에 내려 앉아 쉬는 동안 선원들이 손으로 잡아들이는 장면이 나온다. 나아가 ‘모비 딕’의 흰 색과 더불어 새의 흰 색은 ‘불길함’을 암시하는 대상으로 등장한 바 있다. 하지만 크리스 조던의 《알바트로스》에서는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또 다른 의미에서 ‘불길함’을 암시하는 대상으로 등장한다.
알바트로스가 환경운동가들의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영화에서도 분명히 보여주듯, 알바트로스 사체에서 발견된 수많은 플라스틱 쓰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알바트로스는 대개 한 개의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는데, 점점 원기 왕성해지는 새끼에게 먹일 음식을 구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한다. 연구자들이 보고한 추적조사에 의하면, 알바트로스는 일단 새끼에게 먹일 먹이를 구하러 바다로 나가면, 일주일 이상 바다 위에서, 통상 16,000 km를 비행한다고 한다. 결코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말이다. 알바트로스는 이 과정에서 바다에 떠있는 각종 쓰레기들을 먹이로 오인하고 삼켜버린다. 인간이 버린 각종 쓰레기를 뱃속에 가득 채운 어미 알바트로스는 둥지로 돌아와 자신이 먹은 것들을 다시 게워내어 새끼에게 먹인다. 바로 여기에 ‘지속되는 재앙’이 있었다. 문제는 미드웨이섬이 오염되어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의 인간이 무심코 버린 각종 쓰레기가 바다로 흘러들었고, 알바트로스는 이 쓰레기조각들을 수집하여 배에 채우고 돌아오게 된 것이 문제였다. 반면, 같은 섬에 사는 ‘흰제비갈매기’는 알바트로스처럼 새끼에게 줄 먹이를 먼 바다에서 구해오지 않기 때문에 플라스틱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는다. 알바트로스에게 닥친 재앙은 1차적으로 이러한 정황에서 비롯되었다.
영화를 통해 감독은 죽은 알바트로스의 배를 갈라 새의 뱃속에 있는 소화되지 않은 잔존물을 카메라에 담아 보여주었다. 새의 사체에서 나온 물건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영상에서만 알아본 물건들은 주로 물에 뜨는 플라스틱 조각 및 병뚜껑, 칫솔, 그물, 낚시줄 등으로 보였다. 영화에서 감독은 자신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인간인 자신이 ‘알바트로스의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반면, 이 새들은 자신이 이유도 모른 체 죽어가야 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감독은 직접 죽은 새의 몸에 손을 얹고, 죽은 새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이 새들에게 닥친 ‘불-시’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 화자인 감독은 이러한 자신이 경험을 두고, ‘애도의 진정한 본질은 사랑과도 같다. 바로 상실에 대한 사랑의 경험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언젠가 코끼리에 관한 어느 자연 다큐멘터리 영화를 본 적이 있다. 한 코끼리는 뼈만 남게 된 어미 코끼리의 잔해에 매년 찾아와 끌어 앉고 마치 울부짓듯 소리를 내었더랬다. 코끼리 역시 일종의 ‘애도’ 행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코끼리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는 감독이 담담하게 꺼냈던 이 말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되었다. 크리스 조던 감독에게도 마찬가지로, 그가 해변에서 발견하여 뱃속의 잔존물을 꺼낸 대상은 ‘알바트로스라고 불리는’ 새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며, 한때 현존했던 바로 그 새’였던 것이다. 이제 살아남아 비행에 성공한 알바트로스들은 일단 섬을 떠나면 3년에서 5년간 한 번도 땅을 밟지 않고, 바다 위에 혹은 몇 주 씩이나 하늘에 떠있게 될 것이었다. 알바트로스들이 떠난 미드웨이섬은 고요했다. 다만 섬의 해안가에는 뱃속의 이물질들로 인해 죽은 알바트로스의 사체들만이 말없이 남아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다시금 느꼈던 점은 단순히 이 새가 마주해야 했던 재앙에 대한 연민을 넘어선 감정이었다. 만약 어떤 이유로 알바트로스 대신 인간이 이러한 운명을 맞았다면, 알바트로스 혹은 다른 존재가 인간을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지금은 이처럼 인간이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재앙을 피할 수 있었지만, 과연 죽은 알바트로스의 운명 대신 인간의 운명이 이렇게 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있을까? 과거의 역사가 준 교훈은 지구상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무차별적이다. 인간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영화 《알바트로스》가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보다 알바트로스의 재앙을 통해 여기에 투영된 우리 인간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죽은 알바트로스를 쓰다듬으며 흐느끼던 감독은 인간의 운명 또한 예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누리는 문명으로 인하여 강제로, 공동운명체가 되어버린 이 알바트로스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알바트로스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나아가 인간의 운명은 알바트로스가 겪고 있는 삶과 운명의 연장선에 있음을 새로이 깨닫게 되었다.
영화에서 감독이 남긴 한 마디가, 영화가 끝나고서도 특히 기억에 남았다. 바로 “There is no going back.”이라는 말이었다. ‘되돌아갈 길은 없다, 후퇴는 없다’ 정도의 의미로 번역될 수 있는 이 표현은 영화에서 새끼 알바트로스들이 처음 비행을 시도하기 위해 해변으로 이동하는 장면에서 나온 표현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표현이 알바트로스와 인간의 운명이 오버랩되며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직간접적으로 인간이 유발한 모든 원인으로 인해 현재의 알바트로스와 미래의 인간이 겪게 될 운명을 경고한 메시지로 읽힌다. 이미 우리 인간에겐 ‘순수의 상태’로 되돌아갈 방도는 없다. 대신 우리는 우리의 현재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미래 인간의 운명에 보내는 과거 인간의 애도와 사랑의 노래다.
Farewell, farewell! But this I tell
To thee, thou Wedding-Guest!
He prayeth well, who loveth well
Both man and bird and beast.
잘 가시오, 잘 가시오! 하지만 이 한마디는
당신에게 해야겠소, 결혼식 하객이여!
사람뿐만 아니라 새와 짐승을
잘 사랑하는 이가 기도를 잘 하는 이라고.
[번역 출처: 윤준 지음, 《코울리지의 시연구》, 도서출판 동인, 154p, Part VI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