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과 인간애가 충만한 삶을 보고 싶다면, 올리버 색스를”
《그리고 잘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로런스 웨슐러(Lawrence Weschler) 지음 | 양병찬 옮김 | [알마]
&
《올리버 색스의 오악사카 저널》
김승욱 옮김 | [알마]
“호기심과 인간애가 충만한 삶을 보고 싶다면, 올리버 색스를”
오늘은 올리버 색스에 관한 책 두권을 위주로 살펴보려 한다. 올리버 색스의 사망(2015) 이후 이제 5년이 지났다. 그 와중에 작년(2019)에 미국의 문학 중심의 잡지 <뉴요커>의 전속작가였던 로런스 웨슐러가 올리버 색스 평전 《And How Are You, Dr. Sacks?》을 세상에 내놓았다. 국내에는 《그리고 잘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 나왔다. 박식하고 박물학자와 같은 면모를 지닌 색스는 평생 호기심어린 관찰자로서 지냈다. 호기심으로 충만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쓴 《엉클 텅스텐》이란 책을 재미있게 읽었고, 노년에 성인이 된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반추해본 자서전 《온 더 무브》를 흥미롭게 읽었더랬다. 이런 기억을 떠올리며 타인이 바라본 올리버 색스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올리버 색스의 평전을 저술한 로렌스 웨슐러는 색스가 30대일 때 처음 만나 그가 82살에 세상을 뜰 때까지 반세기에 가까운 교류를 한 인물이다. 올리버 색스의 임상기록보다도 더 개인적인 일기(《오악사카 저널》)와 제3자가 기록한 평전을 동시에 읽으면서 한 인물에 대한 이미지를 보다 선명히 그려볼 수 있었다. 다만 대상에 대한 묘사를 사후 기록만으로 파악하여 전달하는 경우보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더욱 조심스럽고 부담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상대방을 옆에서 오래시간 지켜보고 교류해왔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글에는 거짓이나 지나친 미화가 있어서도 안되겠지만, 상대방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에피소드와 습관, 성향 등을 파악하고 있기에 평전을 읽게 될 독자에게 대상이 어떤 이미지로 남게 될 것인지를 분명히 고민했을 것 같다. 저자는 이 책에서 조심스럽게 그러나 솔직하게 색스의 면모를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 《그리고 잘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은 다른 평전과 달리, 저자가 색스와 반 세기에 가까운 교류를 통해 모아둔 메모와 함께 색스가 지인들과 나눈 대화를 제공하고 있고, 저자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와 가정사가 색스와 함께 하나의 직물처럼 짜여 있다. 저자의 가족들도 색스와 많은 시간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올리버 색스라는 인물을 재구성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저자인 웨슐러는 폴란드계 유대인이다. 이 점은 러시아에서 영국으로 온 유대인 이민자의 후손이자 글을 쓰는 올리버 색스와 많은 점에서 잘 통했을 것 같다. 오랜 시간 나누던 두 사람의 대화 기록과 메모는 계속되었지만, 처음 색스의 전기를 쓰려던 1984년에 색스의 요청으로 이 작업은 중단되었다. 그리고 무려 30년이 지나 색스가 사망하기 직전인 2015년에 색스는 저자에게 전기를 마무리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웨슐러가 쓰려고 했던 전기에 30여 년에 걸친 교류가 이번 평전에 더 추가된 셈이다.
웨슐러가 그려내는 색스의 모습은 무엇보다 엄청난 다독가로서의 모습이다. 자신의 전공인 신경학은 물론이고, 시와 소설 등의 문학과 철학, 그 밖의 논픽션 등을 가리지 않는 잡식성 독서가의 이미지를 선명히 보여준다. 저자가 기록하는 색스의 한 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2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독서의 유일한 가치는 ‘지식 습득하기’가 아니라 ‘새로운 의문 품기’였어.”(282면)
올리버 색스와 관련된 에피소드와 그가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따라가다보면 이 인물의 천진난만한 호기심과 상상력뿐만 아니라 강박증도 발견할 수 있다.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면 색스의 독서는 엄청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강박적인 독서로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역시 중시했던 것은 결국 저자들이 제공하는 지식의 권위에 압도되기 보다 여기에 맞서는 것, ‘의혹을 품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로 요약해볼 수 있다.
종종 등장하는 색스의 강박증적인 모습은 본인이 저술한 책들을 통해서 독자가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는 있겠지만, 제3자가 쓴 평전을 통해서도 그려볼 수 있었다. 자신이 남다르며, 뛰어나다는 점을 알고 있는 사람이 인지하고 고민했을 내밀한 생각들은 이렇게 웨슐러가 모아둔 메모를 통해 빛을 보게 되었다.
“영재는 허영과 나르시시즘의 끔찍한 압박감에 시달리는 법이야. (…) 나는 그 때부터 그런 압박감을 느꼈던 것 같아.”(460면)
이런 표현을 자신의 자서전에서 쓰기란 쉬운일이 아닐 것이다. 웨슐러가 색스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바라본 것은 재능이 많고 완벽해 보이는 인물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다라는 점이다. 웨슐러는 때로 엄살과 지나친 강박증 및 건강 염려증을 보이며 타인의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내면의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이를 신뢰와 애정어린 시선으로 색스를 한결같이 바라보았던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궁금했던 건 저자가 올리버 색스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이유였다. 이 정서는 과연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일까? 내가 공감이나 상상력이 부족해서 인지도 모르겠지만, 이 독후기록을 쓰면서 한 가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1984년 말에 쓰려던 올리버 전기를 2019년에 마무리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523면)
만약 내가 유명인인 누군가와 반 세기 가까이 교류하며 그 사람의 많은 일상, 장점 및 단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인간적인 애정과 존경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런데 이제 30년이 넘게 시간이 흘러서 이 지인이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이 사람에 대한 전기를 오랫동안 쓰고 싶었는데, 진전없이 중단되었다가 이 사람의 죽음에 앞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무엇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내가 그 대상보다 먼저 사망하지 않고 그에 대한 전기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된 것이 기뻤을 것 같다. 그렇지 않을까? 나는 이 사람의 삶을 정리해보겠다는 일생의 목표가 다시 생기고, 이 사람과의 좋았던 추억을 다시 떠올리며 상대방의 현존을 놓치지 않고 계속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아마도 이 점에 우선 감사한 마음이 들 것 같다. 웨슐러가 올리버의 부음 소식을 들었을 때 기쁨의 눈물을 흘린 배경에는 오랜 세월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이런 감정과 소회가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웨슐러가 ‘나를 압도한 첫 번째 감정은 반가움과 고마움이었다.’(625면)라고 한 대목에서 이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에는 앞서 잠깐 언급했던 보다 개인적인 텍스트로 가본다. 《올리버 색스의 오악사카 저널》은 아마추어 식물 애호가로서, 특히 소철과 같이 오랜 역사를 품은 양치식물을 좋아했던 색스의 색다르고 개인적인 여행 기록이다. “나는 지금 양치류 탐방여행을 위해 식물학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을 마난려고 오악사카로 가는 중이다.”(13면)로 시작하는 첫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의 흥분감과 기대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색스는 분야를 가리지 않는 잡식성 독서가의 면모를 지녔지만, 무엇보다 개인적인 이야기와 학문적인(지적인) 이야기가 어우러져 있는 글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19세기 박물학 연구자들의 여행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다윈의 저서들 뿐만 아니라 다윈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알프레드 월리스와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탐사여행기를 좋아한 것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양치류에 열광하는 식물 덕후들이 멕시코의 오악사카로 날아가서 다양한 양치류를 살펴보고 자신들의 애정을 확인하는 여행에 관한 책이다. 물론 저자는 식물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담고 있으면서도 멕시코의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놓치지 않는다. 코르테스를 비롯한 스페인 정복자들이 멕시코에 온 후 1500만 명이던 아즈텍인들이 50년 이내에 300만 명 정도로 감소한 역사에도 주목한다. 정복자들에 의해 학살당하고 노예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백인의 입장에서 색스는 반성적인 입장에 있는 편이었던 것 같다. 물론 색스의 다른 저서에서도 이런 점들을 짧게 내비치긴 하지만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텍스트에서 풀어내지는 않는 것 같다. 내가 이해하는 색스의 입장은 백인으로서 이러한 역사의 문제를 예민하게 주시하고 인지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이를 독자에게 제시해주는 ‘질문하는 자, 생각거리를 던지는 자’에 더 가깝다.
이 책은 식물과학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통찰이 담겨있지만, 인간에 대한 관심과 관찰을 놓치지 않는다. 바로 집단 속에서 느끼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기록을 빼놓지 않는다. 색스가 ‘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136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평소에 담아두고 있던 심정을 엿볼 수 있었다. 10일간 함께 한 무리 속에서 색스는 유일하게 동행인 없이 홀로 참가했다.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글쓰는 사람으로서 혼자만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도 보인다. 내성적인 나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다소 불안해하곤 하는데, 유명인이면서 수많은 환자를 대하던 색스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오악사카에서 그가 만난 이 집단에 대한 감정은 무엇보다 기쁨이었다. 소속감에 대한 기쁨. 일행에는 레즈비언, 게이 커플도 있었는데, 참가자들 모두 서로 다른 조건과 무관하게 식물학에 대한 사랑만으로 상대방을 포용하고 강한 유대감을 느낀다. 색스의 평전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지만, 내가 보았던 색스의 ‘관심받고자 하는 내면의 어린아이’는 이 덕후들의 모임에서 비로소 편견 없는 관심을 받고 만족감을 느꼈던 것 같다.
한편 나는 여행일기를 읽으면서 오늘날 현대인들이 자연과 얼마나 괴리되어버렸는지도 느낄 수 있었다. 색스는 오악사카에서 술을 전문으로 담그는 마을, 염색을 전문으로 하는 마을 등 1,000년 넘게 나름의 기술을 전통으로 유지해온 마을을 인상깊게 기록하고 있다. 소위 문명 사회에서 온 사람의 눈에 비쳤던 점들에 주목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색스는 이렇게 자신의 소회를 밝힌다.
“더 ‘발전’되었다는 우리 문화와는 얼마나 다른가. 우리 문화에서는 누구도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법을 모른다. 펜이나 연필은 도대체 어떻게 만드는 것인가? 꼭 필요한 경우에 우리가 그것들을 직접 만들어 쓸 수 있는가?”(156면)
우리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요즘도 거리를 걷거나 어느 장소에 가면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우리 삶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야만 하는지 모른다. 나의 생존 하나 하나가 타인의 손에 지나치게 달려있는 형국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 삶의 요소를 지나치게 ‘외주화’해버린 것은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도시에 살면서 타샤 튜터 할머니처럼 스스로 사과를 재배하여 수확하여 사과주스를 만들고, 양초를 직접 만들며, 다양한 채소를 키워서 식탁에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도시에 사는 우리에게 도시는 우리의 ‘자연’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하지만 젊은 세대가(전자기기를 다루는 능력 외에) 때로는 우리의 부모 혹은 조부모 세대와 달리 일상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던 것을 너무나 쉽게 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분명히 생각해볼 문제다. 책의 맥락과는 조금 벗어나게 되었지만, 색스가 한 말에서 잠시 다른 생각을 해보았다.
한 인물의 삶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경이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인간이란 그 자체로 완전할 수 없다는 것도 함께말이다. 그 자체로 불완전한 대상으로서(사실 이 표현 자체도 불합리하다) 인간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이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색스가 쓴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식물 탐사 여행기에서 역시 지식과 사람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과 호기심이 책 전체에서 드러나는데, 이 모습은 우리가 사람, 타인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특히 색스의 여행기록에서 그의 어린이 같은 호기심과 관심이 경탄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모습을 통해 이러한 단서들을 확인해볼 수도 있겠다. 대상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은 어쩌면 자연과 현대인을 이어주는 유일한 에테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 인간은 우주의 시간에 비해 지극히 짧은 찰나의 순간을 사는 존재다. 나는 그 인간이 남긴 유산을 찾아보고 나의 삶을 돌아볼 수 있다는 사실에도 경이로움을 느낀다. 특히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다른 이들이 남긴 궤적을 찾아보면서 남은 나의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내가 올리버 색스의 평전과 여행 기록 두 권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은 나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애정과 돌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상당한 노력 역시 필요하다는 것도 함께 말이다.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 나는 삐딱한 사람, 도덕률 폐기론자, 변절자, 영지주의자 등 기존 질서를 뒤집어엎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매혹되었던 적이 있었어. 그러나 지금은 도덕률 폐기론의 전통 - 사실은 전통 자체 - 에 깊이 뿌리박고 있어." (올리버 색스의 말) - <그리고 잘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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