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존엄을 발견하는 경험과 기억의 전염병 연대기’
《페스트 La Peste》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지음 | 변광배 옮김 | [미르북컴퍼니]
“그 순간부터 페스트는 우리 모두의 문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91면)
전염병의 정체가 확인된 후 도시가 봉쇄되면서 도시에 갇힌 사람들은 모두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가 된다. 막연한 공포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거주자들의 삶이 추상에서 구상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우리는 이미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 전염병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았는지 지난 9개월 넘게 구체적으로 목격한 바 있다. 70여년 전에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발표한 《페스트》를 우리가 겪은 상황, 그 구체성과 함께 비교하여 읽으니 우리의 경험과 깜짝 놀랄정도로 닮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1947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34세의 카뮈가 연대기적 방식으로 실감나게 써내려간 전염병에 관한 작품이다. 프랑스령 알제리 해변에 위치한 오랑이라는 중소도시를 9개월 남짓 휩쓸어버린 페스트에 관한 이야기이다. 코로나19 감염병뿐만 아니라 페스트 역시 오랜 생명체의 역사를 거쳐 신중하게 진화해온 잘 작동하는 하나의 체계였다. 이 소설이 단순히 허구의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은 이유는 전염병이 군림하는 봉쇄된 지역의 공동체가 겪는 그 구체적인 양상이 아주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얻은 인간의 경험들이 모두의 기억으로 전달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염병은 지구가 존재하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전염병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단지 사람들만 사라져갈 뿐이다. 이런 까닭으로 소설의 화자는 봉쇄된 도시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기억을 이야기하기 위해 연대기를 남기게 된 것이리라. 사람이 사라지면 이러한 기억 또한 단절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중심 화자는 30대 중반의 의사 베르나르 리외다. 아마도 소설을 쓸 당시 작가의 나이와 비슷한 젋은 의사를 상상했을 법하다. 이 이야기 속에 묘사되는 의사와 의료 시스템에 대한 정보는 아마 카뮈가 10대 후반부터 오랫동안 작가를 괴롭히던 폐결핵의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병원이나 요양소, 병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소설에 상당히 반영되었을 것이다. 한편 2차 세계대전 당시 기자 활동과 레지스탕스 조직 신문 편집자를 지낸 경험은 소설 속에서 기자로 등장하는 레몽 랑베르에게 적용되었을 것이다. 소설을 읽은 느낌을 간결하게 표현해보면 ‘인간의 존엄에 대한 호소’가 아닐까. 다만 이와 관련한 정서가 오늘날 독자들의 정서에 거부반응이 없는지 확신하진 못하겠다. 카뮈의 시대와 비교해서 우리는 이미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극도로 파편화된 현대인들에게 인간에 대한 카뮈의 관심과 애정이 다소 부담스럽게 다가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삶을 다시 추적해보면 작가의 작품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카뮈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1년 전(1913년)에 출생했다. 그러니까 그는 20세기에 가장 참혹했던 전쟁을 모두 겪은 셈이고, 특히 제2차 대전 당시에는 30세 전후의 청년으로 현실에 적극 참여하는 지식인으로의 행보를 보여주기도 했다. 게다가 신문 편집자로서 전쟁 상황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이를 전달한 경험을 통해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숱하게 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곧 인간이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면 인류에게 무엇이 남을지 명명백백하게 자각한 사람이 바로 카뮈가 아닐까. 그의 문학을 이해하는데 이 점을 놓치지 말고 따라가볼 수 있을 것 같다.
구체성으로 경험되는 페스트(우리 밖의 페스트)
소설에서 전염병은 구체적으로 감지되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도시 전역에서 쥐들은 이미 죽어있거나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뒤이어 사람들은 하얗게 변해버린 눈, 거친 숨소리와 헛소리, 몸에 드러난 종기, 구토 등 병의 징후는 진화된 병원균의 치밀한 계획을 보여주었다. 번식하고 주변으로 퍼져나가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숙주인 인간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페스트가 경험되는 감각은 달라진 도시의 소음과도 관련이 있었다. 가게들은 문을 닫고, 차량은 제한되어 거리는 침묵 속에 놓여 있다. ‘침묵의 소리’ 역시 사람들이 경험하는 전염병의 구체적인 사회적 징후였다. 병을 막 진단받은 환자는 경적소리를 내는 앰뷰런스에 실려 격리되고, 페스트에 걸린 환자는 적막 속에 고통스런 신음을 내며 죽어간다. 거리는 다시 적막 속에 이따금씩의 차량 소음과 기계 소음이 간간이 들릴 뿐이다. 그나마 전염병이 나타나기 전에는 항상 들리던 소음이었을 텐데 말이다. 이렇게 전염병은 다양한 모습으로 지각되며 그 실체를 드러낸다.
도시가 봉쇄되자 도시에 남은 시민들의 삶 또한 급변한다. 이 점은 이미 현재 진행중인 전염병으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70여년 전에 작가가 묘사한 삶의 변화 또한 지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치료약이 부족해지고, 병실에는 환자가 넘쳐난다. 가게들이 문을 닫고 경제활동이 중단되어 실업자와 다름없는 휴직자들이 넘쳐나게 된다. 이들은 영화나 오페라를 보며 시간을 보내려 하지만 필름 유통이 중단되고, 레퍼토리에는 변화가 없다. 물자가 공급이 차단되니 차량 운행이 금지되고, 행정 당국에서 배급해주는 음식에 적응해야 했다. 우편물 반출이 안되니 통신수단마저 전보로 제한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물질적인 제약뿐만 아니라 가차없고 기약없는 이별을 겪은 모든 이들에게 심리적 고통으로 다가온다. 감옥 밖의 수감자와 다름 없는 생활을 감내하며 고독과 회한, 체념의 정서를 경험한다. 코로나 전염병을 겪으며 몸과 마음에 가해진 구속을 통해 경험한 것을 통해 소설의 상황이 실감나게 이해되었다. 또 사람과의 거리두리를 통해 환자와 보호자와의 강제 격리와 극단적인 고립과정을 통해 동정심에 피곤을 느끼고, 윤리 의식마져 변화가 찾아오는 이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온전한 인간으로서 각자 자신의 삶에 집중하여 스스로를 돌보고 타인에게 공감하는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전염병이 오래 정체되면 결국 사람들은 인간되기의 과정에 스스로 탈진해버리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봉쇄된 지역의 사람들에게 삶은 이제 단단한 지면에 발을 딛지 못하고 부유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자각할 수 있는 인간은 스스로를 방치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 경험하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조건에서도 자신과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화자인 의사 베르나르 리외 뿐만 아니라 조제프 그랑, 장 타루와 같은 인물들은 전염병이 한창 진행될 때에도 의료봉사대에 자원하여 활동했다. 뒤에서 타루에 대해 좀더 언급할 것이지만, 조제프 그랑 같은 인물은 작품에서 존재감이 크지 않아보이지만 실은 생각보다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랑은 50대의 시청서기로, 노란 콧수염의 키가 크고 구부정한, 다소 소심한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출세를 하기 위한 커다란 포부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전염병이 돌자 자신의 일 외에 의료보건대의 서기를 맡겠다고 한 인물이었다. 이런 그랑이 소설 속에서 나름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본 이유는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작은 역할이나마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이었다. 혈청을 개발하느라 온 힘을 쏟는 늙은 의사 카스텔처럼 그랑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조용히 일상의 노력을 기울이는 존재다. 그랑(Grand)의 이름과 대조적으로 보이는 한 사람의 작은 참여, 움직임을 통해 하나의 일상이 지닌 가치와 무게를 가만히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국면에서 우리는 무엇을 달리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절망적이고 단조로워 보이는 이런 노력들이 우리의 필연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병에 걸리지 않게 기도하거나 살아 남아 여생을 살던가, 그렇지 않으면 병에 굴복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외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가 있을까? 그랑이 자신의 역할을 흔들림없이 꾸준하게 완수해나가는 것처럼 주요 화자인 리외 역시 이런 행동에 대해 확고하고 구체적인 윤리 의식을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리외는 무신론자로서 파늘루 신부와 달리 신의 섭리를 믿지 않는다. 대신 패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일 뿐이라고 믿는다. 도시가 봉쇄되기 직전 아픈 아내를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요양소로 보낸 리외는 의도치 않은 이별을 겪었다. 연락도 제대로 취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흔들림없이 해내고자 하는 인물이다. 물론 리외는 타루에게 자신이 가난한 노동자 가족 출신으로서 처음에 의사가 된 것은 사회적 지위가 보장된 직업이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 치명적인 전염병의 한 가운데에서 리외는 도의로 페스트와 싸우며 헌신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랑과 리외는 페스트의 도래 이후 구체적인 가치관 및 행동 기준에 따르는 인물이다.
추상성으로 기억되는 페스트(우리 안의 페스트)
소설을 읽으면서 줄곧 문자 그대로의 질병인 페스트가 가져온 삶의 변화와 국면들을 실감나게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 페스트가 새로운 의미를 지니며 의미가 확장되는 순간이 나온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롭게 다다온 인물이 바로 장 타루이다. 타루는 결론적으로 말해 10대 후반에 가출하여 오랑에 정착한 인물이다. 검사였던 아버지를 둔 유복한 가정의 아들이었다. 타루는 어느 날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내린 공판을 보기 까지는 부자간에 사이도 좋았을 것이다. 타루는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내려 사람의 목숨을 결정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타루는 자신의 개인사를 리외에게 들려주는데, 자신은 오랑에 와서 전염병을 만나기 전에 이미 ‘페스트’로 고통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곧바로 더 알듯말듯한 말을 리외에게 덧붙인다. “나는 그때 적어도 내 경우 긴 세월 동안 끊임없이 페스트에 걸려 있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333면) 실제로 페스트에 걸렸다는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런 상황에서 타루는 한 가지 실마리를 더 전해준다. 타루는 “내가 간접적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의 죽음에 동의했다는 것, 숙명적으로 이런 죽음을 유도한 행위나 원칙을 선(善)이라고 여김으로써 그것을 야기하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한다(333면). 그러니까 타루가 자신의 개인사를 꺼내며 언급한 ‘페스트’는 전염병으로서의 페스트가 아니었던 것이다. 우선적으로 파악되는 의미는 사형제도 및 인권과 관련 있다는 단서였다. 타루는 사형선고를 ‘역겨운 도살 행위’라고까지 표현하며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행위 자체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타루가 ‘우리 모두는 페스트 속에 있다’, ‘내가 명명백백히 알고 있는 것은, 각자가 그것을, 페스트를 자기 속에 지니고 있다는 것’ 이라고 말했을 때(336면), 그가 사용한 ‘페스트’의 의미를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붉은 법복을 입은 그들’을 ‘최상급의 페스트 환자들’이라고 표현한 것에서도 그 연관성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타루가 언급한 ‘페스트’는 사형선고와 같이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인간 사회와 문명의 야만, 제도의 폭력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인간이 저지르는 이런 잔악한 행위와 제도에 무감각한 것, 이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 말로 타루가 말한 ‘페스트’에 걸린 징후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구체적인 경험으로 다가오는 실체적인 질병으로서의 페스트는 타루의 경험과 기억을 거쳐 추상적인 ‘페스트’로 거듭나게 되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질병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타루가 자신의 입으로 이야기하는 이 부분이 특히나 흥미롭게 다가왔다. 타루는 자신이 속한 사회가 만들어 놓은 관습과 억압의 폭력에 무의식적으로 동조함으로써 자신도 일종의 가해자임을 느끼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연대의식과 죄책감을 느끼는 예민한 양심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지성인이기도 했다. 인간이 인간임을 주정하는 행위,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행동과 관습을 돌아보게 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타루의 ‘페스트’는 비가시적인 대상으로 다가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잠식하는 야만의 상태로도, 혹은 우리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악마를 지칭하는 추상적 개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를 읽다보면 이렇게 이질적인 개념의 ‘페스트’가 등장한다. 하나는 구체적인 전염병으로서의 페스트라면, 다른 하나는 상징적인 하나의 추상적 개념으로서 ‘페스트’다. 타루가 꺼내는 자신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이 추상은 분명히 사형제도로 대변되는 인권문제와 우선적으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하긴 했지만, 카뮈가 이 소설을 쓴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과 겹친다. 전쟁터에서 사망한 군인들을 제외하고도 나치 독일에 의해서만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사망했으며,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독일인이 60만 명이 사망한 시기다. 전쟁의 본성 상 인권이 유린당하는 야만의 시기였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개념 자체에 대해 수많은 지식인들이 좌절과 회의감에 빠지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인간으로서 싸워야하는 대상은 병원균과 바이러스 뿐만 아니라 인간에 의해 자행되는 ‘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은 무엇보다 시대를 견디어온 당대 지식인의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결국 카뮈에게 ‘페스트’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인간의 무지와 몽매를 상징하는 단어로 한 자리를 차지했을 것 같다. 그러므로 《페스트》에는 때로는 구체적이며 때로는 추상적인 층위를 갖는 ‘페스트’의 의미로 텍스트를 읽어나갈 수 있겠다.
그밖에 기자인 랑베르와 예수회 신부인 파늘루 신부도 흥미로운 인물인데, 이들은 소설 속의 사건들을 겪으며 성격에 변화를 가져오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각각 ‘사랑’과 ‘신앙’이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강력하게 따르다가 보건위생대의 활동에 참여 하면서 페스트가 가져온 인간 조건의 구체성에 주목하게 되는 인물로 그려진다. 파리에 두고 온 연인을 만나기 위해 도시 탈출 방도를 찾던 랑베르는 리외의 개인적인 상황을 알게되면서 탈출 계획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다음날 새벽에 리외에게 전화를 걸어 자원봉사단에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전한다. 리외 역시 부인을 멀리 떨어진 요양소에 지내며 가차없는 이별을 겪는 가운데,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랑베르는 리외의 사정을 듣는 순간 비로소 이 문제(페스트)가 자신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자신을 이방인으로 여기며 이곳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겼던 의식은 이제 자신이 ‘이곳 사람’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랑베르가 페스트를 우리 모두와 관계된 것으로 새롭게 인식하는 순간이다. 파늘루 신부 역시 예심 판사 오통의 아들이 페스트에 걸려 죽어가는 과정을 오랫동안 지켜보는 경험을 통해 신부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질병의 견해에 변화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소설 속에서 랑베르와 파늘루 신부는 그랑이나 리외처럼 꾸준한 성격을 지니지 않았다. 대신 어느 사건을 통해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고 질병에 대한 추상적 견해에서 구체적인 견해를 지니도록 변화를 겪는 인물들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질병 및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을 묘사한 대목에 특히 주목했다. 무엇보다 올해 코로나19를 겪으며 작가가 기술해 놓은 전염병에 대한 통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질병에 대응하는 여러 인간들의 모습이나 인간의 무지에서 비롯된 악덕에 저항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마도 카뮈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리외의 입으로 작품 속에 마련해둔 듯하다. “나는 성자들보다는 패배자들과 더 연대감을 느껴요. (…) 내 관심사는 한 명의 인간으로 있는 겁니다.”(339면) 그러므로 ‘페스트’에 걸리지 않으려고 깨어있는 것 말고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돌아보게 된다. 한 사람의 자리를 지킨다는 것, 한 사람의 몫을 해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21세기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어떻게 다가갈지 궁금하다. 나는 이 글의 처음에 인용한 문장에 그 실마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페스트가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자각하는 것말이다. 질병이든 무지에 의한 악이든 모두 인간이 쉽게 고립되도록 만든다. 이러한 조건이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말이다. 이에 저항하는 길은 상대방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임을 깨달을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인간에 대한 애정과 상상력이 필요한 작업인 것이다. 타인에 대한 억압과 폭력에 동조하지 않는 것에서 나아가 무관심에 저항하는 일이 아닐까. 추상과 구상의 ‘페스트’로부터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서 나의 손을 타인에게 내미는 일은 곧 인간이란 종의 존엄을 담보하는 길이기도 하다. 페스트가 리외에게는 ‘끝없는 패배’를 의미하더라도 이에 대항하여 투쟁을 중단하지 말아야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작가는 나에게 이것이 필연임을 호소하고 있다.
"죽은 사람이란 사람들이 그가 죽는 것을 목격하는 경우에만 무게를 갖는 법이다."- P10 "그 순간부터 페스트는 우리 모두의 문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P91 "페스트는 마치 추상처럼 단조로웠다."- P122 ‘당신에게 이 페스트가 어떤 존재인가?‘ "세계 속의 악은 거의 항상 무지에서 비롯되고, 또 무식한 선의는 악의만큼이나 많은 피해를 입힐 수가 있다."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도의뿐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리외, 나는 이 도시와 전염병을 만나기 훨씬 전에 이미 페스트로 고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때 적어도 내 경우 긴 세월 동안 끊임없이 페스트에 걸려 있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 내가 간접적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의 죽음에 동의했다는 것, 숙명적으로 이런 죽음을 유도한 행위나 원칙을 선이라고 여김으로써 그것을 야기하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명명백백히 알고 있는 것은, 각자가 그것을, 페스트를 자기 속에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래요, 세상에 그 누구도 그 해를 입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성자들보다는 패배자들과 더 연대감을 느껴요. (...) 내 관심사는 한 명의 인간으로 있는 겁니다." "페스트 간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고, 수십 년간 가구나 옷 속에서 잠들어 있을 수 있어서, 방, 지하실, 짐가방, 손수건, 폐지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사람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깨워 그것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에서 죽으라고 보낼 날이 분명 오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