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꼭 드는 날 - <오우아(吳友我)>를 다시 읽으며
마음에 꼭 드는 날
<오우아(吳友我)>를 다시 읽으며
- 박수밀 글 | [메가스터디북스]
코로나19가 급속하게 퍼지던 지난 여름에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쳐본다. 책 미치광이라는 의미의 간서치로 불리는 이덕무 선생의 단상을 모아놓은 책이다. ‘나는 나를 벗 삼는다’는 의미의 <오우아(吳友我)>. 이덕무 선생은 호를 여러 개 갖고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오우아거사(吳友我居)’라고 한다. 당대의 신분적 제약으로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지독히 가난한 환경에서 지내야 했다. 그 삶의 고단함은 지금 내가 속한 환경만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일 테다. 그에게도 친분을 나누던 박지원, 홍대용 등 선배, 친구가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고난은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붕이 뚫려 있고 기둥마저 기울어가는 초가집 단간 방에서 한겨울 엄습해오는 외풍을 막기 위해 책을 뜯어 막고, 이 책들로 이불삼아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슬픔이 닥치면 사방을 둘러보아도 막막해서 그저 한 치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 싶고, 살고 싶은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어진다.”
-이덕무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중에서 재인용(43면)
그럼에도 이덕무는 ‘다행히’ 두 눈이 있고, 책을 읽을 수 있어 절망을 가라앉히고 마음의 고요를 찾을 수 있었노라고 말한다.
나 역시 나의 부족함 때문에, 나와 가족이 어려운 환경에 놓이기도 한 것 같아 그저 막막하고 절망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나마 책을 읽곤 하는 것이 다행인지 모른다. 때론 내가 더 열심히 살지 않아서일까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고, 무기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사람들은 나의 고민과 죄책감과 미안함, 때론 땅 깊숙이 꺼질 것 같은 좌절감을 알 길이 없다. 그저 나의 좋은 환경만을 보거나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를 보라고 할 뿐. 이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실없는 소리만 하는 별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문해본다. 나는 타인의 삶을 제대로 공감한 적이 있는지, 혹은 노력이라도 해본 적이 있는지 말이다.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내 삶을 지금까지 되돌아보면 좋은 가족과 친구, 지인들에 둘러싸여 유복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언제나 나는 이 세상에 홀로 던져져서 나의 힘으로 생존해야만 한다는 두려움과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엔 홀로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텐데 말이다. 무엇이 두려워서 타인의 친절을 거부하거나,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걸 그토록 두려워했을까. 가장으로서 막막한 심정을 이덕무의 글에서 만난다.
복숭아 나무아래서 붓가는 대로 쓰다
다시 <오우아>를 뒤적이다가 또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한다. 이덕무 선생이 아이의 손을 잡고 복숭아 나무 아래로 갔다. 나뭇잎을 따고, 아이와 함께 나뭇잎에 붓으로 글씨를 썼다. 마음이 가는대로. 이덕무 선생의 생각이 이어진다. ‘형편이 좋은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누구나 근심 걱정은 있기 마련’이라고 말이다.
“일 년 아니 한 달에 마음에 딱 맞는 날이 얼마나 될까?”
-이덕무 <만제정도(?題庭桃)>중에서 재인용(44면)
지금으로부터 358년 전인 1762년 6월 21일의 기록이다. 아이의 손을 잡고 나뭇잎에 마음 가는 대로 쓴 글자들을 보며 미소 짓는 두 부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가난, 가족들의 병치레에 근심이 끊이질 않았을 그의 서글픔을 느끼다가도, 이 찰나의 ‘행복감’을 잊지 않은 선생의 마음을 읽어본다. <오우아>의 저자가 한 상상대로 이덕무는 아이와 저물녘 마루에 앉아 순간의 평화로움을 즐겼을 것이다. 문득 사람이 일생을 마칠 때, 이런 일상의 추억 하나 남아 있지 않다면 얼마나 허무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의 소똥'을 아끼다
이덕무 선생의 고난과 근심을 들여다보면서 사람이 자신을 긍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는다.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시하고 포장하는 나의 모습도 발견한다. 나 자신을 너무나 오랫동안 불신해왔던 것이 한 가지 이유가 될 것이다. 나를 드러내고, 나의 견해를, 합리적인 근거에 의해 도출된 견해를 단정해보는 일이 익숙하지 않을 것인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나의 두려움, 나의 무지를 제대로 마주보고 들여다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나의 감정을 느끼는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감정이 과연 어떤 것인지 거리를 두고 들여다보는 일을 말한다. 바쁜 사회생활에 매몰되어 생각 없이 산다는 것은 이런 나의 두려움, 무지, 나의 결핍을 제대로 인식해보고 나의 입장을 정하는 것, 나름의 답을 구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과정을 줄곧 회피해온 것은 아닐까. 이 작업은 누구나 홀로 해내야 하는 것이지만, 이 과제의 양상이 나만의 것임이 아니라는 점에 약간의 위안을 얻기도 한다.
다만 내가 책을 읽는 일은 나의 결핍을 자각하고 위로를 받기 위해서는 아니었는지 자문해본다. 책을 통해 ‘정답’을 찾을 수 있을까? 나만의 문제에 대한 정답이 책에 쓰여 있을 리 없다. 다만 수많은 이들이 남긴 사유의 기록만이 내 앞에 주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기록만은 아니고, 개별적인 의식의 수준을 넘어서 공유되는 보다 보편적인 의식이 있을 것 같다. 선배들이 지나온 과정을 통해 내가 내 문제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내가 어떤 방향으로 난 길을 갈지 보다 구체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문득 이덕무 선생이 당신의 호를 ‘오우아거사’로 한 것이 어떤 어려움과 고난에도 자신을 긍정하고 아끼겠다는 다짐과도 같이 느껴진다.
“소똥구리는 소똥 경단을 스스로 아끼기에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 이덕무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중 재인용(189면)
이덕무의 <선귤당농도>는 그가 20대 중반에 쓴 산문집이라고 한다. ‘선귤당’ 또한 이덕무 선생의 호다. ‘매미와 귤이 어우러진 집’에서 활짝 웃는 이덕무 선생을 상상해본다. 일상에서 길어 올린 아름다운 문장들로 씌여 있다. 오늘 무언가에 근심과 서글픔을 느꼈다면,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발견’하고, 나에게 주어진 나만의 ‘소똥’이 있을 것이다. ‘나의 소똥’을 아끼는 것. 이게 오늘 나에게 주어진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