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briele Basilico 사진전'을 보고
《Gabriele Basilico사진전》
Photography of Italy
2020.10.20 – 12.02 KF Gallery
시내에 잠시 나갈 일이 있어 을지로에 들렀다가 KF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사진전을 관람했다. 사진을 전공하는 친구가 가보라고 했던 기억이 나서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렀다.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출신인 사진작가 가브리엘레 바질리코(Gabriele Basilico, 1944-2013)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12월 2일 까지). 평일인데다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어서 그런지, 점심시간이라고 해도, 넓은 공간에 대개 나 혼자 아니면 두 명 정도로 관람할 수 있었다.
바질리코는 대형 카메라로 도시의 풍경을 주로 찍는 작업을 했던 것 같다. 영상을 보니 말년에는 컬러 작업도 했던 모양인데, 전시된 사진은 모두 흑백 사진 작업이었다. 이번에 전시된 사진은 1978년에서 2010년 사이에 작업한 사진을 고르게 선별했다고 나온다. 사진을 전공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바질리코의 사진 작업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들은 ‘베이루트’를 찍은 풍경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번 국내 전시에는 이 사진이 빠져있었다. 아쉽지만 영상에서 보는 몇 장의 이미지로 만족해야 했다.
지난 8월 4일, 항구에서 항구에 몇 년간 저장되어 있던 질산 암모늄이 폭발하여, 400여 명이 죽고, 6500 여 명이 부상했다는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바질리코는 바로 이 레바논의 베이루트를 찍은 사진으로 이름이 잘 알려져 있는 모양이다. 1991년에 여러 사진작가들과 함께 15년 간 지속된 내전으로 파괴된 도시 베이루트에 관한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찍은 사진들이라고 한다. 도시의 건물에 유리창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고, 모든 건물은 앙상한 구조만 남아 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이 터질 때 순간 발생한 엄청난 열로 사람이 증발한 흔적을 보는 것 같은 충격이 느껴진다.
요즈음 그림 전시회나 사진전에서 많은 관람자들이 작품을 보면서 폰이나 카메라로 사진 찍기 바쁜 모습을 본다. 모든 사진을 담아가려는 사람도 있다. 나도 이전에 그렇게 하곤 했지만, 찍어두고는 다시 들여다 보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촬영이 허용되는 한에서 마음에 드는 작품 한 두 장만 찍어오는 것으로 그치고, 대신 넉넉히 시간을 들여 그림이나 사진을 눈에 담아오는데 집중하는 편이다. 게다가 사람이 많지 않아서 떠밀리듯 감상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 작품의 특징을 찬찬히 관찰하면서 메모해두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집에 와서 메모를 봤을 때, 머릿속에서 제법 생생하게 그림이나 사진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관람자가 거의 없어서 메모와 함께 사진을 보았다.
사진 전공인 친구는 바질리코의 사진에서 어떤 ‘인성’같은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좋았다고 했다. 안타깝게 나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바질리코의 사진은 대부분의 대형 카메라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사진처럼 조용하다. 하지만 그의 사진이 조금 색다른 점은 도시의 건물을 찍을 때 어떤 패턴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건축전공을 해서 그런지 상당히 치밀하게 화면을 구성하는 ‘균형감’ 같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평면의 영역 속에 관람자의 관습적인 기억에 의존하는 전경과 후경의 배치, 도시의 수직 구조 같은 기하학적인 느낌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라고 했던가. 바질리코의 사진 역시 여러 사진가들로부터 받은 영향이 보이는 듯 했다. 영상에서도 작가가 언급하지만, 건축을 전공한 바질리코가 사진을 시작할 때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의 사진 역시 브레송 사진의 흔적들이 보인다. ‘트리에스테 1985’사진 들 중에서 해질 녘의 바닷가/부두를 찍은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전망대처럼 보이는 위쪽의 공간을 에워싸고 있는 가드레일은 기하학적인 구조를 하고, 화면의 가운데를 에워싸면서 화면을 중심과 외부로 분할한다. 한 쪽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이는데, 계단을 올라가는 시선 위로는 멀리 바닷가에 배 한 척이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반면에 오른쪽 아래 어둑한 그늘 속의 회랑에는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연인이 있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처럼 바질리코는 대형 카메라로 화면을 구성하고, 프레임 속의 동적 요소가 나름 균형있는 지점에 올 때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리며 작업을 했을 것이다. 하루에 한 장을 찍을까 말까한 대형 카메라 작업에서 그는 기하학적 요소와 동적 요소가 적절한 배치나 그림자의 위치가 나올 때까지 많은 시간을 기다린 정황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조용한 그의 사진에는 대개 사람이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 처음 보면 사람이 없는 듯 하다가도, 자세히 보면 어딘가에 사람이 박혀 있는 경우가 많다.
영상에서 폐허가 되다 시피한 베이루트의 건물 잔해들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가는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프레임을 구성하고, 빛과 동적요소가 만족스럽게 혹은 적절하게 배치가 될 때까지 기다린 사진들이다. 시원한 도시의 풍경 속에 무너저내릴 법한 건물 잔해들, 그 사이를 외롭게 걷는 사람으로 인간의 흔적을 남겨두었다. 고요한 피렌체 사진들 중에서도 적막한 도시 공간의 어느 구석엔 자세히 보면 대개 사람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가본적은 없지만, 이탈리아에서 광장은 삶 그 자체를 규정하는 공간인 것으로 보인다. 이 나라 사람들의 삶은 바로 광장에서 시작해서 광장에서 끝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바질리코가 기록한 오랜 도시의 흔적,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현대 문명의 모습을 보다보면 수직선은 언제나 문명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자연은 수평선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명은 <밀라노, 공장들의 초상> 프로젝트에서와 같이 수직으로 올라가는 공장의 굴뚝을 낳았다. 혹은 건물 위로 나 있는 계단, 가로등 그리고 건물의 외벽에 조각되어 있는 그리스 신전 모양의 부조, 이오니아 양식의 신전 기둥을 닮은 가짜 기둥 조각과 같은 구조물을 통해 화면의 수직선을 구성하는 것이다.
‘베네치아 1998’의 어느 사진은 인적이 없는 광장에 동상이 높이 세워져 있고, 아래 광장 바닥에는 비둘기 한 마리가 있다.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광장에 동상과 비둘기 한 마리가 외롭게 서 있다. 이 장면이 오히려 이미지가 제시하는 장면의 비현실적인 느낌을 배가한다. 베네치아 골목을 찍은 바질리코의 사진은, 파리 골목을 찍은 앗제의 사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미묘한 차이라는 것은 무시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앗제의 느낌과는 다르게 화면을 꽉 채우는 건물이 무게감과 동적 느낌을 더해준다. 이건 아마도 화면 구성상의 소실점 배치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전공자가 아닌 나로서는 가끔씩 이렇게 사진의 특징을 메모해놓곤 한다. 그런데 바질리코의 사진은 화면의 구성 뿐만 아니라, 흑백 톤 그 자체에서 나오는 매력이 있다. 특히 영상에서도 작가가 설명하고 있던 현대적인 건물의 곡선 외양과 계단에서 보여주는 톤의 매력이 인상적이었다. 이 점은 ‘밀라노 1989’ 작업 중 밤에 두오모처럼 보이는 건물을 촬영한 사진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둥근 지붕의 위에 나온 구조물이 지붕과 함께 밤의 암흑 속으로 사라져가는 듯한 세심한 톤의 표현이 인상적이 었다. 가운데 중심적인 건물을 양쪽에서 에워싸는 듯한 배치는 작가의 도시 사진 프레임 구성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보인다. 이런 유형의 작업 중에서 양쪽 건물, 담벽 사이의 톤이 주는 미묘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업들이 있기도 하다.
건물의 정면을 찍으며 화면을 가득 메우게 만든 구성은 다양한 실험적인 시도를 했던 사진가 워커 에반스의 작업들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또는 김아타의 작업처럼 오랜 노출로 부동의 건물을 제외한 사람의 흔적이 모두 사라져 버린 도시 풍경을 닮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진 역시 창밖으로 빨래를 널어 놓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바질리코의 사진은 자세하고 웅장한 느낌을 주는 듯하면서도 언제나 사람의 자취를 볼 수 있다. 다양한 작가의 영향이 느껴지는 사진들 역시 소형 카메라가 아닌 대형 카메라로 작업을 하니 또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도시의 풍경을 담으면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을까. 기독교 문화에서 세레자 요한의 탄생을 즈가리아에게, 그리고 예수의 탄생을 동정녀 마리아에 고지한 대천사 가브리엘의 이름을 딴 사진작가 바질리코. 그는 관람자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이야기 하고자 했을지 궁금하다.
이번 바질리코의 사진전은 그가 컬러 사진 작업을 한 말년의 작업들, 이를테면 샌프란시스코 사진이나 상하이, 이스탄불 시리즈 처럼 다양한 장소에서 촬영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지는 않다. 이번 사진전의 주제가 ‘이탈리아의 사진’이듯,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촬영한 사진들만을 대상으로 했을 것으로 보인다. 주한이탈리아대사관, 주한이탈리아문화원이 주최한 것으로 보아, 이탈리아의 도시와 이탈리아가 낳은 유명 사진작가의 홍보를 겸해서 하는 전시로 보인다. 바질리코의 다른 사진들은 국내 사진 전문 출판사 열화당에서 《가브리엘레 바질리코 Gabriele Basilico》(2002)라는 제목의 사진문고판이 나와 있으므로, 작가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나 작업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마찬가지로 열화당에서 출간한 《루이지 기리의 사진 수업》(2020)라는 책에도 바질리코의 이름이 스치듯 지나간기도 한다. ‘이탈리아 기행’이라는 제목으로 기획된 대규모 사진전에 대한 주석에 가브리엘레 바질리코를 참여 작가로 언급하는 대목이 한 군데 나온다. 이 책 《사진 수업》은 이탈리아의 사진가 루이지 기리의 사진 수업 기록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은 흔히 보는 사진 관련 서적처럼 미국 중심의 혹은 유명한 (미국인 위주의) 사진이 중심이 된 것이 아니라, 루이지 기리 자신의 사진, 그리고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사진들을 수업에 많이 활용하는 점이 신선하게 보인다. 게다가 책의 서두에 사진 장비에 대한 설명부터 진부하게 설명하는 사진학 수업 서적이 아니라, 보다 인문학적인 이야기로 주제를 이끌어내는 점이 흥미롭다. 오늘은 미국 위주의 사진가가 아닌 이탈리아의 유명한 두 사진가의 이야기를 주목해서 메모해두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