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e you good at twilighting?
錄 [memo] 2008. 11. 3. 08:53
[생각 하나]
'안경'이라는 일본 영화를 보았는데, 참 잔잔하고 심심한 영화다.
안경을 매개체로 무언가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특이한 건 (독특한 일본영화답게) 등장 인물들이 모두
안경을 쓰고 나온다는 거다.
주인공인 여 교수는 조용한 한 바닷가의 민박집 같은 곳으로 홀로 여행을 오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여행의 이유를 휴대폰 신호가 잡히지 않는 곳을 찾아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일본어는 하지 못하고, 영어 자막으로 보았는데, 마을사람들이 이 이방인에게 줄곧 물어보는 대사가 있다.
'Are you good at twilighting?'
글세.
twilight은 보통 명사로 쓰는 줄 알았는데 동사로도 씀직하다.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동사 혹은 동명사로도 쓰이는
경우를 발견하지 못했다. 허나 그건 중요한게 아닌거다.
어찌하였든 해질녘에 일몰을 구경하는 데에 익숙하냐는 말이다.
서울에서만 30년 가까이를 살아온 나에게 일몰을 바라본 다는 건 익숙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익숙하다. 내가 있는 곳은 높은 건물도 없는 중소도시의 외곽지역으로 언제나 해지는것을 바다에서만큼은
아니지만 익숙하게 맞고있다.
번잡한 도시 생활은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만들고 만다.
휴대폰이 없는 조그마한 바닷가의 마을에서 주인공은 점점 이유는 알수 없지만, 도시 사람들이 잃어가던,
혹은 자신이 잃어버렸던 삶의 본질에 대해 보다 가까워지게 된 것은 아닐까.
뻔한 일상, 초라한 아침 식단에 올라온 신맛나는 자두를 하나 하나 차근 차근 음미한다던가,
팥빙수를 만드는 할머니의 팥을 쑤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보다 중요한 것들을 깨닫게되는 과정을 잔잔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의 저자이기도한 Spencer Johnson의 < The Present >의 중심 주제
"Being in the present" 라는 글귀가 생각났더랬다.
이 가르침은 내가 선 명상을 배울때 느꼈던 것들과 잇닿아 있다. 동양의 오랜 가르침을 서양의 작가들도 우리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잘 꾸며놓았다고 생각한다. 굳이 동양의 지혜를 배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잃어가는 것은 무엇인가를 깨닳은 후에는 동서양이 동시에 주목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도 있겠다.
일몰을 바라보는 것, 하늘을 바라보는 것에 익숙한가....
이건 현재를 잘 살고 있느냐의 구체적인 물음에 다름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Are you good at twilighting?"
[생각 둘]
hotshoe, Cast your fate to the Wind, Niagara River, 2008
오늘 저녁노을은 무척 이뻤다. 마음이 설레인다. 집에있으면 안될 것 같은 그런 설레임 말이다.
저녁 공기는 깨끗하고 시원했다. 잔잔한 바람이 불어 코끝을 찡하게 만들어놓는다.
창을 통해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디지털 카메라를 학교에 두고 왔다. 필름 카메라로 대신 찍었는데, 바로 확인할
길은 없다. 난 아직도 여유가 부족한가...
주말에 인화할 필름을 두 통들고 가까운 마켓 포토 센터에 갔었다. 그런데 왠걸...
포토 센터가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 두달 사이에 그만 문을 닫아버렸던 모양이다.
여름 내내 인화를 부탁해서 내 이름까지도 기억하는 점원이 있을 정도였는데 말이다.
마켓 광고를 보니 새로운 맥주 코너를 만들 예정인가보다. 내가 인화를 직접하지 않는 한은
다시 다른 장소를 물색해봐야 겠다. 글세 다른 곳도 얼마나 버틸지 모를 일이다.
[생각 셋]
언젠가 온 '고도원의 아침 편지'중의 한 내용이다.
내 친구 중에는
세상의 인연이 다 번뇌라며
강원도의 어느 절로 들어가다가,
시외버스 안에서 군인 옆자리에 앉게 되어
두 달 만에 결혼한 애가 있다.
인연을 끊겠다는 사람일수록
마음 속에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강하다.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집착의 대상을 찾는 것이
인간이 견뎌야 할 고독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 은희경의《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중에서 -
나는 우연이나 기적을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과학을 공부하는 입장으로 내가 유물론자가 되어야한다던가 하는
제약따위를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난 한국 사람으로서 공유하는 미신이나 구태의연한 혹은 소박한 정서에
더 친근감을 가지고있다.
내가 우연을 믿지 않는 다고하지만, 필연적인 인연이나 사람사이의 관계를 믿는다. 이건 드라마에 나옴직한
작위적인 설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 곳에 있었고, 내가 그러한 생각에 따라 몸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건 위에 언급한 일본 영화 '안경'에서 나오듯이 알듯 모를듯한 팥빙수 할멈과 민박집 주인 남자의 인연이나,
여 주인공과 사람들과의 인연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필연적인 인연은 이미 결과가 드러난 사건에 대한 해석이라고 봐야할 것이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연적인 인연에 대한 기대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에 대한 낮은 확률에대한 기대심리
혹은 도박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따라서 우연적인 인연은 수동적인 반면, 필연적인 우연은 상당히 능동성을
수반한다.
어느 쪽을 믿던 그 건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사람은 어떤 상태로 살던지간에 하나의 섬으로서만 살 수 없는 것같다.
인연의 사슬은 사람을 더욱 고민스럽게 만드는 원인이면서도 사람은 그것을 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의 인연을 피하려 발버둥 쳐도, 새로운 인연 혹은 관계가 형성되어가는 것이 우리 인연의 모습일 것 같다.
모든 인연은 참 귀중한 것 같다.
난 그것을 참으로 많이 소홀히 대했던 모양이다. 좀더 내 주위를 둘러보아야할 일이다.
나에게 형성된 관계라는 것 그것을 악연으로 만들지는 말아야겠다.
'안경'이라는 일본 영화를 보았는데, 참 잔잔하고 심심한 영화다.
안경을 매개체로 무언가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특이한 건 (독특한 일본영화답게) 등장 인물들이 모두
안경을 쓰고 나온다는 거다.
주인공인 여 교수는 조용한 한 바닷가의 민박집 같은 곳으로 홀로 여행을 오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여행의 이유를 휴대폰 신호가 잡히지 않는 곳을 찾아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일본어는 하지 못하고, 영어 자막으로 보았는데, 마을사람들이 이 이방인에게 줄곧 물어보는 대사가 있다.
'Are you good at twilighting?'
글세.
twilight은 보통 명사로 쓰는 줄 알았는데 동사로도 씀직하다.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동사 혹은 동명사로도 쓰이는
경우를 발견하지 못했다. 허나 그건 중요한게 아닌거다.
어찌하였든 해질녘에 일몰을 구경하는 데에 익숙하냐는 말이다.
서울에서만 30년 가까이를 살아온 나에게 일몰을 바라본 다는 건 익숙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익숙하다. 내가 있는 곳은 높은 건물도 없는 중소도시의 외곽지역으로 언제나 해지는것을 바다에서만큼은
아니지만 익숙하게 맞고있다.
번잡한 도시 생활은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만들고 만다.
휴대폰이 없는 조그마한 바닷가의 마을에서 주인공은 점점 이유는 알수 없지만, 도시 사람들이 잃어가던,
혹은 자신이 잃어버렸던 삶의 본질에 대해 보다 가까워지게 된 것은 아닐까.
뻔한 일상, 초라한 아침 식단에 올라온 신맛나는 자두를 하나 하나 차근 차근 음미한다던가,
팥빙수를 만드는 할머니의 팥을 쑤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보다 중요한 것들을 깨닫게되는 과정을 잔잔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의 저자이기도한 Spencer Johnson의 < The Present >의 중심 주제
"Being in the present" 라는 글귀가 생각났더랬다.
이 가르침은 내가 선 명상을 배울때 느꼈던 것들과 잇닿아 있다. 동양의 오랜 가르침을 서양의 작가들도 우리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잘 꾸며놓았다고 생각한다. 굳이 동양의 지혜를 배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잃어가는 것은 무엇인가를 깨닳은 후에는 동서양이 동시에 주목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도 있겠다.
일몰을 바라보는 것, 하늘을 바라보는 것에 익숙한가....
이건 현재를 잘 살고 있느냐의 구체적인 물음에 다름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Are you good at twilighting?"
[생각 둘]
hotshoe, Cast your fate to the Wind, Niagara River, 2008
오늘 저녁노을은 무척 이뻤다. 마음이 설레인다. 집에있으면 안될 것 같은 그런 설레임 말이다.
저녁 공기는 깨끗하고 시원했다. 잔잔한 바람이 불어 코끝을 찡하게 만들어놓는다.
창을 통해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디지털 카메라를 학교에 두고 왔다. 필름 카메라로 대신 찍었는데, 바로 확인할
길은 없다. 난 아직도 여유가 부족한가...
주말에 인화할 필름을 두 통들고 가까운 마켓 포토 센터에 갔었다. 그런데 왠걸...
포토 센터가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 두달 사이에 그만 문을 닫아버렸던 모양이다.
여름 내내 인화를 부탁해서 내 이름까지도 기억하는 점원이 있을 정도였는데 말이다.
마켓 광고를 보니 새로운 맥주 코너를 만들 예정인가보다. 내가 인화를 직접하지 않는 한은
다시 다른 장소를 물색해봐야 겠다. 글세 다른 곳도 얼마나 버틸지 모를 일이다.
[생각 셋]
언젠가 온 '고도원의 아침 편지'중의 한 내용이다.
내 친구 중에는
세상의 인연이 다 번뇌라며
강원도의 어느 절로 들어가다가,
시외버스 안에서 군인 옆자리에 앉게 되어
두 달 만에 결혼한 애가 있다.
인연을 끊겠다는 사람일수록
마음 속에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강하다.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집착의 대상을 찾는 것이
인간이 견뎌야 할 고독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 은희경의《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중에서 -
나는 우연이나 기적을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과학을 공부하는 입장으로 내가 유물론자가 되어야한다던가 하는
제약따위를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난 한국 사람으로서 공유하는 미신이나 구태의연한 혹은 소박한 정서에
더 친근감을 가지고있다.
내가 우연을 믿지 않는 다고하지만, 필연적인 인연이나 사람사이의 관계를 믿는다. 이건 드라마에 나옴직한
작위적인 설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 곳에 있었고, 내가 그러한 생각에 따라 몸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건 위에 언급한 일본 영화 '안경'에서 나오듯이 알듯 모를듯한 팥빙수 할멈과 민박집 주인 남자의 인연이나,
여 주인공과 사람들과의 인연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필연적인 인연은 이미 결과가 드러난 사건에 대한 해석이라고 봐야할 것이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연적인 인연에 대한 기대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에 대한 낮은 확률에대한 기대심리
혹은 도박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따라서 우연적인 인연은 수동적인 반면, 필연적인 우연은 상당히 능동성을
수반한다.
어느 쪽을 믿던 그 건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사람은 어떤 상태로 살던지간에 하나의 섬으로서만 살 수 없는 것같다.
인연의 사슬은 사람을 더욱 고민스럽게 만드는 원인이면서도 사람은 그것을 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의 인연을 피하려 발버둥 쳐도, 새로운 인연 혹은 관계가 형성되어가는 것이 우리 인연의 모습일 것 같다.
모든 인연은 참 귀중한 것 같다.
난 그것을 참으로 많이 소홀히 대했던 모양이다. 좀더 내 주위를 둘러보아야할 일이다.
나에게 형성된 관계라는 것 그것을 악연으로 만들지는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