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서의 은유 - 모호함 속에서 잉태된 찰나적 출현

<은유의 힘>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내가 부러워하는 이는 깊은 독서와 사유를 하고 언제나 걷는 자이다. 스스로를 고된 ‘문장노동자’로서 표현을 하는 장석주 시인이 바로 이 대상에 속한다. 언제나 읽기와 쓰기, 그리고 세상에 대한 명민한 관찰을 하며 걷는 시인이 보다 진지하게 시에 대해 논하는 글을 모았다. 이번에는 시의 ‘은유’에 대해서다. 시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단히 답한다. “시는 은유에서 시작해서 은유에서 끝난다.”(29면) 달리말하면 ‘은유’없는 시는 앙꼬없는 찐빵이란 뜻일테다. 그렇다면 ‘은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따라나온다. 바로 이 한 가지 물음을 붙들고 시의 은유에 대해 한 권의 책으로 생산해 내었다. 이 책은 바로 40년 간 시와 접하고, 시를 써온 시인이 생각하는 시의 은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만의 답일 것이다. 



     시인에게 ‘좋은’ 시는 보석과도 같은 은유들이 가득한 상자인 모양이다. 시인은 ‘은유란 거울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31면)이며, ‘거울에서 타자인 자기를 찾아내는 것’(32면, 사사키 아타루의 <야전과 영원> 재인용)이라고 말한다. ‘나’는 거울에 비친 상이 나인 줄 알지만, 이것이 ‘참-나’는 아닌줄도 안다. 결국 ‘내가 아닌 나’다. 이 모호함과 낭패감이 ‘은유’의 단면인 것이고, 또한 시를 더욱 매력있게 해주는 요소일 것이다. 시인의 설명은 알송달송하나 또한 그럴듯하게 다가오는 순간도 있다. 시인의 문장은 그러한 모습에서 또한 ‘시의 은유화’된 양상을 닮은 것도 같다. 내가 학교를 오래 전에 졸업하고 참으로 오래간만에 ‘은유’와 ‘직유’에 대해 떠올려보게 된 시인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109-110면)

시는 이런 자명함 속에서 배태되지 않는다. 시는 모호함 속에서 윤곽을 만들며 떠오른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어떤 찰나, 저녁의 거무스름한 물, 생리하는 개들, 처제들의 상상임신같은 것, 이런 모호함들은 시의 자궁이다. 시를 쓸 때는 대상에서 가장 먼 이미지들을 데려와야 한다. 대상과 먼 이미지들 사이의 모호함을 타고 나가라는 뜻이다. 대상과 유사성으로 인접한 이미지들 사이에는 모호함이 깃들 여지가 없다. 그러니 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곧 시인이 시에서 사용하는 대상과 시인이 마음 속에 품은 이미지들에는 ‘은유’라는 코드로 맺어지게 되는데, 이 대상과 이미지들 사이에 ‘뻔한’ 관계, 진부한 상식이 깃들어서는 시가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느 한 순간 ‘그럴수도 있군’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그런 관계가 ‘은유’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지. 시에서 꽁꽁 얼어있는 우리의 무지와 사유의 나태함이라는 얼음을 깨부수는 도끼와도 같은 수단이 바로 ‘은유’라고 나에게 일러주는 듯하다. 쉽지는 않지만 다시 시인이 던져주는 실마리를 또 쫒아가보자.



(36면)

은유는 맥락이 아니라 끊김이고, 그냥 끊김이 아니라 맥락의 찰나적 출현이다. 이것이야말로 ‘의미의 창조적 생산’이다.

은유는 빛을 흩뿌리지만 윤리의 맥락에서 포획되지는 않는다. 포획되는 것이 아니라 불꽃처럼 ‘창조된 것’이다.



     어쩌면 내가 시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시에서 은유는 어느 순간 ‘불쑥’ 고개를 들이밀고 나온 이미지일 것이다. 어떤 논리나 이성의 준거를 기반으로 ‘준비된’ 것이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달리말하면 나는 시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학창시절 참고서에 나온 해설서의 양식대로 ‘분석’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아닐까. “퇴색한 성교당의 언덕 위에선/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168면에서 재인용)라는 김광균 시인의 시 한구절에서 ‘청각의 이미지(시각)화’라는 단어가 자동적으로 튀어나온 반응을 보면 내 문제를 보다 분명히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나태함’을 부수고, ‘관성적 익숙함의 전복’(190면)을 가져다줄 구원투수로서 ‘시 처방’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40여년 간의 오랜 독서의 경험과 사유가 녹아들어 직조된 시인의 문장을 따라가다보면, 집중된 시인의 의식 한 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순간이 있다. 내가 시인이 안내하는 대로 잘 따라가고 있는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는 않으나, 내가 이러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은, 바로 시인 자신이 이렇게 오롯한 집중된 의식 속에서 글쓰기를 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인상은 시인의 글쓰기가 목에서 소리를 내는 발성이 아닌 배에서 소리를 내는 발성을 이야기하듯, 겉도는 이야기가 아닌 시인 내면의 사유에서 길러올린 글쓰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단, <은유의 힘>은 시와 친하지 않은 독자에겐 낯설다. 차라리 퉁명스러운 책이라 하겠다. 보다 진지하게 시에 대해 논하는 잡지에 써온 글들을 모은 책이기에 ‘시를 가까이하고 싶어 집어든’ 나같은 독자에게는 낭패감을 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은유의 힘>은 ‘친절한 시인’의 책은 아니다. 독자가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저자가 설명하는 시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폭넓은 독서가 없다면 저자의 진행과정과 맥락을 따라가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 곧 이 책은 내가 보기에 다른 독서보다도 좀더 독자의 품이 더 필요한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시인은 옥타비오 파스의 말을 빌어 ‘시인은 욕망하는 자고, 시는 욕망 그 자체다.”(166면)이라고 전한다. ‘욕망’은 ‘결핍’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 그런 까닭에 존재의 한가운데는 항상 결핍으로 움푹 파여 있다.’(166면)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핍의 힘으로 인하여 시인들은 이 세상의 ‘가장 작은 것’에도 비로소 눈길을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좋은 시는 작은 진실들에 충실하다.”(176면)라는 시인의 표현이 다소 막연하나마 마음에 들었다. ‘풀잎’이라는 작은 진실에 너무나도 충실한 나머지 세계를 발견해버린 월트 휘트먼의 이야기는 조그만 놀라움과 경외를 불러일으킨다. ‘욕망’이라는 대상(시)을 만들어내는 ‘욕망하는 자’인 시인들은 그런 의미에서 ‘은유’라는 보석상자를 소유한 자들일 것이다. 나아가 시인은 끊임없이 자기만의 보석상자를 틈틈이 열어보고 ‘은유’와 ‘꿈’이라는 보석이 있음에 안도하기도 하는 이들이 아닐까.   





(25면)
‘시는 은유들의 보석상자다.‘

(29면)
‘시는 은유에서 시작해서 은유에서 끝난다.‘

(31면)
‘은유는 대상의 삼킴이다. 대상을 삼켜서 다른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은유는 거울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이고, 신체의 현전이 아니라 언어의 현전이다.‘

(32면)
‘거울에서 타자인 자기를 찾아내는 것‘, 그게 바로 은유화다.
- 사사키 아타루의 <야전과 영원>에서 재인용

(36면)
‘은유는 맥락이 아니라 끊김이고, 그냥 끊김이 아니라 맥락의 찰나적 출현이다. 이것이야말로 ˝의미의 창조적 생산˝이다.‘
‘은유는 빛을 흩뿌리지만 윤리의 맥락에서 포획되지는 않는다. 포획되는 것이 아니라 불꽃처럼 ˝창조된 것˝이다.‘

(109-110면)
‘시는 이런 자명함 속에서 배태되지 않는다. 시는 모호함 속에서 윤곽을 만들며 떠오른다. (...) 대상과 먼 이미지들 사이의 모호함을 타고 나가라는 뜻이다. 대상과 유사성으로 인접한 이미지들 사이에는 모호함이 깃들 여지가 없다. 그러니 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166면)
‘시인은 욕망하는 자고, 시는 욕망 그 자체다.‘ - 옥타비오 파스
‘시인은 세계의 가난을 산다. (...) 이들은 열등하고 패배하며 곤경에 빠진 자들을 대신하여 욕망하고, 그런 까닭에 존재의 한가운데는 항상 결핍으로 움푹 파여 있다.‘

(176면)
‘좋은 시는 작은 진실들에 충실하다.‘

(233면)
‘오늘날 가장 철학적인 시들은 오직 무지 속에서 무지를 견디며 피로 쓴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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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자유, 평등 및 정의를 다시 생각해보다

 

<국가의 품격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원제: National Dignity: Freedom, Equality, and Justice)

짜우포충 지음 | 남해선 옮김 | 더퀘스트

 

우리의 자유, 평등 정의를 다시 생각해보다

 

     많은 이들에게 정치 환멸을 불러오는 대화 주제가 된듯하다. 우리의 삶은 점점 팍팍해지는데 반해 하루가 멀다하고 정치 스캔들이 터지고, 정치인들의 비리나 뇌물 수수 또는 악습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오늘 소개하게 짜우포충 교수의 <국가의 품격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이하 <국가의 품격>) 나의 우려보다는 보다 명쾌하게 정치 대한 나의 편견를 되돌아보게하고, ‘자유라는 개념에 대해 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한 인식을 얻을 있는 기회를 책이라 생각한다. 짧은 시간에 상당한 정치철학 개념들이 나오는 책을 소화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책을 처음 만난 인상은 분명 다시 읽어보고 좀더 명료하게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책의 소개에 따르면 저자인 짜우포충은 정치철학자이자 홍콩중문대학 정치행정학과 교수로서 홍콩의 민주화 시위인 우산혁명 주도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중국의 정치상황을 언급하거나 홍콩의 시민행동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저자는 홍콩의 대학생들이 주축이 2014년의 우산혁명 반복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책이 홍콩에서는 베스트셀러이지만 중국 본토에서는 금서목록에 올라가 있다는 소개만 봐도, 책과 저자의 영향력을 짐작해볼 있다. 특히나 책의 후반에 나오듯 중국의 SNS 해당하는 웨이보에서 시민들과 온라인 상에서 대화를 하고 시민들이 올리는 질문에 대해 꼼꼼이 답변을 하고 시민들과 소통하는 모습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고, 저자가 중국인들, 특히 홍콩의 시민들에게 얼마나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국가의 품격> 처음부터 저자는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궁금증을 유발한다. ‘정치라는 영역에서 도덕 필연적인가?’  묻고 있으며 이에 대한 논증을 해나간다. 저자가 피력하는 정치사상의 줄기는 롤스의 <정의론> 기반하고 있다는 점은 책의 특징이다. 물론 로크 이래 자크 루소와 임마누엘 칸트, 뱅자맹 콩스탕, 스튜어트 밀을 거쳐 이사야 벌린과 롤스 등의 사상을 면밀히 연구하고 이들의 차이점을 명료하게 정리해내는 모습에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고민의 흔적들이 제대로 녹아들어 있는 책이 책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선 정치에 도덕 끌여들여 논의를 하는 것인지 시작부터 의아해할 즈음, 저자는 미리 나의 의혹을 간파했는지 저자가 정치에서 도덕을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이상주의적이지 않은가라는 의혹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루소의 <사회계약론> 아니더라도 저자는 국가의 존재가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다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제제가 필요한데, 바로 국가가 이러한 공권력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아 질서 유지를 위한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권력의 행사에 바로 도덕적인 기준 기반해야한다는 것이 내가 이해한 주요사항이다. 다시말하면 도덕적인 기준 부합하는 정당성을 획득한 국가만이 공권력 행사에 대해 국민의 인정을 받을 있다는 말이다. 이를 우리 사회의 사례에 견주어볼만하다. 특히 작년 후반부터 시작된 촛불혁명 사례는 대한민국의 정치역사에 있어서 의미를 갖는 시민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누누히 언급하는 대로 국가의 존재는 결국 국민 개개인의 행복과 안위를 위한 것이다. 국민의 선택으로 등장한 정부가 공권력 행사에 국민의 도덕적 기준에 부합하는 신뢰를 얻지 못하면 권력의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시민은 그러한 정부를 불신임하고 정치 권력을 교체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교과서의 이론대로가 아니라 대한민국 시민의 손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닌가. 촛불집회가 10 차례 진행되고 시간이 지나면서도 정부의 불소통과 안하무인의 모습을 볼때면 나도 다시금 회의적이고, 냉소적으로 되기도 하였는데, <국가의 품격> 읽으면서 나의 성급함과 정치적 미성숙을 반성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아울러 저자가 설명해준 민주 개념 또한 내가 막연하게 생각하던 개념과 사뭇 다른 점도 눈길이 갔다. ‘자유 민주 개념이 이사야 벌린의 주장대로 서로 무관한 개념이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저자의 논증은 제쳐두고라도, 내게 부족했던 기본 정치의 개념과 편견들을 책은 상당히 바로잡아 주었다.

 

      글의 문장에서도 언급했듯이, 정치는 우리의 환멸 대상이 된지 오래다. 하지만 짜우포충 교수는 오히려 우리는 태어나면서 정치 속에 산다”(347)라고 말한다.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는 나름 열심히 참여했으나, 선거가 끝나고 다시 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한 환멸을 경험하곤하는 이런 무한 반복 패턴 속에서 정치를 경원시하던 모습을 떠올릴 있었다. 하지만 권력을 갖는 자들을 뽑는 것에서 우리의 정치참여가 끝난다고 생각했던 것이 문제는 아니었던가하는 반성도 해본다. 우리의 지도자를 뽑았다면,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이 짜우포충 교수의 조언일 것이다. 국민으로부터 주어진 권력을 수행하는 집단(정부) 도덕적으로 집행하고 있는지를 감시하고 견제해야하는 일은 시민의 몫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우리 삶에 직간접적으로 깊숙히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치를 우리는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에서 나아가 사회가 제대로운영되도록 우리가 관리해야한다는 것을 배웠다. 정치는 우리의 환멸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있도록 합리적으로 제도를 마련하고 이를 보장하는 수단으로 사용해야한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열린 자세를 보여주었던 웨이보에서의 자유로운 토론의 모습은 책을 덮고나서도 인상적으로 남는다. 여기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점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와 비슷하게 자유 토론에 참여한 일부 중국인들은 우려한바대로 정치에 대한 불신을 지적하고 심지어는 중국인의 열등함을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모습에서도 토론에 참여한 시민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는 점과, 상대방에 대한 비방이나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다는 점에 매우 놀랐다. 우리 같으면 짜우포충 교수와 같은 시도를 할만한 교수들이 있어도, 이렇게 성숙한 온라인 상에서 자유토론의 모습을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남는다. 분명 계획되었던 공개 자유토론의 기회가 정부나 이를 지지하는 세력에 의해 제제를 받았을 터인데, 이에 굴하지 않고 짜우포충 교수와 시민들이 참여해서 이러한 기회를 마련해나가는 모습에서 짜우포충 교수가 느끼는 올의 희망을 찾아볼 있다.

 

     홍콩사람들이 보통선거와 자유를 쟁취하기위해 우산혁명을 시도한 것처럼, 우리도 촛불혁명을 통해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정부의 책임을 물고 시민의 힘으로 지도자를 교체해내었다. 짜우포충 교수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자주적으로 선택 지도자가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시민을 위한 나라살림살이를 해나가는 모습을 우리가 지켜보고 우리의 의견을 반영하도록 요구하는 일은 여전히 남아있다. 우리가 원하는 지도자를 데려다 놓았다고 모든 것이 자동으로해결될리는 없다. 사회의 여러 명사들이 스펙쌓기를 하는 대신 밖으로 나가 시위하라라고 일갈하는 이유가 짜우포충 교수가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그리고 <국가의 품격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대한 가장 단순화된 해답일지도 모르겠다.

 

 

 

 

                                          

 

 

(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제작사로부터 상품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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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들의 흑역사에서 잉태한 좀비문학의 고전

<좀비 연대기>

로버트 어빈 하워드 지음 | 정진영 엮고 번역 | 책세상

 

 

   <좀비 연대기> 기대이상으로 재미있다. 나는 공포소설, 스릴러 일종의 장르소설로 분류되는 소설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작품들은 무언가 작가의 작위적인 결과물들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역자는 좀비가 대세라고 역자 후기에서 귀뜸해주지만, 그동안 나는 좀체로 좀비영화나 좀비가 나오는 소설, 심지어 오락마저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좀비 연대기> 읽어나가면서 좀비소설 역시 문장력과 이야기의 전개에 흡인력이 있다면 다른 장르 소설과 다를바가 없겠다는 점을 느꼈다. 다시말해서 소재보다 중요한 소설로서의 탄탄한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말이 .

 

   클래식호러라는 문구가 시사하듯, 책에는 주로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작가들의 좀비를 소재로 하는 단편들이 실려있다. 사실 각각의 단편들은 나름의 개성이 있는 독특한 작품들이라 생각한다. 모두 자연의 질서를 벗어나 죽었으나 살아있는, 피와 살을 지닌 시체 좀비를 매개로 하고 있다. 하지만 SF소설 혹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환상소설과 같이 새로운 상상력으로 우리를 자극하는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도 좀비는 일차적으로 부두교와 관련이 있고 마술사를 통해 비밀스런 주술과 마법을 통해 되살아난 시체다. <좀비 연대기> 나온 소설들만을 통해 정리를 해보자면, 좀비는 아프리카-아이티-미국남부 열대에 준하는 지역적인 배경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흑인(크레올과 같은 혼혈인들을 포함하여) 또는 흑인노예의 역사라는 맥락 속에서 탄생한 개념이라고 있다. 좀비문학 속에서 좀비와 관련된 특징을 떠올리자면 항상 부두교의 마법사가 어떤 의식을 통해 죽은 자들을 되살아나게만든다는 점이다. 마법과 주술을 통해 되살아난 좀비들은 이따금 중얼거리긴 하지만 대개는 말없이, 아무런 자유 의지나 판단능력 없이 마법사의 지시를 따르는 자동인형 또는 마리오네트 인형과 같은 존재들이 된다. 따라서 여러 작품들에서 보이듯 좀비는 농장에서 월급도 받지 않고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좀비가 흑인노예 떠올리게 한다는 점도 고려해볼 있다(《노예에게 소금은 금물》,《나트에서의 마법》,《화이트 좀비》). 여러 소설에서 이러한 구도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당시에 좀비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흔히 활용하던 좀비 사용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지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드라큘라를 언급할 , 이들이 무서워하는 존재가 , 십자가, 마늘과 같은 대상이 떠오른 반면, 좀비에게 이런 대상은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듯하다. 좀비는 마법사의 주술의 힘으로 낮에도 다니는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좀비들에게 치명적인 대상은 바로 소금으로 보인다. 이는 여러 작품을 통해 활용되고 있는데, 좀비가 소금을 먹게되면 정말로 죽는다. 소금이 생명을 가진 유기체에 매우 중요하고 귀한 물질이면서도 죽은 유기체의 부패방지에 활용된다는 양면적인 특징을 떠올려보면, 좀비 문학에서 좀비들이 소금을 먹으면 영원히죽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은 또한 모순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좀비가 결국 되살아난 시체라는 이율배반적인 초자연적 존재이기에 소금이 이들을 죽인다는 발상도 아이러니하지만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좀비는 말을 하지 않고, 항상 앞쪽만 응시하기 때문이다. (…) 좀비는 소금을 먹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좀비에게는 소금 맛을 보고 나면 자신이 죽었음을 깨닫고 무덤이 어디에 있든 기필코 자신이 묻힌 곳을 찾아가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아무도 그들을 막을 없다!

(220) 이네즈 월리스의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중에서

 

실제로 피와 살을 지닌 시체이기에 좀비들은 특이하게도 총을 맞거나 칼을 맞으면 역시나 피를 흘리는 모습도 공통적이다. 이런 점들은 좀비문학의 클래식 작품들을 수록한 책을 통해 새롭게 살펴본 좀비의 특징들이라고 있다.     

 

 

   좀비문학에 대한 나의 편견을 깨준 것은 무엇보다도 책의 소설인 로버트 어빈 하워드의 작품들이었다. 로버트 어빈 하워드의 문장은 긴장감과 속도감을 주기에 독자로 하여금 상황에 몰입하도록 만들어주었다. 1845 흑인 노예들의 폭동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검은 카난》에서 주인공 백인(커크 버크너) 사악한흑인 좀비들을 죽이는 구도는 다소 거슬리는 데가 있다. 한편 전지적 작가 시점에 준하는 1인칭 시점의 친절한 설명과 진행은 다소 생경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커크 버크너가 어떤 주술적인 힘에 의해 카난이라는 삼각주 지역으로 끌려가는장면을 떠올려보면 상당히 인상적이다.

 

나는 최면에 빠진 사람과는 달랐다. 완전히 깨어 있었고, 정신도 말짱했다. 노호하는 검은 강물이 쇄도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멍한 상태에서도 정신은 말짱했고 생각은 명료했다. 이것이 바로 고통의 지옥이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분명하게, 통렬하게 깨닫고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무력감. 내가 고문과 죽음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계속 가고 있었다. 이성을 송두리째 앗아 가버릴 것만 같은 주술을 깨려고 기를 쓰면서도 계속 가고 있었다. 충동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97)

 

   부분은 마치 과거 꿈의 일부를 써놓은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나의 통제를 벗어난 어떤 거대한 물줄기 속에 몸을 맡긴 어딘가로 가는 . 나는 너무나 자주 꾸던 유형의 꿈이었다. 분명 어딘가의 종착지는 죽음 관계할지도 모른다. 다르게 보면 이러한 무기력한 나의 꿈과 주인공 커크 버크너가 경험하는 충동의 모습은 어쩌면 비판적인 사유없이 자본이라는 거대한 강물 속에 무기력한 존재로서 따라가는 현대인의 모습과도 병치되어 다가온다. 나만의 지나친 비약일까. 

 

나의 통제력을 능가하는 어떤 힘이 나를 고션으로, 너머로 이끌고 있었다.”(97)

  

 

 

 

   책에 수록된 작품들 여타 작품들과 다른 느낌을 주는 작품은 단연 런던의 《천 번의 죽음》이라고 있다. 작품은 부두교나 흑인과 관련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좀비 소설이라기보다는 디스토피아적인 SF소설에 더욱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죽은 유기체의 소생방법을 찾아내는 인물 등장하는 것으로보면 마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도 닮아있다. 마찬가지로  《천 번의 죽음》에서도 생명을 주는 아버지와 실험대상이 되는 아들과의 대립구도가 보인다. 아버지는 실험대상인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네게 생명을 주었으니, 그것을 가져갈 권리 또한 나한테 있지 않겠냐?”(127)  이어서 아버지는 수없이 죽을 운명인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물론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지만, 너는 받아들여야 한다. 인생이란 원래 위험으로 가득 있으니까.”(127)  아버지의 말은 살아있는 존재 말할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 인생 끌어오는 것은 작가인 런던이 설정해둔 신랄한 유머가 아닐까. 어찌되었든 작품에서 아버지는 창조자인 신의 위치에 놓여있다. 아들을 죽이고는 다시 다양한 방법으로 아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이러한 모티브는 생물학, 의학의 발달과 함께 생물체를 복제하거나 이들을 변형하는 것에 대한 원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 영생이나 인간이 갖지 못한 특별한 능력이라는 욕망을 투사하는 대상으로서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떠올리면 것이다.

 

     한편《천 번의 죽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 구도에서 흔히 빠지지 않는 친부살해 모티브가 나온다. 우리가 흔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부르는 개념은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의《나트에서의 마법》에서 나트섬의 마법사 바카른과 아들 보칼 울돌라와의 대립구도에서도 중심 사건으로 이어지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역시나 생명을 주는 존재인 아버지를 살해하는 아들의 구도는 또다시 <프랑켄슈타인> 떠올리게 해준다. 아버지는 아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존재인데, 특히나 갈등을 유발하는 아버지는 아들의 사회적 역할에 제약을 가하거나 구속하는 측면이 있다. 나아가 (생명을 주는)아버지와 대립하는 아들의 갈등 구도를 보다 폭넓게 해석해보면 농장주와 여기에서 착취당하는 노예 또는 좀비와의 갈등구도에 적용해볼 있을 것이다. 가넷 웨스턴 허터의 작품《노예에게 소금은 금물》에서 150살로 추정되는 크레올 노파가 이야기해주는 에피소드를 떠올려본다. 농장의 노예들은 농장주가 없는 동안 농장주의 명령을 거스르며 주인의 샴페인과 소금을 약탈하고 건물을 파괴한다. 이러한 행위는 바로 친부살해모티브의 확장이라고 있을 것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책에 수록된 여러 단편들을 통해 깨닫게 것은 분명 좀비라는 대상은 (흑인 혼혈인들을 포함하여)흑인 노예제도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등장했다고 있다는 점이다. 좀비 문학에서 배경으로 등장하는 아프리카-아이티-미국남부라는 지리적 특징은 모두 흑인 노예들이 이동했던 지리와 일치한다. 오늘날 드라마나 영화에서 있는 좀비의 이미지와 다르게 좀비 문화는 사실 흑인노예제도라는 극도로 가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흑인들의 어두운 원체험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폐쇄적이고 미신적인 이들 집단 내에서 주술을 통해 자신들이 간직한 원한이나 저주를 있는 유일한 기회이자 공간을 부두교라는 미신적 행위가 제공하고 있다. 자연현상과 유사하게 사회적 스트레스 억압 속에서 쌓이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어디에서든 터져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좀비를 단순히 인간이 지닌 욕망의 결과물이라고 본다면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인 맥락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만족스럽지 못하다. 좀더 구체적으로 억압받아온 흑인들의 인간적 욕망이 어두운 컬트 문화로 표출된 존재 바로 좀비라고 보아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클래식 호러 작품을 수록한 <좀비 연대기> 나의 편견을 보기좋게 깨도록 해준 흥미로운 시도였다.    

 

 

 

 

인상적인 문장

어디서나 밤은 상상을 공포로 물들이는 모호함과 환영을 가져온다. 그러나 열대 지방에서는 밤이 유난히 강력하고 불길한 효과를 만들어낸다.”(161)

라프카디오 헌의 《귀환자들의 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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