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보니것 <고양이 요람>을 읽고 - 메모와 단상들

 

 

 

 

고양이 요람 Cat’s Cradle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 지음 | 김송현정 옮김 | [문학동네]

 

 

[1]

소설은 나를 조나라고 부르라라는 대목으로 시작한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 문장을 패러디하며, 기독교의 <구약성경> 등장하는 모티브 또한 함축하고 있는 문장이다. 소설을 읽어나가며 저자가 정말 독특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흥미가 더해졌는, 블랙 유머와 생태주의의 시선을 잇는다는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보다는 좀더 수월하게 접할 있었다. 엉뚱하면서도 기발한 이야기 전개에도 중간 중간 작가는 진지한 마디를 알게모르게 툭툭 던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특이한 여행 제안은 하느님이 제공하는 무용 수업이다.”(85) 라는 위트가 들어있는 문장이 하나의 예이다. 나는 이러한 문장이 특히 재미있다고 느꼈는데, 장편소설 <고양이 요람>(1963) 시점에서 21 후인 1984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던 작가와 과연 동일한 인물일까 궁금해졌다. 어쩌면 문장에도 전쟁의 복판에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사람으로서, 전후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미국, 팍스 아메리카나의 사회를 바라보는 저자의 냉소가 묻어있지는 않을까 생각해본다. 

 

 

[2]

저자의 연보를 보다보면 저자 자신의 생애도 <고양이 요람> 주인공 조나, 존처럼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생화학을 공부하던 코넬대 재학시절 대한민국의 남학생들 처럼 군대에 입대하고 기계공학을 공부하기도 했던 커트 보니것은 <호밀밭의 파수꾼> 저자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처럼 2차대전에 참전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독일군 포로에 잡혀 드레스덴으로 끌려갔으며,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으로 도시가 불타는 와중에도 가까스로 살아남은 저자의 ---(저자가 소설에서 설정해놓은 사이비 종교인 보코논교 용어로 숙명, 필연적인 운명) 다른 이야기를 예비하는 것이었다. 커트 보니것의 인생을 흔들어놓았던 때의 체험은 다른 사람들처럼 허무주의로 빠지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 대한 애정을 품게 만든 계기가 되었을 것 같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를 커트 보니것은 전쟁의 경험을 통해 절실히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그토록 무관심한 인간을 적이 없소.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동처럼 차갑게 죽어있는 자들이 너무나 많소. 이따금 그게 세상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92)

 

저자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이 지식에 대한 욕구만 있는 지식인, 도덕적인 책임은 회피하는 과학자들의 문제를 미국의 핵폭탄을 연구하는 과학자라는 설정을 통해 보다 극적으로 제시한. 문득 휴머니즘이라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애정의 정신을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가 절실하게 이해할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3]

언젠가 경제학을 전공한 사진가 세바스티앙 살가두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 적이 있다. 사진가 경력의 대부분을 세계사적으로 굵직한 사건들, 학살 현장 난민 캠프 현장에서 보냈던 살가두는 르완다 난민 학살을 경험하는 것을 끝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를 안전히 잃어버린 했다. 그리고 마음에 병을 얻고 카메라에서 손을 한동안 놓았던 것이다.

 

살가두가 방문한 난민 캠프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우리가 당장 한반도에 전쟁이 발생하는 경우, 포화를 피하여 피난민이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 많은 이들이 아프리카의 난민 캠프에서와 같은 환경에 처해지는 것은 피할 없는 결과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도 제주에 난민 문제와 관련하여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있지만, 문제에 대한 결론을 바로 내리지는 않아도 공적인 대화의 장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할 사항이라는 생각을 한다. 모든 나라에서 난민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난민 수용 여부에 대한 도덕성이나 우리의 처지에 대한 판단을 떠나, 인간이 타인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행위가 아닐까. 인간(人間)’이라는  이 매우 철학적인 용어를 고려할 , 인간은 '인간 사이의 관계' 형성을 통해 서로 의지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질적인 이유로든 정신적인 이유로든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통해 문득 문득 드러나는 작가의 인간에 대한 관심, 애정이 느껴졌다.

 

 

[4]

소설은 알듯 모를듯 매우 다양한 이슈들이 화자인 조나의 지나가는 말투를 통해 다루어진다. 미국의 세계 패권주의, 나치즘, 지식인과 과학자의 사회적/도덕적 책무, 진짜와 가짜의 문제, 종교의 본질, 미국의 매카시즘이 50-60년대에 남긴 , 비트 세대로 대변되는 미국의 저항운동, 여권 문제 등등에 대한 저자의 폭넓은 관심이 보니것 특유의 신랄한 유머에 묻어 나오고 있다. 무거운 사회문제 뿐만 아니라 저자는 문학의 역할 내지는 기능에 대한 언급도 빼놓지 않고 있다.

 

나는 아버지 캐슬에게 물었다. “선생님, 문학이 주는 위안을 박탈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죽을까요?”

하나겠지. 심장 경화 아니면 신경계 위축.” 그가 말했다.

어느 쪽도 그리 유쾌하진 않을 같군요.” 내가 말했다.

그렇소. 그러니, 젠장, 사람 모두 제발 계속 글을 쓰시게!” 아머지 캐슬이 말했다.’ (276-277)

 

 

[5]

옮긴이는 책의 제목 고양이 요람 상징하는 것이 사람들 스스로가 행복과 위안을 주기 위해 만든 모든 종류의 거짓이라고 풀어주고 있다. 이는 밀란 쿤데라가 <참을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야기 했던 키치와도 닮은 구석이 있다. ‘고양이 요람이든 키치이든 모두 진짜에 해당하는 대상 또는 진실이 아닌 허구 내지는 모조품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다. 대량복제가 가능해진 산업사회의 제품/결과물(모조품) 우리는 나의 개성을 표현해주는 물건이라 착각하고 살아가며 이를 욕망한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진실을 대면할 무엇을 선택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고양이 요람>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호니커 박사의 난쟁이 막내 아들 뉴트가 실뜨게를 하다 문득 대화 상대방에게 고양이가 보이세요? 요람이 보이세요? 묻는 대목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이는 아마도 화자들이 사회의 진실에 대면하는 순간 대화 상대방에게 묻는 절차를 빌어 우리 독자에게도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손에 걸린 실을 보고 요람 같이 생겼는지혹은 요람 속에 고양이가 보이는지 사람의 상상력 선택 달려있을 것이다. 뉴트는 대화 상대자에게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내지는 '무엇을 보고 싶은가?’ 묻고 있는 것이다.

 

보니것은 고양이 요람 선택 기로에서 어느 입장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아마도 어떤 규칙이나 관점을 정하여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더없는 죄악이 아닐까 생각하는 듯하다. 이유는 소설의 커버 페이지에 나온 일명 <보코논서> 구절에 실마리가 있기 때문이다.   

 

책의 어떤 내용도 진실이 아니다.

그대를 용감하고 친절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는 포마(무해한 거짓말) 따라 살지어다.

<보코논서> 15

 

관점에서 선언 성경에 등장하는 핵심, 사랑 다른 표현으로도 읽힌다. 다시말해 세속적인 사랑의 개념차원을 넘어 인간에 대한 애정, 배려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특정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타인에게 강요한다거나, 특정 집단/기득권 층에만 유리한 법의 제정은 없는 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교조적인 장치가 될 뿐이다. 차라리 타인을 배려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포마'가 오늘 나와 타인의 하루를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커트 보니것의 소설은 사이비 종교 보코논이라는 설정과 저자의 유머를 통해 숙성된 매우 기독교적 배경을 보여주는 소설이기며, 인간 관계의 핵심적인 비결을 알려주는 비전(秘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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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를 이해하기 위하여 – 사람은 자신을 만든 과거의 경험을 간직한다.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원제: THE FACT OF A BODY: A MURDER & A MEMOIR)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레즈네비치(Alexandria Marzano-Lesnevich)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이상한 기억상실이 때때로 나를 급습했다. 나는 안에 해결되지 않은 어떤 것이 있음을 그래서 알았다.”(325)

 

 

미국 최고의 명문 하버드대 법대를 재학중 인턴자격으로 살인사건과 접하게 저자 알렉산드리아는 남자 아이를 살해한 가해자 리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녀의 이러한 선택적인 기억상실은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에 자신의 몸이 기억하는 특정한 사건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처음 경험하는 공백 경험은 아마도 신체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을 이를 완화하려는 신체의 반작용으로 이해된다.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살인 사건과 자신의 비망록이 혼재된 독특한 글쓰기를 보여주는 책이다. 실제 사건에 대해 방대한 자료들을 읽고 검토한 후에도, 생생한 사건을 보여주기 위해 현장에서 실제로 나누었을 법한 대화를 상상하기에 주저함이 없다. 아울러 , 그리고 그녀의 글쓰기는 너무나 솔직하기에 오히려 강력한 힘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비롯하여, 가족의 치부를 담담하고도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특히 저자가 어린 시절 겪었던 성추행의 경험을 끊임없이 반추하며 자신을 공개하고 있다. 책의 서술방식은 개인의 유일무이한 경험과 아픔의 기억에 기반하기에 독창적이면서 유일한 글쓰기이며 그만큼 인상적인 이유다.

 

 

 

책의 구조와 중심사건에 대해

책에서 중심이되는 사건은 실제 일어났던 일들을 기반으로 한다. 하나는 아동 성추행으로 이미 번이나 실형을 살았던 리키 랭글리가 출소 1 5개월 만에 동네 여섯 아이 제레미를 살해한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다른 하나는 저자의 어린 시절 가정에서 겪게된 성추행에 기반한다. 사건이 엄연히 별개의 사건임에도 저자가 되새기며 제공하는 양상의 이면에는 밀접한 관계, 다양한 접점이 존재한다. 영화의 플래시백 기법처럼 현재와 과거의 장면을 번갈아 오가며 별개의 사건을 조금씩 드러낸다. 결국 저자의 의도에 따라 사건은 결국 어느 지점에서 유사점을 지니고 있음을 독자에게 깨닫게 해준다. 따라서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기본적으로 현재와 과거(살인자와 저자의 현재와 과거) 왕복해가며 마치 깨져버린 도자기의 파편들을 줍는 과정처럼 기억의 편린들을 모으는 작업이기도하다.  

 

 

저자가 오랜 시간 써내려가면서 수없이 떠올렸을 기억들은 현대 인간의 삶에 영향력을 주는 굵직굵직한 여러 이슈들을 관통한다. 법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 뿐만 아니라 사형제도 인권에 대한 주제, 삶의 모순으로 보이는 진실의 문제, 가족이란 무엇이며, 개인의 자존감 문제와 같은 우리 삶에서 만나는 보편적인 주제에 폭넓게 맞닿아 있다. 알렉산드리아가 청년 시절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온 살인 사건의 재판과정과 자신의 문제들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결국 인간이 삶에서 경험하는 폭넓은 경험을 아우른다. 저자는 이러한 성찰을 다양한 국면에서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법이란 무엇인가  법의 역할과 태생적 한계

우선 알렉산드리아가 떠올리는 자신의 어릴 기억과 리키 랭글리 사건이 맞닿는 접점은 아동 성추행 관련이 있다. 살인 피의자 리키 랭글리는 아동 성추행이라는 과거의 흔적 이외에 살인이라는 죄목이 추가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반면  저자의 과거는 자신이 성추행 피해자이며 가해자가 바로 할아버지라는 사실에서 리키 사건과의 접점이 위치한다. 자각의 순간으로부터 사건은 결코 분리될 없는 하나의 특이점으로 수렴하기 시작한다.

 

 

법이란 지구상에 개체만이 존재하고 살아갈 경우에는 전혀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러 인간이 모여 살아갈 각각의 구성에게 각각의 진실이 존재한다고 해도 개별적인 진실이 구성원 간에 상호인정이 안되고 충돌이 발생할 경우 문제가 된다. 비전문가의 관점에서 법이란 무엇인가를 따져보면, 법은 인간 사회가 혼란에 빠지지 않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준거가 되는 장치란 생각을 한다. 다만 법은 자체로 완전하지 않다는 점을 깨닫고 한계를 인지하는 또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우리의 근현대사를 잠깐만 살펴보더라도 권력을 가진 사법부의 수장이 정치 권력에 복종할 국민들이 어떤 고난을 겪을 있는지 있는 사례가 적지 않다. 법집행은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법을 알고 이를 활용할줄 아는 이들만을 위한 사회를 조성하는데 악용될 있는 여지를 포함한다. 사법부가 독립적이어야하며, 법이 제시하는 기준과 법관의 양심에 충실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저자 알렉산드리아는 리키 랭글리 사건과 같은 사건이 사회를 휩쓸고 제정된 새로운 법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실효성을 갖는지 반문한다. 성범죄자의 신상을 지역사회에 공개한다고 하지만, 이러한 정보가 지역사회에 전달/공지되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있음을 지적한다. 한편 저자 자신에 대해 성추행을 일삼았던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법의 제재를 받지 않고, 혹은 경계의 대상에서 빠져버린 사람들이 있게 마련임을 지적한다. 나아가 사회가 엄한 법을 적용한다고 해도 범죄율이 줄지 않을 있다는 점도 간과하면 안된다. 법의 제정이 범죄 발생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할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재 음주운전 사건으로 음주운전자에 대한 법률을 엄하게 정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움직임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법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제제를 가하는 힘보다는 사건이 일어났을 이를 제재하는 기능이 크다는 점을 인지해야할 같다. 보다 중요한 일은 근본적인 원인을 차단해나가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이번 음주운전자 처벌관련한 법이 엄하게 변경되는 것과 함께 취지에 대한 공감대, 그리고 희생자 가족에 대한 공감대도 함께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알렉산드리아가 제레미의 사후 제정된 성범죄자 신상공개와 관련한 법률이 시행된 20년이 지나도 성학대율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지적하는 대목은 분명 법의 본질과 관련한 중요한 고찰임을 염두해두어야 것같다.

 

 

 

기억이란 무엇일까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

우리는 기억이란 현상이 뇌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책에 등장하는 여러 장면만 보더라도 사람의 삶에서 기억이라는 것은 뿐만 아니라 전체를 통해 각인되고 저장된다는 점을 수긍할 있게 된다. 실체로서의 몸은 여기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정신현상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몸전체를 통해 기억이 전해지며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게 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리키의 어머니 베시가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리키를 임신하고, 리키는 베시가 받아 먹는 각종 약과 치료용 엑스레이에 숱하게 노출된다. 게다가 베시가 임신 마신 상당한 위스키도 리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놀라운 일은 리키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오스카의 교통사고 현장에 대한 꿈을 리키는 어린시절 계속하여 꾸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살인자 리키는 어쩌면 어머니 베시 뿐만 아니라 가족의 모든 아픔을 몸에 고스란히 간직한 태어난 사람이기에 조금 다른 관점에서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억이란 내가 임을 인식하는 출발이되기에 내가 라는 자기동일성을 확인하고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반면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은 시간을 거듭하여 자신을 괴롭히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알렉산드리아가 할아버지로부터 당한 성추행 때문에 몸에 흉터는 성인이되어서도 그녀를 붙들어 매고 있다.  거식증 같은 증세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가 가한 성추행의 기억은 오히려 저자에게 이를 잊게함으로써 스트레스를 완화하려는 몸의 메커니즘에 영향을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인턴으로 루이지애나 로펌에 갔을 , 리키의 이름을 듣고도 곧바로 잊는 장면은 아마도 리키의 사건이 자신의 과거와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한 몸의 망각기작이었을 같다. 리키의 이름은 잊고 싶은 할아버지의 기억과 만나는 접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 흉터가 남았다. 흉터가 통증을, 칠흙 같은 기억 상실을 뛰어 넘는 증거가 아닐까? 끝나버린 기억 너머의 증거가 아닐까?”(392)

 

저자가 법조계를 떠나 오랜 세월 다시 루이지애나로 돌아와야만 했던 이유가 루이지애나라는 지역이 주는 느낌 때문이라 언급했다. 특유한 장소성과 기후 등이 저자에게 주는 모든 느낌과 감정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글을 시작하며 인용했던 저자의 언급은 분명 자기 자신만이 해결할 있는 실마리를 자신이 쥐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머리가 아닌 몸에 각인된 느낌들은 현재의 저자와 과거의 저자를 연결하는 매개체였다. 마찬가지로 리키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읽고 알렉산드리아는 비로소 리키와 그의 가족을 상상할 있었고, 그의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했다(414)라고 기록했다. 자신의 몸에 각인된 흉터로 할아버지의 행동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로부터 리키를 사람으로서 바라볼 있게 되었던 것이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출발점은 바로 한번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다.

 

 

 

사형제도를 둘러싼 여러 장면들

자신도 저자처럼 사형제도를 반대한다. 하지만 저자의 고백을 읽으니 나도 그녀처럼 사형제도를 반대한다는 착각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가족이 비슷한 일을 겪었다면 나도 사망한 제레미의 어머니인 로렐라이처럼 아들을 살인한 리키를 위해 구명운동을 있을까? 아마 나는 그렇지 못할 같다. 알렉산드리아의 독백처럼 나도 변호사가 있는 자질은 부족한 모양이다. 한편 로렐라이는 리키를 용서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다만 자녀를 가진 어머니의 입장에서 리키의 어머니 베시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부모된 자로서 자녀가 죽는 일을 리키의 부모가 맞이하지 않도록  노력한 것이 맞을 것이다. 이러한 심경은  실제 사형수의 구명운동을 벌인 노력을 담은 영화 <데드 워킹 Dead Man Walking>에서 수잔 서랜든이 연기했던 인물인 헬렌 프리진 수녀의 마음가짐과도 다르지 않을 것같다.

 

로렐라이는 베시에게 자기 자신의 모습이 보여서 리키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다른 여인의 아들이 목숨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447)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특히 주목하는 의외의 인물이 있는데, 다름아닌 영국인 변호사 클라이브 스태퍼드 스미스이다. 그는 평생 미국의 사형제 폐지를 위해 헌신한 사람으로서 공로로 영국 여왕의 훈장도 수여받은 인물이다. 정황상 그는 살해당한 제레미의 어머니와 함께 리키의 구명운동을 위해 헌신하여 살해사건이 일어난 10년만에 형량을 교수형에서 무기징역으로 낮추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리키의 감소를 위해 변호하는 일을 하게된다. 법은 사회의 질서를 위해 만들어진 최소한의 테두리라는 생각을 하지만 언제나 그러한 바램에 맞추어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법도 나름의 역할 외에 틈새가 있기 마련이고, 틈새로 무고한 사람들이 제재를 받거나 나아가 사형과 같은 중한 벌을 받게 되는 일도 있다. 그러한 부작용을 줄일 있는 균형은 클라이브 변호사와 같은 인물들이 담당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살인자를 사람의 인간으로 있는가는 저자가 말한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있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몸에 각인되는 기억 떠올려보면 우리가 어떤 삶을, 어떤 경험을 과거에 했는지에 따라 타인을 이해하는 폭이 달라질 있다. 타인을 이해하는 일이란 우리가 과거에 경험했던 모든 일들을 동원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이 지은 죄가 무겁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할 있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로렐라이가 리키의 구명운동을 하기 시작한 시점은 아들이 살해당한 8년이 지난 시간이었다. 시간 동안 그녀는 리키와 그의 과거, 그리고 리키의 가족에 대한 사실들을 끊임없이 돌이켜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 숙고의 시간 이후 로렐라이는 마침내 리키를 인간으로서 바라보는 계기가 있었을 것이며, 그를 용서는 아니더라도 화해할 있는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과정을 저자도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기억, 할아버지의 추행과 자기 가족과의 유사성을 비교하며 자신의 과거와 비로소 대면할 있는 준비를 마련해나갔던 것이다.

 

 

 

나가며 자신과 화해하기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짚어보자면 저자 알렉산드리아가 어린 시절 몸에 남겨진 오랜 상처를 발견하고 아픈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아픔을 치유해가는 과정을 떠올리게 된다. 과정은 자신이 접했던 살인 사건을 통해 실마리를 찾고 사건이 결코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과정이었다고 수도 있다. 저자는 자기 안에 해결이 안된 무언가 인식하고 정체를 파악하는 여정에 오른다. 결국 자신의 내면에 상처받고 꽁꽁 숨어 있던 내면의 아이 찾아내고,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번역자가 사용한 표현인 팩트로서의 (fact of a body) 실재하는 신체, 외부의 자극에 왜곡없이 기억하는 몸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의 뇌는 과거에 경험했던 내용을 왜곡하여 기억할 있지만, 고통이라는 자극을 몸이 겪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바로 우리의 몸은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는 거짓없는 저장매체로서 기능하며 이것이 엄연한 팩트로서의 되는 것이 아닐까.

 

 

아울러 알렉산드리아가 살인사건을 접하고, 로렐라이의 사형수 구명운동을 보면서 느꼈을 혼란스러운 심정을 떠올려본다. 또한 가족의 침묵 속에 법의 제재를 받지 않고 삶을 마감하였던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후유증 결국 저자 자신의 흉터와 함께 남아 무언가 해결이 안된존재로서 여전히 남아있던 것이다. 저자는 결국 자신을 돌아보며 흉터와 아픔의 기억에 주목하였다.

 

내게 과거는 땅속에서만 있는 아니었다. 과거는 몸에 있었다.”(383)  

 

저자의 할아버지 역시 어렸을 성추행 피해자였다는 , 결국 할아버지 역시 피해자이자 가해자 였음을 알게된 , 할아버지를 좀더 이해하게 되었던 같다. 알렉산드리아가 리키의 가족과 리키에게 들었을 감정의 동요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움직임은 할아버지와 자신에게로 확장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무덤 앞에서 젊고 앞날이 창창했을 커플의 모습부터 나이 모습, 그리고 지금은 땅속에 묻힌 모습을 상상하며 강한 놀라움의 충격을 받는다. 우리는 모두 필멸의 존재라는 것을 여러 시간의 중첩을 통해 자신을 관통해 나간 것이다.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 사건이 시간과 공간의 이질적인 요소들의 중첩 속에서 순간 강하게 알렉산드리아를 관통해 나갔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받는 상처, 특히 외상이 아닌 모든 이들의 내상은 결국 개별자의 기억과 벌이는 싸움에 다름아닐지도 모른다. 몸에 각인된 기억의 상처는 두뇌에 기억되는 왜곡될 있는 상처와 달리 살아있는 평생 몸의 주인과 함께할 것이다. 저자는 20 가까이 이어지는 살인사건 재판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기억과 조우했다. 과정에서 자신의 내밀하고 아픈 기억을 밖으로 꺼내 놓고 대면했다. 책은 저자의 솔직한 자기 고백의 비망록이자 저자가 살아가는 생에 가장 중요한 국면을 다룬 저자의 분신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픔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마주대하고 손을 내밀어 과거와 화해하는 일만 해도 상처받은 내면의 아이를 다독거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수 있게 힘을 주는 일이 아닐까. 책을 덮으면서 저자의 짧은 독백 마디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사람은 자기를 자기로 만든 경험을 지니고 다닌다.”(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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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관람 후기] 국립극장 NT Live <줄리어스시저>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er)

셰익스피어 원작 | NT Live(국립극장 상영) | 연출 니콜라스 하이트너

 

 

입장하며

연극 관람은 오래간만의 일이다. 대학시절 아서 밀러의 희곡세일즈맨의 죽음 인상깊게 이후로 20 년이 지났지만 원작에 비교적 충실한 연극을 기회가 없었다. 아니 연극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말이 적확하겠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문학작품을 거의 읽지도 않았기에 연극인들이 그저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으로만 치부했던 같다. 이제 중년이 되어 오래간만에 다시 보는 연극은 청년 시절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잠자리에 들때면 가끔씩 내가 내일 아침 깊은 숨을 내뱉으며 다시 일어날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삶의 유한성을 보다 느끼게되는 나이. 지금 다시 되돌아보니 모든 연극(희극, 비극을 포함하여) 기본적으로 비극 속에서 잉태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마저 하게 된다. ‘모든 존재는 필멸한다 전제가 연극의 기본 정신이 아닐까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모든 연극은 인간이란 존재의 삶에서 길어낸 비애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출하는 행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울러 연극배우들은 반드시 다독가는 아닐지언정 분명히 정독가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하나의 고전을 수십 읽고, 작품 속의 인물이 되려고, 부단히 자신의 자아와 일으키는 충돌을 경험하며 작품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보게된 연극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율리우스 카이사르 영국 국립연극단이 공연한 실황 녹화 작품이다. 현대적인 연출로 셰익스피어의 원전을 무대에 올렸다. 작품을 보기 전까지 나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나 카이사르에 대해 아는바가 없었기에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제목과 달리 브루투스가 주인공인지도 알지 못했다. 이번 연극은 원전과 마찬가지로 카이사르가 장군으로서 반역자로 치부된 폼페이우스를 물리치고 로마로 개선하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브루투스가 죽음에 이르는 데까지의 서사를 다루고 있다.   

 

 

브루투스일까?

연극이 시작하고 가지 의문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는 작품을 영웅 카이사르가 아니라 카이사르를 배신한 암살자로 알려진 브루투스에 주목을 하게 되었을까? 카이사르의 마지막도 충분히 비극의 주인공이 있었는데 말이다. 셰익스피어는 1 독재를 포함한 황제정치에 반대했기에 암살이라는 거사의 주동자인 브루투스를 주목했던 것일까. 연극에서 브루투스가 사용하는 책상에 독재자였던 스탈린(Stalin)’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이름이 적힌 책들이 놓여 있었던 것은 극단 연출자의 의도일 것이지만 셰익스피어의 의도를 세심하게 드러내려는 노력 같아 보였다. 혹은 셰익스피어가 승자의 기록으로만 남는 역사에 거부감을 느끼고 암살자/배신자라는 이름을 얻은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새롭게 조명하려고 했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셰익스피어는 남다른 안목과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였을 같다. 가지 분명한 것은 셰익스피어가 독자 혹은 관람객에게 정답을 주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선택의 자유를 주려고 했을 같다는 점이다. ‘사실 진실 유사해보이면서도 분명 다르듯, 역사적 사실은 하나일지 모르나 진실은 무한할 있다고 본다. 카이사르의 진실과 브루투스에 유의미한 진실은 분명 다르다. 셰익스피어는 연극을 관람하는 우리에게 과거사의 단면을 보여주고, 보다 다양한 진실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모든 연극은 인생의 유한성이라는 대전제로부터 자유로울수 없다.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모든 역사는 어김없이 되풀이된다라는 일종의 강박이 연극이라는 오래된 예술을 지속하게 해주는 동력이 아닐까한다. 오늘 끄집어내는 모든 이야기들은 결국 이러한 또는 연극의 대전제로부터 분기된 구체성에 다름 아닐 것이다.

 

 

역사가들이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그려내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야심만만하고 단호한 성격의 인물이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이 중심이 공화정 형태의 로마에서 절대권력을 갖는 황제가 되기를 야망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원로원의 보수파와 충돌하는 일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탄탄한 세력에도 불구하고 숱한 정적(政敵) 보이지 않는 대결 국면 속에서 성장했을 것이다. 후대인들은 영웅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들의 견해에 따라 브루투스의 파멸을 배신자가 겪게되는 역사의 인과응보로 치부하기 쉽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어김없이 반복되는 상투성의 전형이다. 셰익스피어는 아마도 이러한 상투성과 거리를 두기로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배신자/암살자 혹은 패배자의 진실을 새로이 들여다보기로 의도하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브루투스에게도 카이사르 암살에 대한 충분한 명분에 주목했고 이를 상상했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존경하면서도 그를 암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셰익스피어는 브루투스의 입을 통해 명예와 공익때문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셰익스피어가 브루투스의 진실이다. 셰익스피어의 관점을 통해 떠오른 생각은 역사라는 무형의 실체가 개개의 인간들에게 요청하는 소속에의 강요이다. 예컨대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떠올려보자. 작중 인물들은 어떤 명분(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개인들이었으며, 역사 속에서 어느 편이든 소속하도록 선택할 것을 강요받는 상황에 놓여있다. 어느 시골 마을 사람들은 낮에는 국군 편이 되어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이적행위자를 밀고할 것을 폭압적으로 강요받는다. 그러나 밤에는 빨치산의 영향력 아래 이들 편이 되기를 선택해야만 하고 적대행위를 하는 이들을 신고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과 유사하다. 브루투스의 명예과 공익이라는 대의는 분명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것이며, 역사에서 선택의 경계를 만들어낸다. 브루투스의 암살 행위는 로마 시민들에게 카이사르의 1 독재, 황제정치를 반대할 것을 요구하며 입장을 선택할 것을 요청하는 정치 행위로 있겠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 성난 군중으로부터 달아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일당은 세력을 규합하여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가 이끄는 연합군과 맞서 필리피 평원에서의 전투를 치른다. 2차례에 걸친 전투를 치르며 브루투스 측의 패색은 점점 짙어지게 된다. 수세에 몰린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는 이제 자신들이 운명의 요구에 의해 각자의 입장을 선택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카시우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생일날 자결을 하고, 브루투스 역시 부하의 도움을 구하여 카시우스가 길을 따른다. 필리피 평원의 결전이 있기 전날 브루투스는 자신의 막사에 나타난 카이사르의 망령과 조우하고 자신의 죽음을 이미 예감했던 것이다. 이들은 결국 자신의 명예를 위해 그리고 역사의 요구에 의해 분명한 정치 행위를 실행해야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카이사르라는 당대의 영웅을 암살한 공모자들 역시 각자 상당한 능력을 지닌 비범한 인물들이었으나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시대와 역사의 산물임을 부인할 없다.  

 

 

 

시인킨나의 죽음에 주목하며

이번 실황녹화 연극에서 잠시 지나가듯 처리된 시인킨나의 죽음 장면을 명분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본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카이사르의 죽음을 애도하러 가던 시인킨나는 안토니우스의 추도사로 흥분한 군중에게 죽임을 당한다. ‘시인킨나는 카이사르를 암살했던 공모자킨나와 동일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로 군중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이다. 어이없는 죽음을 다룬 짧은 장면을 셰익스피어가 추가했을까? 나는 점이 궁금해졌다. ‘시인킨나의 죽음이란 사건은 분명 카이사르의 암살사건이나 브루투스의 파멸과 어떤 개연성도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셰익스피어는 지적인 개개인이 모여 군중이 되었을 집단이 보여주는 무감각한 잔인성을 몸소 겪고 체험했기 때문에 이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인간 집단의 잔인성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인간만이보여주는 폭력성이라 있다. 그리고 이런 폭력성은 앞서 브루투스가 공언한 명예와 공익이라는 명예를 위해 희생하는 인간의 행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가지 주의할 점은 인간의 폭력이 인간의 본성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막연히 인간이란 잔인한 동물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이를 기정사실화 한다. 그러나 이는 진실이 아닐 있다. 적어도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는 말이다.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져있는 일본의 영장류학자 야마기와 주이치의 저서 <인간 폭력의 기원>에서 저자는 줄곧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의 폭력은 대체 어디에서 기원하고 있는가? 집요하게 묻고 답을 구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잔인한 폭력 행위에 대한 그의 결론은 인간의 폭력 행위는 본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다시 밝히자면 인간이란 생물이 보여주는 폭력은 여타 영장류가 보여주는 폭력의 층위와 결이 다르다라는 것이다. 다른 영장류들은 본능에 따라 먹이 또는 번식의 유리함을 얻기 위한 위력 행사의 과정인 반면, 인간에게는 다른 층위, 명분 대의 같은 허구의 실체에 복종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새롭게 발현되는 잔인성을 이야기한다. 나는 이러한 인간 행위의 양상이란 결국 집단이 내세우는 가치(이데올로기, 명분, 대의 등등) 위해 구성원들이 헌신하는 사회성, 이타성에 기인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이것이 인간만이 갖는 폭력의 잔인성 설명해주는 본질이란 생각도 해본다.

 

 

다시 시인킨나의 죽음으로 되돌아가본다. 그가 군중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은 인간집단이 공유하는 명예혹은 대의 대한 집단의 이타성이 잘못 발현된 사례로 읽힌다. 집단의 이타성은 무형의 경계(또는 대의) 만들고 안과 밖을 구분하며(편가르기), 경계 밖의 존재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잔인성을 표출한다. 이슬람 문화권에 존재하는 명예살인이라는 행위는 어느 가족 혹은 집단이 침해받은 명예 대한 복원 욕구, 집단에 대한 헌신(이타성)이라는 반작용의 결과로 있을 같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진화생물학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시인킨나가 군중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은 분명 셰익스피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