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다운 삶을 살기위한 고민의 흔적

<죽음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 91 5월투쟁과 김은국의 <순교자> 정치죽음진실

강정인 지음 | 책세상

 

[1]

        인생에 있어 삶과 죽음은 결국 하나의 실체/진실을 이룬다. 생명을 가진 개체에게 죽음은 삶의 종착점이자 완성이라 있다.

죽음은 인간의 삶에 실존적으로 배태되어 있으며 삶이란 끊임없는 그리고 점진적인 죽음에의 굴복과정이다.”(64)

 

     정치철학서 권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굳이 삶과 죽음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강정인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정치 과정이 죽음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 언급한 책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인간이라는 심연>, 성염 2), 인간이 나이가 들어 죽음에 더욱 다가갈수록, 인간의 삶에 진지함이 더해짐에는 누구나 공감할 있을 것이다. 저자는 정치권력의 기원에 폭력과 죽음은 본질적으로 잠복해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정치와 죽음과의 밀접한 관계는 현재 대한민국 사회라는 현장에서 예외일 없다.

 

     저자는 지난 30여년 간의 대한민국 정치 현장에서 진실 죽음 관계 또한 헐거워진것으로 표현하는 , 이것은 그동안 대한민국 정치의식과 수준이 향상되어 죽음 이미지가 약해졌다는 의미보다는 정치권력이 정치와 관련된 죽음 탈정치화 꾀하고 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현대의 정치적 거짓말들은 '원래 비밀이 아닌, 사실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들' 다룬다."(144)라고 언급하기도 것처럼, 오늘날 ‘(정치)권력에 의한 조직적인 거짓말하기는 하나의 국가 통치술이 되어가고 있다’(145, 주석11) 있다. 150 수준으로 인간 최초의 정치집단을 상정하고, 이들이 강한 결속력을 가질 있게한 매개체로서 신화, 이야기, 상상력을 이야기하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정치적 공동체란 진리가 아니라 합의에 의해 결속력이 유지된다’(166) 언급한 셸던 월린의 주장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크게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책에서는 우선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는 1987 6월항쟁에 비해 종종 망각된1991 5월투쟁을 시작으로 정치와 죽음과의 관계를 고찰한다. 91 5월투쟁은  시위 도중 명지대 1학년생 강경대군이 전경들의 구타에 숨지는 사건으로 촉발된다.  그리고 박승희를 비롯하여 이어지는 청년들의 분신으로 사태가 더욱 심각해져가는 상황에서 검찰의 주도하에 꾸며진 김기설 유서 대필 논쟁/사건 김지하,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의 자살방조배후설’, 그리고 정원식 총리서리의 봉변사건등의 사태로 인하여 당시 운동권 세력이 와해되어버린 투쟁이다.

 

     저자 강정인 교수는 현상적으로 실패한’ 91 5월투쟁이 안목에서 실패한 투쟁이 아니라 87 6월항쟁 이후에도 지속된 반민중적반민주적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민중의 저항행위였음을 주지하고 있다. 특히 책에 언급된 91 5월투쟁의 소멸에 사회 지도층(검찰, 김지하, 박홍 신부)   보수언론이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할 있었는지를 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사례로 있다.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 저술한 <사법부>에서는 대한민국 사법부의 민낯을 공개하고 있는데, 책의  말미에 보면 검찰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함과 동시에 김기설 유서 대필 사건 대한 간략한 평가를 하는 대목이 나온다. 한홍구 교수는 사건을 검찰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규정하며, ‘과거에는 정권 핵심이나 안기부가 기획한 사건을 검찰이 법률적으로 뒤치다꺼리를 해주었다면 이제는 검찰이 전면에 나서서 정권의 위기를 돌파했다라고 사건의 본질을 전하고 있다. 사건은 검찰이 권력의 하인/머슴 역할을 자처 사례로 역사에 기억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김기설 유서 대필 사건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규정되는 것도 수긍할만한 해석이라고 있다. 

 

 

[2] 

     5월투쟁이 넓은 의미의 정치적 개념으로서 보다 적극적인 역사 창조에 개입, 참여함으로서 공동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활동과정에서 본질적으로 잠복해있는 죽음 진실 관계를 풀어나갔다면, 번째 부분에서는 정치와 종교적 진실사이의 관계로 관심을 제한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재미교포 작가 김은국이 1964 출간한 소설  <순교자 The Martyred> 가지고 분석하고 있다. 소설은 ‘6.25전쟁으로 많이 통용되는 한국전쟁 배경으로 하여, 공산주의세력에 의해 희생된 12명의 목사에 관한 진실을 중심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번째 장은 개인적으로 이번 독서에서 상당히 흥미를 갖게된 부분인데, 작가의 소설 이전에 작가 김은국에 관한 관심때문이다.

 

     김은국 작가는 대학에 입학한지 달만에 한국전쟁’(1950) 발발하여, 자원 군입대한 55년까지 복무하다가 도미하여 역사학과 정치학을 공부한다. 학사를 졸업하고 작가 워크숍 등록, 글쓰기 훈련을 보다 본격적으로 하며, 자신의 번째 소설이자 작가로서의 명성을 가져다준 <순교자> 발표하면서, 영문학과에서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내가 대학생시절 인상깊게 읽고 좋아했던 인류학자 제이콥 브로노우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 번역한 장본인이 바로 김은국 작가였다는 사실, 나아가 이범선의 <오발탄> 영역했다는 사실도 작가를 다시 보게한 계기가 되었다.

 

     <순교자>에서 재확인할 있는 점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구분한 가지 진실-합리적 진리와 사실적 진실-중에서 정치권력에 의해 쉽게 왜곡이 가능한 사실적 진실 취약성이었다. 점은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의 정치공학적 전략으로 빈번히 사용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실례는 앞서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가 검찰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규정하기도 했다고 언급했던 김기설 유서 대필 사건 다시 떠올려볼 있다. 저자 강정인 교수는 <순교자> 드러나는 사실적 진실 왜곡문제와 1장에서 언급한 김기설 유서 대필 사건 연결지으며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권력에 의한 조직적인 거짓말 하기는 전쟁 때나 혁명기 뿐만 아니라 정권의 정당성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집권 세력이 이른바 국면 전환 위해 흔히 사용하는 국가 통치술이 되어가고 있다.”(145)

 

     우리가 좀더 실감할 있는 예로서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등장할 있었던 ,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될 있었던 것을 상기해볼 있다. 이러한 실례들은 집단으로서의 정치적 공동체가 분명한 진리보다는 합의에 의해 결속력이 유지된다 월린의 지적을 돌이켜볼 수긍할 있는 사례이다. 집단,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결속이 허구로서의 신화에 의존한다는 통찰은 강정인 교수의 <순교자> 분석을 통해 보다 주의깊게 들여다볼 있는 계기를 나에게 주었다.

 

 

[3]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는 내용은 미국 반전(反戰) 영화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저자는 미국의 반전영화가 과연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것인지에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서구의 동일자중심의 세계관과 이를 착실히 내면화하고 있는 우리의 서구중심주의 지적하고 있다. 장에서 다루고 있는 미국의 반전 영화 <디어 헌터>, <플래툰>, <지옥의 묵시록>, <7 4일생> 등은 내가 학창 시절 인상깊게 보았던 영화인데, 저자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서구중심주의 시각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주로 베트남전과 관련하여 등장한 반전영화들이 사실은 미국인(주로 백인) 인명피해에만 주로 관심을 갖고 있을 , 베트남 인들은 미국의 아들딸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미개인으로 보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보다 정제된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미국 반전 영화의 베트남인들은 미국인 영화 관람자의 지배적 의식 속에서 비인간화(타자화)되어 버린다.”(190)

 

     미국 반전 영화에서 드러나는 시각은 과거에 제작된 카우보이 영화 시각과 다를바가 없다는 말이다. 미국 역사의 주체는 백인 이민자들로서 규정되고 있으며, 저자가 아메리카 인디언으로 부르는 미국 원주민들은 미국사의 객체나 배경으로 다루어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의 시각에서는 미국의 반전 영화도 람보 시리즈와 다름없이 서부 활극 다름아니다.

미국의 반전 영화는 전쟁 동기의 타당성이 아닌 수행 방식의 타당성에 의거해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있다. 또한 전쟁 방식을 제한하는 움직임도 상대방의 피해는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피해만을 고려한 결과로, 집단이기주의를 드러낼 뿐이다. ”(192)

 

점에서 미국의 반전 운동은 일관성 있는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원칙론적 반전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중의 마음을 쉽게 움직일 있는 최대 공약수로서의 우리의 피해 방지 호소하는, 집단 이기주의의 발로였다. 결국 이러한 반전 운동이 대중적 성공을 거둠에 따라 어떤 면에서는 성공보다도 중요한 반전의 윤리적, 원칙적 의미는 퇴색하게 되었고, 집단 이기주의의 형태인 공리주의가 빛을 발하게 되었다.”(196)    

 

     이러한 시각은 최근 유럽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테러사건들에서도 확인할 있다. 다시말해 서방국가의 무고한 시민들이 겪은 희생에는 깊은 애도를 표하면서도, 비서방국가들의 시민들이 겪는 희생에 우리는 동일한 애도를 보였는지 자문해볼 있다. 과연 그런가? 미국의 2001 9·11사건 이후, 미국 내에 거주하는 무슬림 대학생들이 경찰의 감시를 받아왔다는 사실이 수년 드러나 언론의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미국은 여러 인종이 서로 융합되는 (melting pot) 아니라 여전히 백인들만의 왕국이었음은 저자가 언급한 반전 영화의 사례로 다시금 확인할 있었다.

 

     책의 군데에서 저자가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단정적인 표현들은 과연 그럴까라는 의구심을 들게하는 표현들이 간혹 나온다. 이런 부분은 자신감의 발로일 수는 있지만, 동일한 대상에 대해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있다. 혹은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바라보고 결론을 것이 아닌가하는 부분들은 미미하지만 눈에 띄기도 한다. 이런 가지 점들을 제외하면 미국의 반전 영화를 중심으로 우리 안의 서구중심적 가치관 지적하고 있는 3장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게 읽은 부분이기도하다. 흔히 걸프전으로 불리는 미국-이라크전당시 학생으로서 나는 부끄럽지만 미국의 첨단 무기에 관한 자료들을 모으는 상당히 열중했던 일을 상기해본다. 이번 독서는 어린 나에게 이미 내면화 되어 있던 강자의 세계관 안으로부터 꺼내어 살펴볼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가지 떠오르는 생각은 저자가 베트남 전쟁과 걸프전에 대해 미국내 반응이 정반대였던 이유가 무엇일까 의문을 던지는 부분에서 비롯되었다. 분명히 뚜렷한 명분을 갖지 못하고, 밀림에서 보이지 않는적을 제거해야 햇던 베트남 전과는 달리 걸프전에서는 버튼 하나로 목표물을 공격하는 첨단 무기의 실험장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모호한 주적을 대상으로 베트남전과는 달리 걸프전에는 후세인이라는 분명한 미국의 () 상정되어 있던 점도 무시할 없다고 본다. 말하자면 걸프전의 경우는 보다 컴퓨터 게임적인 요소가 강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후세인은 게임에서 물리쳐 제거해야하는 난이도 높은 으로서 드러나고, 전쟁을 질질 끌면서 미국의 아들딸들의 희생을 증가시키는 보다는 백악관에서 버튼 하나로 미군의 희생을 최소로 하면서 단기간에 전쟁을 끌어 나갈 있었던 것도 반전(反戰)여론의 반전(反轉)’ 현상에 영향을 것으로 이해할 있다. 걸프전은 게임적 요소로서 화면을 통해 재구성되는진실은 베트남전과는 달리 피해자(희생자)들과의 거리두기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다시말해서 희생자들의 고통에 더욱 둔감해지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정치 세력은 베트남 전쟁을 통해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는 철저함을 보인다. 베트남 전쟁을 통해 배운 교훈을 다양한 각도에서 활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나에게 비춰지는 미국의 모습은 걸프전 이후 미국내 전쟁에 대한 여론이 진실을 외면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동체의 결속을 위해 미국의 정치 세력이 주력하는 바는 구성원들의 비판적 기능을 둔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상으로 진리/진실’ – ‘정치’ – ‘죽음 상호관계를 들여다보는 저자의 책을 읽으며 메모해둔 것들, 책을 덮고 옆길로 새며 끄적거렸던 나의 생각들을 모아보았다. 저자의 여러 학술 논문을 다듬고 정리한 책은 정치철학서로서 이해할 있을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성찰하지 않는 삶은 무가치하다라고 까지 언급한 플라톤의 통찰처럼 책은 참다운 살기위한 통찰을 주고 있기도 하다. 삶의 대척점을 이루는 죽음은 책의 전체를 통해 언급되고 있으며, 죽음 우리에게 삶을 제대로 살도록 절실하게 요구한다. ‘참다운 대한 기준은 매우 개별적일 것이다. ‘죽음 각자에게 매우 개별적인 현상인 것처럼 말이다. 중세 판화가이자 화가였던 알프레드 뒤러의 그림에,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지도(화가 홀데인의 그림 버전) 숨어있는 두개골( 죽음) 이미지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죽음 문제는 인류 생존의 문제와 떨어질 없는 인간의 조건이기도 것이다. 나는 책을 저자의 참다운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라고 하겠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정치 세계에서 진리/진실의 지위는 근본적으로 위협받는 듯하다.’(8)라고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최래되는 죽음 왜곡된 진실 앞에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결국 현대 사회에서 정치와 진실과의 관계를 바로 잡는 동인은 죽음 염두해준 참다운 대한 욕망이 아닐까 생각하며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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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음에 대한 새로운 발견 [1부]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 호모 루덴스를 위한 철학사

정낙림 지음 | 책세상

 

 

 

우리 인간에게 놀이 본질적인 특성일까? 나는 놀이하는 인간 의미를 담고 있는 호모 루덴스에 관한 고찰을 담고 있는 책을 집어들며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이었다. 지난 신문을 보니 흥미로운 뉴스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독일 연구소의 연구팀이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호모 사피엔스의 존재보다 무려 10만년이나 오래된 호모 사피엔스의 뼈를 모로코에서 발견했다는 소식이었다. ‘직립인으로 이해되는 호모 사피엔스는 발로 무게 중심을 잡고 걸어다니며 손의 자유를 얻었으며, 엄지의 독특한 구조로 도구를 단단히 잡고, 섬세한 가공을 있는 매우 독특한 존재이다. 다시말하면 지난 주에 발표된 연구결과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놀이 그토록 오래된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따라온다. 이번에 만나게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읽으며 책에 또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바로 호모 사피엔스에게 놀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였다.

 

     철학을 전공한 저자 정낙림 박사는 놀이라는 의외의 주제에 관심을 두게 것이 학위 지도교수의 영향이라 밝히고 있다. 오랜시간 놀이라는 주제에 대해 천착해왔고, 니체의 저서 제목과 유사한 지도교수의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통해 니체가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하나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언급하며,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과의 인연을 밝히고 있다. 책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놀이 대한 태도 내지는 관점에 대한 치밀한 논의를 시작으로 플라톤이 헤라클레이토스의 긍정적인(것으로 해석되는) ‘놀이 대한 입장과 달리 놀이 대해 다소 부정적, 제한적인 견해를 갖고 있음을 소개한다. 나아가 근대 사유에 영향을 사람들인 칸트와 실러가 놀이 수단적인 가치로 보는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면, 니체와 하이데거가 놀이 하나의 주체로서 새롭게 주목하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다음 다시 놀이에 대한 가다머와 핑크 그리고 비트겐슈 타인의 유희 대한 견해를 소개하고나면 저자가 많은 시간을 연구하느라 할애했을 것으로 보이는 니체의 예술생리학 소개와 함께 현대 예술미학에 어떤 놀이 흔적을 발견한 있는지를 정리하는 흐름으로 되어 있다. 이번 글에서는 개의 부로 나누어 1부에서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놀이 대한 견해를 문헌을 통해 해석하기 위해 추적하는 과정을 따라가보며, 근대의 문을 철학자들인 칸트와 실러가 놀이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이해해보려고 하였다. 2부는 사실상 책의 핵심적인 부분인 니체, 하이데거의 놀이 대한 관점을 다음 글에서 좀더 이해해보려고 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책은 저자가 심혈을 기울여 고민하고 정리한 놀이 대한 다양한 고찰을 담은 학술서라고 있다. 다양한 철학 거장의 개념이 등장하고 이들의 관점이 텍스트로 표현되어 이들이 놀이라는 맥락에서 치밀하게 비교되고 있는만큼 눈에 이해될 것이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나에게 어려운 책인 만큼 보다 천천히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려고 했다. 온전히 이해가되지 않은 내용에 대해 쓰려고 고민하지는 않겠다. 다만 책을 읽어가면서 새롭게 발견하게 사항들과 즐거움을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다소 머리는 아프지만 놀이 관한 철학책을 놀이하듯 읽어나가면 되지 않겠는가. 책을 읽어가다 흥미로운 부분이 나오면 멈추고 옆길로 새어 생각을 하기도하고, 언젠가 다시 돌아와 읽을 때는 나의 지혜가 성장하여 좀더 이해가 깊어질 것을 믿으며 넘어간다. 저자가 언급하는 다른 철학자의 책들을 뒤적여 보며 찬찬히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는 재미는 나에게 하나의 놀이과정이었다. 나에게 책은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이 놀이’, ‘예술’, ‘미학 관점에서 서로 충돌하고 만나는 다접점의 공간을 보여주었다. 다시 책에 소개된 철학자, 사상가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놀이 관해 주목한 독일() 철학자들의 계보임을 느낄 있다. 물론 저자가 철학적 전통이 강한 독일에서 공부한 원인일 수도 있겠으나, 그만큼 독일철학이 놀이-현대예술에 대해 갖는 관념적 해석의 전통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오늘날 관념적이고 철학적 성격이 매우 강한 개념예술의 메카가 독일 베를린이라는 점도 놀이라는 주제에 대해 천착한 독일철학의 전통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해할 있겠다.

 

 

고대 그리스인의 놀이철학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둘이 아닐터인데,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라톤 사람만을 언급하며 고대 그리스인이라고 통칭하기에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다만 놀이라는 관점에서 사람이 세계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을 것이며, 문헌이 충분히 남아 온전한 이들의 철학을 파악하기 힘들기에 본질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는 없겠다. ‘플라톤 이후의 서양철학은 그의 주석에 불과하다라고 화이트헤드가 말했다고 했던가. 아마도 놀이 대한 관점에서는 화이트헤드의 간결한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놀이에 대해 플라톤이 갖고 있던 제한적, 부정적인 견해는 이후 많은 이들에게 놀이의 평가절하현상에 분명히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에게 놀이는 어린 아이들에게만 교육적 목적으로 적용되는 제한적인 의미만을 가진 듯하다.

“(플라톤에게 있어) 놀이는 대상에 대한 재현활동으로 진리와 무관할 뿐만 아니라 영혼을 감각적으로 치우치게 하여 젊은이를 타락시킨다.”(97)  

하여 시인을 공화국에서 추방해야한다니!

 

     플라톤에 인간의 감정 욕망이란 불길한 대상으로 비쳐진 모양이다. 온전한 진리를 파악하는데 방해가 되는 존재로서 말이다. 그리고  놀이 바로 감각적인 쾌락 근거한 것으로 진리 추구와는 거리가 있는 행위라는 것이다. 숱한 전쟁과 영아살해의 시대에 살았던 플라톤에게 놀이 미숙하고 쓸모없는 아이라는 존재에게만 교육적으로 필요한 수단으로만 받아들여졌을 것같다. 플라톤에게 있어 장애가 있거나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않거나, 혹은 어떤 역할에 적합하지 않은 아이는 말그대로 도태시켜도 상관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이런 플라톤에게 아이들이 보여주는 미성숙함, 숱한 실수를 통해 배우는 과정은 중요하게 보지 않았을 것같다.

   이에 반해 헤라클레이토스의 놀이 대한 관점은 여전히 정해지지 않고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오히려 긍정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담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보다 면밀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놀이철학은 다음 글에서 보다 찬찬히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볼 것이지만, 저자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놀이철학은 긍정적일 있음을 조심스럽게 암시하고 있다. 근거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의 다음과 같은 전언때문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번잡함을 피해 아르테미스 사원에서 아이들과 장기놀이를 즐겼다.”(78)

 

     이런 가능성도 생각해본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암시적으로 드러나듯 당대의 남자철학자들이 어린 남자아이( 책에서 pais라고 언급되는 사내아이’) 동성연애적 향연 즐겼다는 점을 고려해볼 , 헤라클레이토스도 이들 하나였고, 아이들과의 장기놀이 긍정적으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말하자면 헤라클레이토스도 당대 문화와 시대성에 종속된 존재이기에 플라톤과 유사하게 놀이에 대해 제한적인 가지면서도, 긍정적으로 표현한 아이와의 놀이 대해 복합적인 감정을 갖고 대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유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남긴 조각글이 상징적이고 은유적이므로 해석의 다양성을 허용한다.’(45) 저자의 언급때문이다. 

 

     다른 흥미로운 부분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B52 해석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해석의 다양성을 허용하는 부분인 만큼 부분을 해석하는 다양한 견해들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왕국이 아이에 속한다 B52 마지막 부분의 해석문제는 자체로 유희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물론 책을 읽어나가는 과정은 더디지만 나에게 이러한 유희는 보기드문 호사이기도 하다. 물론 나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또한 놀이 과정으로서 해석에 동참해보기도 하였다. 과연 왕국 뜽금없이 여기에 나왔을까. 그리고 아이 저자의 말대로 은유적인 표현일까. 점점 의혹과 질문만 던지다 미궁에 빠진다. 하지만 재미있기도 하다. 내가 이해하는(마구잡이로 추측해낸 해석) 이러하다. 장기놀이하는 아이에게 장기판은 규칙을 따르면서도 우연성이 존재하는 하나의 축소된 세계이다. 반면 말을 조종하는 아이는 세계의 창조자 조종자이자 된다. 나아가 놀이에 몰입 아이에게 축소된 세계는 진실이며 세계가 전부가 된다. 다시말하면 장기놀이에 몰입하는 아이에게 세계는 전부이다. 왕국은 전적으로 아이의 것이 아니겠는가. 너무 당연한 해석일까. 여기에 장기놀이하는 아이의 원형이 <일리아드> 아폴론이라는 베르나이스의 해석(66) 어쩌면 지나친 지적 호사가 아닐까 나혼자 반격해보기도 한다. 이런 나의 엉뚱하고 무례한 생각들을 돌이켜보면 놀이의 사회성 언급하면서 오늘날의 토론’, ‘논쟁 놀이적 성격이 강하게 남아있다(21) 저자의 지적이 이해되기도 한다.           

 

 

근대 철학자들이 놀이

      플라톤 이후 부정적인 관점으로 받아들여진 놀이 중세를 지나 근대를 시작하며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다. 저자는 부분에서 칸트와 실러를 불러들인다. ‘놀이 갖는 위상의 변화가 근대에 이루어지기 시작했음은 기독교가 절대적으로 지배했던 중세를 지나 미학 신학과 형이상학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미학이라고 이야기하는 아름다움에 관한 견해를 다루는 분야는 근대에 정립된 개념으로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칸트와 실러의 놀이 대한 세세한 철학과 입장은 온전히 이해되지 않음을 인정해야겠다. 다만 놀이 대한 입장이 칸트에 있어서 제한적이고 하나의 수단으로서만 기능한다는 , 그리고 칸트의 놀이철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했다는 실러도 결국 놀이 수단으로서의 위상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정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문득 칸트에게는 놀이 미에 대한 판단 어떤 관계를 가질까가 문득 궁금해진다.

칸트는 미에 대한 판단이 상상력과 지성 사이의 조화와 일치에서 성립한다고 본다. 상상력과 지성이라는 이질적인 인식능력이 자유롭게 우연히 일치하여 획득되는 것이 바로 미적 쾌감이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놀이이다.”(108) 

    

     칸트에게 미에 대한 판단 상상력과 지성이라는 인식능력의 조화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며 이를 매개하는 수단 바로 놀이라는 점이다. 수단으로서의 놀이가 갖는 위상은 여전히 실러에게도 나타난다고 하였다. 인간은 오직 그가 말의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일 경우에만 놀이하며, 놀이할 경우에만 온전한 인간이다.”(159)라는 대목에서처럼 칸트의 놀이에 관한 관점 보다 놀이를 진지하게 놓고 역할을 인정하는 보인다. 다만 실러의 놀이 철학도 분열된 인간의 총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위상에 한정된다는 비판을 받는 듯하다.

     다른 흥미로운 부분은 칸트가 미에 대한 자율성의 확보 관해 설명한 대목이다. 칸트에 따르면 미에 대한 자율성은 주관적 보편 통해 가능하다고 하였다. 미에 대한 판단이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이의 주관적인 느낌과 감정에서 출발하지만 동시에 타자의 보편적 동의를 획득할 있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나에게 부분이 특히 흥미롭다. 부분이 롤랑 바르트가 자신의 <밝은 >에서 언급한 사진미학에 관한 관점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머니 사진을 바라보며 다시 만나게 어머니에 관한 추억들은 분명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담은 순간과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며 느끼는 주관적인 느낌과 어머니에 대한 감정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롤랑 바르트 어머니의 사진을 보며 느끼게 되는 감정들은 동일한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연유될 없다. 이러한 감정들은 지극히 개인적, 개별적인 체험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억으로부터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며 다시 어머니와 만날 있다. 따라서 칸트가 말하는 타자의 보편적 동의 물론 동일한 내용(기억) 대한 보편성을 의미하기 보다는  어머니의 기억을 되살리고 어머니와 만난다는 형식의 동일성에 보편성의 근거를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을 떠올려보면 칸트가 언급한 주관적 보편성 개념은 현대의 사진미학에도 적용될 있는 부분이 있다고 있지 않을까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에도 암울하게 그려지고 있듯이 유럽 자본주의의 발달과정에서 일어나는 노동분업과 그에 따른 인간의 소외문제는 이미 프리드리히 실러도 주목한 모양이다. 분업과 전문화의 과정을 통해 반쪽짜리 불구가 되어버린 인간에게 본래의 건강함(실러의 표현으로 인간의 총체성) 되찾기 위해서는 예술을 통해 가능하다는 주장은 아마도 모든 미술학원 경영자들이 가장 좋아할 표현일 것이다. 독일의 문호라고 불리는 괴테와 오랜 교류를 것으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실러가 실추되는 인간에 주목한 것은 어쩌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면이 있다. 칸트와 다소 다르게 느껴지는 점은 인간성을 획득하기 위한 교육적 방편으로 훈육 필요함을 말한 점이라면, 실러는 이성과 감정에 기반한 충동을 조화/제약하기 위한 방편으로 문화와 교육, 중에서도 예술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국내에서도 많이 주목을 받고 있는 독일의 교육이념인 발도로프 교육도 어쩌면 실러와 같은 독일 철학자들의 인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교실의 색깔을 괴테의 색체론에 근거한 6가지 색상을 적용하고 있는 사실에서도 철학적 전통을 짐작해볼 있다.

 

 

1 마무리

      다음에 쓰게 2부에서는 보다 본격적으로 현대철학에서 놀이 어떤 경위로 새롭게 해석되게 되었는지를 놀이하듯살펴볼 생각이다. 여러 현대 철학자들의 놀이 대한 관점을 살펴보게 것이고, 끝으로 현대 예술에서 놀이 특성을 확인하는 작업이 것으로 보인다. 학술서이긴 하지만 책이 제공하는 흥미로운 점은 놀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여러 철학자들의 관점이 접접을 갖기도하고 대립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달리 보면 각각의 철학자들을 다시 접하게 , 이들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보다 깊은 이해를 제공해줄 있겠다는 점이다. 플라톤이 그러하고 니체가 그러하다. 예컨대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통해 이진우 교수의 <니체의 인생 강의>에서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전통을 따른다 표현의 이유에 대해 보다 설득력있는 이해를 있다. 또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오는 낙타-사자-아이의 비유에서 아이 갖는 의미에 대한 보다 설득력 이해를 책이 도와줄 있을 것이다. 출판사의 광고대로 2500년을 아우르는 놀이의 철학을 번의 독서로 이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에게 책은 철학자의 저서를 읽을 옆에 두고 다시 돌아와 찾아볼 있는 그런 책이다.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쓸모없다고 오래도록 여겨진 놀이 대한 발견과 재발견의 철학사를 책에서 다룬다. 그리고 현대예술은 쓸모없음의 쓸모를 증거하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우리에게 보다 가깝게 느껴지는 현대철학에서 놀이 어떻게 해석될 있는지 이해해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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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발견하고 보관하는 남자의 수상록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윌리엄 데이비스 킹지음 | 안기순 옮김 | 책세상

 

 

끊임없이 발견하고 보관하는 남자의 수상록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집요하게 수집하는 남자의 에세이를 접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극무용과 교수인 저자 윌리엄 데이비스 킹은 우리가 흔히 가치가 있다고 믿는 대상을 사들이는 수집가가 아니다. 한때는 타인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를 뒤지기도 하고, 버려진 쇠붙이를 가져와 광이 때까지 집요하게 문질러대기도 하던 사람이었다. 책의 제목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열정적으로 수집한다.’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라고 번역된 용어의 다른 표현은 아마도 무가치한 ’,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의미한다고 있겠다.

     책의 시작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당시 43세이자 교수였던 저자는 이혼을 앞둔 암울한 상황이 전개된다. 아마도 이혼에 앞서 아내의 집에서 자신의 짐을 챙겨 나오는 장면으로 생각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저자가 7 써내려 개인적인 수집기이자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들여다본 성찰의 흔적이다.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수집하며 무언가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감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타인의 존중받기를 원하는 분열적인 자화상이라고 수도 있을 것이다. 7년간의 자기 기록 과정을 거쳐 책이 마무리되는 지점에서 50세가 저자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 결혼을 앞둔 시점에서 마무리되는 희망적인 책이기도 하다.

 

 

저자에게 수집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선 저자의 수집관은 매우 독특하다. 무언가를 수집하기 위해 돈을 들여 구입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수집할만하다고 생각할만큼 가치있는 대상을 수집하지 않는다. 저자 자신이 말하는 자신의 수집행태는 매우 독특하다.

 

수집 행태는 시장에서 외쳐대는 대상물들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다른 수집가들과 다르다. 나는 없고 빈약하고 실용적 가치가 없는 물건들에 반응한다.”(99)

 

나는 (…)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 깃든 의미 있는 어떤 것에 끌린다.”(99)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반응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요한 관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어쩌면 타인이나 사회가 의도한 욕망이 개인에게, 우리에게 투사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세계적으로 물신화된 가치체계에 익숙해져 무비판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가치있다고 믿는 어떤 대상은 의식화된 사회의 욕망이 아닐까. 반면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끌리고 반응하는 것은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자기 가신에 대해 알기 결과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자신에 대해 솔직한 사람이 나타낼 있는 솔직한 반응들을 말하는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대상들에 반응하는 행위는 현대 예술에서 작품과 관객사이의 반응관계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근대 예술에서 우리가 작품을 , 우리는 작가의 의도 파악에 노력을 기울였고, 작가는 자신의 작품 활동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일종의 텍스트로 제한하여 관객에게 제시하는 점이 특징이었다고 있다. 반면 현대 예술에서는 작가가 텍스트를 배제해버렸거나 아니면 최소한으로 제한하여, 작가의 의도롤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 또는 관람자는 작가의 작품을 통해 보다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경험과 배경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과정이 마치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느껴진다고 것은 바로 이런 특징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43세의 교수이었지만, 중년의 초입에 이혼이라는 인생의 고비를 건너는 상황이었다. 저자에게 수집행위는 이러한 인생의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약과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폭넓게 공유되는 수집 충동은 극도로 풍요로운 물질사회에서 우리가 받은 깊은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다수가 각자의 개인사에서 받는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수집이 그런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효과는 충분할 정도로 좋다.”(26)  

 

비록 도착적이고 모순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