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기로에 있는 젊은 이들을 위한 경제학자의 조언

<인생을 결정짓는 다섯가지 선택>

로버트 마이클 지음/안기순 옮김/책세상

                     

 

 

 

 

책은 사람들이 일생동안 만나게 되는 혹은 반드시 고민할법한 인생의 결정 사항 5가지를 중심으로 할아버지 경제학자의 관점에서 후배들에게 조언해주는 책이다. 경제학자 답게 수많은 연구결과를 반영하고 있으며 광범위한 통계 자료를 제시한다. 다만 연구의 대상과 통계 자료의 표본이 미국인들을 기준으로 한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인생의 중요한 다섯가지 결정에 도움이 될만한 고려사항들을 깊이는 얕지만 세부적인 사항까지 언급하고 있다.

 

   저자가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 사항 5가지로 꼽은 것은 학교교육’, ‘직업선택’, ‘배우자선택’, ‘부모되기’, ‘건강습관 관한 사항이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라고 흔히 말하곤 한다. 저자가 선택한 인생의 5가지 결정사항은 사실 온전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국면마다 서로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치고, 연관되어 있는 사항이다.

 

   예를 들어 학교교육과 직업선택은 현대 사회에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의 대학교육은 인간의 정신적 성숙을 돕는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직업을 갖기 위한 사설학원화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도 모자라서 정부는 평생교육 장려하고 자격증 제도를 만들어 국민들을 교육시장의 소비자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좀더 극단적인 예를 들면 대한민국에서 현재 매년 1 4-5000 수준의 박사를 배출하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는 달리 좀더 극단적으로 대한민국에는 박사 실업자가 많이 양산되고 있다고 한다. 그나마 이공계 분야는 상황이 낳은 편이나, 인문계 박사들은 가정을 갖고 부모가 되어 자녀를 양육하거나 하는 과정이 더욱 열악한 상황에 직면해있다. 이런 점들은 저자가 책에서 말하는 통계 지표인 고학력 일반적으로 높은 소득 얻는 경향과 맞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배우자선택과 부모되기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주제이다. 책의 옮긴이는 부분을 각각 결혼을 해야할까 아이는 가져야할까라는 제목으로 장에서 논의하는 방향이 상당히 왜곡될우려가 있다. 혹은 마케팅적인 관점에서 현재 대한민국에서 많은 관심을 가질 있는 세부 주제 가지를 장의 전체 제목으로 사용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점은 저자의 의도를 왜곡시킬 있기에 다소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책에서 저자도 언급하듯이 파트너로서의 배우자를 전통적인 이성 배우자 뿐만 아니라 동성인 배우자도 범주에 무리없이 포함시킨다. 할아버지 경제학자(1942 )로서 미국에서 민감한 주제인 동성 결혼이나 동성 부모 가족의 양육에 대한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는 점은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도 이제 매년 결혼하는 커플의 10% 이상이 국제결혼이고, 다문화라는 개념이 사회에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사회의 변화가 지속되고 다양성이 근래에 들어 급증한다는 증거로 있겠다.

 

   인생의 여러 결정 사항에 대해 경제학자로서 조언하고 있는 저자는 본인의 세계관에 따라 경제학적 관점에서 모든 것을 파악하는 듯하다. ‘시간 비용에 대한 투자’, ‘불확실성’, ‘외부효과’, ‘주인-대리인 관계’, ‘수익률 등의 용어로 독자의 선택을 돕고 있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국면에서 경제학적인 판단기준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과연 충분한가 혹은 옳은 것일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예컨대 대학교육을 이야기할 , 저자는 교육을 하나의 투자개념으로 바라본다. 사실 대학입시 원서를 제출하는 시기가 되면 국내 언론에서도 적성, 혜택, 학과 분위기 등을 고려하여 4 투자해도 좋을 곳을 선택하라 기사를 싣는다. ‘투자라고 하면 수익률 같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러한 경제학적 관점이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되면 학내 인문학과의 축소 폐지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이러니컬 것은 현재 대한민국은 인문학 열풍 한가운데에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맨큐의 경제학 필두로 우리에게 익숙한 신자유주의 경제 이론의 중심지 시카고 대학의 명예교수이다. 나의 좁은 소견으로는 저자가 평생 내면화한 신자본주의적 가치에 기반하여 어떻게 하면 '합리적' 근거로 선택의 기로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릴 것인지 조언하고, 체제에 가장 합리적으로 순응하여 살아갈 있는 무난한 선택의 길로 안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점이다. 책의 전반적인 느낌은 노경제학자가 딸에게 전해주는 노파심어린 충고이다.

 

   저자의 경제학적 세계관을 인생의 국면에 적용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계속 등장한다.  저자가 양육의 결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에서 어머니에게 건강상의 문제가 없다면 모유수유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모유수유가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는 일보다 좋다는 점은 누구나 공감하지 않을까. 그런데 저자는 모유수유가 돈이 들지 않는 가장 값싼 방법이므로 아이에게 모유수유를 권하는 것인지하는 생각을 하게한다. 경제학자다운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모유수유를 권하는 근거로는 빈약해보인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저자가 건강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저자가 말하는 건강 정의는 어떤 점에서보면 매우 플라톤적이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다시말하면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에서 진정한 실체와 실체의 모사인 그림자적 측면을 말한다. 우리의 현실은 그림자에 해당하고, 저자가 말하는 건강 상태는 바로 유일한 진실의 실체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건강 정의를 다른 말로 이해해보면 매우 기능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체의 모든 부분이 조화롭고 정상적인 역할 해내는 상태만이 저자의 건강범주에 들어갈 있을 듯하다. 다시말하면 저자는 사람이 건강한 상태는 신체에서 측정된 수치가 정상적 범위 내에 속해있을 경우에 해당한다. 하지만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수많은 크고 작은 병에 걸리고 고통을 경험하기도 한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병치레를 하는 것도 크게  건강 범주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했다. 앓고 온전히 회복하는 일도 결국은 건강한 상태로 봐야할 듯한데, 이부분은 단지 나의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다.  

 

     책내용만을 보고 저자에 대해 짐작해보면 저자는 온건한 보수성향의 백인 가정에서 교육을 받은 인물이 아닐까한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이 발생한 후인 1942년에 태어났다고 하는 저자는 어려운 시기에 태어났지만 저자의 가치관은 50-60년대 호황기 백인 중산층 가족 가치관의 전형인듯하다. 건강을 이야기하며 프랭클린을 인용하는 것도 어떤 점에서보면 저자가 종교에 대한 표면적인 편견은 없으나 청교도적인 가치관의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프랭클린으로 대표되는 청교도적 윤리관은 근면, 절제, 검소 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일찍자고 일찍일어나면 건강해진다.’라는 프랭클린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건강 관한 장에서 저자에 대해 분명히 청교도적 가치의 영향을 느낄 있다. 아울러 동성 결혼과 양육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논의의 카테고리에 포함시킨 점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신선하게 다가왔다.

 

   저자의 가치관은 <사피언스의 미래>라는 책에서 이루어진 토론의 참석자인 매트 리들리와 스티븐 핑커의 관점과 너무나 유사한 같다. 매트 리들리와 스티븐 핑커는 과학자이고, 사회에 대한 모든 인식과 판단 기준은 절대적으로 수치와 자료에 기반하는 같기 때문이다. 이들이 참여한 토론의 주제는 인류의 미래는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대한 것이었으며, 상대편 토론자는 알랭 보통과 맬콤 글래드웰이었다. 알랭과 맬콤은 인문학을 공부한 이들로서 인류의 미래는 낙관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인간의 정신적 가치에 중점을 두어 토론을 진행해나갔다. 반면 매트 리들리와 스티븐 핑커는 인류의 미래는 절대적으로 낙관적이며, 모든 통계와 수치가 이를 증거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전문가는 경제학자였다. 마찬가지로 <인생을 결정짓는 다섯가지 선택> 저자인 로버트 마이클은 경제학자이자 공공정책 분야의 권위자 답게 방대한 통계자료를 인용한다. 통계자료에 대한 이견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료를 해석하고 이를 어떠한 의도를 갖고 견해를 표출하게 때에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새삼 환기하게 된다. 저자의 조언은 수긍이 가는 부분도 많지만 사실 저자의 조언은 전문가이기에 있는 조언이라기보다는 인생의 선배로서 있는 조언일 것같다. 상식적으로 이미 주변의 어른들로부터 많이 들어본 조언들이 많기 때문이다.

 

(책을 덮으며)

책에는 할아버지 경제학자가 후배들에게 해주는 조언들이 가득하다. 다만 인생의 여러 국면에서 판단할 기준을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다소 제한적인 조언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모든 선택의 행위를 투자, 그리고 선택이 잘되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수익률 된다면, 기대한 수익률이 나오지 않았을 경우 개인의 선택은 틀린 것이 된다는 것일까. 저자가 제시하는 각각의 중요한 선택에서 반드시 존재하는 불확실성 떠올려본다면 독립적인 성인 된다는 것은, 최선의 선택을 하도록 노력하되, 자신의 선택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결정의 순간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불확실성을 최소화는 선택을 하여 자신의 삶에 주도적으로 관여함을 의미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제시하는 모든 통계와 진심어린 조언들 뒤에는 결국 인생의 주인인 본인이 모든 국면에서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져야한다는 점을 깨닫는 일이다. 

   독자가 인생의 단계에서 선택의 기로에 직면해 있을 , 저자는 수많은 선택의 길이 있음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개개인의 사정은 모두가 다른 ! 결국은 여러 주제를 언급하기는 하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선택의 가능성의 수에 반하여 지극히 원론적인 선택시 고려사항만을 전달해 있을 뿐이다. 결국 각자의 인생에서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은 책을 읽는 독자들이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죽음 문제와 마찬가지로 보편성을 공유하면서도 지극히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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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작업 <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

 

<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

모니카 렌츠 지음 | 전진만 옮김 [책세상]

 

‘죽음’에 대하여

 

    ‘죽음’이란 주제는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가 맞이하는 유일하고 확실한 운명일 것이다. ‘사랑’과 ‘죽음’은 아마도 인간의 인지능력이 여타의 동물과 달리 창발되어 드러난 이후 언제나 우리의 속에 함께하는 주제가 아닐까한다. ‘사랑’은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논했던 주제인 반면, ‘죽음’은 어쩐지 우리가 회피하고 막연하게 다가오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을 같다. ‘죽음’은 본연의 실체를 모르기에 더욱 공포스러운 생명체의 운명이다. <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 저자 모니카 렌츠는 스위스 동북부에 위치한 장크트갈렌St. Gallen 종합병원의 정신종양학 의사로서, 그리고 임종을 앞둔 환자들을 대상으로 음악치료에 관심을 갖고 있는 심층 심리학자로서 활동하는 죽음 전문가라고 있다. 저자가 17 1000 명의 죽음에 이르는 환자들을 지켜보고, 경험한 점들을 바탕으로 책이 바로 <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이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을 운명’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어느 누구도 모른다는 점이 ‘죽음’에 대해 갖게 되는 공포일 것이다. 어느 누구도 죽음의 실체에 대해 모르는 것은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우리의 죽음이 지극히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은 중에 몽테뉴의 에세이 형식을 닮은 빌헬름 슈미트의 철학서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에서도 ‘죽음’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죽음은 솔직함의 극단적 지점이며, 이상 회피를 용납하지 않는 진리의 순간이다.”라고 하였다. 누구나 피할길 없는 자명한 운명은 지극히 개인적이긴 하지만 언젠가는 누구나 마주해야하는 대상이다. ‘안락사’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 현대 사회의 분위기는 바로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 모니카 렌츠는 서문에서 ‘안락사’에 대한 개념을 여러 가지 유사 개념들과 함께 구분해 놓고 있다. 생명유지가 무의미한 상황에서 생명 연장을 위한 조치들을 포기하는 ‘소극적 안락사’와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약물을 투여하여 ‘생명’을 인위적으로 단축하거나 거두는 ‘적극적 안락사’, 그리고 의료진으로부터 약물을 직접 처방받아 환자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조력 자살’ 행위도 있다고 한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은 문화적 맥락에서 ‘안락사’는 논의를 꺼내기 쉽지 않은 주제다. 나아가 가족 명이 ‘안락사’를 이야기 한다면 더욱 힘겨운 주제가 것이다. 현재에도 특별한 시대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안락사’는 금기시 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 ‘안락사’는 금기시되는 단어라고 어느 교수로부터 들었던 적이 있다. 바로 나치가 권력을 잡던 시기에 아우슈비츠와 같은 집단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는 일’이 ‘안락사’라는 단어와 결부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일 나치의 광기어린 지도층에게나 ‘안락사’라고 말할 , 정작 대상이 되는 수용되어 있던 유대인들에 대한 고려와는 전혀 무관한 표현이었다. 이처럼 말을 꺼내기조차 쉽지 않은 ‘안락사’를 언급하기도 하며 저자가 말하려던 의도는 무엇보다 ‘존엄’에 대한 질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여타의 동물과 다른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이 있는가? 그리고 인간의 마지막 모습에 ‘존엄’이란 존재할 있나? 저자는 ‘좋은 죽음’이란 무엇일까도 자문한다. 저자가 기존의 죽음을 다룬 사람들과 다른 점은 아마도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들의 관점에서 ‘죽음’을 고려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일 듯하다. 따라서 저자에 따르면 일반적인 인지과정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임종환자의 ‘존엄’은 보다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저자는 책의 여러 곳에서 꾸준히 ‘존엄’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 저자는 심지어   다시 환기하자면 죽음이란 모든 인간에게 일어나는 실존 형식의 하나로서, 죽음을 17 관찰해온 저자의 ‘죽음’에 대한 경험을 나도 조금 얻어갈 있게 되어서 좋은 기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죽음의 의사라고 불리기도 하였던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연구와 업적은 저자의 선배 세대로서 죽음이란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하는지에 대해 영향을 미쳤다. 저자 모니카 렌츠는 선배 연구자 퀴블러 로스의 업적에 힘입은 크다는 점을 언급함과 동시에 한계점을 언급하고 있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의 순간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다만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앗다는 확진을 받고 나서 쇼크, 상실, 비운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주는 내적인 여정만을 묘사한다.”(42) 퀴블러 로스의 견해는 임종 환자의 죽음에 대한 수용-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하며, 저자 자신은 여기에서 나아가 죽음이라는 현상 자체 대한 이해를 하기위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저자 모니카 렌츠는 죽음의 과정은 크게 3가지 다른 양상으로 구분된다고 묘사한다. 그리고 임종 과정은 다른 상태 사이를 반복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전이 현상으로 이야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죽음의 과정 3단계는 삶과 죽음의 경계이전 단계(통과 이전), 경계를 통과하는 순간, 그리고 경계의 통과 이후 이루어진다고 본다. 경계 이전의 단계에서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자아가 소멸되어간다고 한다. 경계 통과 이전의 경직된 상태는 경계를 통과하며 이러한 상태가 이완되는 과정을 수반한다고 한다.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기점으로 임종 환자의 공간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됨을 강조한다. 따라서 임종환자의 인지 경험은 일반인들의 시각에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임종 환자는 죽어가는 과정을 통해 이전의 자기와 전혀 다른 타자가 되어 죽는다 한다. 죽음의 과정은 통제가 불가능하고 지극히 개인적이므로 결코 완전한 이해에 다다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와 같은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닌 이상, 자연적인 죽음에는 틀로서의 진행방식은 존재하는 같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일부만이 죽음의 과정을 지켜보는 우리들이 파악될 것이다.

 

     모니카는 죽음의 단계에 대한 연구와 소개에서 멈추지 않고, 의미에 대해서도 추구한다. 죽음의 단계에서 존엄이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임종환자의 가족으로서 그리고 전문가인 의사로서 환자를 어떻게 돌보아야하는지를 저자는 되묻고 고민한다. 모니카가 잊지 않고 당부하는 점은 임종 과정이 환자 뿐만 아니라 환자의 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한가지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존엄이라고 하는 개념이 초기 근대의 계몽주의적인 산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현대인들이 죽음으로부터 소외된 이후, 우리는 전문가'로서 의사의 서비스에 의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필요 전문가인 의사와 간호사에게 위탁함으로써, 과거 우리 선조들이 자신들의 집에서 임종과정을 지켜보고, 후손들에게 이야기와 경험을 통해서 전달되던 죽음 대한 지식과 이해가 일반인들로부터 분리된 상황을 초래했다. 결국, 일종의 계몽주의적 산물로서 죽음  전문가들의 지식과 돌봄에 대한 경험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우리 선조들 보다 앞에서 언급한 존엄 의미가 더욱 가벼워진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

     저자는 분명히 삶과 죽음의 경계 통과 이후의 모습에 대해 우리가 없다라고 선을 긋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죽음 연구에 있어서의 한계를 인정한다. 죽음의 실체에 대해 완전히 이해가 가진 않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지만, 모두에게 반드시일어나게될 실존의 형식으로서 죽음 대해 우리는, 그리고 나는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지 깨닫는 경험이었다. 죽음에 대해 좀더 알게 것이 반갑고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곳곳에서 저자가 기독교적 해석을 가미한 점에는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 점은 있지만, ‘죽음 실체를 이해하기위한 노력과 죽음의 단계에서 진지하게 되묻는 존엄 의미 추구는 공감을 많이 하게 된다. 오히려 저자가 소개하는 칸트의 존엄 의미는 우리의 경험과 무관하게 인간이기에 존엄을 갖는다 정언적 선언이기에 모호하고 공감을 하기 힘든 점이 있다.

 

     현대 사회는 죽음을 금기시하는 사회라고 서경식 교수가 글을 언젠가 읽은 기억이 난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살던 집에서 가족들에 의해 둘러싸여 죽음을 맞는 것이 아니라 병원 시설에서 첨단 장비에 연결되어 생명 활동의 신호가 수치로 모니터링 되는 상태로 명을 이어가다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맞는 죽음은 금기시 된다. 모니카 렌츠는 오늘날 터부시되는 것은 이상 죽음 아닌, ‘죽음의 고통이라고 보다 명확히 지적하기도 한다. 현대인들이 이렇게 죽음을 회피하게 현상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점점 소외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를 좀더 신랄하게 비판해본다면, 나는 현대인들이 자신들의 죽음 아웃소싱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표현해보겠다.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일부를 회피하는 데서 생기는 소외현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바꾸어 말하면, 이런 상황은 죽음 우리 삶의 필요충분조건이자 우리 삶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정보 내지는 조건처럼 인지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한다. 가운데는 현대 사회의 병폐에 기인하는 점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같다.      

 

     책을 덮으며 모니카 렌츠가 자문한 것처럼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고민해본다. 누구나 죽는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죽음은 너무나 개별적이기에 죽음 앞에 좋은이란 수식어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죽음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는 현대인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선배 세대에 비해 죽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음을 느낀다. 따라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는 점점 희귀해진다. 죽음은 생명을 가진 개체의 삶의 완성이기에 죽음 대해 알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보다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향하게 있지 않을까.


 


(37면) 죽음의 이해
˝자아 중심적 존재에서 더 큰 존재(포괄적 존재)로의 전이, 자존적 존재에서 포괄적 존재로의 전이는 죽음에서 가장 본질적으로 경험하는 영혼적, 정신적 과정이다.˝

(50면) ‘존엄‘에 대해
˝존엄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올바른 관계를 지칭하는 용어다. 동시에 자율의 표현이자 (거부가 아닌) 긍정의 표현이며 본질에 다가서려는 ‘불굴의 의지‘다.˝

(89면) ‘임종환자에 대한 위로‘
˝위로란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에게 말을 거는 일이다.˝

(109)면 ‘죽음‘의 존재론적 해석
˝존재론적으로 말하자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이자 ‘대상을 경험하는‘ 통로에서 죽음이 발생한다. (...) 즉 인간은 존재자이면서도 이전의 자기와 전혀 다른 타자가 되어 죽는다.˝

(159면) 오늘날 왜곡된 죽음
˝오늘날 터부시되는 것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닌, 죽음의 고통이다. 사람들은 고통과 함게 환자의 외모가 심하게 일그러진다는 사실에 두려워하고 공포를 느낀다. 이 공포에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187면) 임종준비
˝임종 준비란 임종 환자뿐만 아니라 그들 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과정이다.˝

(243면) 저자의 마지막 언급
˝죽어가는 사람들의 증언과 이들의 마지막 변화가 내세에 대한 암시인지, 아니면 단지 임사체험을 표현한 것인지에 대한 대답은 여전히 열려 있다. 단지 해석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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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청년들에 대한 현상학 <청춘의 가격>

 

<청춘의 가격>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지음 | 사계절

 

 

<청춘의 가격>에서 이야기하는 청년들의 범주에는 아마도 현재 고등학교, 대학교, 사회 초년생 정도의 연령대가 주로 포함되어 있을 것같다. 10 후반에서 30 초반 정도의 청년들에 해당할 터인데, 나는 청년들과 이들의 부모세대 사이에 끼인 세대로서 청년들의 부모들은 나의 삼촌, 숙모에 해당하는 전형적인 연령 구성을 떠올려볼 있겠다. 청년의 부모들은 자녀들이 현재 어떤 삶의 조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책을 살펴봄으로써 자녀들이 처한 현실을 어느 정도 그려볼 있을 것이다. <청춘의 가격> 현재 나의 삶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모습들을 담고 있다. 삶과 여러 교집합을 가진 책을 읽어내려 가면서 자신의 삶을 다시 살펴볼 있었다.

 


(1 가족의 증가  신자본주의 시대)

     1997 IMF외환위기 당시 세대들은 부모들이 직장이나 사업체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많이 목격한 세대이기도 하다. 시기를 기점으로 사회의 근본적인 체질이 변했다라고 진단을 내리는 이들이 많다. 경제전문가이든 일반 직장인이든간에 말이다. 2008 세계금융위기 때는 아마도 <청춘의 가격> 나오는 청년들이 한창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을 부모들이 차례 위기감을 느꼈을 것하다. 우리 사회에는 이제 생존에 대한 위기감과 긴장감이 팽배해진 사회가 되어버렸다. 나아가 이제 이러한 신자본주의 세계에서 생존 위해 버텨야만하는 인간은 가족이라는 전통적인 관계망과 충돌을 피할 없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인간 개개인에게 개성이라는 허구를 발명하여줌으로써 인간의 개별화, 원자화를 더욱 부추기게 되었다. 결과가 바로 우리 사회에서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는 ‘1 가구 증가 현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청춘의 가격> ‘1 가구 증가하는 현상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여러 통계자료를 통해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 점은 1 가구의 경제력이 자녀를 청년 부부와 마찬가지로 매우 취약하다는 진단일 것이다. ‘보통의 1 가구는 어느 가구 형태보다도 소득이나 소비, 재산 수준에서 열악함을 벗어나지 못한다.’(105)

     요즘 수도권 집값이 하늘 높은 모르고 치솟는 데도, 마땅한 집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단순히 생각하면 대가족이 함께 집에서 살면 많은 부분이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는데, 우리 사회의 모습은 더이상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이제 평생 빚을 갚겠다고 계약서에 사인을 하면서도 부모와 더이상 살지 않는 시대를 살기 때문이다. 세대 가족이 분리되는 경향을 넘어 최근에는 대한민국 사회의 혼인율이 최저치(2016) 기록했다는 기사도 있다. 그렇다면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은 서로 어울려 살지 않는 이상 대부분 1 가구의 모습으로 남지 않겠는가. ‘각자 도생 시대에 경제력이 취약한 청년들은 무거운 삶의 무게를 혼자 감당해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수많은 불법건축물 속에서 누을 좁은 공간에서 살고 있는 청년들의 이야기만으로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게 현재 대도시 청년들의 삶의 모습임을 부인할 없다.   

 


     ( 취약한 계층 - 여성)

     책에 소개된 직업관련 통계 자료에서 상용직과 임시 일용직 추이(107, 도표20) 보면 35 미만 여성들이 처한 열악한 현실이 눈에 띈다. 결혼을 하여 자녀가 있는 청년 부부도 취약하긴 하지만 그보다도 1 가구로 사는 여성들은 더욱 열악한 노동시장 속에서 버텨나가야 함을 보게 된다. 이들이 사회에서 갖는 입지가 얼마나 열악한 상태인지 짐작만 있을 뿐이다. 반면 거리를 다니면서 우리 주위를 둘러보거나 혹은 직장에서 임시 일용직 여성들을 힘들지 않게 찾을 있다. 통계자료는 그저 현상을 재확인해줄 뿐이다.

     요즘 새롭게 드는 생각은 여성들이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여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소식도 고무적이긴 하지만, 소위 잘나가는 여성들에 대한 언론의 주목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한 점을 많이 느낀다. 성공한 여성들은 남자들과 당당히 경쟁하여 실력을 인정받았을 지언정, 전통적인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사회구조 하에서 치열하게 경쟁하여 성공하긴 했으나, 여전히 다수의 여성들은 직업 현장에서 힘들게 지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성공한 여성들에 대한 주목 뿐만 아니라 취업 직장 여성에 대한 공평하고 균형잡힌 기회와 평가의 기회가 보편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실천되어야하는 점도 중요하다고 믿는다. 보다 근본적인 사회 체질의 화가 아울러 중요하지 않겠는가.

 


(청년들의 주거 문제)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1 가구의 증가와 더불어 청년들이 가장 비용을 지출하게 되는 일이 거주지와 관련한 문제임을 확인할 있었다. 편의점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고시원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에 대한 기사는 비단 2017년에 새롭게 등장한 풍속이 아니다. 지도자의 윤리적 판단능력은 도외시한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의 판매가를 올려줄 있는 지도자를 뽑는데 모든 것을 거는 우리의 기성세대들은 자녀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살아가게 될지 책을 보면 파악할 있을까? 아니면 책의 에피소드를 읽고 단지 소설이라고 치부해버릴까. 주택 대출을 받아 평생 빚을 갚아야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그나마 버틸 있는 것은 금수저’, ‘은수저 뿐일지도 모르겠다. 자신도 거대한 주택 대출을 받고 빚쟁이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금융기관은 여기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 이자율 혜택을 조금이라도 준다는 명록으로 자신들의 다른 금융상품 재구매하거나 사용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덕에 원하지 않았던 신용카드만 꾸준히 늘어나고, 나는 끊임없이 빚을 만드는 경제구조의 실험대상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나는 그렇저럭 주변 가족의 도움으로 버티고 있으나 과연 나의 자녀들은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 주변 위성도시들의 아파트 건설 붐으로 경제력이 취약한 청년들은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의 주요 먹이감이 되고 있다. 내가 가족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자녀가 장차 도움을 필요로할 부모처럼 도움을 있을까? 자녀가 성장하여 독립하게 즈음, 나는 직장에서 여전히 일하고 있을 있을 것인가? 나는 자녀들에게 확답을 해줄 수가 없다. 그래서 더욱 자신이 없고 두렵기만 하다.

 


(결론 대한민국 청년의 삶에 관한 현상학)         

     책을 읽고나서 다시 돌이켜보면 <청춘의 가격> 2017 한국 청년들의 모습을 담아내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현상에 대한 소개와 정리는 되어 있으나, 청년들이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야만 하는지에 대한 언급이 부족한 느낌이다. 보다 폭넓은 시각에서 사태를 조망해봤으면 어땠을까? 물론 ?’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만 실마리라도 좀더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일이 생겨난 것인지 이유와 배경을 위한 ()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좀더 맥락에서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노력들로 이어지지 않을까. 현실에 대해 점점 알게되면 점점 불편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것이다.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청년이라도 우리 삶을 구성하는 불편한 진실 회피하는 것은 청년꼰대 되는 전제 조건이 아닐까. 불편한 기억, 불편한 현실에 우리는 꾸준히, 끊임없이 마주대해야만 한다. 불편한 진실들을 기억해두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장차 이를 바로잡고 개선하기 위해서다.

     청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련된 청년 일자리 지원 센터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아쉬운 점이 남는다. 창업자금을 어느 정도 마련할 있는 청년들에게는 현실적으로 도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창업자금마저 마련하기 힘든 청년들의 경우, 청년들에게 도전적인 창업정신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청년들보고 일자리 많은 중동으로 가라고 말했던 대통령 박근혜’(2015 3 19 발언) 일자리 해법 제시와 뭐가 다르겠는가. 이런 대표 꼰대들은 오히려 <청년의 가격> 읽어볼 일이다. 아울러 정부에서 지원하는 창업지원 프로그램은 많아졌을지 모르지만, 이를 어떻게 운영해나가야 할지, ‘창업 이후 과정까지도 살펴보고 지원해줄 있는 프로그램도 있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아쉬웠던 점은 책의 마지막에 마무리하는 말로서 저자들이 현재 자신의 일에 충실하라 충고하는 대목이었다. 물론 충고는 분명 중요한 조언이다. 그러나 보다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인간의 조건 이해하려는 노력이 아울러 세심하게 필요할 같다. 어떤 면에서 현재에 최선을 다하라 충고는 우리가 담고 있는 체제에 순응하여 적응하라라고 충고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카르페디엠 의미로서 현재 방점이 있을것이라 짐작해본다. 반면 ‘(원하는 일자리를 얻도록) 최선을 다하고, 적극적으로 노력해야한다 청년에 대한 충고는 표현 자체가 체제 순응적이고, 우리가 처한 현실의 본질을  치열하게 파악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일 있다. ‘열심히 하면 라는 거짓말을 우리는 기성세대로부터 얼마나 많이 듣고 속아왔는가.       

     ‘1 가구의 증가 같은 현상은 사회 구성원의 개인화/파편화/몰개성화를 촉진하고 현대 금융자본주의의 구조 하의 노예적 삶을 고착시키는 기작이 있다.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지적처럼 인간의 원자화과정을 통해 후기 금융자본주의 구조 하에서 새로운 전체주의 사회로 이행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나는 이런 부조리한 구조에 대한 저항으로서 잇닿아 있음 가치 연대 중요성을 새롭게 깨닫는 독서 경험이기도 하였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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