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삶의 철학> - 우리의 소박한 삶을 낯설게 보기

단순한 삶의 철학

(원제: The Wisdom of Frugality)

엠리스 웨스타콧 (Emrys Westacott) 지음 | 노윤기 옮김 | [책세상]

 

 

 

이번에 읽게된 <단순한 삶의 철학> 대한 글은 기존의 독후감과 유사한 방식으로 나아가지 않고 보다 간결하게, 내가 받은 인상을 책은 어떤 책이다라는 방식으로 정리해보려한다.

 

 

<단순한 삶의 철학> 생각의 출발점이 되는 책이다.

책의 저자 엠리스 웨스타콧에 대해 출판사에서 제시한 자료를 보면 미국 뉴욕 소재 대학의 철학과 교수로서 본인 자신은 지독한 구두쇠로 스스로 인정하고 있으나 책에서는 독자에게 검소한 삶만이 길이다라고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자는 책의 처음부터 소박하고 단순한 선배 철학자들이 주장했고, 이를 찬양했다고 하여 우리도 여기에 따라야하는가를 묻는다. 책의 원제(검소함의 지혜) 고려하면 결국 저자의 입장은 소박하고 검소한 손을 들어주고 있긴 하지만, 이를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을 공개하듯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는인상을 받는다. 일상생활에서 당연한 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에 대해 의심하기, 일상에서 철학하기를 우리에게 책전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저자의 견해에 동조하든 반대하든 선택은 각자의 논리와 철학에 달려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저자가 제시하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하나하나 따라가며 자신의 견해와 비교해보면 것이고,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들을 풍부하게 제시한다.

 

 

<단순한 삶의 철학> 천천히 읽는 책이다.

저자가 어떤 관점에 대해 소개할 , 다양한 견해를 제시해준다고 말했다. 동전의 양면을 모두 면밀히 살펴보듯, 해당 관점에 대해 저자는 반론의 가능성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뚜렷한 주장이 없이 저자의 논점이 없어보이기도 한다.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반론의 모습을 따라가는 것은 긴장의 이완이 없이 지속적으로 긴장상태에 있는 같아 속도감있게 진행되지 않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책은 소박하고 검소한 삶과 우리의 행복한 , 의미있는 삶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소개해주는데, 고대의 철학자 뿐만 아니라 알랭 보통과 같은 동시대의 저술가도 소환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가 제시하는 문장의 의미는 저자가 정리한 고대 철학자나 동시대 철학자의 저서에 대한 서평이기도 하다. 책은 독자의 수준에 따라 저자가 제시해주는 견해들을 이미 알고있다면 빠르게 읽어나갈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천천히 읽을만한 책이다. 어떤 점에서는 <단순한 삶의 철학>  검소한 삶의 미덕으로 가기 위해 저자가 오랜 시간 함께해온 책들과 삶의 철학이 함께 녹아든 독서에세이라고 수도 있겠다. 저자의 폭넓은 독서 경험과 검소한 삶의 미덕 대해 생각해온 저자의 고민이 들어있는 만큼 천천히 읽으며 독자 자신의 생각을 부추기는 책이기도 하다.

 

 

<단순한 삶의 철학> 유연한 윤리학을 보여준다.

윤리학/철학을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우선 자신이 책을 읽으며 받은 인상은 책이 북미의 실용주의 윤리학의 전통을 잇는 실천윤리학적 맥락을 보여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 실천윤리학의 대표적인 인물인 피터 싱어의 철학과 생각하기의 방식 닮아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가치에 대해 우리의 일상의 실례를 다양하게 고찰하고, 다양한 관점을 모두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서양철학사 2000년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는 영국 철학자 화이트 헤드(White Head) 말을 떠올려본다. 플라톤 철학의 전통은 이데아 철학임을 인정한다면, 이데아 영원불변의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다. 여기서 플라톤을 갑자기 꺼내는 이유는 <단순한 삶의 철학> 원제가 의미하듯 소박한 삶의 지혜라는 (저자의) 기준을 가진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전통을 잇는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길에 이르기 위한 과정은 상당히 유연하고 상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 또한 우리가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어떤 가치 대해 다시 들여다보기를 실천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경제를 북돋우기 위해 지역 농산물만을 구매하여 섭취하는 것이 좋다라는 주장을 놓고 , 피터 싱어가 그의 <죽음의 밥상>에서 다양한 입장을 모두 고찰하던 모습을 책의 저자 엠리스 웨스타콧도 유사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 측히 후기 자본주의로 대두되는 지구촌에서 물질적 풍요와 소비의 향유는 성공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풍요속의 빈곤, 공허감을 이야기하기 시작한지 오래다. 책은 결국 이러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검소한 사람 가치를 다시 들여다보게 해주고, 우리의 일상에서 각자가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로 실천의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책이 아닐까 한다. 

 

 

<단순한 삶의 철학> 읽고 옆길로 흔적 단상들

저자는 고대 철학자, 사상가들의 시대와 현대 시대는 분명 삶의 양태가 다르다는 점을 분명이 인식하고 제시한다. 가진 것이 부족하고, 소수의 특권 귀족 계층만이 부를 누리던 고대 사회에서는 귀족 계층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서 금욕주의 칭송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금욕주의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다’(49)라고 저자도 주장하고 있듯이, 저자는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에 대한 고려를 놓치지 않는다. 책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도 역시 2년에 가까운 속에서의 생활에 기반하여 <월든>이라는 책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역시 전세계가 긴밀히 인터넷과 전화 등의 통신망으로 연결되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소유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소로의 실험적인 삶은 사실 접근하기 어려운 방식이다.

 

2018 현재, 자본주의적인 경제구조가 지구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잡리잡을 있었던 이유 하나는 서구의 자본주의가 지구촌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개성이란 개념을 발명(?)하고 주입시킨데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우리는 언제나 욕구 가지고 있다. 생물체로서,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말이다. 자본주의는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일이라는 점으로 우리에게 안심시키며, 우리가 자신들의 욕망 충족하기 위해 자유의지 갖고 이를 추구하도록 독려한다. 저자도 누누이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가 무엇을 욕망한다는 것은 그른 일일까를 반문해보면서도, 보다 중요한 것은 욕망 모습이 어떤 양태를 가지며,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따져보라는 것이 저자 엠리스 웨스타콧 교수의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보다 간결히 말하면,  어떤 가치 주장에 대해 단순히 수긍하기 전에 각자가 따져보라 것이다. 그리고 판단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모양이다. 저자는 끝없이 의심하고 소소한 반론을 제기한다. 저자는 심지어 끝없는 욕망이 불행으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127)라고 까지 주장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높고 강렬하고 광범위한 행복의 동력이 되는 경우도 있다’(127) 점이다.

 

그러나 책의 후반에서 다루고 있듯 우리 현대인들은 개성 표출, ‘욕망 충족을 위해 많은 시간을  일해야만하는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4차혁명이라는 화두로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인공지능에 기반한 삶의 혁명은 우리의 삶의 질을 보다 높여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당장은 우리의 삶을 좀더 편하고 일처리를 빠르게 해주는 자동화 과정에서 현대 기술은 인간의 생산성을 더욱 압박하는 양상도 무시하지 못함을 지적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자동화 설비를 통해 일주일하던 임무를 하루만에 해냄으로써 기존의 작업방식을 혁명적으로 개선했지만, 이는 또다시 노동자로하여금 일주일 내에 일곱배의 일을 완수하도록 강요하는 메카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대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현대인들, 특히 노동자들의 삶은 노동시간이 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 내에 많은 일을 하도록, 높은 생산성을 요구하는 모순을 가져왔다는 점도 고려해야한다. 저자가 소박한 사람또는 검소한 길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노동시간을 언급하는 것도 분명 검소한 에는 삶의 대한 고려도 분명 포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짐작할 있었다 

 

저자가 보여주는, 혹은 저자가 개인적으로 판단하는 검소한 모습을 글로 모두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이를 글로 표현하고 타인에게 주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책의 가치는 저자가 독자들을 각자 나름의 고유한 점과 보편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인정하고, 독자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한번 면밀히 들여다보라고 권유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각자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낯설게 보라는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책은 소크라테스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성찰하지 않은 삶은 가치가 없다(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라는 주장에 대한 실천적 가능성이라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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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대면하고 치유의 길로 이어주는 마법’ – 피해자와 가해자가 용서와 자유에 이르는 여정

용서의 나라

(원제: South of Forgiveness)

토르디스 엘바/ 스트레인져 지음 | 권가비 옮김 | [책세상]

 

 

 

과거를 대면하고 치유의 길로 이어주는 마법’ – 피해자와 가해자가 용서와 자유에 이르는 여정

 

 

잃어버린 기억, 잃어버린 시절

기억에서 기어 나오며 나는 잃어버린 세월의 황량함에 몸을 떨었다. (…) 사랑의 나라로 처음 뛰어내렸는데 낙하산이 펼쳐지지 않았다는 . 피처럼 붉은 대문자들이 나의 추락을 그림처럼 선명하게 묘사해 넣었다.”(146)

 

성폭력 피해자이자 <용서의 나라> 저자인 30대의 토르디스 엘바가 열여덟 생일날 아침에 시를 다시 들여다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다. 이처럼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은 폭력은 십수년이 지나도 여전히 이들의 세포 하나 하나에 선명히 각인되어 끊임없이 피해자들을 따라다닌다. 

 

<용서의 나라> 저자는 때의 연인이자, 성폭력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를 대면하는 일은 피해자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와 고통을 있는 일이기에, 특히 피해자에 대한 보호와 보살핌이 이루어지지 않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상당히 우려스러운 상황으로 보였다. 하지만 사람을 대면하게 해줄 있게 해준 매개체는 책의 제목에도 드러나듯, ‘용서라는 화두로 가능했다. 책은 흔히 합의라는 이름의 경제적 보상으로 폭력사건의 가해자가 면죄부를 받고 새사람으로 변신할 있는 대한민국 사회를 떠올려볼 , 진정한 용서 어떻게 이루어져야하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제시해주며 우리가 눈여겨볼만한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책에 등장하는 저자이자 성폭력 피해자인 토르디스 엘바는 아이슬란드에서 태어난 여성이며, 다른 저자이자 성폭력 가해자인 스트레인져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남성이다. 사람은 각각 10 후반이자 20 초반이었던 16 사람 사이에 있었던 성폭력 사건의 기억을 다시 소환하고 이와 직접 대면하기위한 준비를 한다. 특별한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장소로 남아공의 케이프 타운을 선택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케이프 타운은 소수의 백인 남성이 주도했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폭풍을 겪은 곳이면서,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정치적 이유로 반평생을 감옥에서 갇힌 풀려나 활동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무엇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성폭력이 발생하고 있는 곳이기에, 케이프타운에서 이루어진 사람의 만남은 서로의 화해와 용서를 위한 출발점으로서 매우 상징적이고,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육체적으로는 성숙했을지 모르지만 성적으로나 삶의 경험으로나 아직 미숙하던 10 후반, 20 초의 저자들은 사건직후, 가해자 피해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부정 반응을 보여주고 있음을 발견할 있다. 토르디스는 자신이 겪은 절대적 신뢰의 대상이었던 연인에게서 당한 일이었음을 믿지 않으려 했다. 한편 톰의 경우, 토드디스와 절교하고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끝나게 되어 아이슬란드를 떠나며 상황을 회피하였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덮으려는 태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톰에게는 회피기작으로 인해 어떤 죄책감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토르디스가 톰에게   일에 대해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높여 톰의 가해 사실을 전달할 때까지는 말이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성폭력은 우리 주변, 특히 안면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많이 자행된다는 점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최근 국내에서 발생한 여러 성폭력 관련 사건을 살펴봐도 그렇다. 무작위로 성폭행을 저지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토르디스가 책의 초반에 말문을 열며 언급하는 대목도 정확이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대부분의 강간사건은 우리가 피하라고 교육받는 그런 상황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강간 사건은 대부분 가정에서 일어난다. 우리가 믿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친척, 배우자, 친구 등에 의해서 일어난다.”(33)

특히 톰의 경우 성폭력 가해자가 되리라고 짐작해볼만한 단서를 찾기힘들다. 우리가 성폭력을 가하는 사람은 이미 정해져있다라고 믿는한 그렇다. 그러나 톰은 사랑이 넘치고 풍요로운 자연환경에서 충만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교육도 충분히 받았고, 부모로부터 사랑도 많이 받았다. 여성을 혐오할만한 부정적인 경험을 적도 없어보이며, 오히려 성장과정에서 톰에게 긍정적인 여성상도 많았다. 경우를 보면 누군든 성폭력 가해자가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는 점에서, 성폭력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일깨워준다. 아울러 성폭력은 어디에나 존재할 있음을 사례는 다시금 분명히 보여준다.

 

토르디스는 남자가 여자를 범하는 이유에 대한 답을 사회구조에서 찾을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 사회구조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 부분은 책의 후반에 사람이 남아공의 강간위기센터를 방문했을 , 곳의 담당자였던 시릴라가 남아공의 현실에 대해 언급한 내용과도 무관하지 않다. 다시말하면 남아공은 소수 백인(남자)들이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놓은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 영향과 상처를 아직 치료중이라는 것인데, 시릴라는 아파르트헤이트가 가부장제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라고 지적하였다. 여성 인권이 극히 취약하면서 동시에 세계 최고 수준의 성폭력 발생률을 보이는 남아공-케이프타운의 현실을 고려해본다면, 본질적으로 현상(아파르트헤이트와 높은 성폭력 발생률) 서로 모종의 연관을 갖는다는 점을 시사해주기도 한다. 시릴라의 말대로라면 강간은 힘과 지배 문제이기에, 성폭력 문제는 결국 개개인의 가해자에 대한 교화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안되며,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사회구조적이고 총체적인 접근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는 것을 배울 있다.

 

 

 

 

수인(囚人)으로서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습

있고난 직후 토르디스와 톰에게 일어난 반응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현실에 대한 부정 혹은 현실 회피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피해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이런 폭력을 당할 있는가? 그리고 가해자는 아마도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은연중에 내리며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이 겪은 일의 후폭풍은 사람 모두가 스스로를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토르디스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고,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우울증, 스스로 강간을 자초했다는 자괴감 뿐만 아니라 섭식장애, 알코올 중독 등으로 장기간 고통을 받았다. 가해자입장이었던 톰도 이후 쉽지 않은 세월을 보내게  된다. 수치심, 그리고 끊임없이 몸에 새겨져 스스로를 갉아먹는 죄책감의 감정과 떳떳하지 못한 인간으로서 두려움 속에서 살게되어 스스로를 수인(囚人)으로 만들어 버렸다. 피해자를 무의식중에 회피하고 살아가더라도, 묻혀있던 죄책감은 언제든 다시 고개를 들어 가해자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할지 모른다. 결국 심리적,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는 타인과의 관계가 원할하기 힘들게 됨은 미루어 짐작할 있다. 스스로를 돌볼 여유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상대방을 위하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있겠는가. 토르디스가 과거를 마주대하는 것이 편하지는 않은 입장임에도, 톰이 동안 어떤 어려움을 겪었을지를 짐작하는 대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토르디스는 톰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자기를 혐오하며 주변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밀쳐내다 보면 누군가를 보살피거나 거꾸로 보살핌 받기가 힘들어진다.”(223)

 

결국 과거에 일어난 일을 회피하고, 잊으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톰처럼 진심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원활한 대인관계를 맺고 타인을 위하는 마음가짐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결국 수치심을 너머 가해자였던 이들에게도 평생의 짐을 지우고, 보이지 않는 감옥 속에서 살아가는 다른 피해자를 만드는 결과가 된다는 점을 토르디스는 이미 스스로 고통의 시간을 감내하며 깨닫고 있었다.

 

 

 

 

피해자가 다른 가해자가 되는 프레임 -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무자비한 인종주의를 고발하는 사진을 수백 보고 나니 사람에게 딱지를 붙인다는 얼마나 비인간적인 일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람이 이상 사람이 아닐 백인혹은 흑인 되고, ‘박해자혹은 피해자 되는 것이다.”(115)

 

아파르트헤이트의 참상을 고발하는 박물관에 들른 사람은 케이프타운에서 벌어진 인간의 다른 폭력의 역사를 접한다. 여기에 피해자 새로운 가해자 수도 있는 구조를 보여준다. 바로 딱지표 붙인다는 , 달리 이야기하면 누군가의 행동으로 상대방 자체에 공고한 낙인 찍어버리는 행위의 위험성을 다시금 생각할 있다. 젊은 시절 때의 실수 혹은 잘못으로 평생을 도덕적 비난의 대상을 들어야한다면, 과연 언제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준비할 있을까. 토르디스는 과거의 가해자에 대해 영구적인 딱지표 붙이는 대신 이런 역사적/관습적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용서라는 것이 필요함을 오랜 숙고와 과거의 자신과 대면을 통해 확신하게 된다. 성경에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마리아 여인이 과거에 어떤 행동을 하였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는 놀라운 가르침을 전해준다. 평범한 우리들이 타인에 대해 비난하는 일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종종 우리의 허물과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임을 망각하곤 한다. 타인에 대한 비난과 마녀사냥 결국 하나의 폭력일 뿐이다. 분노와 두려움이 억눌린 감정이 내부로 향하면 토르디스와 톰과 같이 죄책감과 자책, 심지어는 자해로 이어질 있을 것이며, 감정들이 외부로 향하게 되면 결국 타인에 대한 비난과 딱지표 붙이기와 같은 행위를 초래하게 것이다. 결국 피해자마저도 가해자가 있는 가능성을 본질적으로 내포한다.

 

<용서의 나라>에서는  과거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오랜 시간의 대화와 고통스러운 상처 되돌아보기 과정을 통해 각자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감정을 보살피고 있다. 일종의 의식과 같은 만남을 통해 서로의 감정을 풀어내고 궁극적인 용서와 화해 여정으로 있었다. 놀랍게도 토르디스는 불완전한 인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성숙한 여유의 경지를 보여준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16년이 걸리긴 했지만.

 

나는 너를 강간범이라고, 적어도 나를 강간한 사람이라고 불러도 . 그렇지만 말이 너를 말하는 아니야. (…) 사람은 평생 살면서 좋은 일도하고 나쁜 일도 . 요지는 나는 사람이라는 말이야. 딱지가 아니고. 나라는 사람이 그날 일어났던 일로 축소될 수는 없어.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177)

 

 인간은 누구나 실수 혹은 잘못을 저지를 있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 그리고 상대방의 인간 분리해낼 있는 이런 분별력과 심리적 여유는 오랜 시간 자신의 상처와 대면하고, 스스로를 돌보기 시작한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토르디스는 용서 여정을 위해 과정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필요한 과정인지를 숙고하고 깨달음을 얻는다.

 

용서의 핵심은 짐을 덜되 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는 것이야. 짐이 원래 사람의 몫이라하더라도 말이야. 돌을 소유한 사람이 바뀐다 해도 악순환이 계속되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70)

 

토르디스와 톰이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직접 얼굴을 맞대고 과거의 상처를 다시 꺼내어 들여다보는 과정은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나로서도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만큼, 사람에게는 민감하고 쉽지 않은 과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회에서 이런 성폭력이 근절되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일방적 용서 완전한 해결책은 결코 아님을 또한 일깨워 준다. 결국 토르디스의 깨달음과 확신은 성폭력을 극복하려면 공동체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자라야 하고, 잘못된 생각을 다듬어내야 하고, 노력을 합쳐야 한다.”(352) 결론에 도달한다. 함께 노력해야한다는 이다. 그것도 가해자, 피해자의 노력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사회의 구조를 새롭게 그리고 건강하게 만들어나갈 있도록 말이다.

 

 

 

 

나가며 소리내어 말하고, 웃어 넘기고, 그리고 그냥 다시 살아가기

토르디스에게 있어 용서 길은 험난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섭식장애, 알코올 중독, 자해, 자존감 상실 등의 심신이 무너지는 과정을 겪어내야했다. 또한 자책과 죄책감, 그리고 사회 생활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스스로 옭아매던 과정을 겪었다. 사람은 각자 익숙한 고향을 떠나 낯선 케이프타운에서 과거를 대면하고 가해자를 용서함으로써, 사람 모두 진정한 자유 얻었다. 사람이 만나 노력한 대화와 화해, 용서의 과정은 매우 낯선 과정이다. 낯선 , 낯선 방식으로 서로가 진심으로 만나는 지점을 찾아가는 노력은 사람에게 용기와 주변 가족의 도움 지지가 필요한 일이었다. 다시 상기하지만 과정은 사람을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함께 노력하고 참여한 결과라고도 있다.

 

책을 덮으니 바로 떠오르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바로 토르디스가 톰으로부터 받아 반평생을 속에 넣고 다니던 돌하나를 톰의 손바닥에 쥐어주는 장면이다.

 

그가 침을 삼켰다. 그와 마주친 시선을 떼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아 돌을 쥐어주었다. 그가 짧게 숨을 들이쉬더니 흐느끼기 시작했다. 손이 그의 주먹 손을 감쌌다. 그가 남은 손으로 위를 덮어 우리의 힘들었던 과거를 감싸 쥐었다.”(343)

 

16년의 세월동안 사람이 고통의 시간과 이메일로 주고받은 대화를 통해, 그리고 최종적으로 케이프타운에서 직접만나 이르게 여정의 마지막에서 사람은 이상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 있기 이전의 톰이 토르디스에게 쥐어주던 돌은 성폭행 사건 이후 토르디스에게는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로 무게감있게 자리를 잡았다. 몸에서 떨어지지 않던 마음의 짐을 몸에 새기듯 16년을 짊어지던 토르디스는 다시 돌을 톰의 손에 되돌려주며 진심어린 용서를 하고 스스로 짊어지던 마음의 짊도 내려놓았다. 이어서 톰은 돌을 거꾸로 나무 불리었던 바오밥나무 옹이에 남겨둠으로써 톰이 지니고 다니던 죄책감과 두려움을 내려놓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아주 상징적이지만, 낯선 의식은 사람에게 무엇보다 의미를 갖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상처는 남지만, 사람의 기이한 만남과 용서의 여정은 진정한 용서 어떤 모습일 있는지를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책의 여러 군데에서 사람이 대화하는 과정에서 토르디스가 제안한 지혜는 결국 케이프 타운에서 사람의 모토가 된다.

 

 소리내어 말하고, 웃어 넘기고, 그리고 그냥 다시 살아가는 거라니까.”(224)

 

감정적으로 서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람은 모토를 다시금 기억하며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고 있다. ‘소리내어 말함으로써 우리 내면에 숨겨져있는 상처와 불완전한 감정들을 대면하고 이를 인정하는 과정일 것이다. 이것이 기반이 되어 용서로의 여정 시작된다. 이후 이들은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고 웃어 넘김으로써 자신들에게 짊어지워진 죄책감 혹은 두려움을 벗고 스스로를 가볍게 하게 된다. ‘그냥 다시 살아가기 시작함으로써 이들은 비로소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으로서 평범한삶을 살아갈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삶의 여정에서 평범한 삶의 위대함 다시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이렇게 유사한 일을 겪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지지하고 도움을 있을 것인지 고민하는 계기로 삼을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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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깊고 느리게 그리고 낯설게 문학읽기 <문학 속의 철학>

문학 속의 철학

이현우(로쟈) 지음 | [책세상]

 

 

 

언제나 느끼지만 문학은 우리에게 가지를 제시해주는 같다. 하나는 우리 삶의 전형으로서 사례(또는 에피소드, 인생의 국면) 제시한는 것이다. 작가가 설정하여 글로 표현한 사례로부터 독자는 자신의 삶에 비추어 보편성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는 작가가 제시하는 사례에 공감을 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저자가 여기에 하나의 전형/사례를 보여주었으니 삶은 어떠한가하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저주는 같다. 문학은 우리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게 해주고, 우리에게 인생의 질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문학은 삶의 철학을 구현하는 장으로서 기능을 하는 것일테다.

 

 

<문학 속의 철학> 저자인 로쟈 이현우가 강연을 엮은 책이면서, 철학자였던 박이문 선생이 저술한 동일한 제목의 <문학 속의 철학> 다시금 떠올리며 문학과 철학의 조우를 조명하며 문학을 다시 읽는 시도로 보인다. 책을 읽고 나서 다시금 책에 언급되어있는 저자의 폭넓은 이해와 지식이 좀더 나에게 와닿는 글은 분명 내가 이전에 읽었던 책이다. 저자가 강연한 문학작품 내가 읽은 책이 별로 없어서 저자의 지적 세례에 혜택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우선 언젠가 읽어보았던 볼테르의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떠올리며 최소한 작품에 대해 새롭게 바라볼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는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작품에 국한하여 저자의 강연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우선 <캉디드>

저자에 따르면 볼테르는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이하 <캉디드>)에서 라이프니츠의 낙천주의를 직접 겨냥하여 완성한 철학적 콩트가 소설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주인공 캉디드 스승인 팡글로스가 바로 라이프니츠의 생각을 대변하는 인물로 나오는데, 세상의 모든 것을 긍정하는 인물로 나온다. 오늘날에 견주어보면 신자유주의적인 질서에서 강요하는 무한긍정의 대변인이 팡글로스인 셈이다. 세계가 그냥 존재할 있는 최선의 세계라고 믿는 팡글로스는 라이프니츠가 빙의된 인물로도 읽혀진다. 또한 우리가 속해있는 우주의 질서는 신의 예정조화에 있다라고 주장한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인물이 팡글로스이다. 하지만 세계는 그리 녹녹치 않았다. 캉디드를 비롯하여, 캉디드가 사모하던 여인 퀴네공드, 팡글로스가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며 겪은 잔혹사는 저자가 언급하듯 세계에 악의 존재를 인정하게끔 만드는 장치일 있다.

 

 

우리도 최근에 경주나 포항에 지진이 발생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놀란 상태이지만, 가까운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과 원전사고를 떠올려볼 수도 있다. 저자는 1755 1101일에 발생한 리스본 대지진을 사례로 언급한다. 불과 5 동안의 지진에 3 명정도가 희생당했다고 한다. 당시에 희생된 사람들은 종교인/비종교인, 어른/아이를 구별하지 않고 희생당했다. 재앙적인 자연재해 앞에서 사람들은 과연 신은 어디에 있었던가를 묻지 않을 없었을 것이다. 다른 예로 중세 시대가 끝나갈 무렵 유럽에 창궐했던 흑사병을 떠올려 있다. 혹자는 유럽 인구의 3분의 1정도가 사망한 역사적인 사건은 절대신이 지배하던 중세를 끝내고 인본주의로 돌아간 새로운 시대를 앞당겼다고 보기도 것이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병에 걸려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던 생존자들은 신에대한 의혹을 가질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기독교적인 유일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런 문제는 충격이자 모순이었을 것이다. 과연 악이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답할 없게된다. 반면 저자가 예를 배화교는 선한 신과 악한 , 종류의 신을 상정하기에 악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므로 이런 거대한 모순을 피해갈 있다고 지적하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볼테르와 루소 vs. 리차드 도킨스와 스티븐 제이 굴드

 저자는 볼테르가 루소와 여러 면에서 앙숙이었음을 언급한다. 루소가 과격한 혁명을 주장하고, 사람의 본성은 선하게 태어난다는 성선설 입장을 지지했다면, 볼테르는 온건한 개혁파의 입장이고, 성선설을 비판한다. 물론 성악설 또한 거부하고, 말하자면 인간의 본성은 백지와 같다는 생각을 고수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관점은 한편 루소가 <고백> 통해 우리 안의 내적자아의 발견 주목하고 있다면, 볼테르는 문화상대주의적인 관점을 통해 상대성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며 타자의 차이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고 저자는 정리해준다. 달리말하면 루소의 시선은 보다 내부로 향하고 있고, 볼테르의 시선은 외부를 향하고 있다라고도 정리해볼 있지 않을까. 

 

 

볼테르와 루소의 대결구도를 저자는 확장하여 도킨스와 굴드의 대결구도로 연결시킨다. 매개가된 계기가 볼테르의 인간관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볼테르는 인간이 애초에 악하게 태어난다는 성악설을 반대하면서도, 루소가 말하듯 성선설에도 동조하지 않았다. 다만 인간은 백지상태와 같이 태어나 후천적으로 영향을 받아 악하게도 선하게도 행동할 있다는 입장에 가깝다. 선과 악을 결정할 있는 인자가 문화적 인자이자 전달자인 meme이라고 보며, 저자는 개념을 통해 도킨스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진화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갖는 도킨스와 굴드의 대결구도를 볼테르와 루소의 구도에 비교하고 있는 점이었다. 도킨스는 진화가 오랜 시간을 두코 천천히,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연속적 진화설 대변한다면, 굴드는 진화란 계단식으로 어떤 계기가 마련되어 단속적으로 진행된다는 진화의 단속 평형설 대변하는 입장이다. 구도는 볼테르가 온건한 개혁을 주장한 입장을 떠올려볼 도킨스에 비견되며, 루소의 과격한 혁명에 대한 지지는 굴드의 단속 평형설과 연관시키고 있다. 단순히 문학에서 어떤 교훈/주제와 관련된 이야기에 주목하던 문학읽기 습관을 새롭게 생각해보게 해준 기회라할 있겠다.

 

 

 

나가며 상대주의적 태도의 발견

<캉디드>에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여행과정은 모두 생략되어 있지만, 소설 속의 배경은 전세계에 걸쳐있다. 소설 속에서 저자 이현우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볼테르가 제시하는 문화상대주의적인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여행을 통해 보고 배울 있는 점일텐데, 공교롭게도 <캉디드>에서 주인공들이 전세계를 여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와 관련하여 <캉디드> 등장하는 에피소드 중의 백미는 캉디드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에서 나체 여인을 따라가며 여인의 엉덩이를 깨무는 원숭이를 총으로 쏘아죽이는 장면이다. 결국 여인과 원숭이는 연인들로 밝혀지는데, 하인 카캄보가 캉디드를 나무라는 장면도 등장한다. 이러한 문화상대주의적인 태도는 앞서 <수상록> 집필했던 몽테뉴의 태도와도 다르지 않다. 식인종들을 만나 이들과 대화하고, 자신이 믿지 않는 종교의 수장들을 찾아가 종교에 대해 대화하는 일과 같은 태도, 문화적 밈은 소수 지식인들의 밈으로 전해져 내려온 듯하다.

 

 

저자의 <캉디드> 강의를 읽고나니 주인공 캉디드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며 겪은 고생과 잔혹사는 결국 누구나 우리 삶에서 어느 정도 걸쳐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면에서 허무맹랑한 이야기같은 <캉디드>  담을 있는 진실성을 새롭게 발견할 있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한나 아렌트가 <예수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악의 근원 어디에 있는지를 자문했을 , 유일신의 전통이 아닌 배화교적인 전통 속에서 성장했다면 어떻게 재판을 바라보았을까하는 엉뚱한 생각도 하게 된다. 그만큼 우리가 성장할 영향을 주는 종교적 관념, 인생관은 평생에 걸쳐 삶을 제한하기도 것이다. 물론 <캉디드> 무엇보다 우리 삶의 모든 면이 신이 예정해놓은 최선의 상태가 아니라 악이 공존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에피소드라고 있다. 여기에서 소설이 끝나면 무언가 채워지지 않을 텅빈 공간과 같은 느낌만을 받을 같은데, 볼테르는 가지 파문을 일으키는 말을 남기면서 소설을 끝낸다. 스승 팡글로스가 라이프니츠적인 예정조화설로 그동안 일행이 겪은 모든 사건들을 해석하는 것에 대해 캉디드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122, <캉디드>에서 재인용)

 

내게 말은 우리 인간 자신에 대한 믿음과 동시에 책임을 일깨워주는 말이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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