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나서] 팀 르윈스의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원제: The Meaning of Science)

르윈스(Timothy Lewens) | 김경숙 옮김  |  MID

 

    

      당신은 과학적인가?

    

     우리가 의심없이 사용하는 과학적이라는 말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우선 물음에 답하기 위해 과연 과학은 무엇인가를 먼저 분명히 해야할 것이다. 케임브리지 대학 과학철학 교수인 르윈스는 권의 책에서 과학이란 학문의 정체성(1) 과학의 가치(2) 다양한 논쟁점들을 소개하며 폭넓게 고찰한다. 르윈스는 대중에게 과학철학분야의 논점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중에서도 무엇을 과학이라 부를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과 이에 관련한 논점들을 엮어 놓은 것이다. 실로 다양한 과학분야를 떠올려볼 있는데, 중에서도 물리학과 생물학 특히다윈의 <종의 기원> 둘러싼 오랜 논점과 유전학의 발전 이후 새로 해석되고 보강된 생물학 분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과학의 요건 포퍼의 관점

 

     우리가 무언가를 과학이라 정의할 있을까를 물었을 , 르윈스는 포퍼의 과학론부터 소개를 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포퍼는 귀납법 자체를 비합리적이라 믿을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포퍼는 과학이 연역적 추리를 통해서만이 진보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39)’ 하였다. 반면 르윈스는 과학체계로서 귀납적 접근방식에 대해 포퍼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르윈스는 포퍼가 귀납법을 포기하고 연역법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어떤 이론가도 현실에서 손을 떼는 것과 같다.’라고 비판한다. 누군가 과학은 자체로 완전한가라고 묻는다면 결국 과학도 인간이 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르윈스가 말한바대로 과학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말은 개방적이고 창의적이며 예민해야한다는 말이면서 동시에 어떤 경우에는 눈을 가릴 필요도 있다’(68)라고 하는 것처럼 과학은 스스로 완전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결국 과학은 사람이 하는 것이므로 그렇다. 따라서 누군가 과학은 가치중립적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약간 달리 표현하여 그럴 필요 없다.’라고 말하겠다. 다시말해 과학이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충분조건이지만 필요조건은 아니다라고 말할 있을까.

          

     과학적 방법에 있어서 귀납적 추론을 인정하지 않는 포퍼의 관점에서 과학이 과학일 있는 요건 추정과 반박’(혹은추측과 논박’)이라고 저자는 소개하고 있다. 포퍼에게 진정한 과학이란 반증될 가능성을 지닌 학문만이 과학이다’(41)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이해할 있는 자료로 저자는 파인만의 강의(유투브 비디오 자료) 언급하고 있다(42). 포퍼의 추정과 반박이라는 관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는 말은 파인만의 강의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있다. 우리가 수행하는 과학적 작업 과정에서 흔히 단계로 어림짐작(guessing) 통해 가설을 세우게 된다. 물론 어림짐작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하며 필요한 경우 수학적인 논리가 있어야 것이다. 파인만에 따르면 어림짐작을 통해 세워진 가설은 실험결과에 따라 판가름난다는 말이다. 짐작이 실험과 일치하지 않으면 틀린 겁니다. 과학은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라는 말에서 포퍼의 추정과 반박이라는 간결한 과학의 요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무를 반듯하게 자르듯 과학의 요건을 포퍼의 주장대로 따르기 어려운 경우도 발생한다. 르윈스가 과학의 딜레마라고 언급한 것처럼 어떤 경우에는 과학자들이 눈가리개를 하고 있을 가장 발전을 이룬다’(68)라고 있는 부분이 생겨난다. 예컨대 소립자의 하나인 뉴트리노가 빛의 속력을 능가한다는 그란사소 실험 결과에 대해 과학집단이 보인 반응(156) 보면 보다 쉽게 이해할 있다. 대부분의 과학집단은 우선 결과를 그대로 믿고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폐기했던 것이 아니라 실험기구의 조작이나 절차에 있어서의 문제 가능성, 이론적 적용에서 생겨날 있는 문제점들을 우선 의심했다. 물론 결론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실험 결과에 대한 해석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과학자들이 세운 가설이 과학자의 세계관, 가치관, 경험이나 문화의 차이로인한 영향으로부터 과연 무관한가라고 묻는다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따라서 포퍼가 주장한 과학의 요건(‘추정과 반박’) 자체로 중요한 요건의 하나로 받아들여질 있으나 자체로 완전하지 않다라고 결론을 내릴 있을 같다.

 

 

     학창시절 읽었던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믿음직스럽지 못한 나의 기억에 의하면, 토마스 쿤이 주장했던 과학혁명은 불연속적이고 단계적 특성을 띄고 있었다. 달리 표현하면 변증법적 구조와 유사했다고 기억한다. 당대의 과학 집단이 신뢰하는 정상과학이 존재()한다면, 소수의 집단에 의해 참신하고 혁명적인 혹은 반대되는 의견() 나오고, 만약 여러 재현 실험을 통해 설득력있는 증거가 많이 나오면 기존의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는 혁명() 일어난다는 순환적이고 단계적인 과학 발전의 모습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처럼 유명한 과학사의 저서에도 후대의 연구자들에 의해 수많은 논의가 있었으며 비판이 가해졌다. 르윈스가 언급하는 이론의 한계는 물리학이 전공인 토마스 쿤의 이론은 물리학 분야에 적용하면 설명할 있는 부분이 많은 반면, 패러다임 전환 이론을 다른 과학, 예컨대 생물학 내에서의 이론의 변화를 설명하는데는 적합하지 않다는 (141)이다.

 

     다시 기억에 의존하면 처음 <과학혁명의 구조> 읽었을 기억나는 개념이 incommensurability라는 용어였다. 당시 번역된 책에는 개념이 동일선상에서 비교 불능으로 번역되었다고 기억하는데,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에서는 공약불가능성으로 번역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어려운 단어에 대한 번역은 동일선상에서 비교 불능이라는 해석이 이해하기 쉽게 느껴진다. 개념에 대해 르윈스는 쉬운 (120) 들어 설명하고 있다. 자신의 아이를 각각 다른 단위의 자로 키를 잰다고 하자. 아이는 키가 120센티미터였으며, 작은 아이는 키가 3피트 2인치로 측정되었다고 하면, 누구의 키가 큰지 어떻게 있는가? 결과를 모두 미터 단위 또는 피트 단위로 통일하여 비교해야 서로 비교할 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같은 기준에 맞추어야 서로의 키를 견주어볼 있다. 쿤의 패러다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과연 뉴튼의 연구와 아인슈타인의 연구 어느 것이 뛰어난가라고 물었을 , 패러다임의 언어를 다른 패러다임의 언어로 통일해 있다면 서로 비교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쿤의 입장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같은 기준(언로) 통일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서로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만 서로 비교할 있는 가능성이란 것이 전혀 없는가라고 묻는다면, 이는 새로운 토론의 주제가 수도 있겠다.

 

     쿤의 패러다임 이론에 대한 비판을 떠올려볼 , 물리학과 생물학의 학문적 방법론에서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가 궁금했던 적이 있다. 아마도 접근 방법의 차이로인해 쿤의 이론에 대한 비판의 빌비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나의 의문에 대한 답은 아니더라도 가지 실마리를 찾아볼 수는 있었다. 물리학의 경우, 흔히 물리학은 실험실이라는 통제된상황에서 연구를 복잡하게 있는 요인을 최소화한다는 (78)이다. 예를 들어 뉴튼의 역학을 설명하는 , 우선 하나의 운동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좀더 통제된상황을 만든다면, 공을 하나의 부피가 없는 으로, 그리고 공기저항도 고려하지 않는 이상적인 진공의 공간에서 상수 중력이 있거나 혹은 없는 가정하에 이동하는 가장 단순화된 모델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나면 좀더 현실적인 상황들을 고려하여 실제 물체의 운동까지 설명할 있다는 것이 (전통적인) 물리학의 연구방법론이라고 있겠다. 반면 생물학의 경우는 어떤가? 생물은 기본적으로 복잡계다. 수많은 원소들이 응집되어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생명현상이라는 현상이 발현된 존재다. 따라서 비교적 간단한 세포로 이루어진 생물도 있겠지만, 간단한 생물도 물리학과 같이 단순화 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물리학자 슈뢰딩거가 생명의 본질에 대해 논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What is Life?>라는 책에서도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생명 현상을 열역학적인 물리학적 패러다임에 근거하여 탐구하였다. 단순한 아미노산의 배열인 단백질의 1, 2 구조와 달리 새로운 기능 생겨나기 시작하는 단백질의 3 구조의 원인과 해석에 대해서도 우리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물리학적 방법만으로는 무언가 생명이라는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해보인다. 하지만 생물학적 방법론에서 무엇보다 포퍼가 부정했던 귀납적 추론 방식이 많이 적용된다는 점이 물리학적 방법론과 다른 차이점이지 않을까. 나아가 호주의 철학자 프랭크 잭슨이 주장하는 바대로 과학적인 연구로도 도저히 알아낼 없는 어떤 유형의 진리가 존재’(344)하는 것은 아닐까? 회색지대의 존재가 많은 이들이 쿤의 패러다임 이론에 대해 비판하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윈의 <종의 기원> 둘러싼 논점들

    

     르윈스는 다윈의 저서 <종의 기원> 쿤의 관점에서 과연 혁명적인가를 묻는다. 물론 아니다 르윈스의 답이다. <종의 기원>에서 다윈이 주장하는 변이론 당대의 박물학자들에게 새로운 이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윈의 자연선택 신선한 설명이었음을 인정한다. 반면 인문학자 양자오가 저술한 <종의 기원을 읽다> 보면 다윈이 <종의 기원> 저술할 당시 출간을 둘러싼 여러 정황들을 설명해두었는데, 일반인들이라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을 만한 사항이었다. 하지만 <종의 기원> 신화화된 입지/지위를 고려하면 반드시 그럴까라고 의구심이 들게 정도의 사안이긴 하다. 특히 다윈의 조부의 미출판 원고의 제목이 <종의 기원> 원제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는 , 그리고 조부의 원고가 이미 있었음에도 다윈이 조부에 대해 <종의 기원>에서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은 점은 과연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에 보다 신빙성을 주는 실마리가 있다. 물론 다윈이 중요한 저술을 것은 사실이지만, 커다란 업적이 과연 혼자만의 업적이냐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라고 말할 있겠다. 다윈이 오랜기간 작업하던 <종의 기원> 원고를 어느 순간 급하게 출간 정황도, 사실은 비슷한 내용의 책을 출간하려는 다른 학자보다 먼저 책을 내려고 노력한 정황도 양자오 교수가 소개하였는데, 돌이켜보면 다윈의 연구도 결국 다윈이 디딜 있게 어깨를 내어준 거인의 존재(다윈 이전의 과학자, 인류의 지적 발견을 축적, 경쟁하는 과학자) 역시 고려해야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도 양자오 교수는 다윈의 업적이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관점을 바꾸어 놓았다 평하고 있으며, 르윈스 역시 (쿤의 관점에서 혁명적 업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다윈은 기존의 연구를 인정하고,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는데 썼으며 새로운 해석까지 내놓았다.’(181)라고 평하고 있다.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5년에 가까운 시간을 탐험하면서 수많은 생물들을 관찰하고 자료를 수집할 있었다. 그의 과학적 방법론을 고려할 다윈은 포퍼가 부정한 귀납적 추론 크게 의존했다. 수만 개의 생물 표본을 수집할 있었던 다윈은 당시 주도적이던 생물의 분류 방법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았다는 점도 그가 <종의 기원>에서 새로운 해석을 있었던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불완전성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귀납적 추론 평생 색채 대한 연구를 하기도 했던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과학적 방법론의 근간이었다. 괴테는 치밀한 관찰과 방대한 자료 수집을 통해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을 중요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대에 귀납적 추론 매우 중요한 과학 연구 절차로 받아들여졌다고 이해할 있다. 물론 사물을 보다 깊이 관찰할 있는 도구와 지식이 오늘날과 달리 크게 부족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결론을 도출했을 것이다. 따라서 연역적 방식과 달리 관찰에 대한 해석에 영향을 있는 요소가 많을 있고, 특정 과학자 과학집단의 이해 내지는 패러다임을 너머서는 해석을 내리기 힘든 경우가 생긴다. 포퍼가 신뢰를 보였던 연역법은 최초의 가정이 옳지 않았다는 것이 실험을 통해 밝혀지면 근거부터 흔들리고 심지어는 무너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퍼의 과학체계는 말뚝 위에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공중누각이다.(55)’라고 르윈스는 비판하고 있다. 결국 과학적 방법론에는 어느 쪽도 영원불변한 도그마처럼 규정되어야할 것이 아니라 각각 불완전함을 가진 방법론이 서로 상보적 역할을 해야만 같다. 권을 책을 읽는 사람마다 다른 이해도와 해석을 보여주듯, 과학에서도 수많은 해석, 견해, 오독이 모여 서로 충돌하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윈의 업적을 생각할 잠깐 옆길로 빠져보면, 말콤 글래드웰의 저서 <아웃라이어> 관점에서 다윈은 혜택받은 자임에 틀림이 없다. 당시 여러 과학자들 중에서도 영국에서 유일하게 과학자로서 비글호에 승선할 있었던 기회, 5 간의 (무사고) 항해를 통해 관찰한 생물들과 수집해온 만가지 생물 견본에 대해 접근할 있었다는 점은 글래드웰의 관점에서 보면 누구나 누리기 힘든 혜택이라 말할 있다. 물론 오랜 시간 진지하게 연구를 하고 지식을 쌓아온 시간이  전제되어 있었고, 명망있는 집안이라는 신분의 보장이 있었기에 이런 기회를 누릴 있었음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나아가 종교집단의 견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종의 기원> 발표할 있는 시대적(역사적) 여건과 공간적 여건(비교적 자유롭고 반항적으로 과학적 결과를 발표할 있었던 영국이라는 공간) 무시할 없을 것이다. 단순히 그의 천재성에 대한 신화화만으로 그의 업적을 평가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다. 물론 다윈의 업적을 폄훼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평생 준비했던 다윈의 업적이 앞에서 언급한 여러 조건에 힘입어 중대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점과 개인의 건강문제(평생 고통을 받던 두통과 신경증적 소인) 극복하고 이루어진 인류사의 커다란 업적이라는 점을 부인할 없다. 결국 과학도 장대한 인류 역사의 증거물인 인간이 하는 것임을 언제나 고려해야한다.  

 

 

     책의 2부에서는 과학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고민한다. 공교롭게도 과학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화두로 다윈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과학하는 자는 어떠한 소망도 어떠한 애착도 가져서는 안된다. 그는 돌과 같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188) 오늘날이 과학자를 비롯하여 교양있는 일반 대중들에게 말이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겠지만, 당대의 다윈은 나름 확고한 과학에 대한 관점, 철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반면 르윈스는 과학자는 가치 개념을 지닐 더욱 현명한 조언을 있다’(192)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핵무기 개발 정황을 떠올려 있다. 2 세계대전이 한창일 , 헝가리 물리학자 레오 질라드와 함께 아인슈타인은 당시의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이 핵무기 개발을 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 핵무기의 파괴력을 실감한 사람은 다시 당시의 대통령인 트루먼 대통령에게 핵무기 개발 중단을 탄원하는 편지를 보낸 것은 과학자가 가치 개념을 지니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사례라고 있다.

 

     만일 과학자가 엄격하게 가치 중립적이어야한다는 다윈의 원칙을 지켜야한다면, 또한 보다 재앙 초래할 수도 있다. 만약 과학자가 히틀러의 나치 정부 아래서 히틀러의 명령을 성실히 따르기만 했다면 수많은 유대인 학살에 관여했던 아이히만처럼 2 아이히만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과학자도 결국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가치중립적일 없으며, 나아가 가치판단을 하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에는 스탈린 치하 소련의 유전학 사례(192) 생물학자의 그릇된 가치관(혹은 폭력적으로 강요받는 상황에서 묵인하거나 답습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 가치관) 떠올린다면 과학자가 단지 가치 개념을 지니는 문제를 넘어, ‘어떠한가치관을 갖는지의 문제가 선과 악의 행위를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가 것이다. 과학 역시 이를 수행하는 사람( 과학자 정치인) 의해 양날의 칼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타적 행위에 대해

 

     생명체의 이기성, 이타성에 관한 문제는 나의 개인적인 관심대상이기도 하다. 과연 인간 다른 동물의 이타적 행위를 어떻게 설명할 있을 것인가? 이타성을 설명할 , 르윈스는 이타성을 생물학적 이타주의(238) 심리학적 이타주의(235)로서 구분하여 소개하고 있다. 생물학적 이타성은 현대 유전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유전적인 증거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인간을 비롯한 다른 모든 생물체에 모두 적용할 있다. 물론 르윈스는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생물학적 (유전적) 이기성/이타성에 대해 논하고 있음을 재확인하고 있는데, 도킨스의 유전자 중심 관점에 대해 비판한다(244). 유전자 자체가 어떤 동기를 가지고 행동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특성/경향성만을 갖고 있다.’라는 점에서 인간의 행동이 사실은 유전자가 의도한 동기를 위한 것이라는 도킨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반면 심리학적 이타성은 행위의 심리적 동기에 초점을 맞추며, 심리적 상태를 지닌 생명체에만 적용이 가능하다는 제약이 있다. 다시말하면 박테리아가 심리적으로 이타적인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생물학적으로 이타적인가는 물을 있다는 것이다.

 

     이기성/이타성의 문제에서 흥미로운 논의 주제는 과연 생물체에서 이타성이 발현되는 것은 유전적 기제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문화적 기제에 기인하는가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타적 행위와 관련하여 문화적인 (후천적 영향) 의한 것일 수도 있다는 관점(258) 더욱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문화적인 영향 좀더 폭넓게 적용할 있다면, 전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핵가족화/혹은 가족의 해체 현상을 떠올려본다. 수럽-채집 시대와 농경 시대, 그리고 산업 혁명 시대 이후 급격하게 변화된 인간의 삶의 양식으로 인하여 이타성이라는 행위는 유전적이라기 보다는 문화적 영향에 따라 영향을 더욱 크게 받는다는 관점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소식이다. 핵가족화 가족의 해체에 따라 우리가 겪는 이타적인 행위는 오히려  SNS등의 통로를 통해 모인 동호회 사람들의 연대 행위가 더욱 이타적인 행위로 보인다는 점은 이타적 행위에 대한 문화적 힘의 영향을 더욱 설득력있게 나에게 다가온다.

 

 

     인간의 본성은 고유한가?

 

     이타적 행위를 이야기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문화적 역할은 역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최근의 주장들 처럼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자연보다는 문화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데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269). 그러면 인간의 본성 Nature이라는 막연한 개념을 이해하는데 과학은 어떤 도움을 있을까. 르윈스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 본성 등에 대해 연구를 해온 스티븐 핑커는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는 입장이다(263). 반면 르윈스는 최근의 과학적 연구가 인간의 본성 대해 의구심을 표하는 관점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인간의 본성이 존재한다는 것에 의문을 표한다. 인간이 고유한 본성 갖고 있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수많은 철학자들이 논쟁을 해왔던 주제이기도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거나 악하다는 점에 대해 논쟁한 동양의 철학자도 있으며, 이는 서양철학의 전통도 주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런데 현대 과학에서 주도권을 얻고 있는 입장은 인간의 본성자체를 미신이라고 말한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현대 과학이 인간의 본성 부정하는 것은 인간만의 고유한 본성을 인정하고 있는 서양의 기독교 전통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여 새와 물고기와 짐승을 다스리게 했다라고 명하는 구약성서의 신은 윤리학자 피터 싱어가 <죽음의 밥상>에서 사용한 개념인 종차별주의 존재의 근원이 것이다. 피터 싱어에 따르면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 고유의 특징이 있고 따라서 인간만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생물계의 (species) 개념을 고려하여 종차별주의자라고 하였다. 인간에게 고유한 본성이 존재하고 인간은 다른 생물체보다 우월하다는 서양 기독교 관념은 이런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주장을 하는 사람에 대한 비판을 하게 것이다. 예컨대 인간의 고유한 본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 복제 윤리를 인간 본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아닌 생명체에 대한 통제권을 용인해주는 빌비를 제공할 있다. 말하자면 밀란 쿤데라가 그의 소설 <참을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언급한 인간이 염소를 죽일 권리 신이 아닌 인간이 저술한 <구약성서> 공표함으로써 인간이 스스로 다른 동물을 지배할 권리를 부여하는 아이러니를 낳게 것이다. 자연의 질서를 이야기하면서 무성생식이 유성생식보다 열등하며,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라고 주장하는 레온 카스는 그대로 종차별주의자라고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는 논리로 우월한 종인 인간 복제의 윤리적인 허용에 반대하는데 적용하고 있다. 생물종의 우열을 성적인 방식에 의해 구분하는 것은 다분히 자의적이고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인 시각이다. 르윈스는 이렇게 인간 중심적인 인간 본성 개념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이 윤리적 토론에서 사용되면 혼란을 일으킬 있으며, 집단의 본성에 따른 사고가 특정 인종, 성에 대한 적형적인 사고를 강화하기도 한다는 점이다(296).

 

 

     당신의 자유의지(free will) 허구다?

 

     이제 마지막 장에 이르러 다른 흥미로운 주제를 저자는 책에서 던지고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란 있는가? 현대의 신경과학 분야의 연구에 기반한 흥미로운 주장은 주관적인 자유 체험은 환상에 불과하다’(300)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모양이다. 나의 혼란스러운 마음처럼 저자인 르윈스도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는 신빙성있게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할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리벳의 실험과 같은 신경과학적 연구에 의하면 팔을 굽히기와 같은 순간적이고 자발적인 운동이 일어나기 준비 전위 알려진 뉴런 활동이 증가하는 것을 발견했다(327)’ 결과적으로 준비 전위가 실험참가자가 팔을 굽히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기 350밀리초 , 그리고 팔을 굽히는 행동을 하게 되는 시점보다 550밀리초 전에 이미 시작된다는 말이었다(328). 흥미로운 결과는 결국 우리의 자유의지가 우리가 하는 행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며 나아가 자유의지는 허구다라는 주장을 지지하고 있는 것같다. 르윈스는 현대 신경과학이 자유의지란 없다라는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데, 우선 준비 전위 본질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뉴질랜드의 연구진이 행한 실험을 들면서 준비 전위는 행동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결심이라고 보기 힘들다라고 말한다(332). 아울러 우리는 실험 참가자들처럼 개개인의 욕구와 무관하게 통제된 환경에서 결정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인위적인 지시를 받아 행동해야만 했던 것인 반면, 일반적인 경우는 엉뚱한 결정도 그만큼 적절한 상황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아울러 자기공명영상을 통해 뇌를 연구하는 경우처럼 장비의 높은 정확성 과장해서는 안된다(335) 르윈스는 말한다. 뇌의 활동부위의 지역적 차이가 개개인의 습관, 무의식적 편견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있다고 의문을 표한다. 따라서 이런 방식, 자료들은 인간의 의식적인 결정이 허구임을 증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르윈스는 신경과학분야가 주장하는 바처럼 인간의 자유는 환상이다라는 것을 입증하는데 실패했으며 여전히 의식적인 욕구가 행동의 원인이 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인간에 대해 설명을 하려는 과학의 시도를 살펴보면 역사적으로 철학자들이 했던 궁극적인 물음, ‘인간이란 무엇인가?’ 대한 궁금증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과학도 예외가 아니어서 과학적 연구 방법이나 도구가 진보함에 따라 과학자들도 결국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에 대한 탐구를 이어나가게 되는 모양이다. 다만 신경과학 분야의 연구결과를 보면 인간은 기계와 다를바가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인간을 기계와 같은 존재로 보는 관점은 이미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가 생각했던 모양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기계, Machina Animata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인간관은 어떤면에서 보면 오늘 날까지도 프랑스 철학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보다 다양한 인간관이 존재하겠으나, 인간이 하나의 기계라는 관점은 서양철학이 바라보는 인간관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도 있겠다. 다시 말하면 시대와 공간에서 자유로울 없는 인간이 완벽하게 가치중립적일 없다고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주장도 이러한 문화적, 역사적, 환경적 맥락에서 자유로울 없다고 생각한다.

    

     원제가 과학의 의미 고찰해보려는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과학을 둘러싼 여러 폭넓은 논쟁점들을 아우르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적극적으로 논쟁에 뛰어들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로서 나는 그의 주장이 독자를 강요한다고 느끼지지는 않는다. 르윈스가 책을 마무리하면서 과학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과학이 혼자서 답변할 있는 문제가 아니다.(350)”라는 열린 자세로 오히려 독자에게 결론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하나의 정답만을 얻는데 익숙한 우리로서는 다소 맥빠지고 실망스럽다고 느낄 있지만,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은 시대에 따라, 인간의 지식의 수준에 따라, 그리고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를 있음을 책에서 배웠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어떤 답을 설정한다고 해도 후대에는 과학의 가치는 달라질 있지 않을까?

 

     책은 폭넓은 주제를 소개하고 있는 만큼 깊이 있는 논의의 과정을 보여주는 데는 지면의 한계가 있을 것이다. 다만 르윈스는 책이 과학이 가져야하는 요건이나 과학의 의의를 생각해보는데 막연하게 느끼는 독자에게 좋은 안내가 있을 것이다. 관심이 가는 주제는 참고문헌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이해를 있도록 소개하는 과학철학분야의 카타로그 같은 책이 아닐까하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물론 나의 부족한 지식과 이해로 인한 오독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다양한 오독을 거치고, 새롭게 이해를 하고 고민을 하는 과정을 통해 보다 온전한 전체상이 드러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따라서 나는 나의 오독을 걱정하기보다 앞으로 흥미있는 생각거리가 늘어난 같아 오히려 반갑다. 한가지 배우게 점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인문학 뿐만 아니라 과학도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해주는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말하면 개인적으로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읽고 재확인 과학의 가치는 과학도 인간의 이해를 더해주는 인류의 업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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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퍼키스 선생의 두 번째 사진집 출간과 전시 관람 후기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

 

류가헌 사진 전시(2015.12.01-12.13)를 보고

 

 

 

 

사진집 정보: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

필립 퍼키스 사진, 글/박태희 옮김/안목출판사

 

 

 

* 일러두기: 이 글은 사진 전시를 보고 메모해둔 두서없는 글인데,

안목출판사 사장님께서 제 부끄러운 글을 출판사 블로그에 올려주셨습니다.

 

 

 

#텅빈 철길에 메마르게 서 있는 나무가 있는 사진

   아마도 대부분은 우리 나라의 풍경일 듯하다, 불모의 겨울을 찍은 필립 퍼키스의 이미지들은 절제되어 있으며 고요하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해져 혼재해있는 어느 지점에 놓여 '거기에' 있는 죽은 생물들마저 겨울 풍경 속에 침잠해있다. 눈 덮힌 텅빈 들판의 풍경은 초월적인 공간의 이미지다. 앗제가 말년에 담은 파리 공원의 초월적인 공간처럼 보이기도한다. 마른 나무가지와 강이 있는 겨울 풍경은 내가 눈으로 보고 몸으로 기억해두었던 뉴욕 주 어느 시골의 겨울 풍경과도 닮아있다. 하지만 필립 퍼키스가 대상으로하는 배경은 이미 지역이 갖는 특수성을 상실한다. 온타리오 호수를 따라 끝없이 동쪽으로 뻗어있는 기차 길 위에는 젊은 사진 작가 신디 셔먼이 뉴욕 주 서부의 작은 도시 버팔로에서 대도시 뉴욕으로, 두려움과 희망을 동시에 안고 지나갔을 기차길이 겹쳐있다. 나는 겨울 온타리오 호수 가의 적막한 철길을 떠올린다.

 

 #죽은 동물이 반쯤 잠겨있는 사진, ‘-시의 죽음

    무진기행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어둡고 음울하게 드리워진 검은 나무 그림자가 수면에 비치고 있고, 그 경계에 죽은 동물이 있다. 사체는 수면위로 일부만 나와있다. 처음에는 새일까 아니면 강에 사는 비버 같은 동물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니 수면위로 나와있는 부위는 등과 동물의 뾰족한 귀로 보인다. 길다란 목은 한 쪽으로 힘없이 꺾인 채 가느다란 머리 부분이 수면 아래에 잠겨있다. 죽어서 물에 불어버린 사슴같다. 내가 여기서 더 놀랐던 이유는 수면 위로 화살의 깃이 살짝 드러나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죽음의 전말이 조금 드러난다. 이 사체는 누군가의 화살에 맞아 죽은 후 물에 퉁퉁 불어버린 사슴으로 보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밀려나있는 이 존재마저 자연의 질서를 거부당한채 인간의 손길에 의해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삶이란 죽음에대한 강렬한 저항의 몸짓이다. 하지만 삶과 죽음은 모두 자연의 질서에 속한 다른 양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수면 아래에 잠겨있는 동물에게 닥친 죽음은, 한 생명의 삶이 충만하고 의미 있게 완결될 수 없었던 불-시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 무진기행의 한 대목

   거리는 어두컴컴했다. 다리를 건널 때 나는 냇가의 나무들이 어슴푸레하게 물 속에 비쳐 있는 것을 보았다. 옛날 언젠가 역시 이 다리를 밤중에 건너면서 나는 저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는 나무들을 저주했었다. 금방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 듯한 모습으로 나무들은 서 있었던 것이다.”

   김승옥 작가는 물 속에 비쳐있는 냇가의 나무들, 시커멓게 웅크리는 나무들을 소설의 후반에 나오는 자살한 여인의 이미지와 연결시킨다. 곧 이 시커먼 나무의 그림자들은 죽음의 이미지와 잇닿아있다. 주인공 윤희중은 냇가에서 자살한 여인의 뒷모습을 보고, 아마도 여인이 새벽 통행금지 사이렌이 해제되던 4시 즈음 죽어갔을 것이라 생각한다. 같은 시각 슬며시 잠이 들었던 주인공은 그 여인이 마치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느끼며 자기 분열적인 체험을 하고 있다. 내가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떠오른 이미지가 바로 무진기행의 이 대목이었던 것이다.

 

 #다리 난간에 놓여있는 목장갑이 있는 사진

   가만히 사진을 들여다보면 다리 난간 사이로 검은 개가 사진가를 쳐다보고 있다. 사진가도 분명 난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난간 사이에 보이는 그늘 속에서 조용히 자신을 응시하고있는 검둥 개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늘 속 검둥 개와의 조우! 사진집에 나온 이 사진보다 실제로 필립 퍼키스 선생이 인화한 사진의 톤이 좀더 어둡다. 따라서 실제 프린트를 보며 이 검둥개를 발견하는 데 시간이 좀더 걸렸던 셈이다. 다시말해 필립 퍼키스 선생이 직접 인화한 사진이 내게는 좀더 비밀스럽게 느껴진다. 전시장에서 인화한 사진을 보다가 사진집을 보면 사뭇다른 느낌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발견의 즐거움을 주기도한다.

 

 #눈 덮힌 들판의 풍경

   위 아래로 거대한 트럭의 바퀴자국처럼 보이는 흔적이 화면의 가운데에 뚜렷하게 드러나는 메마른 땅에 눈이 살짝 덮여있다. 화면의 오른쪽 아래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눈의 섬들과 왼쪽 위에서 화면을 꽉 덮은 구름의 살짝 열린 부분을 통해 새어나오는 밝은 빛은 이 정적인 이미지에서 동적 균형을 주는 요소들같다. 한편S자 모양의 바퀴자국은 이 두 요소 사이를 안내하며 나의 시선을 이끌고있다.

 

#고요 속의 움직임

   하늘에 던져진 나무가지가 나아가는 방향을 향해 잘 보이지 않는 검은 강아지 한마리가 물에 뛰어들 테세다. 하늘에 정지해 있는 나무가지는 초현실적인 느낌을 더해준다. 정중동(精中動). 이 사진집에 나온 이미지들은 이 전의 이미지들보다 더 비밀스럽다고 느낀다. 아마도 이 사진들은 2007년 사진가가 사진을 60년 가까이 찍어오면서 주로 쓰던 한 쪽 눈을 실명한 이후 찍은 사진들이기에 더욱 그럴 수도 있겠다. 사진가의 인화는 세세한 기교를 초월해있다고 생각한다. 구도가 어떠하고, 노출이 어떠한지에관한 문제들을 너머 사진가는 어둡게 찍힌 사진들은 어두운 그대로를 보여주기위해 인화를 했다고 말하는 대목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여기에는 그의 스승이기도 했던  프린트 마스터 안셀 애덤스의 기교와는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

 

#투명한 천막 속 아주머니의 모습

   투명한 천막 속에서 한 아주머니가 오뎅 꼬치의 끝으로 보이는 나무 막대들이 있는 테이블에 무표정하게 앉아 앞을 응시하고 있다. 천막의 밖에 가스통이 있고, 그 위에 씌여진 강원 동해'라는 글자만이 대상의 위치를 짐작하게 해준다. 다시 주의 깊게 사진을 들여다보면 깍지낀 두 손이 슬며시 천막 밖으로 나와있다.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만 외롭게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이 손은 뒤에 앉아 무표정하게 앞을 응시하는 여인의 심리적 표출과도 같이 느껴진다. 이 무위(無爲)의 손은 다시 오른쪽 가스통 위에 구겨진 채 놓여있는, 하얗게 빛나는 고무장갑에 가 닿는다. 이 고무 장갑이 특히 나의 시선을 끈다. 나에게 있어 이 고무 장갑은 이 사진의 전체 이미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에서 본 윌리엄 클라인의 사진을 곧바로 떠올린다. 거리의 아이들을 찍은 윌리엄 클라인의 사진에는 누군가 장난감 총을 쥔 채 한 어린 아이의  머리에 겨누고있는데, 정면을 응시하며 웃는 아이의 모습에서 롤랑 바르트는 유독 어린 소년의 썩은 이빨을 끈덕지게 바라보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에 나온 하얀 고무 장갑이 나에겐 롤랑 바르트가 계속 바라보았을 아이의 썩은 이빨과도 같이 여겨진다.

   나는 사진을 나의 기억과 경험치로만 느낄 뿐이다. 나의 기억과 나의 경험은 내가 한 인간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세계를 탐색하도록 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나의 기억은 내가 인식하는 시간성의 본질을 이루고 있을 것이며, 나의 오감과 직관을 통한 나의 경험들은 내 외부 세계를 인지함으로써 나 자신과 내가 존재하는 공간성을 확립하게 해주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진을 보며 무언가를 느끼는 행위, 셔터를 누르게하는 그 무언가는 지극히 내밀한 나만의 개인적인 활동이 되는 것이다. 결국 타인의 사진을 보면서 느끼는 내 개인적인 감정들은 나에게만 정답일 것이며, 타인에게 강요될 수 없는 요소이다. 내가 느끼는 나의 감성이 정답이라는 것(이는 나와는 다른 타인이 느끼는 감성도 그들에게 정답이며 옳다라고 인정하는 것,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를 포함한다). 이게 내가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현대 사진의 본질이다. 

 

#부인 시릴라의 모습

   차 안에 앉아있는 필립 퍼키스의 부인 시릴라는 유리창문을 통해 사진가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을 찍는 사진가의 반영이 부인의 왼쪽 어깨에 겹쳐져있다. 마치 함께 커플 사진을 찍는 것처럼, 하지만 연륜이 있는 커플 답게 익숙하고 편안하게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가의 부인의 또 다른 사진. 그녀는 가로줄이 나있는 옷을 위 아래 입고있는 노년의 모습이다. 필립 퍼키스가 사랑하는 가족들의 사진들,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억지로 웃는 모습이 아니라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사진가를 응시하거나 사진가의 시선을 받고 있다. 노년에 이른 부인 프리실라의 사진은 필립 퍼키스의 첫 번째 사진집 <인간의 슬픔THE SADNESS OF MEN>에 나오는 젊고 도발적인 모습과는 또 대비된다. 세월은 흘렀지만, 더욱더 깊어진 눈빛을 한 여인은 삶의 경이와 기적을 소박하고 겸손하게 나에게 증거하고있다.

 

#차 앞유리를 통해 바라보는 백구의 모습

   사진에 등장하는 개는 흡사 다이도 모리야마의 길위에서 유랑하는 개의 존재같다. 뒤에 '민박'이라는 간판이 없었다면 한국이라는 정보를 알 수 없었으리라. 민박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을 떠나 길의 한 가운데로 나온 사람들만이 잠시 지나가며머무는 곳아닌가. 백구는 누군가를 주인으로 두고 마을 내에서만 돌아다니는 주인있는 개일 수도, 아니면 마을마다 돌아다니는 유랑하는 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집을 떠나 길의 한 가운데로 떠나온 자만이 자신과 삶에대해 더 잘 알게 되리라는 점이다.

 

이 사진을 보아서인지 나는 톨스토이가 생애의 말년에 쓴 한 책에서 만난 글에 크게 공감한다. 

 

「삶은 지나간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이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나간다는 것을 기억하라.

삶은 안락한 집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하는 기차이다.

죽는 것은 육체뿐 영혼은 영원히 산다.

(…)

악과 고통은 나를 괴롭히지만

죽음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그러니 어떻게 죽음을

좋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상원 옮김 186

 

#뉴욕 거리의 울타리 사진, 경계

   필립 퍼키스의 사진에는 간간이 사진가의 상체 또는 머리의 그림자가 나온다. 사진가는 그만큼 대상과 가까운 거리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말이된다. 뉴욕의 어느 거리로 보이는 한 사진. 어느 집의 철장으로된 울타리의 바깥에는 휠체어에 홈리스로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잠을자고 있다. 하지만 울타리의 안쪽에는 집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커다란 개 뒤에서 벤조로 보이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이 관찰도 진실과는 무관할 수 있다. 진실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안과 밖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의 자의적 구분은 나의 편견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지나가는사람이자 이방인이기에 나의 편견을 발견하고 또다시 부끄러움을 느낀다. 해가 내리쬐는 어느 겨울 오후, 사진 속의 여인은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할아버지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는 단지 햇볕을 쬐다 음악소리를 들으며 단꿈을 꾸고있는 것인지 누가 알 것인가. 진실이 어떠한 것이든 사진가는 프레임의 안쪽으로 들어간 자신의 그림자를 담음으로써 이들과 하나의 현장을 이루며, 홈리스로 보이는 이를 대상으로 사진을 찍는다는 일말의 죄책감이나 판단하려는 의도 없이 그저 존재 그대로를 응시하고 있다.

 

   뉴욕 거리의 모습을 보고 나는 다시 J. D. 샐린저가 만들어낸 한 캐릭터를 떠올린다. 크리스마스 직전, 바로 지금 이맘 때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은 후 학교를 떠나게는 홀든 콜필드는 펜실베니아주 어느 시골에서 밤기차를 타고 뉴욕의 맨하탄에 내린다. 규정과 속박의 세계로부터 익숙하지만 매여있지 않은 세계, 곧 소외되고 고립된 공간으로 던져진 홀든은 추운 맨하탄 거리를 새로운 세계의 이방인처럼 배회한다.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나는 어느 한 책방에 쭈그려 앉아 잠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홀든이 메마른 뉴욕의 추위 속에서 지극한 외로움을 느끼며 거리를 배회하던 장면에 이르러 울컥해지고 먹먹했던 적이 있다. 홀든이 안고있던 짐과는 분명 달랐을 것이지만,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떠올리며 헌 책방에 주저앉아 나의 것이기도 했던 홀든의 고독감을 발견한 적이 있다. 어쩌면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은 나의 경험처럼 볼 때마다 새롭게 발견해내는 사진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전시장 사진집을 보고

   숲 속의 한 가운데 모여있는 세 개의 흰색 표식과 사물, 그리고 사람들, 모두 안개 속 아니면 흐린 날의 뿌연 숲 속의 이미지들이다. 사진가의 추억을 떠올리는 표식일까? 사진가는 이 세 장의 이미지들을 연달아 배열 해 두었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들은 찰나의 순간으로 대변되는 방식, 곧 한 장의 사진으로 승부하기를 거부한다. 오히려 필립 퍼키스의 사진들은 50년대 후반 사진가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들 The American>의 사진 연결하기(sequencing) 방식을 닮은 것 같다. 사진 한 장에 모든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근대 사진의 형태가 아니라, 사진의 연결을 통해 사진가 자신을 드러내는 그런 방식 말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규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사진가의 안목과 직관만이 사진 배열의 기준이 될 뿐이다.

   세 개의 흰 색 표식이 있는 사진의 앞에는 또 흥미로운 두 장의 사진이 배열되어있다. 글라이더로 보이는 동체의 긴 날개가 화면의 위아래를 가르며 잔디밭에 붙어 서있다. 그 뒤를 잇는 사진은 평범해보이는 수면과 초원의 사진이다. 하지만 수면과 대지를 이루는 경계의 면은 앞 사진의 글라이더의 형태를 닮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두 사진에 나오는 소재들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에게는 두 이미지가 어떤 직관적인 연관성으로 이어져 있는 듯이 느껴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연이라는 것이 이미 존재하지 않은 이 지구상에서 필립 퍼키스 선생은 무관하지만 지극히 인공적인 이 두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으며 이를 연달아 배열해두었다는 것. 이 사진에 대해 그 이상 내가 말할 수 있을까?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에서 필립 퍼키스는 “(사진)편집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공간이나 소재가 아니라 정신적인 차원의 연결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곧 사진가에게 있어 한 사진집을 완성하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인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외부에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필립 퍼키스의 연결된 사진들은 사진가 개인의 마음 풍경(mind-scape)을 드러내주는 개인적인 다큐멘터리라고 볼 수도 있겠고, 그 연속된 전체로서 사진가의 삶의 이력을 드러내주는 자서전적(autobiographical) 작업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필립 퍼키스는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관되게 흑백 사진을 찍으며, 현상과 인화를 하고 사진을 선별해내었다. 사진을 고르고 고르는 편집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 저자의 손을 거친 이 사진집은 이 작업이 바로 필립 퍼키스 자신이라는 것을 나에게 말하고 있다.

 

* 전시를 본 후 메모

   사진집의 이미지들을 다시 하나 하나 떠올려보고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을 문학작품과 비교해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굳이 비교한다면 나는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과 함께 떠올려본다. 나의 편견에 치우친 판단일 수 있겠지만, 필립 퍼키스의 첫 번째 사진집 <인간의 슬픔 The Sadness of Men>은 톨스토이의 거대한 장편 소설들같이 느껴진다. 반면 이번에 나온 두 번째 사진집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 In a Box Upon the Sea>는 톨스토이가 노년에 쓴 아포리즘 선집 같이 느껴진다. 톨스토이의 장편 소설이 인간이 살아가며 맛보는 모든 보편적인 경험들 곧 희노애락의 다채로움을, 그리고 인간이 삶에서 마주하게되는 폭넓은 감정의 양상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인간의 슬픔>에서 필립 선생은 5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마주해온 자신의 자전적인 삶의 모습을 아우르고 있다. 때론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혹은 위트가 담긴 시선으로 견고한 두 다리로 버티며 대상을 탐색하고 세상을 관찰하는 듯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진들은 때론 신비스럽기도하고, 교통사고를 당한 어느 자전거 주인의 죽음을 목격한 안타까운 현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집 <미국인들>에 나오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의 현장 사진에대한 오마주같기도 하다. 나아가 여기에는 딸의 어릴 때 사진과 성장한 딸이 아이를 낳아 안고 있는 기쁨의 순간도 있으며, 젊고 아름다운 부인의 모습도 등장한다. 다시말하면 필립 선생의 첫 사진집은 생동하는 한 인간이 경험한 삶의 폭넓은 스펙트럼이 다 담겨있는 듯하다. 필립 퍼키스의 첫 번째 사진집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침에 새롭게 눈을 뜰 때 만나게 되는 삶의 경이와 같은 느낌의 사진집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톨스토이의 소설들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말하면 그의 첫 사진집에는 인생의 봄∙여름∙가을∙겨울이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담겨있는 것이다.

   반면 두 번째 사진집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에 나오는 사진들은 전보다도 훨씬 더 절제되어있음을 느낀다. 물론 일부는 첫 번째 사진집에서 보던 연결고리를 놓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진은 거기에서 좀더 나아가며 인생의 겨울을 담담하게 바라보는듯한 시선이 담겨있다. 이전에 보였주었던 호기심과 위트가 담긴 시선이 아니라 사진은 좀더 신비스러움을 주고있다. 인생의 내밀한 깨달음 같은 것이다. 글로 따지면 한 문장이 갖는 밀도와 무게가 더해져있는 그런 짧은 글을 보는 느낌이다. 노사진가가 담담하게 드러내 펼쳐 보이는 원숙한 삶의 정수(精髓)가 이것이리라. 사진가는 대상을 관조하며 이전보다 더 고요한 사진들을 보여주고있다. 마치 무위(無爲)의 자유속에 노니는 듯 하다. 내가 받은 이런 느낌들이 톨스토이가 만년에 집필한 그의 아포리즘과 같다고 느낀 것이다. 공교롭게도 톨스토이는 그의 아포리즘에서 노자의 무위(無爲)에대해서 언급하기도 하는데. 나는 이런 인상을 필립 퍼키스의 인화방식과 흑백의 톤, 그리고 절제된 사진의 구성에서 더욱 피부로 느낀다.

   필립 선생의 두 번째 사진집과 톨스토이의 아포리즘은 모두 삶과 죽음의 문제에 좀더 큰 관심을 가지고 사유하는 듯하다. 이 두 거장 모두 삶과 죽음을 두려움과 무지가 아닌 하나의 삶의 모습으로 이해하고 바라보고 있다고 느낀다. 물론 사진집에 나온 모든 사진이 나와 공명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 유독 특정한 사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올 수도 있을 것이며, 어느 날에는 다른 사진들이 갑자기 나에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모든 사진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필립 퍼키스 선생이 대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셔터를 눌렀듯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이에 공명하는 사진들을 좀더 유심히 바라보기를 반복할 따름이다. 특정 사진을 보다가 문득 나의 오래된 기억이나 경험들을 떠올리기도하고, 먹먹해지는 느낌을 받거나 삶의 경이를 느끼는 것. 그것 이외에 내가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을 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필립 퍼키스 선생의 첫 번째 사진집

<인간의 슬픔 The Sadness of Men>

 

 

 

*두 사진집 관련 문의는 안목출판사 블로그에서...

http://anmocin.blog.me/220564465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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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rame <Alex Webb:Time Stopper in Alleys> 국내에서 촬영한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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