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관람 후기] 국립극장 NT Live <줄리어스시저>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er)

셰익스피어 원작 | NT Live(국립극장 상영) | 연출 니콜라스 하이트너

 

 

입장하며

연극 관람은 오래간만의 일이다. 대학시절 아서 밀러의 희곡세일즈맨의 죽음 인상깊게 이후로 20 년이 지났지만 원작에 비교적 충실한 연극을 기회가 없었다. 아니 연극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말이 적확하겠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문학작품을 거의 읽지도 않았기에 연극인들이 그저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으로만 치부했던 같다. 이제 중년이 되어 오래간만에 다시 보는 연극은 청년 시절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잠자리에 들때면 가끔씩 내가 내일 아침 깊은 숨을 내뱉으며 다시 일어날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삶의 유한성을 보다 느끼게되는 나이. 지금 다시 되돌아보니 모든 연극(희극, 비극을 포함하여) 기본적으로 비극 속에서 잉태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마저 하게 된다. ‘모든 존재는 필멸한다 전제가 연극의 기본 정신이 아닐까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모든 연극은 인간이란 존재의 삶에서 길어낸 비애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출하는 행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울러 연극배우들은 반드시 다독가는 아닐지언정 분명히 정독가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하나의 고전을 수십 읽고, 작품 속의 인물이 되려고, 부단히 자신의 자아와 일으키는 충돌을 경험하며 작품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보게된 연극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율리우스 카이사르 영국 국립연극단이 공연한 실황 녹화 작품이다. 현대적인 연출로 셰익스피어의 원전을 무대에 올렸다. 작품을 보기 전까지 나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나 카이사르에 대해 아는바가 없었기에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제목과 달리 브루투스가 주인공인지도 알지 못했다. 이번 연극은 원전과 마찬가지로 카이사르가 장군으로서 반역자로 치부된 폼페이우스를 물리치고 로마로 개선하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브루투스가 죽음에 이르는 데까지의 서사를 다루고 있다.   

 

 

브루투스일까?

연극이 시작하고 가지 의문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는 작품을 영웅 카이사르가 아니라 카이사르를 배신한 암살자로 알려진 브루투스에 주목을 하게 되었을까? 카이사르의 마지막도 충분히 비극의 주인공이 있었는데 말이다. 셰익스피어는 1 독재를 포함한 황제정치에 반대했기에 암살이라는 거사의 주동자인 브루투스를 주목했던 것일까. 연극에서 브루투스가 사용하는 책상에 독재자였던 스탈린(Stalin)’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이름이 적힌 책들이 놓여 있었던 것은 극단 연출자의 의도일 것이지만 셰익스피어의 의도를 세심하게 드러내려는 노력 같아 보였다. 혹은 셰익스피어가 승자의 기록으로만 남는 역사에 거부감을 느끼고 암살자/배신자라는 이름을 얻은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새롭게 조명하려고 했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셰익스피어는 남다른 안목과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였을 같다. 가지 분명한 것은 셰익스피어가 독자 혹은 관람객에게 정답을 주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선택의 자유를 주려고 했을 같다는 점이다. ‘사실 진실 유사해보이면서도 분명 다르듯, 역사적 사실은 하나일지 모르나 진실은 무한할 있다고 본다. 카이사르의 진실과 브루투스에 유의미한 진실은 분명 다르다. 셰익스피어는 연극을 관람하는 우리에게 과거사의 단면을 보여주고, 보다 다양한 진실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모든 연극은 인생의 유한성이라는 대전제로부터 자유로울수 없다.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모든 역사는 어김없이 되풀이된다라는 일종의 강박이 연극이라는 오래된 예술을 지속하게 해주는 동력이 아닐까한다. 오늘 끄집어내는 모든 이야기들은 결국 이러한 또는 연극의 대전제로부터 분기된 구체성에 다름 아닐 것이다.

 

 

역사가들이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그려내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야심만만하고 단호한 성격의 인물이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이 중심이 공화정 형태의 로마에서 절대권력을 갖는 황제가 되기를 야망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원로원의 보수파와 충돌하는 일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탄탄한 세력에도 불구하고 숱한 정적(政敵) 보이지 않는 대결 국면 속에서 성장했을 것이다. 후대인들은 영웅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들의 견해에 따라 브루투스의 파멸을 배신자가 겪게되는 역사의 인과응보로 치부하기 쉽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어김없이 반복되는 상투성의 전형이다. 셰익스피어는 아마도 이러한 상투성과 거리를 두기로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배신자/암살자 혹은 패배자의 진실을 새로이 들여다보기로 의도하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브루투스에게도 카이사르 암살에 대한 충분한 명분에 주목했고 이를 상상했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존경하면서도 그를 암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셰익스피어는 브루투스의 입을 통해 명예와 공익때문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셰익스피어가 브루투스의 진실이다. 셰익스피어의 관점을 통해 떠오른 생각은 역사라는 무형의 실체가 개개의 인간들에게 요청하는 소속에의 강요이다. 예컨대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떠올려보자. 작중 인물들은 어떤 명분(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개인들이었으며, 역사 속에서 어느 편이든 소속하도록 선택할 것을 강요받는 상황에 놓여있다. 어느 시골 마을 사람들은 낮에는 국군 편이 되어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이적행위자를 밀고할 것을 폭압적으로 강요받는다. 그러나 밤에는 빨치산의 영향력 아래 이들 편이 되기를 선택해야만 하고 적대행위를 하는 이들을 신고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과 유사하다. 브루투스의 명예과 공익이라는 대의는 분명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것이며, 역사에서 선택의 경계를 만들어낸다. 브루투스의 암살 행위는 로마 시민들에게 카이사르의 1 독재, 황제정치를 반대할 것을 요구하며 입장을 선택할 것을 요청하는 정치 행위로 있겠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 성난 군중으로부터 달아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일당은 세력을 규합하여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가 이끄는 연합군과 맞서 필리피 평원에서의 전투를 치른다. 2차례에 걸친 전투를 치르며 브루투스 측의 패색은 점점 짙어지게 된다. 수세에 몰린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는 이제 자신들이 운명의 요구에 의해 각자의 입장을 선택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카시우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생일날 자결을 하고, 브루투스 역시 부하의 도움을 구하여 카시우스가 길을 따른다. 필리피 평원의 결전이 있기 전날 브루투스는 자신의 막사에 나타난 카이사르의 망령과 조우하고 자신의 죽음을 이미 예감했던 것이다. 이들은 결국 자신의 명예를 위해 그리고 역사의 요구에 의해 분명한 정치 행위를 실행해야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카이사르라는 당대의 영웅을 암살한 공모자들 역시 각자 상당한 능력을 지닌 비범한 인물들이었으나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시대와 역사의 산물임을 부인할 없다.  

 

 

 

시인킨나의 죽음에 주목하며

이번 실황녹화 연극에서 잠시 지나가듯 처리된 시인킨나의 죽음 장면을 명분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본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카이사르의 죽음을 애도하러 가던 시인킨나는 안토니우스의 추도사로 흥분한 군중에게 죽임을 당한다. ‘시인킨나는 카이사르를 암살했던 공모자킨나와 동일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로 군중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이다. 어이없는 죽음을 다룬 짧은 장면을 셰익스피어가 추가했을까? 나는 점이 궁금해졌다. ‘시인킨나의 죽음이란 사건은 분명 카이사르의 암살사건이나 브루투스의 파멸과 어떤 개연성도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셰익스피어는 지적인 개개인이 모여 군중이 되었을 집단이 보여주는 무감각한 잔인성을 몸소 겪고 체험했기 때문에 이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인간 집단의 잔인성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인간만이보여주는 폭력성이라 있다. 그리고 이런 폭력성은 앞서 브루투스가 공언한 명예와 공익이라는 명예를 위해 희생하는 인간의 행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가지 주의할 점은 인간의 폭력이 인간의 본성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막연히 인간이란 잔인한 동물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이를 기정사실화 한다. 그러나 이는 진실이 아닐 있다. 적어도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는 말이다.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져있는 일본의 영장류학자 야마기와 주이치의 저서 <인간 폭력의 기원>에서 저자는 줄곧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의 폭력은 대체 어디에서 기원하고 있는가? 집요하게 묻고 답을 구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잔인한 폭력 행위에 대한 그의 결론은 인간의 폭력 행위는 본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다시 밝히자면 인간이란 생물이 보여주는 폭력은 여타 영장류가 보여주는 폭력의 층위와 결이 다르다라는 것이다. 다른 영장류들은 본능에 따라 먹이 또는 번식의 유리함을 얻기 위한 위력 행사의 과정인 반면, 인간에게는 다른 층위, 명분 대의 같은 허구의 실체에 복종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새롭게 발현되는 잔인성을 이야기한다. 나는 이러한 인간 행위의 양상이란 결국 집단이 내세우는 가치(이데올로기, 명분, 대의 등등) 위해 구성원들이 헌신하는 사회성, 이타성에 기인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이것이 인간만이 갖는 폭력의 잔인성 설명해주는 본질이란 생각도 해본다.

 

 

다시 시인킨나의 죽음으로 되돌아가본다. 그가 군중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은 인간집단이 공유하는 명예혹은 대의 대한 집단의 이타성이 잘못 발현된 사례로 읽힌다. 집단의 이타성은 무형의 경계(또는 대의) 만들고 안과 밖을 구분하며(편가르기), 경계 밖의 존재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잔인성을 표출한다. 이슬람 문화권에 존재하는 명예살인이라는 행위는 어느 가족 혹은 집단이 침해받은 명예 대한 복원 욕구, 집단에 대한 헌신(이타성)이라는 반작용의 결과로 있을 같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진화생물학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시인킨나가 군중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은 분명 셰익스피어가 작가로서 인간 본성에 대해 관심있고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었으며,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지녔다는 의미로 읽혔던 것이다

 

 

 

브루테! (et tu Brute!)

암살 공모자들로부터 일격을 받고 쓰러진 상태에서 브루투스와 대면한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남겼다는 유명한 대사이다. 줄곧 영어로 말하던 카이사르 역의 배우도 대사만은 라틴어 그대로 전달했다. 직역하자면 그리고 브루투스도!정도가 것이다. 대사를 들었을 나는 신뢰받던 브루투스의 배신과 카이사르에 대한 도전 행위가 다름아닌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변용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결코 넘을 없을 같던 강력한 대상(카이사르) 혹은 권위에 대한 도전 행위는 부친살해 모티브를 닮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역사에 존재했던 영웅들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영웅들 대부분은 어느 시점에서 자신들이 극복해야하는 거대한 상대와 대결해야하는 운명을 공통적으로 지녔는지도 모른다. 그런 연후에라야 상대를 이겨내거나 새로운 기회를 잡게 되었을 것이다. 강력한 황제 권력을 염원하던 카이사르를 극복함으로써 자유와 해방 같은 대의를 추구하는 일은 오늘날까지도 되풀이되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재현으로 있지 않을까.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 새롭게 조명한 소설이었다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율리우스 카이사르 영웅 카이사르에 배신한 반역자 브루투스를 새롭게 주목한 작품으로 이해해볼 있을 것이다. 누군가 셰익스피어로부터 얻은 접근법을 유사하게 적용해보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낼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2007 미국의 도움으로 독재자가 되었다가 다시 미국에 의해 운명을 달리한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진실을 새롭게 들여다본다면 하나의 비극을 만들 있을 것이다. 오히려율리우스 카이사르 현대적으로 새롭게 재해석하고 각색하는 경우라면 바로 우리 시대의 인물을 대상으로 작품을 만들 수도 있겠다. 그러면 이러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변용이 역사에서 여전히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있을 것이다.

 

 

 

퇴장하며

셰익스피어의 비극율리우스 카이사르 원전으로하여 현대적인 연출기법으로 재현한 NT Live <줄리어스 시저> 나의 예상과 달리 오히려 원전에 매우 충실한 같다. 물론 록콘서트를 연상하게 하는 연극의 도입부나 독특한 연출방식이 현대적으로 적용된 부분은 있지만 원전의 의도와 줄기를 변형하거나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로마 시대의 문화를 충실히 복원하지 않고 시대성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는데 그친다. 따라서 일부 소품의 변화를 주는 수준을 넘지는 않았다. 각본 자체에 대한 현대적인 재해석이라기 보다는 원전의 기본적인 의도를 오히려 충실하게 반영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판단은 연출의 범위나 방식을 어떤 범위에 한정하고 어떤 관점에서 판단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있을 것이다. 이번 연극의 연출은 한정된 공간을 효과적이고 짜임새있게 활용한 참신한 진행기법에 많이 고심한 흔적을 엿볼 있다. 연극의 무대는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것처럼 사방에서 있다. 로마 시민으로도 참여하는 관람객들은 제레미 벤담의 원형 감옥 연상케하는 무대 주위에서 모든 장면의 목격자가 되거나 연극의 참여자로서 함께한다. 아울러 관람객들은 카이사르의 암살을 모의하는 현장에서 공모자들의 대화를 엿듣거나 암살장면을, 그리고 시인킨나가 성난 군중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모습을 우리는 영상 화면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연극을 보고 나오면서 가지가 안타까웠다. 영미권에서는 여전히 자신들의 선조가 남긴 문학 유산(비록 고어이긴 하지만) 직접 1 자료로 읽어내고, 연극이나 저술에 활발히 재해석하고 이용하는 반면, 우리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별히 훈련받지 않는 이상 조상이 남긴 한문 서적을 읽어내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깞다. 그나마 번역된 작품도 풍부하지 않은 같다. 우리에게는 박지원이라는 조선시대 대문호가 있으나 번역이 되지 않으면 그의 산문 한편 읽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때 이슬람 문명은 고대 그리스 문화 유산을 활발히 재해석하고 찬란한 문화를 일구어 내었다. 당시 미개했던 서유럽 문명이 이슬람 서적 문물을 대대적으로 들여와 이를 번역하고 공부함으로서 이슬람을 극복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 반면 우리는 훌륭한 언어를 가지고도 다양한 지혜를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듯하다는 자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나 이번에 보게 NT Live공연이 광고문구처럼 브루투스가 파멸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셰익스피어는 우리에게 어김없이 반복될 당신의 속에서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가? 혹은 당신의 마지막이 어떻게 마무리되길 원하는가?’ 우리에게 묻고자하는 같다. 결국 메멘토 모리’, 필멸의 존재로서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주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끊임없이 원전이 재해석되고 연극이 공연되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가장 보편적이고도 강력한 주제에 대해 정답없는 답을 구하는 행위라고 있겠다란 생각을 해본다. 혹은 연극이란 호모 사피엔스의 결코 끝나지 않을 고뇌의 흔적이자 몸부림일 터이다. 그런 의미에서 희곡 율리우스 카이사르 우리가 그럼 당신은 어떻게 것인가?라는 질문과 대면하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Trackback 0 Comment 0

‘우리는 모두 이미 우주인이다’

진짜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원제: AD ASTRA: An Illustrated Guide to Leaving the Planet)

댈러스 캠벨(Dallas Campbell) 지음 | 지웅배 옮김 | [책세상]

 

 

 

맑은 저녁 깊고 어두운 하늘에 촘촘이 박힌 별을 바라보고 경외감이 들지 않은 이가 있을까. 대도시에 사는 주민들은 이제 도시의 불로 밝아진 밤과 빌딩숲으로 좁아진 시야로 하늘을 보는 이가 드물다. 밤에는 별을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잊고 지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오늘 만나게 책은 영국의 배우이자 과학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댈러스 캠벨의 <진짜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하 <히치 하이커>)이다. 책을 읽으면서 받은 저자에 대한 인상은, ‘우주 여행/우주 개발에 관한 진정한 덕후 아닐까 하는 점이다. 이는 물론 비난의 말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도 하고 있다는 관점에서다. 책은 특정 분야의 기술적인 사항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여행과 관련한 얇고도 넓은 잡학 사전같은 인상을 준다. 책의 원제목을 참조해보면 지구를 떠나는 일과 관계된 가이드이다. 책은 다양한 맥락에서 우주 여행에 관계된 풍부한 그림과 사진을 곁들인 저자의 스크랩북 같다.

 

책을 읽으며 문득 오래전 기억하나가 되살아났다. 유치원에 가기 전의 나이였으므로 6 정도 되었을 것이다. 할머니 방에 있던 흑백TV 통해 보았던 우주왕복선 컬럼비아 역동적인 이륙 영상이었다. 장면은 나에게 충격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나는 용어는 몰랐지만 과학자 되는 것이 나의 목표가 되어 버렸다. 물론 당시에는 아이들 상당수가 아직은 과학자 꿈이라고 말하는 때였으므로 나도 그런 사회의 분위기 탓일 지도 모른다. 내가 과학을 공부하게 것도 컬럼비아 이륙 영상으로부터 받았던 가슴 벅찬 감흥의 기억과 분명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히치 하이커>에도 나오는 로켓 과학자의 선구자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의 인용구를 수첩에 적어 다닌 기억도 났다. 누군가가 어떤 일에 사명을 갖고 평생 매진하는 일에는 사람의 어린 시절,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계기가 분명히 있었다고 확신에 가까운 짐작을 해볼 있다. 소련 로켓 과학의 시조로 불리는 치올코프스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우리가 아는 베른의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인생이라는 길고도 짧은 여행을 줄곧 의미있게 해주고 나아가는 방향을 설정해주는 것은 무엇보다 젊은 시절에 영향을 받은 영감 상상력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누군가에게 <히치 하이커> 이러한 영감을 주거나 하나의 계기가 될만한 책일 될지도 모르겠다.

 

 

도전의 역사 탈출 시도

우리에게 천체의 운동에 관한 케플러 법칙으로 알려져있는 천문학자 케플러가 소설(< somnium>(1608)) 적이 있다는 것도 <히치하이커> 통해서 처음 알게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소설에서 케플러는 달에서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을 상상했다는 점이다. 인간이 천체를 관찰하고, 이를 대상화하며 당대(케플러의 시대) 지배적이던 신과의 관계에 대해 회의했던 소수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나아가 지구를 떠나 달에 가는 여행을 꿈꾼 이들은 계몽의 시대였던 17세기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도 확인할 있어 흥미롭다.

 

최근에 읽었던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도 이와 관련한 예를 떠올려 본다. 연암 선생이 조선 사신을 따라갔던 열하에서 곡정이라는 청나라 학자와 나눈 곡정필담편에는 연암이 밤하늘을 바라보며 천체에 관한 의문을 거내는 대목이 나온다. 연암은 달이 비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 있다.

지금 땅덩어리 겉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는 비유하자면 유리거울일 것입니다. 만약 달세계에서 지구의 빛을 바라본다면 역시 지구의 모양은 응당 초생, 보름, 그뭄이 있고, (이하 생략)…

- <열하일기> (김혈조 옮김/돌베게)  2 402

 

이미 연암의 시대만 해도 달에는 옥토끼와 두꺼비 살고, 여인이 비파를 타는 인식의 수준을 벗어나 달에서 지구를 때의 지구 모습을 상상하는 것에서 나아가 이치를 따지고 있다. 연암처럼 당대에는 이미 우주를 대면하고 회의하는 지식인들이 있었다는 말로도 해석된다. <히치하이커> 16, 17세기에 이런 회의하는 지식인들의 바탕 위에 18, 19세기에는 인류가 우리 자신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정황을 보여준다. 우선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땅으로부터 벗어나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의 사례로 몽골피에 형제 열기구 실험(1783) 있다. ‘하늘에 오르다라는 의미의 몽토시엘이라는 이름의 양을 열기구에 태우고 실험을 했다고 한다. 이는 분명 20세기 중반 소련의 우주개발에 여러 동물들을 투입하는데로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있다. 외에도 인간이 지구를 떠나 하늘로 나아가기 위한 꿈과 노력의 발자취를 책에서 보여준다.

 

생명체로서 인간이 우주라는 공간에 노출이 되었을 입는 우주복에 관한 대목은 보다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저자 댈러스 캠벨이 정리해놓은 우주복 개발의 역사와 요건들, 만화 캐릭터 탱탱 애벌레 수트와 같은 자료들에 저자의 덕후스러움이 묻어난다. 우주복은 기본적으로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내용 기밀복이 있는가 하면, 생명유지 기능이 특히 중요한 선외활동용 우주복은 의복 개발의 첨단을 이룬다. 우주복 개발 연구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작가 로버트 A. 하인라인의 SF소설 <우주복 있음, 출장가능>(최세진 옮김, 아작)에서는 하인라인의 우주복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발견할 있다. 비록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스토리의 힘은 떨어지고 있긴 하지만 전반부의 우주복에 대한 여러 사항들을 기술하는 대목은 매우 흥미롭다. 책은 우주를 여행하고 싶은 히치하이커들을 위한 소장 목록에는 반드시 들어있을 법한 책이다. 

 

 

 

우주 개발의 흑역사

우주 개발의 역사는 상상력으로 촉발된 목표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과 동물이 희생된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우주인을 태우기 전에 여러 동물들을 우주발사체에 태워 우주 공간으로 내보내었고, 많은 동물들이 과정에서 희생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모르기 때문에 해봐야 안다라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침팬지나 원숭이, 강아지를 비롯하여 , 거북이, 고양이, 심지어 달팽이를 비롯하여 완보동물 불리는 미세한 벌레 또한 실험의 대상이 되어 우주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과정에서 상당수의 동물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희생되었음은 물론이다. 아울러 우주로 나간 우주인이 불의의 사고로, 복귀할 예기치 못한 문제로 목숨을 잃은 사건들도 있었다. 누군가가 처음 시도해보지 않는 이상 우리는 나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발전 과정에 수반되는 불가피한 위험을 대면하는 일은 어쩌면 인간만이 감수하는 특징인지도 모른다. 미국의 작가 어니스트 헤멩웨이가 인간만이 위험을 (알면서도) 감수한다 취지의 말을 적이 있다. 위험에 직면하고 이를 감수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실수를 하지 않도록 기울인 노력을 통해 우주 개발은 나아갈 있었다.

 

하나 주목해보는 항목은 우주 개발 과정에서 존재했던 성별에 따른 참여와 기회의 불평등의 문제다. ‘여자가 우주에 있을까?’ 소제목의 글에서 저자는 글을 당시를 기준으로 우주로 나간 우주인 553 여성이 60명이었다고 한다. 60년대 이미 머큐리 프로젝트에 참가할 여성 우주인으로서 베티 스켈턴 등의 훈련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 주요한 우주 개발의 역사에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것은 분명해보인다. 단순히 수적인 차이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며, 이는 우주 개발 분야에 국한된 사항도 분명 아니다. 특히나 여성에 대한 차별이 백인지식층에 의해 구조적으로 이루어졌던 미국이 우주 개발의 역사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만큼 배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탓도 분명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예컨대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성비를 놓고 개발도상국과 미국의 사례를 비교분석한 자료(코렐리아 파인 <젠더, 만들어진 >) 보면 개발도상국에서 컴퓨터를 전공하는 여학생이 평균 50% 이상인 반하여, 미국에서는 15%수준에 불과하였다. 결과는 미국에서만 유독 여학생들이 컴퓨터 공학을 선택하지 않는 비율이 높고, 이것은 여성이 이러한 분야를 선택하는 일을 꺼리는 사회심리 구조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물론 이러한 여학생 비율은 최근 50% 육박하는 구조를 보인다는 최근의 조사결과와 비교해보아도 이것이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고무적인 사실은 이러한 성구별적사회심리가 보다 완화되고 있다는 신호일 것이다. 더글러스 캠벨에 의하면 가장 최근 우주로 올라간 우주인 여덟 성비는 남녀 모두 절반씩이었다고 하니, 앞으로는 우주인을 여러 태울 있는 우주왕복선의 시대에 보다 다양한 배경과 성비에 따라 지원이 가능해질 것이다.  

 

 

 

다음 히치하이커를 기다리며

우리는 모두 지구라는 우주선을 타고 있는 우주인이다.책에 나오는 유럽우주국장 요한디트리히얀’ 뵈르너 교수와의 인터뷰 중에서 인용한 대목(309)이다. 인간이 문장을 입밖으로 있게되기까지 오랜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어려운 삶을 살았을까. 이러한 인식은 분명 거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만이 우주의 주인이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류는 이전의 상태로 더이상 되돌아갈 수는 없다. 지구를 떠나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시각의 전환은 우리에게 이전과는 다른 인류가 되도록 해주었다. 우주에 진출하려는 인간의 노력으로 어쩌면 우리는 한층 거대한 우주 앞에 겸손해졌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인류는 달에 기지를 건설하고 화성을 거쳐 토성이나 목성의 위성으로 여행을 있는 날이 것이다. 다만 현재로서는 소수의 인간만이 지구 우주에서 지구를 있는 정도의 기회를 갖는다. 어려운 우주인 자격을 취득하거나, 우주여행 경비를 지불할 경제력이 있거나. 그리고 인류의 나머지 대다수는 어쩌면 사뮤엘 베케트의 부조리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나오는 마지막 대목처럼 그러한 운명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블라디미르: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  사뮤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옮김, 민음사) 158

 

지구에서 움직이지 않는/못하는대다수의 인간은 그러므로 끊임없이, 그리고 여전히기다리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우주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고, 우주 발사체 이륙 과정을 보러가거나 우주 캠프에 참여하는 , 심지어 우주복을 제조하는 회사에서 실제 우주복을 구입하는 등의 덕후스러운노력들을 앞으로도 누군가는 계속 이어갈 것이다. 한때 소련의 강력한 로켓 엔진 에네르기아보다 훨씬 강력한 로켓 엔진을 개발하거나, 우주여행을 위한 자이로스코프, 관성자동항법 장치 등의 개발하는 꿈을 가졌던 나의 젊은 시절은 지나갔다. 하지만 누군가는 <히치하이커> 들여다보며 새로운 관심분야를 발견하고 꿈을 갖게될지 모를 일이다. 작가 리처드 바크의 청소년 소설의 고전 <갈매기의 >에서와 같이 다른 갈매기보다 좀더 높이 날고자 노력하는 갈매기 조나단과 같은 사람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나아가 높이 나는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우주로 나아가고 싶어했던 사람도 언제나 존재해왔음을 알게되었다. 우리는 새롭게 등장할 다른 히치하이커 기다리고 있다.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우주인이라는 점이다.

 

 

 

#과학책

#교양과학

#우주과학

#진짜우주를여행하는히치하이커를위한안내서

 

(147면)

우리는 대기권이라 불리는, 공기로 이루어진 바다의 밑바닥에서 살아간다.

▶간단하지만 또 다른 인식의 전환이 될만한 진술

Trackback 0 Comment 0

‘가족’으로 불리는 집단에 관한 사회학 - 장편소설로 만나기

 

좀도둑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 장선정 옮김 | [비채]

 

 

 

하나의 가족

오늘 만난 <좀도둑 가족>이라는 장편소설은 어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서 개봉된 고레아다 히로카즈 감독 작품의 원작 소설이다. 그런데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이 나누는 대화가 일상적이지는 않다. 가족끼리 서로 이름을 부르는 서양과 달리 일본 영화인데도 구성원들은 서로를 아빠, 엄마, 할머니 등으로 부르지 않고 서로의 이름으로 부른다. 그것도 본명이 아닌 각자가 선택한 이름으로.

 

린이 린이 아닌 것처럼 노부요는 노부요가 아니며, 오사무도 오사무가 아니다. 아키를 포함해 집에 사는 가족은 하나같이 이름을 갖고 있었다.(129)

 

책을 읽기 시작하면 가족으로 보이던 한지붕 식구들의 관계가 일반적이진 않다는 것을 바로 있다. 이들은 피로 연결된 가족이 아니었다. 이들은 본래의 가족으로부터 떨어진 아웃사이더 같은 존재들이 헤쳐모여이루어진 집단이었다. 하지만 서로에게 무심한 , 서로 예의차리지 않고도 할말 다하는 이들은 여느 가족 못지않게 가슴 속에 따뜻함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사람다움 모습들은 무엇보다도 각자 선택한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로의 존재감은 선택한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유지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나 서로가 남남인 이들은 각자 나름의 추억 혹은 의미를 갖던 존재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각자가 선택한 이름을 서로 불러주는 행위는 팔을 활짝 펴고 상대방을 환대한다는 의미와 다름이 아닐 것이다. 과거에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건 간에 현재 있는 그대로, 상대방의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좀도둑 가족 피로 엮인 가족은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있다. 자신들의 가족으로부터 떨어져나온 이들은 자신의 가족을 영영잃어버린 인물들이 모여 선택한 하나의 가족이야기라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 가족이라는 집단은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애증의 관계 같은 . 멀리 있으면 그리운 존재이면서도 가까이 있으면 서로에게 말못할 상처를 주기도하는 가까우면서도 집단이 가족이다. 영화든 책이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줄곧 가족이란 주제에 대한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할머니 하쓰에의 말처럼 서로가 선택한 관계가 (가족보다) 끈끈한 아닐까. 인생의 숱한 희노애락을 겪었을법한 할머니 하쓰에는 피가 이어지지 않아서 좋은 것도 있지 않아?”(185)라고 책을 읽는 우리에게 직구를 날린다. 서로에게 가장 상처를 있는 존재가 가족이라는 점에서 수긍할 있는 반면 가족이니까어려움을 이겨내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어느 쪽이 옳다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는 질문이다. 정답은 없으니까. 다만 원작에 충실한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상투적이긴 하지만 분명 가족이라는 집단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는 점이다.

 

 

 

현대 가족이 처한 사회에 관한 보고서

<좀도둑 가족> 21세기 어느 날을 살고 있는 사회 구성원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기도하다. 이따금 들어오는 공사장 일을 전전하며 지내오는 오사무. 결국 공사장에서 다리를 다쳐 하기 싫은 일마저 끊긴 상황에 닥치고, 산재보험으로 보상을 받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사회의 투명인간 같은 혹은 잊혀진 존재일 뿐이다. 그가 그나마 유일하게 꾸준히 하는 일은 쇼타와 함께하는 쇼핑’, 동네 마트에서 물건을 슬쩍해오는 일이다.

 

한편 동네의 영세한 세탁소에서 고참이긴 하지만 여전히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노부요의 독백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실감나게 드러낸다. 나는 가난에 허덕이는 쪽일까. 앞은 내리막길일까. 그저 운이 없는 것뿐일까.(144)  벗어나기 힘든 가난 앞에서 자신의 운이 없음을 자책할 수밖에 없는 운명은 분명 많은 이들이 공감할 있을 터이다. 현대 사회에서 보여주는 가난은 모두가 가난하던 절대적 가난의 모습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